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는 우주일체를 한 몸으로 사유인간-자연 공존하는 상생의 전형 내가 알고 있는 한에서 동서고금의 철학은 단 두 가지로 분류된다. 즉 해체적 사유와 구성적 사유다. 전자를 인간의 자연동형론(physiomorphism), 후자를 자연의 인간동형론(anthropomorp hism)이라 불러도 좋다. 인간의 자연동형론은 인간을 자연으로 산화시키는 사유고, 자연의 인간동형론은 자연을 인간의 것으로 구성하는 사유를 일컫는다. 여기서 인간과 자연이 서로 대대적으로 사용된 까닭은 인간의 사유가 대대적으로 자기의 생각을 전개시켜 나갈 수밖에 없는 구조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차갑고 습한 물과 뜨겁고 메마른 불을 대대적으로 놓아야 물과 불을 생각하기 수월한 이치와 같다. 그래서 인간이 자연을 자기의 대칭으로 놓지
로댕 ‘생각…’- 신라 ‘미륵반가…’대비투쟁 통한 선의 ‘일방 승리’ 주장은 망상 나는 불교가 우주에 존재하는 근본사실을 보게 하는 가르침이라고 생각한다. 즉 불교는 기독교처럼 악에 대한 선의 승리를 기약하는 당위적 도덕의 종교가 아니겠다. 그렇다고 불교가 유치하게 반도덕적 종교라고 반사적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불교의 지계(持戒) 바라밀은 세상을 도덕적으로 권선징악하는 심판을 말하지 않고, 바깥으로부터 오는 유혹에 흔들리는 마음을 경계하는 의미가 더 강하다. 바깥의 경계에 마음이 끄달리면, 마음이 우주의 여여한 존재의 사실을 보지 못하고, 사실과 다른 망상에 빠지게 된다. 그런 점에서 불교는 악이 발호하는 것을 보고 흥분하여 선의 승리를 위하여 선의지를 강화시켜 나가야 한다고 외치면서 선의 십자
극단으로 치닫는 편파독선적 기독 선교행위좌우대립 후진작태 속 종교갈등도 부를텐가 나는 가끔 우리나라에 대하여 어떤 절망을 느낀다. 작금의 정신문화의 현황이 지나간 우리의 역사적 공업(共業)의 여파라는 것을 생각하면, 지금의 우리가 그 역사의 무거운 업의 영향을 입고 있는 것이 아닌 가 추정해 본다. 우리는 지혜롭지 않으면서 너무 잘난 체 하고, 아상이 너무 강해 참회의 길을 가려고 하지 않고, 어리석은 짓을 하면서도 똑똑하다고 착각하는 일반적 행동의 스타일을 예나 이제나 버리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이미 선진제국에서 버린 지 오래된 좌우의 이념투쟁으로 나라가 시끌시끌하고, 민주투쟁을 한 사람들이 의외로 또 북한의 그 가혹한 독제체제에 그토록 호의적인 이상한 행태를 자행하는 짓들이 우리 사회에서 버젓이
부처-중생 이중성 모두 갖고 있어환영인줄 알고 초탈하면 화엄세상 마명(馬鳴)대사는 『대승기신론』에서 제8식 아뢰야식을 진망화합식으로 기술하고 있다. 일체유심의 사유에서 보면, 아뢰야식이 진망화합식이라는 것은 이 세상이 곧 진여와 번뇌가 혼재해 있는 중간지대라는 것을 상징한다 하겠다. 아뢰야식에 여래의 종자와 중생의 종자가 혼융되어 있다는 것은 바로 세상도 저 아뢰야식의 이중성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가리킨다 하겠다. 아뢰야식의 이중성은 그 존재방식이 연기법적이어서, 진여와 번뇌망상이 상호 의타기적이고 따라서 서로 상관적 차이를 지니는 한 쌍의 묶음이라고 봐야 한다. 상관적 차이라는 개념은 원효대사가 묘사했듯이, 같음은 다름에 대한 같음이고, 다름도 같음에 대한 다름이라서 서로 상대방이 없으면 자기의 존재
善 강하면 惡도 강해져 대결구도‘구악’ 일소 혁명 ‘신악’의 씨 뿌려 세상을 악과 죄로부터 해방시키지 않으면, 인류의 역사와 세상에 희망이 없으리라는 사상이 이른바 구원주의이다. 세상에 악과 죄가 도도히 범람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 동안 서양의 철학과 종교는 역사 속에 넘쳐 나는 악과 죄를 제거하기 위하여 모든 노력을 경주했으나, 실제로 세상의 악과 죄는 사라지지 않고 거듭거듭 태어난다. 과거의 병을 퇴치하면, 새로운 병이 또 생기는 것과 같다. 새로운 질병은 과거의 멸균법에 내성이 생겨서 더 고약해지고 악독해 진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서양의 윤리학도 선을 권장하고 증장시키기 위하여 악을 퇴치하고 제거시킬 의지력을 권장해 왔다. 오직 악과 싸워 이기는 길은 도덕적 선의지가 세상을 지배하는 길이 있을
어린이들에게 올바른 독서방법을 지도하는 ‘독서지도사’를 양성하는 교육과정이 동방대학원대학교에 개설된다. 동방대학원대학교 문화교육원(원장 정상철)은 10월 30일 ‘어린이 독서교육지도사 양성과정’을 신설하고 첫 수업을 진행한다. 이 과정은 학생들에게 올바른 독서과정을 통해 효율적인 논술방법을 지도할 수 있는 전문 지도교사를 양성하기 위해 마련됐다. 2007년 2월 26일까지 15주 동안 매주 월요일에 실시되는 독서지도자 양성과정을 이수한 수강생들은 학원강사 및 문화교육센터 강사로 활동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지며 방과후 지도교사로도 활동 가능하다. 강의는 충남대 문헌정보학과 한복희 교수가 담당한다. 정하중 기자 raubone@beopbo.com
사회주의 실패…자본주의도 한계 드러낼 것개인-전체 대립 넘어 자연서 상생 배워야 근현대의 역사는 개인주의(individualism)와 전체주의(totalitarianism)의 대결이었다. 물론 역사는 전자의 승리로 끝났다. 왜냐하면 후자는 극좌적인 공산주의나 극우적인 파시즘처럼 전제(專制)주의를 초래했고, 그 전제주의는 독재의 권력으로 수많은 이들에게 참혹한 괴로움을 주었기 때문이다. 전체주의의 부정으로 우리는 개인주의가 옳은 것으로 당연히 여기는 정치적 사고에 젖게 되었다. 그러나 불교는 전체주의는 물론이지만, 개인주의도 초극되어야 할 이념으로 여긴다. 개인주의는 개인을 불가양도적 권리의 주체로 여겨 개인의 권리를 신성하게 여긴다. 개인이 부당하게 전체의 압력에 굴복하지 않고, 반사회적 행위를 자행하지
무심히 비웠을때 자리이타심 생겨 친절-자비심 자연스럽게 충만 有卽是無 無卽是有(존재가 곧 무요, 무가 곧 존재다). 이 구절은 3조 승찬대사가 「신심명」에 남긴 말이다. 이어서 대사는 ‘만약 이같이 않다면, 반드시 지켜서는 안되느니라’(若不如此하면 不必須守니라)라고 말하였다. 승찬대사의 저 말은 불교가 존재론이란 말을 멀리 하는 것을 불식시킬 수 있는 좋은 계기를 제공한다고 생각된다. 불교가 공(空)사상을 본질로 하고 있기에 존재를 배척하고, 욕심의 탐욕을 경계하기에 욕망이라는 용어를 또한 가까이 하지 않으려는 것을 잘 안다. 그러나 불교는 존재론이고 욕망론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존재론에도 두 가지의 뜻이 있고, 욕망론에도 역시 두 가지의 의미가 있다. 존재를 동사로 보는 진짜 존재론과 존재를 명사로 여기
유다의 배신은 필연인가 자유의지인가 자유와 업 결정 짓는 건 ‘깨어있음’ 유무 우리는 오랜 세월동안 인간의 진리가 결정되어 있는가, 아니면 자유의지의 소산인가 하는 양자택일의 철학적 문제에 골몰해 왔다. 특히 이 문제는 서양철학의 사유에서 매우 심각한 주제로 등록되어 왔었다. 나는 성경에 나오는 가롯 유다의 행위를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 잘 알 수가 없었다. 가롯 유다는 그의 스승인 예수님을 얼마 안 되는 돈으로 바리새인들과 로마 관가에 팔았다. 그는 그 돈으로 팔자를 고칠 수 있었던 것도 아니다. 그런데 그가 예수님을 배신하여 팔았다. 그의 배신행위는 이미 결정된 운명의 길을 걸어 간 것인가, 아니면 자유의지의 소산으로 이루어진 것인가? 물론 내가 배운 바에 의하면, 그는 자유의지의 판단으로 그런 엄청난
神은 인간의 한계 투사한 문제해결법 불보는 초월자 아닌 자신의 본래 능력 불교를 흔히 기독교와 비교해서 무신론으로 단정한다. 그리고 기독교의 신중심주의와 대비해서 불교를 인간중심주의라고 말하는 경우를 종종 본다. 나는 불교를 무신론과 인간중심주의로 설파해도 되는지 의문을 갖는다. 불교는 사실상 ‘유신론/무신론’의 대비를 초탈해 있고, ‘신/인간’중심주의를 다 초극한 사상이고 종교라고 여긴다. 불교는 신들을 섬기고 있고, 석가모니 부처님을 신중의 신으로 여기는 신앙도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불교는 천신지기(天神地祇)들을 모시고 있고, 범천과 제석천 등을 천상의 신으로 생각하고 있다. 불교는 어떤 경직된 교리의 틀을 지니고 있는 닫힌 종교와 달라서 마음의 정화를 통하여 상승하는 마음의 법을 존중하면 다
불교의 관용-평정심이 한국병의 묘약‘고약한 심보’없애는데 불교계 앞장을 불교는 타종교에 비하여 관용적이고, 평정심을 귀하에 여기고, 열광적으로 흥분하여 타자에 대하여 공격적으로 나오지 않으며, 자기고집으로 막무가내 일을 밀고 나가지 않는다는 세평을 받고 있다. 이것은 불자의 자화자찬이 아니라, 일반적인 중의를 모으면 그렇다는 것이다. 나는 불교의 이런 성격이 한국병을 치유할 수 있는 묘약이라고 여긴다. 대체로 사람들이 말하고 있는 한국병의 증세는 한국인들이 너무 격정적이고, 격정적인 만큼 호오의 기분에 너무 휩쓸리고, 무엇을 하더라고 극단적 행동양식을 잘 드러낸다는 것이다. 정치적인 주장을 해도 극단적인 구호를 남발하고, 사회운동을 해도 그 방식이 삭발투쟁이나 극렬한 행동양식을 스스럼없이 드러내고, 교
나와 남 다르되 독립적이지 않은 관계남에게 희망 주며 不二 실천, 보시 으뜸 20세기의 문명은 개인주의/전체주의, 자유주의/사회주의 등의 대결로 막이 내렸다. 물론 저 이분법에서 후자가 전자에 대하여 패배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전자도 후자도 다 불법의 이치에 합당하지 않다고 말할 수 있겠다. 불법은 개인을 독립된 실체로 보지 않기에 개인주의도 사양하고, 전체를 위하여 차이를 무시하고 지우는 전제주의도 거부한다. 자유주의의 자유론은 일체의 개인적 소유를 보장하기 위한 자유론이므로 불법의 해탈적 자유론과 다르다. 사회주의의 평등론은 소유론적 대등론의 억지주장과 유사하므로 불법이 말하는 상관적 차이로서 서로 엮어지는 존재양식의 평등과는 거리가 멀다. 불법의 진리는 소유론적인 의미를 지닌 개인
양자 대립적 사유 택일적 투쟁 초래자연성은 소유 위한 택일·투쟁 없어 원효의 철학사상은 인간의 사회생활이 늘 양자택일(either-or)의 법으로 지배되어 온 것을 다시 이중부정(ne ither-nor)과 이중긍정(both-and)의 도로서 회향시킬 것을 희망하는 사유라고 지난번에 언급되었다. 이중부정은 초탈적 사유로서 무애의 자유를 상징하고, 이중긍정은 포괄적 사유로서 차이의 평등을 말한다는 것을 우리가 보았다. 이중부정이 없는 이중긍정은 택일법을 피하게 하는 대신에 다시 양자 대립론으로 빠지게 되고, 이중긍정이 없는 이중부정은 허무론의 함정에로 미끄러진다. 택일법과 양자 대립론은 결국 같은 의미로 낙찰된다. 양자 대립적 사유는 반드시 택일적 투쟁을 초래하기 때문이다. 단적으로 불법은 세상을
불법은 아집 뒤섞인 택일의 논리 부정세속 끌어안아야 참다운 성스러움 원효는 불교의 도가 먼저 이중부정의 바탕 위에서 이중긍정의 길을 현시하고 있다고 해석하였다. 즉 불법은 비생비멸(非生非滅)과 같은 이중부정의 바탕 위에서 역생역멸(亦生亦滅)의 이중긍정으로 짜여져 있다는 것이다. 쉽게 말하자면 이중부정은 생멸의 현상적 세계를 초탈한 대자유의 해탈법을 상징하고, 이중긍정은 생/멸이 서로 상호간에 교환하는 이중성의 왕래를 포괄하고 있는 평등의 연기법을 말한다. 이중부정의 자유법이 이중긍정의 평등법보다 먼저 언급되는 까닭은 이중부정의 초탈법이 전제되지 않으면, 이중긍정의 포괄법은 양립적인 이원성으로 오독될 수 있겠기 때문이다. 이중긍정의 포괄법(연기법)은 원효가 즐겨 말하는 융이이불일(融二而不一=둘을 융합하되
불자들에 대한 스님들의 배려 필요한문의례 개선해 젊은층 붙잡아야 법보신문 6월7일자 기사에 의하면, 불자의 수가 지난 10년간 서울과 부산 등 대도시에서 상대적으로 크게 줄었다는 것이다. 세계적인 추세가 친불교적으로 흐르는데, 한국에서 오히려 불자의 수가 감소세를 타고 있다니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왜 그럴까? 더구나 젊은 불자들이 타종교에 비하여 약세라는 것은 더 충격적이다. 내가 최근에 들은 이야기를 하나 소개한다. 나이 많은 여성불자인데, 자기 친구들이 거의 종교를 불교에서 천주교나 기독교로 바꿨다는 것이다. 그 까닭은 스님들이 불자들에게 따뜻한 관심을 보이지 않고, 오면 오는가 가면 가는가 대단히 냉담한 분위기를 드러내고 있으며, 스님들이 정신적으로 너무 높이 계시거나, 부자 신도들에게는 친절
한국 정치사회지도자들의 좌표로 충분만파식적 고사처럼 힘 모으는 게 관건 원효대사는 ‘별기’의 서문에서 대승의 사상이 무사(無私)와 지공(至公)의 두 마음을 바탕으로 삼고 있다고 말했다. 나는 무사와 지공의 저 두 마음이 지금의 한국 정치사회지도자들에게 더 없이 요긴한 사고방식이라 여긴다. 속으로 아상과 아망으로 가득 차 있으면서, 겉으로 국민과 민주주의와 역사를 바로 세우기 위함이라는 명분으로 온갖 유치한 짓들을 서슴치 않는 그런 정치지도자들을 나는 지겹게 보아 왔다. 정치는 요익중생(饒益衆生)의 사업인데, 겉으로 국민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시끄럽게 떠드나 우리의 생활에 실속있는 이익을 별로 주지 않는다. 우선 그들의 말이 성실하지 않다. 언필칭 ‘국민이 원한다’고 하면서 자기를 정당화하나, 기실 그
물활론은 마명-원효의 일심과 밀접자연의 두두물물이 여래의 무성법문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다 생명과 정령(精靈)을 갖고 있다고 보는 원시적 신앙의 형태를 철학에서 물활론이라고 부른다. 이런 사상은 미개한 형태의 사유방식으로서 그 동안 철학에서 아주 무시돼 왔었다. 그러나 이 물활론이 세상을 온전히 생각한 가장 높은 사유형태로서 새로이 평가받아야 한다고 나는 생각하게 되었다. 불교적으로 이 물활론은 마명과 원효가 갈파한 일심(一心)의 철학과 밀접한 연관성을 지닌다. 일심은 우주법계가 거대한 하나의 대승적 한 마음의 욕망에 다름 아님을 말한 것이다. 우주법계가 무한한 한 마음의 욕망이라면, 우주에 미만되어 있는 두두물물은 그 대승적 한 마음을 다양하게 나눈 무수한 마음들에 해당한다 하겠다.불교가 유심(
타자 돕는 마음의 탈자 운동 필요 기도는 마음 비워 아상 지우는 수행불기2550년 부처님 오신 날을 맞이해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다시 생각해 본다. 마명보살과 원효대사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일심(一心)으로 읽었다. 일심은 인간중심의 마음이 아니라 우주법계가 바로 마음이라는 것을 말한다.우주법계 안에 존재하는 일체의 삼라만상이 다 마음들이다. 마음은 욕망과 동의어로서 일체는 탈자적인 타자지향적 기(氣)의 운동에 다름 아니다. 생멸계의 모든 삼라만상은 두 가지의 욕망을 동시에 띠고 있다. 타자를 소유하려는 탐욕의 탈자운동과 존재론적 욕망으로서 타자가 존재하게끔 도와주는 원력의 탈자운동이 그 두 가지다. 부처님이 가르친 법은 전체 우주의 필연성처럼 우주의 삼라만상이 서로 존재론적으로 타자의 존재를 도와주는 마음의 탈
무애가는 민중의 괴로운 마음 치유세상 초탈하기 위해 무애법 익혀야7세기 원효대사는 천촌만락을 누비면서 소성(小性.小姓)거사라는 이름으로 민중들에게 무애가(無碍歌)를 가르쳤다고 한다. 전란의 시절을 살았던 대사는 어렵사리 살던 민중들에게 구원의 희망을 보시하기 위하여 그들의 마음을 편안케 하는 관세음보살의 대비심으로 다가갔다. 그가 가르친 무애가는 전란으로 인한 상처의 괴로움을 치유하는 길을 가르쳐준 것이겠다. 괴로운 마음을 털어 버리게 하는 길이 무애의 길이다. 그렇다. 인생은 결국 마음을 어떻게 쓰는가 하는 방편의 문제와 직결된다. 방편을 잘 활용하여 행복에 이르는 길이 지혜가 아닌가?대사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주는 가르침은 그가 의상대사와 함께 당나라에 유학 가는 도중에 무덤에서 잠을 잔 다음 유학을
마음에 정해진 주체는 없어자기가 지은 업만큼 세상 생각불교가 마음의 종교라는 것을 다 안다. 마음이 무엇인가? 『능엄경』에서 부처님이 아난존자의 물음에 대하여 마음을 가르치신다. 마음은 사유의 정체를 갖고 있지 않아서 몸 안에도 바깥에도 안팎의 중간에도 존재하지 않는 무체(無體)로서 다만 ‘알 수 있는 능력’이라고 언명하신다. 보통 마음의 능력은 그 능력을 행사하는 주체를 상정하기가 쉽다. 그러나 생각의 능력을 지닌 주체로서의 정신이란 없다. 이것이 불교의 마음이다. 생각의 인식은 있는데, 그 인식을 행사하는 주체가 없다는 것이 불교의 가르침이다. 불교의 마음은 서양신학에서 말하는 영혼과 같은 정신적인 실체가 존재해서 육체의 죽음을 초월하는 불변의 존재자와 같은 것이 아니다. 불교의 유심사상은 서양신학의 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