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세시위 주도중앙학림 학생임시정부서 활동 독립투쟁 앞장이종욱 스님 변절오점으로 남아 김봉률 출옥 사진. 해인사 스님으로 3·1운동 이후 만주로 건너가 신흥무관학교를 졸업하고 국내에 잠입하여 군자금 모집 활동을 하다가 체포되어 진주 형무소에서 복역하였다.(왼쪽부터 백성원·김종률·임치) 불교계는 1919년 3·1운동이 발발하자 전국의 큰 사찰을 중심으로 만세 시위를 전개하였다. 3·1만세 시위는 3월 말 경이 되자 수그러드는 양상을 보였다. 3·1운동의 의의는 우리 민족이 일제의 무단통치에 항거하여 거족적인 저항운동을 전개하여 독립의 의지를 만천하에 선포하였다는데 있다. 3·1운동은 2백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참가하였고 전국 방방곡곡에서 만세 시위가 전개되었다.
기록 속 사찰시위 16곳 … 중앙학림학생 확산 주도시위 전 발각도 많아… 총독부의 사찰령 위력 발휘 이순재·김성암 등이 부평리 주민들과 함께 만세 시위를 전개했던 경기도 양주군 진접면 봉선사 전경. (사진제공=민족사) 나라가 망한 이후 사찰령 체제하에서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었던 불교계는 1919년 3·1운동이 발발하자 전국에서 호응하였다. 기록으로 전하는 만세 시위가 전개된 곳으로는 봉선사(경기도 광주)· 해인사(경남 합천)· 통도사(경남 양산)· 범어사(부산 동래)· 표충사(경남 단장)·동화사(대구)· 도리사(경북 선산)· 석왕사(함남 안변) 등 16곳이며, 이 밖에도 만세 시위는 전국에서 주요 사찰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그 가운데 비교적 규모가 컸던 해
범어사 소속 스님·학생 시위 주도… 31명 구속 옥고치러부설 명정- 지방학림 폐교… 금정중 남아 당시 행적기념 1917년 경 범어사 전경. 범어사는 우리나라의 사찰 가운데 비교적 일찍 개화문물을 받아들였다. 개화승 이동인이 범어사에 머물면서 일본을 왕래하였고, 1906년에는 명정학교를 설립하여 운영하였다. 재정적으로도 19세기부터 20세기 초반에 걸쳐 승려들이 갑계(甲契)·도종계(都宗契)·서청계(書廳契)·판청계(判廳契) 등을 운영하여 그 기금과 수익금을 사찰에 기부하였다. 신도들 사이에서도 미타계·지장계·나한계·칠성계·열반계 등이 운영되어 사찰 경제에 기여하였다. 이러한 재정적인 기반이 있었기 때문에 1912년에 경성에 임제종 포교당을 운영할 수 있었고 부산과
사찰서 독립선언서 3000여장 등사… 경남 곳곳서 배포 만세운동 후 만주로 흩어져 독립운동… 많은 희생 치뤄 1915년 무렵의 해인서 전경. 불교계의 3·1운동은 전국에 걸쳐 큰 사찰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만세 시위 기간은 대략 3월 초순부터 4월 하순까지였고, 장소는 주로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장터에서 장날 전개되었다. 그렇지만 불교계의 3·1운동에 관한 구체적인 자료가 많지 않아서 전모를 파악하기 어려운 점이 있다. 그런 까닭에 서술할 만한 자료가 남아있는 해인사·범어사를 중심으로 소개하기로 하고 여타 사찰의 만세 시위는 묶어서 그 대략을 서술하기로 한다. 일제시대에도 해인사는 법보사찰로서 30본사 가운데서도 재적 승려 수와 재정적인 면에서도 비교적 형편이
전국 주요 사찰에서 전개… 사찰령 폐지 운동으로 점화30본사주지 의도적 외면… 산중사찰 많아 지리적 한계 태화관에서 민족대표들이 독립선언을 하는 장면을 그린 기록화. 윗쪽 중앙에 있는 두사람 중 오른쪽이 만해. 1919년에 발발한 3·1운동은 20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참여하였고, 7,500여명이 넘는 사람이 희생된 일제시대 가장 큰 독립운동이었다. 3·1운동 발발 원인은 일제의 가혹한 탄압과 조선인에 대한 차별정책으로 조선민중들의 불만이 극에 달했다는 점이다. 여기에 동경 유학생들의 2·8선언을 비롯하여 1918년 11월부터 중국 상해에서 활동한 신한청년당의 활동 등 해외 유학생들의 활약이 또 하나의 요인이 되었다.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원
1917년 총독부에 의해 일본불교 시찰단 첫 파견 근대문명 선전하며 독립 의지 꺾고 친일파 양성 불교사찰단이 동경에서 동경불교호국단과 불교연합회가 증상사에서 주최한 한영회에서 촬영한 기념사진. 일제시대 불교계는 조선총독부의 지원을 받아서 일본으로 여러 차례 시찰단을 파견하였다. 시찰단에 참여였던 승려들은 주로 30본사 주지들과 불교학자, 언론사의 기자들이었다. 이들은 일본에 가서 무엇을 보았으며, 어떤 행동을 하였으며, 무엇을 느꼈을까. 조선총독부는 왜 승려들의 일본 방문을 지원하였을까. 이것은 불교계 일본 시찰단의 파견 목적과 직결되어있다. 총독부가 불교계의 인사들을 일본 시찰단으로 파견하는데 적극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던 것은 이들로 하여금 일본의 발전상을
1920년 불교 인재양성 위해 총독부 권유로 설립신상완·백성욱·김법린 등 걸출한 인재들 배출상해임시정부와 연결된 불교계 항일지사 배출구 당시 숭일동 지금의 명륜동 북묘 터에 있었던 중앙학림. 근대 불교계의 당면 과제는 포교·교육·역경사업이었다. 지금도 이 세 가지 사업은 다른 사업에 비해서 종단에서 역점을 두고 있다. 이 세 가지 사업은 형식은 다르지만 모두 하나로 연결된다. 세 가지 가운데 가장 중요한 사업은 포교 사업이다. 왜냐하면 불교의 목적이 깨달음을 통하여 해탈을 얻는데 있고, 모든 사람들이 그 목적을 이루어야 하기 때문에 교리를 전파하는 포교 사업이 우선이다. 불교계의 교육 사업은 유능한 포교사를 양성하기 위해서 필요하며, 역경사업은 어떤 방법으로
이회광-강대련-이능화 등이 친일 단체 결성 주도불교진흥회 최초 친일잡지 ‘불교진흥회월보’ 발간불교도 자발적 참여 부재로 별다른 활동 없이 해산 30본산연합사무소에서 개최된 불교진흥회 제1회 정기총회 모습. 친일파 문제는 많은 시비와 논란이 끊이지 않는 민감한 사안이다. 친일파란 개념을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부터 개인의 행적을 판단하는데 있어 여러 가지 정황을 고려해야 하는 복합적인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친일 단체는 설립 취지와 목적 그리고 구체적인 행위 나아가서 구성원의 성향까지 고려해서 판단할 문제이다. 먼저 친일파의 개념은 일제시대에 일본의 통치노선에 동조하여 식민정책을 찬양하고, 동족을 압박하여 침략전쟁에 참여할 것을 부추긴 반민족 행위를 저질렀던
각 사찰 내규 총독부가 일괄 초안…통치 편의 위해 작성수평적 사찰 관계 수직구조 변환…전쟁에 佛具 헌납 강요 30본산 연합사무소가 있었던 각황사 전경. 조선총독부는 1911년 사찰령과 사찰령시행규칙들 선포하고 이 법령에 따라 전국의 사찰 가운데 규모가 큰 30개의 사찰을 본사로 지정하고 주변의 크고 작은 사찰들을 말사로 배속시키는 30본사 체제를 확립하였다. 30본사 체제는 1924년에 전라남도 화엄사가 선암사의 말사에서 본사로 승격됨으로써 31본사가 된다. 30본사 체제의 성립으로 불교계는 30개로 분할되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총독부는 중앙에 불교계를 총괄할 수 있는 기관을 두지 않았다. 30본사 주지의 임면을 관할하고, 각 본사의 사법을 개별적으로
총독·지방관 인가 해야 본말사 주지 취임 가능“사찰령은 조선승려 박멸 위한 것” 불교계 저항30본사 체제 확립…불교의 관변화 빌미 제공 조선총독부 사사계(寺社係) 주임으로 사찰령 제정의 실무 담당자인 와 타나메 아키라(渡邊彰). (사진제공=민족사) 일본은 미국의 압력으로 문호를 개방하고 메이지유신(明治維新)을 단행하여 근대국가 체제를 수립하였다. 천황제 국가 체제를 확립한 일본은 1910년 무력을 앞세워 조선을 강점하고 민중들에게서 일체의 정치적 권리를 박탈하고 식민통치에 순응할 것을 강요하였다. 당시 일본은 근대 법치국가 체제를 확립하였기 때문에 조선 통치에도 메이지 헌법을 적용해야 했다. 그러나 조선에서 일본 헌법을 적용하게 되면 조선인의 권리와
1911년 송광사서임제종 탄생 1912년 서울에중앙포교당 설립 총독부 사찰령으로임제종 탄압 폐쇄 임제종 설립주역항일세력으로 진화 1911년 2월 11일 송광사에서 300여 명의 승려가 모여서 조선불교 원종과 일본 불교 조동종의 연합맹약에 반대하면서 설립한 임제종의 발기 취지서. (사진제공=민족사) 원종(圓宗)은 불교계의 공론을 거쳐 성립된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 종단이다. 종정 이회광은 1910년 10월 6일 전국 72개 사찰의 위임장을 받아 일본 조동종과 ‘연합맹약 7개조’를 성립시켰다. 조일불교 연합책동은 나라가 망한 지 39일 만의 일이었다. 이러한 이회광의 매종책동은 1910년 12월 경 원종종무원 서기에 의해서 통도사에 전해짐으로써 불교계에 알려
1910년 종정 이회광 일본 조동종과 ‘연합맹약’ 체결조동종에만 일방적으로 유리…사실상 불평등 조약1911년 정통성 회복위해 임제종 탄생…원종과 대립 1910년 조선불교중앙회소 겸 중앙포교소로 활용되었던 각황사 전경. 1908년 불교계의 대표 52명이 원흥사에 모여 원종이라는 종단을 성립시키고 종정에 이회광을 선출하여 부장 인선을 단행함으로써 종단의 면모를 갖추었다. 원종은 당면한 포교사업과 교육사업을 진행하고, 불교도들의 의견을 수렴하여 실천하기 위해서는 국가로부터 불교계를 대표하는 공식적인 기구라는 공인을 받을 필요성이 있었다. 원종종무원의 설립인가를 받기 위하여 종정인 이회광은 여러 가지 노력을 하였다. 1910년 4월 이회광을 비롯한 원종의 주요 인사
1908년 불교계 대표 52명 원흥사에 모여 원종 창립한성에 각황사 건립…이회광을 종무원장으로 추대日 조동종과의 연합 시도로 불교계 내부 저항 직면 왼쪽. 초대 원종 종무원장을 지냈던 이회광오른쪽. 원종 종무원에서 통감부에 제출한 신고서. 각황사를 종무원의 사무소 겸 포교소로 운영하겠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사진제공=민족사 조선조 세종 연간에 조계종·천태종·총지종은 선종으로 화엄종·지은종·중신종·시
한용운·권상로·이종욱 등 불교계 굵직한 인물 배출포교·외국어·측량·수학 등 근대 학문이 중요 과목불교사범·중앙학림·혜화전문 여러차례 이름 바꿔 근대적 교육제도를 도입하고자 하였던 불교연구회 설립취지서.(민족사 제공) #1906년 불교연구회가 설립 대한제국 시기 황실의 안녕을 기원하고 전국의 사찰을 통할하기 위한 목적에서 창건되었던 원흥사는 창립 2년 뒤인 1904년 관할기관이었던 사사관리서가 폐지됨으로써 그 기능을 상실하였다. 그로부터 2년 뒤인 1906년 불교계는 원흥사 안에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불교학교인 명진학교(明進學校)를 설립하고 새로운 시대를 열어갈 인재 양성 사업을 시작하였다. 명진학교의 설립 주체는 1906년에 창립된 불교연구회(佛敎硏究會)
까치마을 등 7월 전국서 잇따라 문 열어계곡명상·갯벌탐사 등 특색 아이템 ‘눈길’ 수련회의 계절 여름이다. 수련회를 여는 사찰 등 불교계에서는 방학을 맞는 어린이들을 위한 프로그램 기획과 행사준비, 접수로 여념이 없다. 오는 7~8월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될 어린이 여름 수련회는 올해도 많은 어린이들이 참여할 것으로 보인다. 사찰에서 실시하는 수련회는 참선과 명상을 통한 자신의 참모습을 되볼아 보는 계기가 되는 동시에 도심 속 콘크리트 세상에서 생활하는 어린이들이 자연과 하나 되는 체험도 할 수 있는 기회다. 이런 까닭에 방학 때 자녀들을 여름 수련회에 동참시키고자 한다면 프로그램을 꼼꼼히 살펴보고 선택하는 신중함이 필요하다. 올해는 참선, 발우공양, 차담, 예불 등 송광사, 해인사 등지에서 실시하는 일반
동국대학교 일산병원에서 예비 부모들의 출산 준비를 돕는 교육을 실시한다. 일산병원 산부인과는 7월 8일부터 5층 중강당에서 임신 24주 이상 된 부부를 대상으로 ‘2006년 부부 출산준비교실’을 개강한다. 이번 강의는 예비 엄마, 아빠들에게 교육과 연습을 통해 임신과 출산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제공하고자 마련됐다. 매주 토요일 오후 2시부터 진행하는 교육은 산부인과 전문의 박찬욱 교수의 ‘분만진행과정 이해, 오감태교’를 시작으로 4주간 잇따라 열린다. 강좌는 15일 ‘소프롤로지 분만(호흡)법 및 분만진통 완화법, 산전체조(요가)’, 22일 ‘모유수유’, 29일 ‘신생아 마사지 및 미술태교’ 등 전문 태교 강사진들의 유익한 강의와 분만간호 및 신생아 간호를 담당하는 간호사의 현장감 있는 설명이 뒤따른다.
전문적인 지식을 갖춘 우바이 양성에 앞장서고 있는 불교여성개발원(원장 김인숙)은 지난해에 이어 ‘2006년 여성 리더쉽 기본교육’을 실시한다. 불교여성개발원이 주관하고 강남 봉은사가 주최하는 리더쉽 교육은 오는 8월 31일부터 2달간 봉은사 보우당에서 열릴 예정이다. 매주 목요일 오후 1시에 시작하는 이번 교육은 총 10강의 커리큘럼이며, 특히 이 가운데 1강은 1박 2일 워크숍이다. 수업은 1시간 30분으로 진행되며 10명씩 한 조가 되어 30분간 조별 토론시간을 가질 계획이다. 정원은 50명이며 수강료는 3만원. 불교여성개발원은 “교육 이수자를 대상으로 한 달에 1번씩 『승만경』등 여성 불교에 대한 경전 강의 등 지속적인 교육을 열 것”이라고 밝혔다. 02)722-2101 최호승 기자
사사관리서 두고 관계법 ‘국내사찰현행세칙’ 제정봉건틀 못 벗었지만 불교계 자율권 보장은 큰 의미왜색불교 대응 위한 대한제국 마지막 노력 시각도 1902년 동대문 밖에 창건된 원흥사 전경 (사진제공=민족사) 1895년 일본 일련종 승려 사노 젠레이(佐野前勵)가 제출한 건백서에 의해서 승려들의 도성출입금지가 해제되었다. 이것은 조선왕조 정부가 불교의 공식적인 포교를 허용하였다는 뜻이다. 그로부터 7년 후인 1902년 동대문 밖에 원흥사(元興寺)라는 사찰이 창건되었다. 원흥사의 창건 연대에 대해서는 2가지의 학설이 있다. 타카하시 토오루(高橋亨)는 『이조불교(李朝佛敎)』에서 원흥사의 창건 연대를 1899년으로 서술하였고, 이능화(李能和)는 『조선불교통사(
지난 6월 14일 자양복지관 지하강당에서 명상에 잠겨 있는 나란타 학교 학생들. 서울시 교육청으로부터 공식인가를 받고 올 3월 개교한 조계종 사회복지재단 산하 자양사회복지관의 ‘나란타 대안학교’와 사회복지법인 승가원 산하 삼전사회복지관의 ‘아란야 대안학교’. 불교계 복지관 두 곳에서 1년의 위탁기간 동안 운영되는 대안학교가 문을 연지 3개월. 정규학교교육에 적응하지 못하거나 학교폭력으로 학업 중단 상황까지 내몰렸던 중학생들이 불교 색채가 가미된 특성화 교육에 ‘재미’를 찾아가고 있다. 나란타 학교는 16명의 선생님들이 국어, 영어 등 6과목의 보통교과와 함께 매주 요가, 미술심리, 조리실습, 봉사활동, 문화현장체험 등의 대안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특히 일
‘경국대전’에도 도성출입 금지 없어연산군-현종 때 불교 극심한 탄압동학군, 정부에 승려 도성출입 요구일련종 전파 목적 일본 주도 아쉬움 도성출입 금지 해제 전후 시기의 남대문 사진. (사진제공=민족사) #조선은 왜 승려의 도성출입 금지시켰나. 고려왕조를 타도하고 성립된 조선왕조 정부는 유교를 국시로 정하였다. 고려시대 불교는 국교의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국시가 유교로 바뀌었다는 것은 불교계의 탄압은 피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런 까닭에 조선왕조 정부의 불교 탄압은 세월이 흐를수록 강화되어 나타난다. 16세기 말에 완성된 경국대전에는 승려들의 도성출입을 금하는 내용이 없다. 다만 승려가 되려고 하는 사람은 3개월 안에 선종 혹은 교종에 신고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