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만 하더라도 ‘오죽하면 목숨을 끊을까’라고 말하던 것이 이젠 ‘그랬군’으로 바뀌었다. 심지어 ‘자살 신드롬’이라는 신종어가 탄생할 정도니 자살에 대한 기준이 오묘해진지 오래다. 법보닷컴이 지난 8월 21일부터 28일까지 ‘자살을 생각해 본적이 있었습니까’라는 설문조사를 실시한 결과 응답자 93명 가운데 78.5%인 73명이 ‘생각해 본적이 있다’고 답변했다. 이는 하루가 멀다하고 자살 소식이 언론매체나 영상매체로 알려지면서 ‘자살’에 대한 개념이 무너지고 있는 것으로 분석됐다. 신체발부수지부모(身體髮膚受之父母)라하여 조선시대 단발령에 맛서 극렬하게 싸우던 최익현을 비롯한 조선시대 선비들의 의식은 요즘 사회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그리고 ‘생각해보지 않았다’라고 답변한 사람은 21.5%(20명)로 나
개호(蓋護)라는 이는 중국 산양(山陽) 사람으로 옥에 갇혀 죽게 되었습니다. 사흘 낮 사흘 밤을 마음에 조금도 쉴 틈 없이 관세음보살의 이름을 불렀더니 곧 관세음보살이 광명을 내어 그를 비추셨습니다. 이어 쇠사슬이 벗겨지고 옥문이 열려 광명을 찾아 그 곳을 떠나 이십 리를 갔더니 그제서야 광명이 멎었다고 합니다.(『응험전』, 『관음의소』에서 재인용) 1968년에 입적하신 금오(金烏) 대선사께서 젊었을 때의 일입니다. 1920년대 초기 금오 스님은 당대의 선지식인 수월스님을 뵙고 지도를 받으려고 만주 봉천땅으로 향했습니다. 그런데 러시아 땅에서 공교롭게도 스님은 도둑이라는 누명을 쓰고 옥에 갇히고 말았습니다. 결백을 주장 해보았지만 모진 고문만이 가해졌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어찌된 일인지 러시아 경찰들
‘한국종교공동체연대’가 곧 출범한다고 한다. ‘한국의 대표적인 종교공동체들이 대립과 갈등을 치유하는 공동체 세상을 만들기 위해’ 손을 잡는다고 한다. 불교계에서는 도법, 법륜 두 스님이 발기인으로 나섰다. 매우 의미 있고 새로운 작업이며 자랑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가슴이 헛헛하다. 이런 기분 좋은 소식과 함께 좋지 않은 소식이 올랐다. 그것은 다름 아닌 꽃동네 오웅진 신부가 국고보조금 횡령으로 불구속 기소되었고 금란교회 김홍도 목사도 공금횡령으로 구속되었다는 소식이다. 불교계에는 범어사 전 재무국장 스님이 국고보조금 횡령으로 징역3년의 중형을 선고받은 것이 지난해 말의 일이다. 이런 범죄행위는 4바라이죄로 불교공동체에서 영원히 추방되는 멸빈에 처해져야 하는 것임에도
대부분의 네티즌 불자들은 현 불교방송의 구성과 내용에 만족을 느끼지 못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법보닷컴’이 8월 27일부터 9월 4일까지 ‘불교방송(BBS)의 구성과 내용에 만족하십니까’라는 설문조사를 실시한 결과, 응답자 79명 가운데 전체 51.9%(41명)가 ‘만족하지 않는다’고 답변했다. 또 32.9%(26명)가 ‘그저 그렇다’고 답변했다. 반면 ‘만족한다’는 15.2%(12명)에 그쳤다. 이 같은 결과는 본지가 지난 7월 16일 보도한 바와 같이 불교방송에는 찬불가 등 불교적인 내용을 담아내는 프로그램이 저조하기 때문인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또 ‘한참 들어야 불교방송인 것을 알 수 있다’, ‘불교음악을 자주 선곡해 들려달라’는 기타 의견 등이 게재돼 불자들은 불교방송에서 찬불가, 불교음악 등 불교
보시를 해보셨습니까? 어떤 것들을 베푸셨습니까? 세상에서 가장 손쉬운 보시는 따뜻한 말 한마디 건네는 일일 것입니다. 돈도 안 들고 그다지 힘도 들지 않습니다. 하지만 남에게 말 한 마디 건네는 일이 생각만큼 쉽지는 않습니다. 입술만 몇 번 달싹거리면 가능한 일이건만 아무래도 말은 그냥 말이 아니라 마음이 담기는 것인가 봅니다. 마음이 따라주지 않으면 ‘아’ 소리 하나 제대로 내지 못하는 존재가 바로 우리들 인간입니다. 그에 비하면 차라리 재물의 보시가 쉽습니다. 좀 아까운 생각이 들긴 하지만 ‘나에게는 또 생길 테니…’, ‘또 벌면 되지…’ 하는 마음이 들면 제법 큰돈도 흔쾌히 내놓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만큼 재물의 보시에는 마음이 담기기가 쉽지 않습니다. 심지어는 ‘돈으로 때우면
만일 또 삼천 대천 국토에 도둑이 가득 찬 속을 한 상인의 우두머리가 여러 상인을 이끌고 귀중한 보물을 가진 채 험한 길을 지나갈 때, 그 중에 한 사람이 말하기를, ‘여러 선남자들이여, 무서워말고 두려워 말라. 그대들은 진심으로 관세음보살의 이름을 부를지니라. 이 보살이 능히 중생들의 두려움을 없애 주리니, 그대들이 이 이름을 부르면 이 도둑들을 무사히 벗어나리라’하고, 이에 여러 상인들이 이 말을 듣고 모두 소리를 내어 ‘나무 관세음보살’ 하니 곧 그 난을 벗어났느리라. 무진의야, 관세음보살마하살의 위신력이 이와 같이 훌륭하니라. ----------------------------------------------------------------------------------- 도둑의 난 즉
“무서워말고 두려워 말라.” 읽을수록 저에게 힘을 주는 대목입니다. 두려움이 엄습하거든 큰소리로 관세음보살을 외치라는 이 대목은 『보문품』의 절정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밖에서 오는 위협이나 고통 그리고 자신의 내부에서 일어나는 온갖 두려움도 오로지 ‘관세음보살’이라고 크게 외치면 소멸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관세음보살은 우리들 마음속의 두려움을 없애주어 떳떳하게 그 대상과 맞서도록 일러주는 부모와도 같은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틈새를 일러주고 도망갈 길을 열어주고 숨통이 트이게 해주는 존재. 이런 관세음보살을 가리켜 석가모니 부처님은 ‘시무외자[施無畏者]’ 즉 중생에게 두려움을 없애주는 보시를 베푸는 자라고 딱 집어서 일러주십니다. 앞서 우리는 두 가지의 보시에 관해 경전들을 살펴보았습
또 만일 중생이 음욕이 많더라도 관세음보살을 항상 생각하고 공경하면 곧 음욕을 여의게 되며, 혹은 성내는 마음이 많더라도 관세음보살을 생각하고 공경하면 곧 그 마음을 여읠 수 있으며, 혹은 어리석음이 많더라도 관세음보살을 항상 생각하고 공경하면 곧 그 어리석음을 여읠 것이니라. 무진의야, 관세음보살이 이런 위신력으로 이롭게 함이 많으니 중생은 마땅히 마음으로 항상 생각할 것이니라. --------------------------------------------------------------------------------- 참 중요한 개념이 등장했습니다. 바로 ‘관세음보살을 항상 생각하라’ 즉 염불(念佛)이라는 말과 ‘삼독심’입니다. 염불은 부처님을 생각하는 것이니 여기서는 염보살이라고 해
간혹 불자들 중에는 “기도하는데 무슨 효과를 바라고 하는가?”라든가, “나는 그저 내 마음을 평안하게 하려고 염불할 뿐인데…”, “한 생각 잘 지키면 부처님인데 아직도 뭘 그리 바라는 게 많은가?”라는 이도 많습니다. 하지만 우린 목적이 있어서 기도를 하고 염불을 하는 것입니다. 그 목적은 작게는 세속에서의 정당한 행복을 이루는 것이요, 나아가서는 부처님을 친견하는 것이고, 내 마음을 스스로 맑게 하는 것이며, 궁극적으로는 내가 바로 부처가 되려는 것입니다. 불자가 마음에 지니는 이런 목적을 서원(誓願)이라고 달리 표현해봅시다. 마음의 번뇌를 씻고 무명을 제거하여 밝고 진실한 경지와 하나되는 일이 내 개인적인 서원이라면, 밖으로 눈을 돌려 이 모든 생명체가 나와 똑같은 경지를 얻기 원하는 것이 또 하
“물 좀 주십시오.” 아난 존자는 우물가의 한 여인에게 이렇게 말을 건넸습니다. 여인은 슬쩍 아난 존자를 훔쳐본 뒤에 답하였습니다. “저는 천하디 천한 계급입니다. 저와 같은 계급의 사람이 어찌 스님같은 분에게 물을 드릴 수 있겠습니까?” 낮은 계급의 사람은 자기보다 높은 사람과 마주 서서도 안되고 바라보아도 안되며 제 손으로 물건을 집어서 줄 수도 없었던 것이 엄격한 인도 계급사회의 법칙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미 세속의 그런 잣대를 벗어버린 출가자요, 한없이 인자한 아난 존자가 아닙니까? “저는 물이 먹고 싶습니다. 물을 주십시오.” 차분하고 담담한 어조로 아난 존자는 거듭 물을 청하였고 그런 태도에 여인은 그만 자신도 모르게 물을 떠서 존자의 발과 손을 적셔 드리고 마실 물을 올렸습니다.
아무리 옷을 잘 차려입었지만 거울에 비친 모습이 추하게 보이십니까? 편안한 침대에 누웠지만 잠을 이루지 못하십니까? 이성을 잃어 선과 악이 뒤바뀌어 보이며 끝내 스스로에게 해가 되는 일을 저질렀습니까? 어렵게 모은 재산을 잃고 송사에 말려들었습니까? 끝없는 노력으로 얻은 명성을 잃었습니까? 친구와 일가 친척들이 당신을 피하고 있습니까? 혹시 당신에게 이런 징후가 보인다면 그것은 바로 당신의 마음이 분노의 검은 회오리에 휘감겼음을 의미합니다.(『중아함 원가경』) 전세계에서 유일하게 우리 나라 사람만이 가지고 있다는 병, 바로 화병입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화 즉 분노는 사람들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무거운 병이었습니다. 하지만 유독 한국 사람의 화가 공식적인 병명으로 기록에 올랐다
여하튼 우리는 버럭 화를 내고 봅니다. 화를 내는 동안 내 마음에는 상대방에 대한 적대감과 악의만이 가득 차 오릅니다. “그는 나를 욕하고 나를 때렸다, 그는 나를 굴복시켰고 내 것을 빼앗았다고 하여 증오를 품고 있으면 증오는 없어지지 않는다.”(『법구경』) 그러한 증오와 적대감은 나의 입을 지배하여 못하는 말이 없게 만들고, 나의 눈을 지배하여 부모와 자식들도 보이지 않게 하여 급기야 그들의 목숨까지도 빼앗게 만듭니다. 분노가 무서운 이유는 이렇게 다른 이를 향해 독한 마음을 품게 만든다는 데에 있습니다. 분노를 다스릴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자비심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부처님은 경전 곳곳에서 일러주십니다. “분노가 일어나면 자심관(慈心觀)으로 다스려야 한다.”(『정법념처경』) “자비로운 마음을
어떤 사람이 어둑어둑한 길을 걷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저 앞에 뱀 한 마리가 또아리를 튼 채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습니다. “뱀이다!” 그는 기겁을 하고 걸음아 날 살려라 도망치고 말았습니다. 다음 날 아침에 다시 그 길을 지나가던 그는 자신을 그토록 놀라게 했던 것이 뱀이 아니라 밧줄이었음을 알고서 실소를 금하지 못하였습니다. 우리 중생이 생사윤회를 반복하고 있는 것은 밧줄을 밧줄인 줄 분명하게 알지 못하고 뱀이라 착각하였던 데에 기인합니다. 한번 일으킨 착각은 계속 반복하여 일어나 중생들은 영원히 밧줄인 줄 알아차리지 못한 채 여섯 갈래를 맴돌게 됩니다. 어쩌다 “아, 저건 뱀이 아니라 밧줄이었구나!”라고 눈치를 채는 일도 있겠지만 이내 뱀이라 보아왔던 습관을 버리지 못하여 착각하며 지내왔
업인과보의 가르침은 우리가 지금 살림살이를 풀어놓고서 일희일비하며 살아가고 있는 세계[世間]의 원리를 설명한 내용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그런 나고 죽는 세상을 벗어난 진리의 세계도 있습니다. 출세간(出世間)이라 부르는 것인데 출세간의 이치에 대해서 무지한 것이야말로 진짜 어리석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출세간의 이치라는 것은 본격적으로 ‘나’라는 것을 분석해 들어가는 작업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하면 ‘나’를 찾아가는 과정입니다. 고요한 숲 속에서 선정에 들어계시는 부처님 곁으로 젊은이 한 무리가 몰려왔습니다. “성자시여, 혹시 이리로 젊은 여자 한 명이 지나가지 않았습니까?” 남녀가 짝을 이루어 놀러 나왔다가 그 중에 한 여자가 일행들 몰래 그들의 귀중품을 챙겨 달아났던 것입니다. 뒤
생각할수록 웃음이 나옵니다. 우리 동네 상가에서 만난 한 보살님의 말이 자꾸 떠올라서요. 이 분은 신심 하나는 참 대단한 불자입니다. 이전부터 정신세계와 기 수련에 관한 책도 많이 읽었고 그에 따른 수행도 열심히 한 데다 불자가 되고 나서는 큰스님 설법하는 날이면 그곳이 어디든지 그리고 관음재일 같은 날에는 아예 가게문을 닫아걸고 절에 가는 열성신자입니다. 그렇기는 한데 108배에는 아주 서툽니다. 몸도 약하니 더 그럴 터이지요. 평소 이 보살님은 “난 절 못하겠더라. 108배도 겨우 하는데 3000배 하는 사람들 보면 정말…”이라고 말하거나 심지어는 “습이 배어 있지 않아서 절은 못해”라며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곤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보살님의 딸이 올해 수능시험을 보았습니다. 어쩌겠습니까
행복은 마음 속에 존재한다꿈꾸는 듯한 표정의 예쁜 여자가 허름한 가게 안으로 들어와서 이렇게 묻습니다. “저… 여기 혹시 좋은 소식만 나오는 텔레비전 없나요?” 부자 되시라는 멘트로 한 때 우리나라를 부자열풍에 휩싸이게 만든 카드회사의 광고이지요. 저는 이 광고를 볼 때마다 정말 그런 텔레비전이 있으면 아무리 비싸도 한 대 꼭 들여놓겠다고 다짐합니다. 좋은 소식은 사람을 행복하게 해주니까요. 사람은 행복해지는 것을 가장 소중하게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행복하지 않은 것은 불행하다는 뜻이고, 불행하다는 것은 괴롭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괴로움을 좋아하는 이는 온 우주를 다 뒤져보아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 괴로움을 피하고 행복(즐거움)을 얻으려는 것은 목숨 있는 자의 본능이라 하겠습니다.
부처님 당시의 수행자들은 자기 옷은 스스로 꿰매서 입어야 했습니다. 제자 가운데 앞을 못 보는 아나율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바늘귀에 실을 꿸 수가 없었습니다. 아나율은 무심히 ‘이 세상에서 도를 얻은 아라한은 나를 위해 바늘을 꿰어다오’라며 생각하였는데 마침 부처님께서 그의 생각을 알아채셨던가 봅니다. “바늘을 이리 다오. 내가 꿰어주리라.” 부처님의 목소리를 듣자 아나율은 당황하였습니다. “저는 부처님께 청한 것이 아닙니다. 세상에서 복을 구하려는 사람에게 청한 것입니다.” 송구하여 바늘을 내밀지 못하는 아나율을 향해 부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이 세상에서 복을 구하는 사람으로 나보다 더한 사람은 없다.”(『증일아함』 『역품』) 이 일화를 보면 부처님도 복에 대해서는 상당히 긍정적
시청의 성공회 대성당 안에는 4년 이상 된 이주노동자 60여명과 그들과 함께하는 한국인들이 ‘4년 이상 된 외국인의 전원 합법화’를 외치며, 벌써 20일째 농성을 하고 있다. 11월 15일에 시작된 이번 농성엔 성공회 대성당 외에 한국기독교연합(NCC), 기독교백주년 기념관, 명동성당을 비롯해 전국에서 총400여명의 이주노동자들이 끝이 보이지 않는 지루하고도 힘든 싸움을 계속하고 있다. 목사-신부 지지 방문 잇달아 성공대 대성당 안에는 성공회와 원불교 봉공회, 기독교 장로회와 정토회에서 마련한 따뜻한 점심 공양이 제공되고 있다. 또한 많은 사람들이 지지 방문을 해 주고 있다. 목사님, 신부님, 일반 시민들까지 이 곳을 방문해 기도해 주고, 우리들과의 연대를 약속해 주고 희망을 심어주고 있다.
네티즌 불자들의 대부분은 매월 1곳 이상 교계단체나 복지시설에 정기적으로 후원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법보닷컴’이 지난 11월 29일부터 12월 4일까지 홈페이지를 통해 ‘당신이 매달 후원하고 있는 교계단체나 복지시설은 몇 군데나 됩니까’라는 설문조사를 실시한 결과 응답자 95명 가운데 전체 58.9%(56명)가 ‘한 곳’이라고 답변했다. 또 ‘두세 곳’이라고 답변한 응답자는 21.1%(20명)로 나타났으며, ‘네 곳 이상’이라는 답변은 5,3%(5명)인 것으로 집계됐다. 이는 10명 중 8명은 적어도 한 곳 이상의 교계복지시설과 1대1 결연 후원을 맺고 있는 것으로 분석됐다. 반면 ‘없다’라는 답변은 14.7%(14명)인 것으로 나타났다. 김형섭 기자 hsk@beopbo.com
저는 산청 대원사에 8년째 다니고 있는 불자입니다. 그리고 최근에는 가족들의 후원 하에 대구 영남불교대학에서 불교공부를 배우고 있습니다. 집이 함양이라 영남불교대학을 갈 때면 버스, 지하철을 타게 되는 데 그 때마다 많은 보살님과 거사님을 만나게 됩니다. 이런 저런 얘기를 하다보면 그 분들은 “왜 가족들은 나를 따라 절에 오지 않을까”하는 넋두리를 자주 합니다. 그럼 저는 그 분들께 제 얘기를 자주 하곤 합니다. 제 남편은 불교에 대해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절에 다니면서 저를 절에 데려다 주기 위해 함께 절에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5년의 세월이 지난 어느 날 남편이 대웅전에서 부처님께 절을 하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됐습니다. 제가 간절하게 기도하는 모습을 보니 자신도 모르게 부처님께 귀의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