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생활을 마무리하고 졸업을 하면서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여러 가지 길이 있었다. 상업고등학교 선생님, 대기업 특채 사원. 20년 전 그 길을 택했다면 난 지금보다 더 편안한 생활을 할 수 있었을까? 여러 갈래 길 중 내가 선택하고 너무나 당연하다 생각하고 와버린 나의 길. 이 길에서 어느덧 내가 부모님 손에서 자란 시간보다 더 오랜 시간 함께 할 사람을 만나고, 부처님의 새로운 가족을 만들 수 있었던 건 아마도 그 길을 택한 나에 대한 부처님의 가피가 아닐까 싶다. 20대후반부터 중앙신도회 근무남북교류·행복바라미 활동도대학졸업 후
“우리 학교에 불교학생회가 있다고?”성심여대 불교학생회 활동1994년 조계사서 삼보 외호귀를 의심했다. 쉽게 이해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날은 엄마 손에 이끌리지 않고 처음 내 의지로 부처님을 찾았다. 성심여자대학교. 지금은 가톨릭대학이 된 나의 대학캠퍼스는 대학생활에 대한 기대와 호기심을 충족시키기에 충분했다. 수녀 총장님, 신부 교수님들의 가톨릭 수업 속에 불교학생회 성불회(聖佛會)라니 신기하기까지 했다. 그렇게 호기심 반 객기 반으로 시작된 25년 전 부처님과의 만남은 지금의 나를 있게 만들었다. 성불회 활동은 학내뿐
1998년 말, 스님들과의 공동체생활, 신도회 및 사찰의 재건, 그리고 산사태와 다시 시작된 불사까지 굵직굵직한 기억들을 뒤로 한 채 정든 보광사를 떠나기로 했다. 불교계 내부에 종권을 둘러싸고 발생한 폭력사태를 불자의 한 사람으로서 도저히 묵과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박광서, 임완숙, 임동주 선생 등 뜻을 함께하는 분들과 ‘불교바로세우기범불교재가연대’를 조직했고 초대 사무국장 소임까지 맡았다.시민강좌·서울노인 개관 보람다양한 경험들 불교계에 회향 그러나 재가연대 사무국장으로 일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새로운 상황이 발생했다. 종단사
조계종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일한 지 벌써 20여년이 지났다. 시간은 날아가는 화살과 같다는 말이 새삼 실감나는 요즘이다. 돌아보면 많은 분들의 보살핌으로 너무 많은 복을 받은 것 같다. 고교시절 한국불교연구원 구도회 중고등부 활동을 하며 지금은 고인이 된 이기영 박사님, 김상현 교수님 등의 강의를 들으며 부처님 법을 배웠으니 참으로 행운이라 생각한다. 당시는 불교공부에 푹 빠져있을 때라 학교 공부는 언제나 2순위였다. 덕분에 대학 진학은 1년 뒤로 미뤄야 했다.봉은사 지역법회 간사로 인연스러진 보광사 재건 가장 보람1982년 동국대
고양 극락사와 남양주 도법사 사건이 알려지면서 태고종 집행부를 향한 신도들의 원성은 나날이 커졌다. 사찰을 교회에 매각한 것은 어느 누구도 쉽게 이해하지 못할 일이었다. 종단 내부에서 집행부를 개혁해야 한다는 움직임이 시작됐다. 보우승가회도 그 가운데 하나였다. 2008년 5월 보우승가회 간사를 맡으면서 종단 내부를 속속 들여다볼 수 있었다.종무행정 체계 개선하고합리적으로 운영된다면미래 불확실해도 보람 커종단 집행부의 비리의혹은 예상했던 수준을 훨씬 뛰어넘었다. 종단 집행부의 친인척이 개입돼 무리하게 복지사업을 진행하려다 종단의 기
2002년 6월, 월드컵 광풍으로 세상은 온통 들썩였지만 그 대열에 끼지 못했다. 어느 덧 30대 중반. 잘 나가던 회사를 그만둔 뒤로 변변한 직장도, 벌어놓은 돈도 없었다. 불안한 미래에 대한 근심은 한시도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영화사 노스님 시봉하다극락사 사연 접하고 분노 ‘제2 극락사 막겠다’ 발심그러던 어느 날, 성지순례 사업을 하던 친구로부터 연락이 왔다. 불자들을 모아 전국 유명사찰을 순례하는 일을 하던 그 친구는 일손이 부족하다며 도움을 요청했다. 몇 번 절에 가본 것 외에 불교에 대해 아는 것이 없었다. 무슨 도움
조계사로 출근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어느 날, 아이가 물었다. 가족 살뜰히 챙기진 못했지만 조계사서 17년 삶 보람도 커환희심 ‘불자답게’로 회향“아빠, 왜 조개 안사와요?”무슨 말인가, 눈만 멀뚱거렸다. “매일 조개 사러 간다면서 왜 조개 안 사오냐고요?”‘조계사 간다’는 말을 ‘조개 사 간다’로 생각했던 것이다. 이렇게 아이와 대화가 안 통해서야…. 아이 탓이 아니다. 많은 시간을 함께하지 못한 아빠 탓이다. 지금은 훌쩍 커서 대학생이 된 큰 딸은 태어난 지 6개월, 그리고 고등학교 졸업을 앞두고 있는 둘째 아들은
둘째가 태어난다는 소식에 정신이 버쩍 들었다. 실천불교전국승가회 간사 월급 60만원으로는 도저히 네 식구의 생계를 책임질 수 없었다. 뭔가 결단이 필요했다. ‘딱 3년만 밖에서 일을 하고 돌아오겠다’며 1997년 실천불교승가회를 나왔다. 하지만 3년을 채우기도 전에 조계종엔 광풍이 불었다. 1998년 종단사태가 터진 것이다. 낮에는 ‘노가다’ 판에서 일을 하고 저녁마다 조계사에서 밤을 새웠다. 전쟁 같은 시간이 지나고 1999년 1월6일 조계사로 첫 출근했다. 벌써 17년 전 일이다.‘실천적 불교사상’ 통해 발심 실천승가회 간사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