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궁 안에 암바팔리의 거처가 마련됐다. 왕자들은 앞다투어 진귀한 장식품을 들고 찾아와 거처를 꾸몄다. 값비싼 보석으로 장식한 암바팔리의 방은 눈이 부셔 시선을 제대로 두기 힘들 지경이었다. 모든 준비가 마무리되자 왕자들이 차례로 암바팔리를 방문했다. 암바팔리를 독차지하겠다며 전쟁마저 불사할 기세로 으르렁거렸던 왕자들은 어느덧 이 상황을 군말 없이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바이살리에 다시 평화가 찾아왔다.한편, 결혼은 하지 않았지만 매일 찾아오는 다른 왕자를 남편처럼 대해야 하는 기이한 상황 속에서도 암바팔리는 꿋꿋함을 잃지 않으려 노력
“아저씨. 나는 어디서 태어났어? 엄마랑 아빠는 어디에 있는 거야?”망고가 탐스럽게 영근 여름의 어느 날, 정원사의 어깨에 매달린 암바팔리가 머뭇대며 물었다. 이제 겨우 다섯 살 된 아이의 질문이었지만 말투는 자못 진지했다. 놀란 정원사가 고개를 돌려보니 얼굴엔 아이답지 않은 슬픔이 가득했다. 언젠가 오늘 같은 날이 반드시 올 것을 알았기에 무슨 말을 해 주어야 할지 고민해오던 터였다. 바로 대답하지 못하고 자리에 선채로 하늘만 바라보았다. 영원히 숨길 순 없는 노릇이겠지….“암바팔리야. 여기가 네가 태어난 곳이란다. 태어난 지 하
빔비사라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사랑하는 둘째 왕비가 붓다의 말씀을 받들어 자만심을 버리길 원해왔지만 출가까지 바란 건 아니었다. 당황하여 뒷짐을 지고 하늘만 바라보다 케마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허영의 탁한 기운은 사라지고 평온함만이 가득했는데, 죽림정사에 도착했을 때와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마치 성자를 앞에 둔 듯해 빔비사라는 자못 경건해지기까지 했다. 붓다의 설법을 듣고 한 순간에 깨달음을 이룬 이를 많이 봤지만 케마가 그러리라고는 생각해보지 않았다.“그대가 여기까지 온 이상 어찌 출가를 허락하지 않을 수 있겠소. 기
죽림정사의 풍경은 남편의 말 그대로였다. 케마의 부탁대로 붓다가 제자들과 탁발하러 나간 시간에 맞춰 왔기에 간간이 새들의 지저귐 소리만 들릴 뿐 고요하고 평화로웠다. 시선 닿는 곳곳에 꽃이 피어 있어 향기만으로도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숲 속의 오솔길로 들어가 짙푸른 나뭇가지 사이로 쏟아지는 햇살을 맞으며 산책했다. 지금껏 살아온 궁궐도 충분히 아름다웠지만 이곳의 아름다움은 그것과 달랐다.처음 가져보는 느낌에 취해 느릿느릿 걸으며 주변 풍경을 감상하는 동안 케마는 저도 모르게 수행자들의 처소 인근에 도착했다는 사실을 알았다. 붓다가
아침이 밝아왔다. 부스스한 얼굴로 거울 앞에 달려가 자신의 몸 구석구석을 훑어보았다. 파리조차 미끄러질 듯 반질반질한 윤기가 황금색 피부를 탐스럽게 덮었고, 잘록한 허리 위아래로 풍만한 가슴과 통통한 다리는 매끄러운 굴곡을 그렸다. 홍조를 띈 두 볼이 건드리면 터질 것처럼 부풀어 올라 슬며시 지은 미소를 더욱 짙고 깊게 만들었다. 거울에 비친 아름다운 모습이 어제와 그대로인 것을 확인하곤 만족감에 실실 웃음이 나왔다.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단정하게 정리하고 새하얀 목덜미에 향수를 뿌린 뒤 시녀에게 문을 열게 했다. 마가다국 빔비사라왕
첫 번째 남편은 어머니와, 두 번째 남편은 딸과 정을 통했다. 웁팔라반나는 마음속으로 절규했다. 첫 번째 남편과 엄마의 관계를 알면서도 버틸 수 있었던 건 오로지 딸의 존재 때문이었다. 누워만 있던 아이가 옹알이를 시작하고 몸을 뒤집고 일어나 걷고 뛰는 모든 과정이 기쁨이었다. 그것이 아니라면 지옥 같은 집에서 7년이라는 세월을 보낼 이유가 없었다. 그만큼 사랑했다. 사랑한다고 믿었다. 그런 딸이 지금 남편의 두 번째 부인이 되어 나타나다니. 누굴 탓해야 하나, 감도 잡히지 않았다. 차마 딸의 얼굴을 보지 못하고 고개를 떨구었다.
‘어찌 나에게 이토록 더럽고 추악한 일이 들이닥쳤단 말인가. 소문이라도 난다면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어떻게 감당할 수 있을까. 저 달빛에 몸을 녹여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싶다’. 생각할수록 기막힐 뿐이어서 차라리 집을 나가 모든 걸 망각해 버린 척하며 아무렇지도 않은 듯 살고 싶었다. 하지만 담장 너머 아득한 밤거리를 바라보던 웁팔라반나의 눈에 사랑하는 딸의 얼굴이 어른거렸다. 탁자 모서리에 머리를 부딪쳐 울던 딸은 어느새 곤히 자고 있었다. 지금 집을 나가면 지옥 같은 이 집에서 딸이 홀로 남겨질 게 뻔하다. 밤거리와 딸을 번갈아
웁팔라반나가 결혼한다는 소식이 사위성 곳곳으로 퍼져 나갔다. 이전까지 웁팔라반나를 떠올리며 밤을 지새던 남성들이 이번엔 쓰라린 마음을 달래지 못하고 뜬눈으로 밤을 보냈다. 웁팔라반나는 그만큼 아름다웠고 어디서든 이목을 집중시켰다. 검디검은 머리카락과 새하얀 피부, 깊은 눈빛은 사람을 홀리는 듯했는데, 성정까지 단아하여 사람들의 사랑을 듬뿍 받았다. 게다가 사위성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부잣집의 외동딸이라니, 웁팔라반나를 아는 이라면 한 번쯤은 그녀의 남편이 되는 꿈을 그려보곤 했었다.아름답고 단아한 웁팔라반나첫눈에 반한 부호아들
밧다는 한쪽 입꼬리를 위로 올리고 알듯 말듯 한 미소를 지었다. ‘유명하다는 스승들과 논쟁을 벌여 단 한 번도 져본 적이 없는 나에게 감히 도전하겠다니. 그것도 고작 아이들을 시켜 나뭇가지를 짓밟게 했단 말인가. 어쭙잖은 지식을 과시하고 싶은데 겁은 났던 모양이군.’ 밧다의 얼굴 표정에 교만함이 한가득 떠올랐다. 사위성 안으로 들어가 길거리를 돌아다니며 외쳤다.사리풋타에 질문 퍼부은 밧다차분한 그의 대답에 말문막혀붓다 만나 연기의 이치 깨달아“사리풋타라는 어리석은 자와 나와의 논쟁을 보십시오. 나를 따라오면 사리풋타라는 어리석은 자
밧다는 산과 들을 구름처럼 떠돌았다. 아침에 눈을 떠 이 마을 저 마을 둘러보다 어스름 내릴 무렵엔 아무 집에 들어가 하룻밤을 청했다. 부유한 집에서 태어나 원하는 무엇이든 거머쥐며 살았던 지난날이 머릿속에서 말끔하게 지워졌다. 머릿속만이 아니라 마음에서도 사라진 지 오래였다. 남편에게 살해당할 뻔했던 순간과 살기 위해 그런 남편을 죽였던 순간의 충격이 그간 욕망을 순식간에 뽑아 버렸다.산과 들 떠돌다 승원 입소머리깍고 음식 섭취도 줄여고통원인 찾아 세상 헤매다사위성에서 사리붓다 만나한동안 홀가분한 마음으로 유랑했다. 갑작스럽게 닥
“사형을 선고받고 집행장으로 끌려갈 때, 천신에게 기도했어. 살려주신다면 공양을 바치겠다고. 내 이렇게 살아났으니,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면 천신이 가만히 있겠나. 나를 위해 공양을 마련해 주시오. 준비가 끝나거든 같이 갑시다.”살기 가득한 사투카 밀치며욕망의 부질없음 깨달은 뒤하인들 보낸 후에 수행 결심사투카가 자못 진지한 표정으로 밧다에게 말했다. 결혼 후, 하루 종일 바깥만을 나돌 뿐 얼굴 한 번 제대로 보여주지 않은 남편 때문에 속이 바싹 타들어가던 터다. 한량 같던 남편이 처음으로 건넨 반듯한 말에 밧다는 반가운 마음이 앞섰
마가다국의 수도 라자가하. 저잣거리를 곁에 둔 거대한 저택의 가장 높은 층 창문이 빠끔히 열렸다. 한 여인이 윤기 나는 머릿결을 찰랑거리며 얼굴을 내밀고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밑을 내려다보았다. 사형수를 집행장까지 이송하는 행렬과 구경하는 사람들이 엉켜 한바탕 소동이 벌어지고 있었다. “남의 것이나 훔치고 다니는 비열한 자식!” “저 도적놈을 어서 죽여라!”사형수 보고 결혼 결심한 딸딸의 고집 꺾지 못한 부모님보석금 내고 집으로 데려 와멀리서 사형수를 지켜보던 여인의 얼굴에 홍조가 올라오더니 식은땀까지 줄줄 흘러내렸다. 울퉁불퉁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