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은 언덕 위, 이상하게 생긴 탑과 마주쳤습니다. 제멋대로 자연석을 턱 턱 얹어 놓아, 본때가 없어 사람들은 거지탑이라 부른답니다. 하지만 이 탑을 보는 순간, 운주사 천불천탑의 의미를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소박하고 곤궁한 농부들이 이상세계를 염원하여, 자신들과 닮은 이 못난이 불상과 탑들을 세운 것입니다. 생산활동과 예술활동의 일치라고 할까요. 소박하고 천진스런 심성에서 나온 저 자유분방한 상상력. 모든 기교가 떨어져나갔기에 역설적으로 가장 위대한 기교가 된 천진성. 마음을 무장해제 시키는 저 능청스러움. 도시의 꽃미남 꽃미녀들의 얼굴에 식상할 때면, 내 마음은 운주사로 달려가 거지탑 앞에 핀 진달래꽃이 됩니다.
집 모양에는 사람의 마음이 담깁니다. 아파트 생활은 편리하지만, 오래 살다보면 집을 닮아 마음도 네모지고 층층이, 칸칸이 나뉘어 갑니다.용인 민속촌 외진 언덕바지에 초가삼간이 다소곳이 숨어있습니다. 민속촌이 들어서기 전부터 그 자리에 있던 유일한 가옥입니다. 말 그대로 방 둘과 부엌 하나의 초가삼간이지만, 그 모양새는 풍요롭습니다. 단아한 지붕과 앙증맞은 문들, 그리고 저 평안한 앉음새. 처음 저 집을 보았을 때, 얼마나 기뻤던지요! 참 이상합니다. 한없이 작은 방에 누워보니, 마음은 한없이 커졌습니다. 도심의 아스팔트 정글에 지쳐 포근한 품이 그리울 때, 이 초가삼간을 떠올리면 마음이 넉넉해집니다.
벼랑 중간에 걸린 바위길을 더듬어 굴로 들어갔을 때, 난관을 돌파해냈다는 기쁨은 말할 수 없이 컸습니다. 뒤돌아보니, 그 길은 원래 있던 게 아니라 누군가가 뚫어놓은 길이었습니다. 누구였을까요? 겨우 한 사람이 지나갈 만하지만, 징으로 바위를 쳐서 그 길을 내려면 대단한 공이 들었을 것입니다. 기도객을 위하여 저 바위를 조금씩 부수어나간 어느 석수의 순박한 심성이 못내 미더워, 저는 가슴이 따뜻해지는 걸 피할 수 없었습니다. 세상에 멋진 조각이 많지만, 이 투박한 바위길은 얼마나 살아있는 작품입니까? 언젠가 세상사는 일이 시들해질 때, 홀로 개암사 원효방으로 올라가고 싶습니다. 별빛만이 찾아오는 밤을 지새우면서 제 그림자와 나눌 대화 내용이 사뭇 궁금해집니다.
통나무에 파놓은 길을 따라 물이 철철 흘러듭니다. 그 물은 연못에 넘치고, 연못에는 물고기가 삽니다. 메마른 내 영혼에도 이런 물다리가 필요합니다. 인간은 어디서 이런 생명의 샘물을 끌어들일까요? 저는 목마를 땐, 언제나 현재 시간으로 돌아옵니다. 과거의 상처에 아파하거나 미래의 걱정에 불안해하다가도, 현재로만 돌아오면 언제나 신선한 새물이 콸콸 흘러듭니다. 우리에겐 마르지 않는 생명의 샘인 현재가 무한히 주어져 있습니다. 현재만이 실재입니다. 현재로만 돌아오면 공연한 망상은 모두 떨어져나가고, 나는 내가 됩니다. - 담양 소쇄원에서
풍경이란 인간이 어느 장소와 만나는 정신적 현상입니다. 인간이 오면 풍경은 움찔 깨어나, 말을 건네옵니다. 그 체험은 특히 그곳에 있는 특정한 사물과 대화를 나누면서, 깊은 교감으로 승화됩니다. 바위 끝 틈새에 뿌리를 내리고 절벽 위로 고개를 내민 이 잘생긴 소나무에서 어느 수도승의 맑은 표정을 보았다면 지나친 말일까요? 만일 인간도 식물처럼 한자리에 서서 평생을 살라고 한다면, 우리는 어떤 곳을 고를까요? 사람마다 그런 자리가 있을 것입니다. 나만의 명당. 제게 그런 자리를 말해보라고 한다면, 저는 첫 손에 이곳을 꼽을 것입니다. 여기만 서면, 풍경이 소곤대는 목소리가 시공을 넘어 들려오는 것 같습니다.- 영월 요선정에서
산비탈을 등에 진 담벼락 옆으로 물길이 나있습니다. 폐기와장으로 만든 밉지 않은 인공미. 직선을 사용하지 않고 자연스런 물살의 흐름에 순응하여 완만하게 휘어진 곡선을 그대로 살린 누군가의 마음이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미소를 띠게 합니다. 그 유연한 흐름은 전각들을 떠받치고 있는 소나무 기둥들의 곡선과 너무나 잘 어울립니다. 자연에는 직선이 없습니다. 억지를 쓰지 않을 때, 그대로 드러나는 자연미를 배웁니다. 참 편안합니다. - 개심사에서
동국대가 친북 발언으로 사회적 물의를 일으킨 사회학과 강정구 교수에 대해 직위해제를 결정했다. 동국대는 12월 26일 정책위원회 회의를 갖고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불구속 기소된 강정구 사회학과 교수를 직위 해제키로 했다. 이에 따라 강 교수는 강의 배정과 연구비 지원을 받을 수 없게 됐다. 동국대는 “강 교수가 검찰에 의해 정식 기소됨에 따라 사립학교법(제58조)에 근거하여 직위해제를 결정했다”며 “이번 결정은 강 교수 사건으로 학교 명예가 실추된 점을 감안했으며 총장과 이사장의 결재를 받아 처리절차를 마무리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다만 교수 직위가 해제되더라도 교수 신분 자체가 박탈되거나 면직되는 것은 아니며, 법원의 1심 판결이 무죄로 나면 직위는 회복된다.
백담사 어귀 만해마을의 새로 지은 본당에는 단아한 화강암 불상만 있고, 뒤에 탱화가 없습니다. 하지만, 얼마 뒤 빛이 옮겨가면서 그만 탄성을 지르고 말았습니다. 격자무늬로 창살만 꾸며 놓은 유리 문짝에 뒷산의 숲이 비치면서 그대로 자연 탱화가 펼쳐지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아름다운 탱화를 본 적이 없습니다. 완성된 ‘존재’가 아니라, 시시각각 ‘생성’하는 그림. 변화를 통해 드러나는 불변. 시대의 변화에 따라 건축은 변해야 합니다. 하지만 변하지 않아야 할 것은 지켜야 합니다. 변하는 것과 변하지 않는 것의 조화, 이것이 현대건축의 과제입니다.
부석사 무량수전 앞 넓은 마당에서 우연히 어떤 시선과 눈이 마주쳤습니다. 순간 시공간이 떨어져 나가면서, 나는 아득한 허공을 밟고 서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얼굴이 붉어져 본 적이 얼마만인가요. 내 시선을 느꼈는지, 석등에 새겨져 무량수전의 아미타불에게 공양을 올리고 있는 그 보살의 얼굴에도 얼핏 홍조가 스쳐 지나갔습니다. 삼국유사에는 “오진(悟眞)이 수십 리 밖의 산 아래에 살면서 매일 팔을 뻗어 부석사의 석등에 불을 켰다”는 기록이 나옵니다. 나는 수백 리 밖 서울에 살면서 때때로 마음을 달려 석양에 붉게 물든 그녀의 얼굴을 살핍니다.
서울 성북동 성낙원 담 너머로 이 모습과 마주쳤습니다. 나는 상상해 봅니다. 맑은 물이 고이는 널따란 연못가에 마침 반석이 펼쳐져 있습니다. 집주인은 여기다 남향의 정자를 지어 자연을 완상하는 곳으로 꾸미고 싶습니다. 목수가 터를 보니, 마침 연못가 반석 위에 늘씬한 소나무 한 그루가 삐죽 서있습니다. 목수와 주인은 소나무도 살리고, 정자도 짓기로 의견을 모읍니다. 결국 소나무를 품에 안은 정자가 지어집니다. 서울 한복판에서 이렇게 자연을 배려하고 공존하는 인간의 심성을 발견하다니요!
열어보지 말았어야 했습니다. 그냥 그런 줄 알고 지나쳤어야 했는데…. 삐걱-. 완벽하게 아무 것도 없는 빈 공간. 송광사 척주당은 죽은 영가가 천도제를 지내러 절에 들어오기 전, 하룻밤 묵으면서 속세의 욕망과 허물을 벗는 곳이라고 합니다. 우리도 언젠가는 영가가 될 것입니다. 저렇게 텅 빈 방에 앉아, 종이(지방)의 몸을 하고 하룻밤을 지새면 어떤 심정일까요? 나는 속으로 판도라의 상자를 연 것을 후회했습니다. 아니, 이 충격을 미리 맛보아 고마웠습니다. 참으로 복잡한 심사였습니다.
세상에는 쭉쭉 뻗은 잘난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이 나무를 보는 순간, 깨닫게 됩니다. 이게 바로 우리네 몸이란 걸. 세월의 비바람에 시달리며 굽은 인생! 저는 한편으론 슬펐고, 또 한편으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곧은 몸보다 적당히 굽은 몸, 잘난 얼굴보다 수수한 얼굴을 지닌 것이 오히려 다행으로 여겨졌습니다. 비록 가시방석에서 용틀임 치며 살아왔지만, 지금 여기 이 모양 이 꼴 그대로가 좋습니다. 앉은 자리를 꽃자리로 받아들입니다. - 안동 하회마을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