절마다 나름의 분위기가 있어서 거기에 갔을 때 느껴지는 기분이 다 다르다. 법당이며 누각 그리고 탑 들어선 것이야 다 한가지니 무슨 별다른 느낌이 있으랴 싶지만, 실제론 절 마당에 들어섰을 때 마음에 확 와 닿는 첫 인상은 모두 다르다. 마치 사람마다 얼굴이 다 엇비슷해 보이지만 그래도 저마다 풍기는 인상이 다르고 개성이 제각각인 것과 같은 이치다. 그림으로 예를 든다면 영암 도갑사는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의 담담한 필묵과 여백마냥 청초함이 가득하고, 영주 부석사는 정선의 ‘인왕제색도’를 그대로 옮겨 놓은 듯이 말쑥하다. 또 해인
문화란 기후풍토 같은 자연환경의 영향을 받고 민족 또는 국가 구성원 간의 정서 및 심정적 유대감이 많이 작용해 이루어진다. 그래서 문화 간 특질이나 차이는 말할 수 있어도 그 상대적 우월을 논하는 건 불필요한 일인 것 같다. 그래도 불교문화로 범위를 좁혀보면 우리나라의 경우 인도나 중국보다 불교를 늦게 접했으니 도입 초기에는 아무래도 불교 선진국으로부터 배울 게 많았을 것이다. 불교미술을 보더라도 불교가 공식 인정된 4세기 후반부터 한동안은 인도나 중국의 그것을 따라가기 바빴을 게 당연하다. 그러면 우리 불교미술이 세계에 내놓아도
미술 용어는 아니지만 어떤 모습이 썩 보기 좋다는 뜻으로 ‘근사하다’라는 단어가 있다. ‘그럴 듯하게 괜찮거나 훌륭하다’는 뜻인데 사람이나 사물 어디에든 쓸 수 있다. 어감도 좋아 마치 맛있는 음료를 마신 것처럼 입에 부드러운 느낌이 착 감긴다. 사람한테 이 말을 쓰면 더욱 실감난다. 예를 들어 남자에게 “저 사람 근사한데!”라고 말하면 풍채도 좋고 상대방을 푸근하게 감싸주는 중후한 사람을 뜻하는 것 같다. 적어도 중년 남성에게 이만한 칭찬이 또 있을까? 사실 ‘근사(近事)’란 말은 불교 용어다. 산스크리트 말로 ‘Upa-saka’
‘당서(唐書)’에 ‘창업(創業)보다 수성(守成)이 어렵다(易創業難守成)’는 말이 있듯이, 어떤 일이든 처음 이루기는 쉬워도 이를 꾸준히 지켜나가기는 참 어려운 것 같다. 문화재에도 이런 말은 그대로 적용된다. 볼 때마다 어떻게 이런 훌륭한 작품을 만들었을까 감탄하면서 또한 그를 위해 쏟아 부었을 작가의 엄청난 고뇌에 맘속으로 경의를 표한다. 그런데 이런 훌륭한 문화유산을 물려받은 현대인으로서 이를 잘 보존하고 지켜나가는 일 역시 작품의 감상에 못지않게 중요한 일임을 느낀다.1658년부터 만들어지기 시작해장전서 보제루로 이전 보관대부
우리 미의 특성을 나타내는 말들을 음미해보면 우리 미술의 본질을 이해하는 데 무척 도움이 된다. 우리 미술사 연구의 비조(鼻祖)로 일컬어지는 고유섭(高裕燮, 1905~1944) 선생은 ‘구수한 큰 맛’, ‘무기교의 기교’ 등 탁월한 언어로 우리의 미를 표현했고, 일제강점기에 우리의 문화가 억압받는 가운데서도 한국의 미술 연구를 자신의 사명처럼 여겼던 일본인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 1889~1961)는 ‘선(線)의 미’라고 했다. 그밖에 ‘소박미’나 ‘해학미’ 같은 말들도 우리 미술을 설명할 때 자주 쓰이는 단어들이다. 저마다 깊은
시대(時代)란 어떤 기준에 의하여 구분한 일정한 기간을 말한다. 어느 시대마다 당시를 함께 살았던 사람들이 느꼈던 그 사회와 문화에 대한 최소한의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기 마련인데 이를 ‘동시대적(同時代的)’이라고 표현해도 될 것이다. 시대라는 말에 상응하는 미술사적 표현을 찾아보면 ‘양식(樣式)’이라는 용어가 곧바로 떠오른다. 양식은 한 시대의 미술에 나타난 고유한 표현을 뜻한다.17세기 후반 남편 잃은 여인이내생서 백년해로 약속하며 조성보는 사람 압도하는 위엄 대신감싸주려 다가오는 듯한 모습양식사에 얽매여 해석하기보다당대 희망·정
아름다움을 느끼는 것은 객관적 관찰의 결과일까, 아니면 주관적 판단에 근거한 개인적 마음작용일까?18세기 철학자들이 미학(美學)을 학문적으로 연구하기 시작하면서 미(美)를 인식하는 과정에 대해 숱한 연구가 이어져왔다. 지금도 확실한 결론이 나지 않았을 만큼 어려운 논제이지만 요즘은 미(美)를 ‘객관화’할 수 있다는 주장이 힘을 얻고 있다. 예를 들면 ‘황금비율’이라는 가설이 그것이다. 그리스의 수학자 유클리드가 처음 주장했고, 르네상스시대에 들어서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정립한 이 이론은, 선분(線分)을 크기가 다른 두 부분으로 나눌
‘미(美)’를 표현하는 어휘는 알고 보면 꽤 다양하다. ‘아름답다’는 미에 대한 직역이자 가장 보편적인 말이고, ‘멋있다’도 아마 이와 거의 동격일 것이다. 그밖에 ‘곱다’ ‘예쁘다’ ‘말쑥하다’ ‘늘씬하다’ ‘중후하다’ ‘우아하다’ 등도 역시 미를 표현할 때 사용되는 말들이다. 이 중 ‘단아하다’는 말이야말로 한국적 미를 가장 엇비슷하게 나타내는 말이 아닐까 한다. 화려한 무늬장식 최대한 절제‘단아함’ 표현 걸 맞는 문화재따뜻함과 정교함 잘 어우러져 석등은 무명까지 밝히는 성보한국적 불교문화의 대표 유물근대 이전 석등 300여점
문화재를 한 마디로 정의하기란 참 어렵다. 문화재를 겉으로 본다면 ‘멋’과 ‘역사’가 핵심이지만, 실상은 인간 삶의 갖가지 흔적과 자취가 그 속에 어우러져 있어서 간단히 볼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문화재를 겉만 아니라 속까지 들여다볼 수 있는 안목이 있다면 참 좋을 텐데, 그런 경지에 오르는 건 참 어려운 것 같다. 이렇게 삶의 흔적이 담겨 있기에 감흥도 따라 있기 마련이어서, 감흥이 없는 문화재는 화석 같아 보인다. 역사와 감흥이 담긴 문화유적 중 하나가 문무대왕릉(文武大王陵)이 아닌가 한다. 문무대왕이 승하한 681년에 조
대중은 문화재를 학술의 관점에서만 보는 걸 불편해 한다. 그보다는 문화재에서 즐거움을 느끼길 바란다. 문화재를 ‘공공의 자재(資財)’라는 시각에서 본다면 일리가 있다. ‘학술’이라는 말로 포장된 난해한 존재, 전문가에만 독점당한 문화재여서는 분명 곤란하다. 문화재라는 말에 너무 뻣뻣하게 굳어버리지 말고 자유롭게 바라보려는 시선은 창의적 관점을 이끌어낼 수도 있다. 그래서 그런지 가끔 대답하기에 ‘대략 난감’한 질문을 하기도 한다. 부여 정림사지 탑과 더불어가장 오래된 목조형태 석탑 삼국유사에 무왕·선화공주600년 창건했다고 기록 2
사람들이 사는 공간은 기본적으로 담과 문으로 둘러싸여 있다. 고고학을 원용해 보면 적어도 청동기부턴 주거지에 이런 담과 문의 시설이 발견된다고 한다. 담과 문은 둘 다 외부와의 격리를 의미한다. 담장이야 물론 말할 것도 없이 외부 사람이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막기 위한 시설이고, 문은 나가고 들어가는 출입을 목적으로 하지만, 안과 밖을 구분하거나 차단하는 목적이 더 강한 것 같다. 적어도 사람들은 그렇게 믿는다. 물론 사전적(辭典的)이고 일반적인 의미에서야 그럴 지도 모르지만 이 문이 불교의 터울 안에 들어오면 여기에 좀 더 철학적
우리 사찰의 역사를 연구하다 보면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된다. 사찰을 창건한 창건주에 관한 것인데, 의상(義湘, 625~702) 스님이 무려 200개 가까운 사찰을 세운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원효(元曉, 617~686) 스님은 그보다는 적지만 그래도 150곳 정도 사찰의 창건주로 나온다. 한 사람이 그렇게 많이 할 수 있었을까 싶지만, 반대로 생각하면 원효와 의상 두 성현이 우리나라 불교사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그만큼 높기 때문일 것이다.두 스님이 활동한 연대가 7세기인데 이 시기는 우리나라 불교사에서 다른 어느 시대보다도 가장 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