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수영 등 “대왕암은 인공 수중릉” 주장 유홍준 등 “지나친 추정… 산골처” 반박 경북 경주군 양북면 붕길리 앞 바다에 떠 있는 대왕암은 신라 문무왕의 수중릉인가, 아니면 문무왕의 유골을 뿌린 산골처인가? 1967년 신라오악탐사단에 의해 그 실체가 발견된 후 사적 158호로 지정된 대왕암은 그 동안 학계에서 문무왕의 유골을 수중에 봉안한 수중릉인지, 단지 유골 가루를 뿌린 산골처인지를 두고 이견이 분분했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의하면 신라 30대 왕인 문무왕이 죽으면서 불교식 장례에 따라 화장하고 동해에 묻으면 용이 돼 동해로 침입하는 왜구를 막겠다는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이에 그의 아들 신문왕은 동해 근처에 감은사를 세워 법당아래 동해를 향한 배수로를 만들어 용이 된 문무왕이
황수영 “국난극복 위한 호국적 의미” 주장 김상현 “왕권 강화 위한 정치적 목적” 반박 신라 제31대 신문왕(神文王)은 죽은 아버지 문무왕(文武王)을 위해 동해변에 감은사(感恩寺)를 지어 추모했다. 죽어서 해룡(海龍)이 된 문무왕과 천신(天神)이 된 김유신(金庾信)이 합심하여 용을 시켜 동해(東海)의 한 섬에 대나무를 보냈다. 이 대나무는 낮이면 갈라져 둘이 되고, 밤이면 합하여 하나가 되는지라 왕은 이 기이한 소식을 듣고 현장을 직접 방문했다. 이 때 나타난 용에게 왕이 대나무의 이치를 물으니, 용은“비유하건대 한 손으로는 어느 소리도 낼 수 없지만 두 손이 마주치면 능히 소리가 나는지라, 이 대나무도 역시 합한 후에야 소리가 나는 것이요… 또한 대왕은 이 성음(聲音)의 이치로 천하의 보배가 될 것
문명대, “석가여래-미륵보살-다보여래”주장 종범 스님, “보문품 근거한 이불봉주상”반박 강우방 교수는 태안 마애삼존불의 존명에 대한 황수영 박사의 “가운데가 관음 보살이며 좌측은 약사여래, 우측은 석가여래일 것”이라는 주장에 대해 “관음보살을 기준으로 왼쪽은 약사여래, 오른쪽은 아미타 여래”라고 반박하면서 새로운 논쟁을 일으켰다. 강우방 교수에 따르면 왼쪽에 새겨진 불상이 약합(藥盒)을 들고 있어 약사여래가 분명하고 가운데 부처가 관음보살이기 때문에 오른쪽 부처는 석가여래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는 “석가여래의 자비의 화신으로 알려진 관음보살이 석가여래보다 위계가 낮기 때문에 만약 석가여래를 모시기 위해서는 가운데에 주불로 조각하고 왼쪽에 관음보살을 모시는 것이 일반적인 것”이라는 이유에서다
외금강에 위치한 귀면암은 본래 귀신의 얼굴 같은 바위라는 뜻인데 그 이름과 같이 모질고 사나운 형태의 봉우리이다. 귀면암은 인근 삼선암과 하나의 조화를 이루고 있으며 석양이 질 무렵 그 전경이 뛰어나 예로부터 금강산에서 그 어떤 것과 견줄 바 없는 풍경이라고 전하고 있다. 광주지사=김경태 지사장
황수영, “약사여래-관음보살-석가여래” 주장 강우방, “약사여래-관음보살-아미타여래”반박 충남 태안군 백화산 정상 부근에 봉안된 국보 307호인 태안 마애삼존불〈사진〉은 서산 마애삼존불과 더불어 백제의 대표적인 불상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백제의 미소로 불릴 정도로 온화하고 섬세한 여성미를 표현한 것이 서산 마애삼존불이라면 태안 마애삼존불은 대담한 얼굴표정과 장대한 체구 등 강인한 남성미를 보여준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그런데 태안 마애삼존불은 세 분의 부처를 바위 면에 새겼는데 그 배치 수법이 독특해 발견당시부터 학계에 비상한 관심을 받았다. 이는 대부분의 삼존불이 중앙에 거대한 여래상을 조각하고, 좌·우에 작은 보살상을 조각한 것에 반해 태안 마애삼존불은 중앙에 작은 보살 입상을 세우고
천혜봉 등 “유사 첫 간행은 조선시대”주장 김상현 등, “일연-무극 의해 간행” 반박 『삼국유사』는 『삼국사기』와 달리 야사(野史)를 기초로 기술돼 당시 역사는 물론 사회 문화와 사상 등을 꿰뚫을 수 있는 방대한 자료가 수록돼 있어 그 가치가 높은 역사서로 알려져 왔다. 그 동안 『삼국유사』는 고려 충렬왕 때 보각국사(普覺國師) 일연(一然.1206∼1289)이 저술했다는 것이 공공연한 사실로 받아들여져 왔다. 이는 왕력(王曆)과 본문 5권으로 구성돼 있는 『삼국유사』의 제5권 첫머리에 ‘국존 조계종가지산하 인각사주지 원경충조대선사 일연찬(國尊 曹溪宗迦智山下 麟角寺住持 圓徑照大禪師 一然撰)’이라며 저술자의 이름을 분명히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려시대 제작된 초간본이 아직까지 발견되지 않았을 뿐
조성택 등, “모순 지적은 불교 왜곡” 비판 김진, “지나친 교조주의적 입장” 반박 김진 교수와 한자경 교수의 주장과 반박이 팽팽하게 진행되던 무아-윤회 논쟁은 2003년 철학잡지 「오늘의 동양사상」이 무아-윤회 논쟁을 특집으로 다루면서 철학계 전반으로 확산됐다. 고려대 조성택 교수를 비롯해 동국대 최인숙 교수, 서울대 김종욱 박사 등이 새로운 논객으로 참가한 「오늘의 동양사상」에서 학자들은 “무아-윤회가 모순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불교를 왜곡하는 것”이라며 일제히 김진 교수의 주장을 비판했다. 고려대 조성택 교수는「불교에 있어 이론과 실천수행」이라는 논문에서 “김진 교수의 문제 제기는 근본적으로 불교에 있어 ‘이론과 실천 수행의 관계’를 이해하지 못하고 서양 철학의 이성 중심주의
김진, “상호 모순…칸트 요청이론 도입해야” 주장 한자경, “기독교 중심 자아관서 출발한 발상” 반박 90년대 불교학자들간에 진행됐던 무아-윤회 논쟁은 2000년대 들어 칸트 등 서양철학을 전공한 울산대 김진 교수의 새로운 주장이 제기되면서 철학전공자들간의 주장과 반박으로 이어졌다. 울산대 김진 교수는 서양철학자 칸트의 사상과 불교 사상을 비교한 『칸트와 불교』(2000년, 철학과 현실사)라는 책을 통해 “무아-윤회설은 모두 불교에서 가장 기초가 되는 교리로서 두 가지 모두를 내세울 경우 서로 상충될 수밖에 없는 모순에 빠지게 된다”고 주장했다. 김 교수는 “불교의 십이인연설은 윤회설에 기초한 것이며, 윤회적 주체의 탄생과 성장, 죽음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며 “그러나 이와 같이 분명하게 태어나
호진 스님 “상호 모순… 양립 될 수 없다”주장 이중표 등 “서로 다른 차원… 모순 아니다”반박 모든 존재는 다섯 요소들의 집합에 불과하며 거기에는 고정 불변의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불교 근본 가르침 중에 하나인 무아설. 그럼에도 불교는 ‘모든 존재는 업에 대한 과보를 받고 이에 따라 윤회한다’고 밝히고 있다. 그렇다면 고정 불변의 실체가 없음에도 윤회하는 그 주체는 무엇일까? 무아와 윤회를 동일선상에서 놓고 보면 이처럼 상호 모순에 빠질 수밖에 없는 이른바 무아-윤회 모순은 오랜동안 불교계의 풀리지 않는 숙제였다. 이는 부처님의 무아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경우 주체가 부정되고, 윤회설을 수용할 경우 주체가 필연적으로 전제되는 사실에서 오는 두 이론체계 사이의 모순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사재동 등, “정토신앙 담은 불교적 내용” 주장 이수자 등, “‘이공본풀이’ 영향 받은 것” 반박 “범마라국 임정사에서 중생을 교화하던 광유 성인이 하루는 서천국 사라수왕에게 유나(維那)로 맞이하고 싶다는 뜻을 전한다. 이에 사라수왕은 크게 감복해 원앙부인과 함께 임정사로 향한다. 그러던 중 만삭이었던 부인은 불편한 몸 때문에 더 이상 길을 갈 수 없게 되자, 왕에게 자신을 죽림의 자현장자의 종으로 팔아 그 돈을 성인에게 올려 줄 것을 간청한다. 결국 사라수왕은 부인의 뜻에 따라 태어날 아이의 이름을 지어주고 부인은 왕에게 왕생게를 일러주고 헤어진다. 부인은 얼마 후 아들 안락국을 낳게 되지만 장자는 수청을 강요하면서 부인을 괴롭힌다. 성장한 안락국은 부인을 통해 부친의 소재를 확인하고 임정사에서 사
김지견 박사, “‘湘’,‘想’은 선덕왕의 피휘”주장 양은용-해주스님, “납득할 논거 더 찾아야”반박 7∼8세기 해동 화엄학을 개창한 신라의 고승 의상(625∼702). 의상은 중국 화엄 2조인 지엄의 문하에서 수학한 뒤 귀국해 중국화엄과 다른 독창적인 한국 화엄을 완성하면서 한국불교의 사상적 기반을 확립한 인물이다. 이런 까닭에 시대를 거치는 동안 국내·외에서는 그를 가리켜 수많은 존칭(尊稱)을 따로 책정해 추앙했다. 신라 왕실이 그에게 내렸던 ‘화엄조사(華嚴祖師)’, ‘부석존자(浮石尊者)’, 고려왕실이 내린 ‘원교국사(圓敎國師)’, 중국 유학시절 그의 스승 지엄이 내린 법호(法號) ‘의지(義持)’, 존호(尊號) ‘해동신라화엄법사(海東新羅華嚴法師)’ 등이 그것이다. 그런데 이처럼 한국불교를 대표
“거듭된 논쟁 보다 한국 불교에 맞는 법통 마련”지적도 1994년 9월 29일 조계종은 종단 개혁과 함께 도의 국사를 종조로 하는 종헌 종법을 발표하면서 조계종 종조 논쟁은 일단락 되는 듯 했다. 그러나 종헌 종법의 다소 애매한 종조, 중흥조에 대한 규정으로 인해 논쟁의 불씨는 쉽게 수그러들지 못했다. 이는 조계종의 종헌 종법 제 6조에서 “조계종의 종조는 도의 국사로 중흥조는 태고 보우국사”로 규정하면서도 종명 종지를 다룬 제 1조에서 “본종은 대한불교조계종이라 칭하다. 본종은 신라 도의국사가 창시한 가시산문에서 기원해 고려 보조국사의 중천(重闡)을 거쳐 태고 보우국사의 제종 포섭으로서 조계종이라 공칭하여…”라는 구절을 삽입해 누구를 중흥조로 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해 종헌 종법에서도 명확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