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회에 우리가 읽었던 나무장승이 노래하고 돌여자가 춤을 춘다는 말은 무흔적의 존재방식인 부처의 입장에서 읊은 경지이다. 흔적의 존재방식인 삼라만상은 무흔적의 존재방식인 공의 나타난 표현이다. 공은 스스로 아무 것도 나타낼 것이 없는 허허로움 자체다. 일체 중생은 사회생활에서 제행무상(諸行無常)과 일체개고(一切皆苦)의 감정을 느낀다. 중생이 사회생활에서 쾌락과 즐거움을 미친 듯이 찾지만, 그것은 고통과 괴로움을 일시적으로 잊기 위한 몸부림이다. 중생의 몸은 모든 괴로움과 고통의 진원지다. 몸의 집착은 무상감과 괴로움만을 키울 뿐이다. 그러나 부처는 다르다. 중생이 부처로 사고방식을 순간적으로 확 바꿔버리면, 모든 것이 다르게 보인다. 부처는 사고방식이 전적으로 확 바뀌어버린 중생이다. 우리는 종종
지난 회에 이야기된 바와 같이, 여래는 어떤 규정도 정의도 불가능한 무흔적의 존재이다. 무흔적의 존재는 곧 공(空)과 다를 바가 없다. 공이라는 것은 무흔적의 존재방식을 말한다. 지금 여기 내 방 안에 컴퓨터가 있고 전등이 있고. 책들이 놓여 있다는 것은 비어 있는 공간 안에 어떤 흔적의 현상들이 나타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어떤 흔적의 현상들은 어떤 흔적도 없는 무(無)의 공간인 공을 배경으로 해서 가능하다. 그 무의 공간이 없다면, 흔적들의 나타남과 그림이 성립하지 않는다. 마치 흔적들의 현상은 비어 있는 공의 바탕을 배경으로 해서 성립하는 공의 무늬와 다를 바가 없다 하겠다. 어떤 무늬도 없는 공은 곧 어떤 흔적도 없는 무흔적의 존재양식에 다름 아니다. 이 무흔적의 존재양식이 바로 여래요 부처
‘증도가’의 가르침에로 다시 돌아간다. “여래선을 단박에 깨치니 육도만행(六度萬行)이 본체 속에 있는 원만함이라. 꿈속에선 맑고 맑게 육취(六趣)가 있더니, 깨친 후엔 비고 비어 대천(大千)세계가 없도다. 죄와 복이 없고 손해와 이익도 없나니 적멸한 성품 가운데서 묻고 찾지 말라. 예전에 때 낀 거울 갈지 못했더니 오늘에야 분명히 닦아 내었도다.” 이것은 석가모니 부처님이 보리수 나무 아래서 반짝거리는 새벽별을 보신 이후에 성도하신 경지를 말씀하신 것이다. 중생의 몸이 순식간에 부처의 몸으로 바뀐 것과 동시에 나타나는 여래선의 깨침을 노래한 것이다. 육도는 육바라밀을 말한다. 보시, 지계, 인욕, 정진, 선정, 지혜의 바라밀이 그것이다. 육바라밀은 피안에 이르게 하는 여섯가지 방편을 말한다. 피안이라 하여
한국인들은 너무 지나치게 초탈적인 공의 도리와 세속적인 색의 도리를 나누고, 출가와 재가를 너무 분별한다. 이런 생각이 한국불교를 암암리에 지배하기 때문에, 입으로는 다 ‘상구보리(上求菩提) 하화중생(下化衆生)’이라고 말하지만, 기실 상구보리를 모색하고 수행하다가 일생을 마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말하자면 상구보리를 찾다가 끝내 하화중생을 제대로 실천해 보지 못하고 세상을 끝내는 경우가 대부분이라는 것이다. 이론적으로 상구보리가 한없이 멀고 도달점이 끝없이 까마득한데, 언제 상구보리를 졸업하고 하화중생을 할 것인가 생각하면, 기약 없는 수행인것 같고 공부가 한없어 보인다. 그러나 영가대사의 ‘증도가’는 그런 기약없는 공부의 길을 단념시킨다. 하기야 영가대사가 나이 30여세에 이미 ‘증도가’를 지었으니,
불법은 ‘무엇이 정의다, 진리다’ 라고 애써 강조하지 않는다. 그렇게 되면 불법은 도덕윤리적 사고방식에 얽매이는 사상이 되어서 도처에 선/악과 진/위를 너무 뚜렷이 분별하는 경계선을 확연히 긋게 된다. 한국사회가 지금 그런 경계의 병에 시달리고 있다. 우리는 중생신이자 동시에 법신이다. 이 말은 우리가 중생이자 동시에 부처임을 말한다. 많은 분들이 우리가 중생이자 동시에 부처임을 말하나 그것을 실감하지 못하고 있다. 지금 우리사회가 중생의 고집만 꽉 차있으면서 자기 생각이 진리이고 자기 행위가 정의라고만 주장한다면, 우리 사회는 구제불가능의 저주만을 외쳐대는 꼴이 되고 만다. 우리는 원효대사를 본받아 우리 사회를 위하여 시급히 하심(下心)하는 법을 익혀야 한다. 우리는 원효대사의 주장처럼 스스로 하심하여
불심은 나 중심을 산화시켜 나를 우주의 모든 존재방식에 흩어 놓는다. 나 중심의 사고방식이 질투심과 적개심과 편파심을 조장한다. 인류의 역사는 사실상 각자가 다 나중심의 이야기를 정당화시켜나가는 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겠다. 그런 일을 흔히 정의라는 내용 없는 추상명사를 내세워 사람들은 자기 합리화를 꾀한다. 한국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정의라는 말 쓰기를 좋아하고, 또 국민이라는 말을 너무 남용한다. 한국사를 통하여 정의의 개념이 빠진 투쟁이 거의 없고, 자기 입지를 정당화하기 위하여 국민의 뜻을 등장시키지 않는 예가 거의 없다. 그 말은 한국인들이 현실적으로 자기의식과 자기 고집이 얼마나 완고한가를 입증한다 하겠다. 한국인들이 정의와 국민이란 허울 좋은 이름으로 강렬한 자기 고집과 자기의식을 제각기 발
지난 번에 법신은 법성의 보이는 측면이고 법성은 법신의 안보이는 측면이라는 것을 말한 적이 있었다. 법의 몸과 법의 마음과의 관계가 우주 법계를 읽는 두가지 모습이라는 것을 우리가 말했다. 부처님이 가르쳐 주신 불자의 모습은 부처님을 맹목적으로 믿는 신앙의 종교가 아니다. 기독교는 무엇이든지 믿어야 함을 늘 강조하지만, 불교는 믿어야 할 교리가 근원적으로 없다. 오직 불교의 믿음은 이 우주에 늘 있어 온 우주적 사실을 제대로 아는 것이다. 가장 원초적 사실은 더 이상 그것을 더 원초적으로 설명할 방도가 없기에 불교는 그 사실을 믿으라고 말하는 것이지, 기독교처럼 하나님의 천지창조를 믿고, 인격적 하나님의 세상주재를 믿고, 인격적 하나님의 선악심판을 믿고, 인격적 하나님이 영혼을 천국으로 이끄는 구원을 믿
‘증도가’의 구절을 잇는다. “법신을 깨달음에 한 물건도 없으니, 근원의 자성이 천진불이라.” 법신(法身)과 법성(法性)은 어떤 관계일까? 글자 그대로 몸(身)과 마음의 본성(性)과의 관계와 유사하다. 하늘을 나는 새들은 그 종류를 막론하고 경쾌한 몸을 가진 것으로 보이듯이, 육중한 몸을 가진 짐승은 이미 그 몸을 통하여 자신의 성품을 말하여주고 있다. 몸은 마음이 느끼고 있는 바를 이미 말하고 있다. 마음이 느끼고 있는 바를 입으로 말하기 전에 이미 몸이 나타내 보이고 있다. 이처럼 몸은 마음의 생각을 색으로 나타내 보이게 하고, 마음은 몸이 눈에 보이는 물질인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알려준다. 몸은 마음을 겉으로 보이게 하는 현상의 역할을 하지만, 마음은 몸의 모든 한정(限定)을 다 넘어서 있다. 즉
다시 ‘증도가’의 글귀로 되돌아 간다. “무명의 참성품이 바로 불성이요, 허깨비같은 빈 몸이 바로 곧 법신이로다. 법신을 깨달음에 한 물건도 없으니, 근원의 자성이 곧 천진불이라.” 무명의 중생이 곧 부처님의 성품이요, 허깨비 같은 부질없는 빈 몸이 곧 부처님의 법신이로다. 이 말은 앞 회에 우리가 누누히 강조한 애매모호성을 일컫는다. 흑백논리에 의거해서 보면, 지고지순한 부처님과 더럽고 누추한 중생은 결단코 동거할 수 없는 다른 세계에 속한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이 세상에 부처님과 중생이 한 곳에 동거하고 있다는 것이 불교의 가르침이다. 우리는 보통 부처님하면 아주 머나면 거리에 위치한 성스러운 지존이고, 우리와 같은 일반 중생은 도저히 부처님과 한 곳에 살 수 없는 죄인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지난 회에 말했던 것처럼, 세상의 사실이 근원적으로 애매모호하다는 것은 이 세상의 현상이기 때문에, 세상의 구원이 이원적 분별심에서 오지 않는다. 그래서 불교는 진/위, 선/악, 미/추, 성/속 등의 차이가 단지 두개의 이분법으로 이원화되어서는 안되고, 불이법(不二法)으로 읽어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그렇다고 저 두가지가 동일하다고 우기지 않는다. 여기에 불교적 사유의 오묘한 깊이가 깃들어 있다. 여기서 우리는 또한 부처님이 성도(成道)하시기 직전에 밤하늘의 반짝거리는 새벽별을 보신 후에 문득 우주의 철리를 깨달았다는 고사가 우리에게 와닿는다. 그 새벽별(금성?)이 반/짝거렸다는 것은 삼라만상이 불일이불이(不一而不二)의 현상으로 자신을 현시하고 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지 않는가? &n
불교가 얄팍하게 지능적인 장난을 치는 것을 알음알이라고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까닭도 우리가 지난 회에 보았듯이 불교의 반지능주의에 기인한다 하겠다. 그 동안 동서를 막론하고 인류의 문명은 지능위주의 사고방식을 중시하여 왔었다. 심리적 지능이 보다 더 정신화한 것을 우리는 지성이라 부른다. 지성이 아무리 세련화됐다 치더라도, 지성은 역시 지능의 산물로서 이성의 힘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다. 이성에는 과학기술적 이성과 사회도덕적 이성의 두가지 역할로 나누어진다. 서양의 철학은 신학과 과학기술적 이성의 약진을 키웠고, 동양의 유교철학은 사회도덕적 이성을 집중적으로 강화시켜 나갔다. 이성의 철학은 자연적 본능의 계열에 속하지 않고, 사회적 지능의 계열에 귀속하기 때문에, 이성은 사회생활을 영위하는 인간에게만 주
“무명(無明)으로 실제적인 성품이 곧 불성이요, 환화(幻化)인 공(空)한 몸이 곧 법신(法身)이로다.(탄허 번역) 법신을 깨닫고 나니, 한 물건도 없으니, 근원의 자성이 곧 천진불(天眞佛)이라.(성철 번역)” 영가대사의 이 말에 의거해서 우리는 잠시 철학적 사유를 펼쳐본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공자와 예수님의 가르침과 아주 다르다. 부처님은 자연적인 것을 인간 지혜의 근원적인 것으로 알려주고 있고, 공자와 예수님은 사회적인 것을 인간이 알아야 할 으뜸의 것으로 말한다. 즉 불교는 자연적 본능을 최고의 지혜로 생각하는데 비하여, 유교와 기독교는 사회적 지능을 최고의 진리로 간주하는 데에 있다. 유교와 기독교는 사회를 보호하고 지키는 그 가치로서의 사회적 선을 선양하는데 모든 노력을 경주하는데 비하여, 불교
우리는 증도가에서 도의 증득인 증오(證悟)가 존재론적 의미에서 해석되어야지, 문제의식의 해답으로서의 해오(解悟)의 수준에서 이해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말했다. 존재론적 의미에서의 이해는 존재자적인 의미에서와 달리 대상적 차원을 이미 초탈하여 어떤 대상의식을 떠난 상태를 지칭한 것이다. 어린 아기와 바보의 공통점은 다 같이 대상의식을 안갖고 있다는 것이다. 즉 대상을 보고서 무엇을 알게 되는 것이 대상의식이다. 우산을 들고 나오는 타인들을 보고서 비가 자주 오는 계절에 우리가 놓여 있음을 즉각 느끼는 것이 대상의식이다. 그러나 천진한 어린 아기와 바보는 이것을 모른다. 그러나 아기와 바보의 차이는 즉각 드러난다. 아기는 문자그대로 아기고, 바보는 아기가 아니다. 아기는 아무것도 모르고 웃지만, 바보의 웃
과학적 사실과 불교적 사실의 차이는 대단히 중요하다. 기독교는 과학적 사실 앞에서 곤혹스러워 하기도 하고 또 상충적인 갈등을 피하려고 하기도 한다. 그러나 불교는 생물학적 진화론을 피하지도 않고 오히려 반기기도 한다. 그리고 물리학적 역학이론을 공부하여 불교의 실상을 더 풍요하게 이해하는 계기로 삼으려 한다. 부처님이 가르치신 팔정도의 출발이 정견(正見)/정사유(正思惟)/정어(正語)로 시작하지 않는가? 이 세상의 우주적 사실을 바로 보고, 바로 생각하고, 바로 말하라는 것은 무조건 믿으라는 신앙제일주의의 선언과 아주 다르다. 과학적 사실은 제삼자의 위상에 서서 객관적으로 검증가능한 사실의 확증을 말하는 것이지만, 불교적 사실은 존재론적 사실의 가능근거를 가리킨다. 존재론적 사실이라고 하면 대단히 어렵고
증오의 도인과 해오의 철학자와의 차이를 기본으로 하여 지금부터 우리는 영가(永嘉)대사의 『증도가』의 본론을 음미해 보련다. 본문의 해석은 성철스님의 번역본을 기본으로 삼는다. 탄허스님의 번역을 참조할 때에는 그 출처를 밝히겠다. 원문은 원칙적으로 생략하고 필요한 경우에 한하여 인용한다. “그대 보지 못하였는가. 배움이 끊어진 하릴없는 한가한 도인은 망상도 없애지 않고 참됨도 구하지 않으니, 무명의 한 성품이 바로 불성이요, 허깨비 같은 빈 몸이 곧 법신이로다.” 영가대사가 증오한 것이 세수 31세였고, 열반에 드신 것이 39세였다고 하니, 대사는 근기가 최상근이어서 불지견(佛知見)에 일찍 도달한 것으로 보인다. 불지견에 이르기 위하여 오랜 각고의 세월을 통한 참선이 필수적이라는 말을 여기서는 할 필요가
지난 회에 증오와 해오의 수준 차이를 성철 스님의 강조점에 발맞추어 구분하였다. 해오는 부처에 대하여 자기 나름의 소화로 말하는 수준이고, 증오는 부처에 대하여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말하는 그 순간이 바로 부처의 말이 되는 차원이라고 말해도 좋으리라. 참고삼아 비유하자면, 노자와 공자 그리고 소크라테스, 예수는 진리를 말하였지, 그들이 진리에 대하여 말한 것이 아니다. 이점은 부처님도 마찬가지다. 이들은 다 한 결 같이 진리에 대하여 말을 한 것이 아니라, 진리를 증언했다고 보아야 하겠다. 영가(永嘉)대사의 ‘증도가’도 진리를 증언한 차원이라고 읽어야 하겠다. 본인도 잘 모르면서 제법 유식한척 뇌까리는 사이비 학자의 알음알이는 여기서 말하는 해오의 수준이 아니다. 해오는 알고자 하는 진리(
『증도가(證道歌)』는 당나라 8세기 초 유명한 육조 혜능(慧能)조사의 문하로 불리워진 영가(永嘉)대사가 손수 지은 ‘도를 증득한 노래’를 말한다. 불교사에서 혜능조사의 문하에 오대 산맥이 있었다. 이른바 남악 회양(南嶽 懷讓), 남양 혜충(南陽 慧忠), 영가 현각(永嘉 玄覺), 청원 행사(靑原 行思), 하택 신회(荷澤 神會) 등이 그것이다. 영가대사는 이 산맥 중의 하나이지만, 본디 육조 혜능으로부터 도를 인가받기 전에 천태종의 탁월한 고승이었다 한다. 그가 육조 혜능을 찾아 뵙고 깨친 도를 인증받고 『증도가』를 읊었지만, 그는 우수한 부처의 선근을 선천적으로 갖고 있었든지, 득도한 것이 세수 31세였다고 한다. 그가 열반에 든 것이 세수 39세(서기 713년)였고, 그 해에 또 육조조사도 입적했다고 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