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도의 길 위에 제 몸을 소신공양하여 바치겠나이다. 주먹 하나, 팔 하나, 몸뚱어리 하나 불태워 구도의 제단에 바치지 못하겠나이까.” 노령산맥이 호남으로 뻗어가다가 마지막에 갑자기 용트림하듯 솟구치게 한 산이 바로 대둔산이었다. 따라서 대둔산은 충남 금산과 전북 완주의 경계 지점에서 금강산의 한 부분이듯 절경일 수밖에 없었다. 전북에는 기이한 바위봉우리를, 충남에는 울창한 숲과 계곡을 연출하고 있는 것이었다. 산길을 힘겹게 달리던 시외버스는 어느 새 배티재를 넘고 있었다. 이제 십여 리만 더 가면 태고사 초입인 사하촌이 나올 터였다. 좀 전에 일타의 잠을 깨웠던 버스의 남자 조수가 다가와 말을 붙였다. “스님, 지 고향도 태고사가 있는 진산면 행정리구만요. 태고사에 계신가 봐유.”“아닙니다. 저는
“마땅히 머무는 바 없이 그 마음을 일으킬지어다.(應無所住 而生其心)“아, 처처가 청산이라더니 법신(法身) 아닌 것이 없구나.” 일타는 선원의 하안거 해제에 이어 강원이 방학을 하자, 마치 자신도 선객인 양 지체하지 않고 걸망을 매고 일주문을 벗어났다. 일타는 신평에서 물금역으로 가는 완행버스를 탔다. 물금역에서 경부선을 타고가다 대전역에서 내려 금산으로 가는 버스를 갈아탈 작정이었다. 며칠 전까지는 막내외삼촌 진우가 있는 전주 법성원으로 가려고 했으나 달포 전에 금산의 대둔산 태고사에서 외할아버지 추금이 입적했기 때문이었다. 추금은 태고사 조실로 있었는데, 그곳 산중에서 자신의 몸을 스스로 다비하는 소위 자화장(自火葬)으로 이승의 인연을 거둬들였던 것이다. 일타는 방학을 하고 나서야 뒤늦게 추금이
정찬주 장편소설 삽화·송영방 “몸은 물거품과 같고 목숨은 바람 앞의 등불과 같나니, 만약 진실한 경계가 아니면, 어찌 두려워하지 아니하며 어찌 삼가지 않을 것인가. 진중하고 또 진중할지어다” 통도사 선방은 보광선원이었다. 하안거를 해제하자 선방 수좌들이 일주문 너머로 바랑을 매고 하나 둘 빠져나갔다. 일타는 부러운 눈으로 수좌들의 만행을 떠나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송광사에서 만났던 성철의 말이 문득 떠올랐다. ‘중이 가는 길은 혼자 가는 길이다.’ 일주문을 빠져나가는 수좌들의 뒷모습을 보면서 상념에 잠겨 있는 일타의 등을 누군가가 두드렸다. 그제야 일타는 강원에서 함께 공부하는 학인을 돌아보았다. “말뚝스님, 무얼 넋을 잃고 쳐다보시오.”“스님, 내가 문제 하나 낼까요.”“말해
“수행자들이 차를 마시는 것은 다만 혀를 즐겁게 하기 위해 마시는 것이 아니지. 지금 여기서 마시는 차도 반드시 득도하겠다는 발심의 차가 되어야 하네”『서장』과 『절요』의 강의가 끝나는 날 오후였다. 일타는 한여름의 더위도 식힐 겸 십여 명의 학인을 따라 통도사 8경 중 하나인 자장동천으로 나갔다. 이른바 강사 앞에서 책을 통째로 외우는 책걸이 행사는 아니었으나 여러 학인이 제의해서 강사를 좌장 삼아 세족(洗足)을 나갔던 것이다. 걸망에 넣고 간 다관과 찻잔을 너럭바위에 풀어놓고 솔방울과 솔가지를 주워와 불을 피웠다. 주전자의 찻물은 자장암으로 올라가 길어온 샘물이었다. 찻물이 끓기 전부터 학인들은 개울물에 발은 담근 채 다담(茶談)부터 나누었다. “강사스님, 좋은 차시(茶詩) 한번 들려주십시오.” 그
정찬주 장편소설 삽화·송영방 “인생은 연극이다. 중은 중의 배역을 잘해야 하고, 속인은 속인의 배역을 잘해야 한다. 사바세계에 왔으니 근심 걱정 놓아버리고 한바탕 멋들어지게 살아라.” 경봉의 법문은 대중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만큼 울림이 컸고 감동을 주었다. 법문을 들은 산내 암자의 수좌나 신도들이 극락암을 내려가지 않고 경봉이 머문 방 앞에서 서성거렸다. 일타도 방 앞에서 먼저 들어간 사람들이 나오기를 기다렸다. 축축한 바람이 또 불어오더니 멎었던 봄비가 다시 한두 방울씩 내리기 시작했다. 방문을 활짝 열어 놓았으므로 방 안의 풍경이 다 드러나 보였다. 경봉은 자신을 만나러 온 사람들에게 시자가 우려 온 차를 일일이 따라 주고 있었다. 수좌들과 주고받는 얘기에는 긴장이 감돌았다. 한
정찬주 장편소설 삽화·송영방 “공기 속의 전기와 전자는 사람에게 통하고, 나무에게도 통하고, 돌이나 물에도 통하고, 삼라만상 어디든 통하지 않은 곳이 없는데 불법의 진리 또한 그렇다.” 서울 선학원에서 『금강경』과 보조국사의 『수심결』을 법문하던 경봉이 극락암으로 내려왔다는 소식이 일타의 귀에도 들려왔다. 선학원은 광복 전부터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이었던 용성의 가풍을 이어온 도량이었는데, 조선불교를 지키는 거점이나 다름없는 곳이었던 것이다. 일타는 반가운 마음에 강원의 수업이 끝나자마자 통도사에서 십여 리나 떨어져 있는 극락암으로 올라갔다. 봄비가 내린 뒤끝이었으므로 산길이 촉촉하게 젖어 있었다. 나뭇가지에는 아직도 빗방울들이 매달려 보석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갠 하늘에는 흙을 문 제
정찬주 장편소설 삽화·송영방 “한 생각 나고 한 생각 꺼지는 것이 생사(生死)이며, 한 숨 내쉬고 한 숨 들이쉬는 것이 생사이다. 생사의 호흡지간에 사는 사람이 어찌 위태롭지 않다고 하는가” 속리산 복천암에서 통도사로 돌아온 일타는 바로 강원으로 들어갔다. 통도사 불교전문강원에 입학한 후 일타는 틈만 나면 사리탑으로 올라가 탑돌이를 하며 언젠가 득도하여 중생을 제도하겠다는 초심을 다졌다. 강의가 없는 그날도 일타는 지눌 보조국사가 지은 『계초심학인문』을 외면서 사리탑을 돌았다. ‘무릇 처음 발심한 사람은 반드시 악한 벗을 멀리하고 어질고 착한 이를 가까이해야 하며, 5계와 10계 등을 받아서 잘 지키고 범하고 열고 닫을 줄 알아야 한다. 다만 금구성언(金口聖言)에 의지할지언정 용렬한 무리들
정찬주 장편소설 삽화·송영방 “노스님, 구름내(雲川) 고향으로 가시겠습니까”“구름내는 뭐하러 가나. 청산에 흰 구름 나르고 맑은 물이 흐르는 곳이면 다 내 고향이다” 혜인스님이 선방으로 들어가고 난 후 혜각과 고명인은 잠시 정혜사 마당에서 서성거렸다. 바로 승용차로 내려가기에는 뭔가 아쉬운 느낌이 들어서였다. 무언가 더 할일이 있을 것 같았고, 어딘가 더 들러야 될 것 같아서였다. 힘들게 산 정상까지 올라왔다가 그냥 내려간다는 것이 왠지 허전했다. 그래서 혜각과 고명인은 마당가에 놓인 긴 의자에 앉아 잠시 가을햇살을 쪼였다. 잠시 후, 고명인이 먼저 말문을 열었다. “만공스님께서는 어느 방에서 거처하셨습니까.”“아! 조실채 말입니까.” 혜각이 그제야 더 들러야 될 곳이 생각났다는 듯이 무릎
정찬주 장편소설 삽화·송영방 “제가 남들에게 들은 얘기를 가지고 누구누구는 어떻고 어떻다고 비평을 하면 처음에는 듣는 체하시다가 나중에는 읽던 책의 글귀로 흥얼흥얼 콧노래를 부르시곤 했어요. 그러면 더 이상 말씀드릴 마음이 사라져요” 고명인은 기둥에 등을 기대고 마루 끝에 앉아 상념에 잠겼다. 자신이 왜 정혜사 요사채까지 와 있는지 문득 정리해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이상하고 분명한 사실은 미국에 벌려놓은 사업들이 요 며칠 동안 자신과 무관한 일처럼 까마득히 멀어져버렸고, 특별한 이유 없이 마치 어머니의 영가에 홀린 듯이 일타스님의 흔적을 좇고 있다는 점이었다.자신이 해인사를 찾아가게 된 이유는 한때 불자였던 어머니의 영가를 위한 것이었지만 이제는 일타스님의 입적 주기 때마다 스님이
정찬주 장편소설 삽화·송영방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면 저 인간 세상은 더 보잘 것 없게 보일 것이다. 점점 작아졌다 하나의 희미한 점으로 보일지도 몰랐다” 응민을 ‘방울대사’라고 부르던 만공도 세연(世緣)을 다하는 날이 왔다. 1946년 10월 20일이었다. 만공은 수덕사 선방인 정혜사 밑에 전월사(轉月舍)를 지어 머물고 있었는데, 갑자기 시자더러 목욕물을 준비하게 했다. “이제 그만 달을 굴려야겠다. 목욕물을 떠오너라.” 달을 굴리지 않겠다는 것은 전월사를 떠나겠다는, 이승의 옷을 벗겠다는 의미나 다름없었다. 전월사란 ‘달을 굴리는 집’이란 뜻이기 때문이었다. 가을이 깊어가고 있었다. 아침저녁으로는 무서리가 내리고 찬바람이 불었다. 시자는 즉시 솥에 물을 붓고 솔가지를 꺾어 아궁이에
정찬주 장편소설 삽화·송영방 “한 생각에 검은 머리 한 다발 끊는 일 아까울 것이 없나이다. 이 세상 모든 것 다 버릴 것인데, 구할 것 많은 복잡한 세상으로부터 벗어나 부처님의 세계에서 법의 꽃을 피우는 일은 진실로 그 가치가 무한합니다 ” 가을비가 오려는 듯 차창에 빗방울이 날벌레처럼 붙기 시작했다. 고명인은 브러시를 작동하여 빗방울을 닦아냈다. 그러자 시야가 멀리 드러났다. 추수가 끝나버린 들판은 언제 보아도 황량했다. 예전에는 움막 같은 볏단들이 들판을 지켰는데, 지금은 기계가 추수를 하면서 알곡만 챙기고 볏짚은 잘게 간 뒤 논에 뿌려 썩히는 모양이었다. “볏짚이 필요해서 마을로 나가 봤지만 구하기 힘들더군요. 소를 기르는 농가에서 다 가져가 버렸고, 남은 것들은 기계로 갈아서 논
정찬주 장편소설 삽화·송영방 “세상 어디고 간에 선방 아닌 곳이 없었다. 머슴이 코를 골며 자는 골방이 선방이고, 애통하게 울부짖는 초상집이 선방이고, 폭우에 쓰러진 벼를 일으켜 세우는 논이 선방이고, 폭우가 할퀴고 간 끊어진 다리를 복구하는 현장이 바로 선방이었다 ” 일타는 하안거를 해제한 날 송광사 경내를 한 바퀴 돌았다. 감로암으로 올라가 원감국사 비를 돌며 효봉에게 탄 화두 간시궐을 중얼거렸다. 어느 할머니 신도는 허공을 향해 간시궐을 외는 일타를 보더니 도리질을 하며 손사래를 쳤다. 젊은 수좌가 허기 져 간식을 달라고 중얼거리는 줄 알았던 것이다. ‘간식을, 간식을.’ 그러나 일타는 하안거 동안 화두를 타파하지 못한 분심이 일어 ‘간시궐’을 외고 있는 중이었다. 일타는 계곡물 소리
정찬주 장편소설 삽화·송영방 “효봉은 죽비를 들어 자신의 손바닥을 탁탁 치면서 ‘시심하’가 아니라 ‘시심마’라고 자세하게 가르쳐 주었다. 심마(心 )는 중국말 사투리로 ‘뭣고’이니 시심마는 ‘이 뭣고’가 된다는 것이었다 ” 소문대로 35세의 성철이 송광사 삼일암 선방에서 하안거를 나려고 왔다. 멀리서 온 탓인지 떨어진 짚신에다 낡은 바랑을 맨 모습은 영락없이 걸사였다. 그러나 그의 걸음걸이는 자신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선방 대중들이 공양 시간에 모여 수군거렸다. “철 수좌가 왔다.”“철 수좌는 불경도 밝아 팔만대장경을 거꾸로 외우는 분이다.” 선방 대중 가운데 나이가 가장 어린 일타는 성철을 외경심으로 맞이했다. 성철이 풍기는 분위기에 압도되어 ‘나도 이번 하안거에 일대사를 해
정찬주 장편소설 삽화·송영방 “중노릇 잘해야겠다는 신심이 솟구쳤다. 그것을 불가에서는 결코 무엇에도 흔들리지 않는 ‘말뚝신심’이라고 했다. 일타는 송광사 정랑에 똥만 싸고 가는 수좌가 되지 않겠다고 이를 악물었다 ” 송광사에는 금강산에서 오도를 한 효봉이 있었다. 효봉은 송광사 삼일암 선방에서 조실스님으로 머물면서 선방 수좌들을 지도하고 있었다. 영천이 송광사를 가는 것은 일타를 효봉에게 소개해 주기 위해서였다. 일타 역시도 참선을 하겠다고 통도사 사리탑에서 스스로 맹세하였기 때문에 송광사 삼일암 선방에서 첫 안거를 나고 싶었다. 일타의 생애 중 선(禪)의 길로 들어서는 첫 안거인 셈이었다. 송광사는 보조국사 이후 16국사를 배출하였다고 해서 승보종찰(僧寶宗刹)이라고 불렀고, 해인사는 팔만대
정찬주 장편소설 삽화·송영방 “팔만사천 경전 다 외울 것 없이 오관게만 실천해도 불(佛)을 이룰 수 있을 것이다. 공양할 때마다 오관게를 외우니 우리 불문이 얼마나 좋은 곳이냐 ” 1945년.해방이 되고 나서 두 달 뒤 통도사에서는 주지 선거가 있었다. 해방 후의 혼란한 격동기를 헤쳐 갈 주지를 뽑는 중요한 선거였다. 산중 대중들은 단 한 사람의 반대도 없이 대강백 고경을 만장일치로 선출했다. 공과 사가 분명하고 수행자로서 흠결이 적은 고경이 누구보다도 적임자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고경은 거듭 사양을 했다. 통도사 고승과 학인들은 하나같이 고경이 주지가 되기를 바랐지만 고경은 타협할 여지를 주지 않았다. 일타는 그러한 고경의 마음을 잘 알고 있었다. 오직 불경을 좋아할 뿐 권세 ‘권(權)’
정찬주 장편소설 삽화·송영방 “무얼 오고 가는 것을 보려고 하느냐. 그것도 상(相)에 집착하는 것이니 상관하지 말거라. 정녕 대중들이 나를 찾거든 동쪽 하늘을 보라고 일러라.” 혜각은 절상대에 앉아 잠시 좌선하는 자세를 취했다. 가만히 눈을 내리감더니 두 팔을 단전에 모으고 입정에 드는 것이었다. 고명인도 혜각을 따라 앉아 좌선을 했다. 난생 처음 해보는 좌선이었지만 자신을 고요한 데 두는 수련이란 생각이 들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시간과 공간이 순식간에 사라져버린 듯했다. 고명인은 혜각이 눈을 뜨고 어깨를 좌우로 흔들고 있을 때에야 자신의 자세를 허물어뜨렸다. “참선을 이렇게 하는 것입니까.”“화두를 들지 않았으니 참선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한 걸음도 떼지 않고 있는 자체도 수행이라 할
정찬주 장편소설 삽화·송영방 “출가한 후에도 머릿속은 저잣거리의 생각들로 들끓고 있는 수행자가 많습니다. 그런 승려를 출가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반대로 저잣거리에 있으면서도 가슴에 청산을 품고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이 바로 참된 출가자가 아니겠습니까.” 백련암 마당에 이르자 어디선가 나타난 까마귀가 까악까악 하고 솔숲 너머로 날아갔다. 암자는 기도객이 없어 몹시 고요했고, 까마귀 울음소리는 더욱 날카롭고 크게 들렸다. 고명인은 혜각이 던진 화두를 푸느라 ‘법안의 옹달샘’을 찾았고, 혜각은 곧장 관음전으로 가 엎드렸다. 혜각에게 관음전의 관세음보살은 특별한 의미가 있었다. 혜각은 바로 일어나지 않고 엎드린 채 절박했던 그때를 떠올렸다. 부도 난 회사의 문을 닫고 가방 속에 수
정찬주 장편소설 삽화·송영방 “인생이란 거추장스럽고 보잘것없는 달팽이집 같은 것에 갇혀 웃고 울며 꿈꾸고 사는 일이 아닐까.” 혜각이 앞장서서 백련암 가는 산길을 걸어 오르다 낙엽이 우수수우수수 지고 있는 느티나무 아래서 고명인에게 물었다. “고 선생은 일타 큰스님의 무엇이 궁금합니까.”“여러 가지가 있습니다.”“아, 알겠습니다. 신도들도 대부분 그러합니다. 첫 번째가 일타 큰스님의 가족 41명이 출가한 사실을 두고 불교사에 전무후무한 일이라며 다들 놀라지요.”“사실, 그렇지 않습니까.”“물론 그렇습니다. 그러나 저는 신비화하거나 화젯거리로 삼는 것에 반대합니다.”“왜 그렇습니까.”“출가라는 것도 인간의 일입니다. 인간의 일을 가지고 출가자의 숫자에 연연해서 망상을 피워서는 안 된다는 겁
정찬주 장편소설 삽화·송영방 불교에는 본질적으로 권유라는 것이 없습니다. 부처님도 제자들에게 무엇을 강요한 적이 없었습니다. 진리마저도 선택의 여지를 주었습니다.불교는 자유의지를 존중할 뿐입니다. 삼생(三生)을 들여다보았다는 일타스님. 과거와 현재, 미래의 자기 모습을 볼 수만 있다면 무엇이 불안할 것인가. 친가 외가 할 것 없이 41명 모두가 출가하였다는 일타스님의 가족. 불문(佛門)의 무슨 마력에 이끌려 세속의 행복을 버리고 전 가족이 출가했던 것일까. 자신의 손가락을 거리낌 없이 태울 수 있었던 일타스님. 바늘만 찔려도 아픔을 참지 못해 비명을 지르는데 무엇이 불의 고통을 견디게 하였던 것일까. 고명인은 갑자기 일타스님이 누구인지 알고 싶어졌다. 일타스님의 가족이 보여 주었던 불가사의함
정찬주 장편소설 삽화·송영방 몸은 물거품과 같고 목숨은 바람 앞의 등불과 같나니, 만약 진실한 경계가 아니면 어찌 두려워하지 아니하며 어찌 삼가지 않을 것인가. 김사의는 고경의 추천으로 바로 중학교에 입학했다. 학교의 정식 이름은 통도사사립중학교였다. 고경은 중학교에서 한문을 가르치는 교사이기도 했다. 그러니 고경은 절집의 은사요, 공부하는 데 뒷바라지하는 학부형이요, 한문을 가르치는 교사인 셈이었다. 고경의 뒷바라지는 남달랐다. 시골 마을 아이들이 공납금을 내지 못하여 쩔쩔맬 때도 김사의는 그런 걱정하지 않고 공부에만 전념할 수 있었다. 다른 아이들이 무명바지 저고리에 검정 고무신을 신고 다닐 때도 김사의는 대구나 부산에서 사온 고급 운동화에 반듯한 학생복을 입고 다녔다. 다른 아이들이 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