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안에 향기로운 냄새가 가득하면 선한 천신이 찾아오고, 고약한 냄새가 진동하면 악한 신이 찾아온다는 말이 있다. 길을 지나가다 향긋한 냄새가 나면 기분도 상쾌해지고, 냄새나는 곳을 찾아보게 된다. 반대로 지독한 냄새가 나면 갑자기 짜증이 나고, 나도 모르게 고개를 돌려버린다.우리들이 청정한 스님들을 뵙고 설법을 듣고 공양하는 것은 그분들에게서 향긋한 삶의 냄새가 나기 때문이다. 그 향기가 많은 사람들을 불러 모으는 것이다. 오라고 하지 않아도 절로 모여든다. 이는 꽃향기를 따라 나비가 모이는 것과 같다.방탕 욕망 익히기 쉽고나쁜버릇
우리는 누구나 살아가면서 크던 작던 상처를 안고 산다. 때로는 누군가에서 상처를 주기도 하고, 받기도 한다. 그런데 대부분 상처를 주거나 받는 경우 나와는 전연 상관없는 사람과 관련된 경우는 드물다. 요즘이야 인터넷이 발달하여 정말 일면식도 없는 사람에게 상처를 받는 경우가 늘고 있긴 하지만. 그래도 마음속에 남는 커다란 상처는 가족이나 친구와 같이 나를 잘 알고 있는 사람, 혹은 내가 잘 아는 사람에게서 받고 주는 경우이다.또 다른 상처는 몸의 상처이다. 예기치 않은 사고로 인해 몸에 상처가 난 경우와 질병으로 인해 수술로 남은
오늘날 사회는 자본이 지배하는 사회, 즉 자본주의를 기반으로 운영된다. 여기에 사회주의적 요소를 가미하여 복지나 부의 사회적 재분배가 가능하게 하는 것이 대부분의 나라에서 채택하는 국가 운영 시스템이다. 이것을 수정자본주의라고 부른다. 하지만 오늘날의 세계시스템은 신자유주의라고 한다. 이에 대한 다양한 비판의 목소리가 높은 것은 시장원리에 모든 것을 맡기는 탓에, 빈익빈부익부가 심화되고, 전체적인 사람들의 삶의 질이 하락했다고 보기 때문이다. 여하튼 이러한 시스템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포인트는 ‘자본’이다.재물이 가치 우선되면자본
‘말 한마디가 비수가 되어 가슴에 꽂힌다’라는 표현이 있다. 말을 칼에 비유한 표현이다. 우리가 무심코 던지는 말이 상대방에게 커다란 상처가 될 수 있음을 표현한 것이다. 손에 든 칼보다, 때로는 마음에 품은 칼이 더 위험하고 잔인할 수 있다.부처님의 가르침 가운데 ‘신구의삼업(身口意三業)’이란 가르침이 있다. 신은 몸으로 하는 행동, 구는 말로 하는 모든 것, 의는 의도를 말한다. 이것이 세 가지 행위라는 것이다. 업(業)이란 카르마(karma)를 번역한 말인데, 카르마의 본래 의미는 ‘행위, 행동’을 의미한다. 말하자면 내가 한
들판에 목동이 소를 모는 모습은 목가적 분위기를 물씬 풍긴다. 해가 뉘엿뉘엿 지는 무렵의 소 모는 목동은 더욱 그러하다. 그런데 목동과 소에 집중해 보면, 목가적 분위기는 일순 변하고 만다. 목동의 손에는 어김없이 막대기가 쥐어져 있기 때문이다. 멀리서 보는 그림과 같은 풍경에서 의미가 없었던 막대기가 문득 눈에 들어오면, 경우에 따라서는 비극이 떠오르기도 한다. 소의 입장에서 보면 목동은 친근한 벗이 아닌, 두려운 존재일 가능성이 높다. 소가 목동의 말을 듣는 것은 아마도 막대기의 의미를 알기 때문일 것이다. 실제 폭력을 가하는가
우스갯소리로 술자리에서 다른 사람 험담하는 것을 ‘술안주 삼는다’라고 표현한다. 우리는 두 사람 이상 모이면, 다른 사람 이야기를 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하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어색한 분위기를 모면하기 위한 방편으로 다른 사람을 화제로 끌어 올리곤 한다. 물론 좋은 이야기도 한다. 하지만 대부분, 험담이 아니더라도 흉을 보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그러다 보면 이것이 씨앗이 되어 소문이 퍼져, 곤란한 경우를 겪기도 한다. 어쩌다 그런 곤란한 경우를 당하면, 다시는 다른 사람 이야기는 하지 말아야지 하고 다짐하기도 한다. 간혹 칭
불교에는 두 가지 커다란 기둥이 있다. 하나는 깨달음이요, 다른 하나는 자비이다. 이 두 가지는 서로 다른 것이 아니다. 만약 이 가운데 하나가 없다면 다른 하나도 존재할 수 없다. 따라서 깨달음의 무게와 자비의 무게는 다르지 않다. 그런데 깨달음만 강조하고 자비를 강조하지 않게 되면 불교를 지탱하는 기초가 흔들리게 된다. 이 두 가지가 만나는 접점이 바로 ‘수행’이다. 따라서 수행이란 깨달음을 구하는 것과 동시에 자비를 실천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불교기둥은 깨달음·자비접점은 수행이라는 노력내 안에 선한 덕성 키워모든 생명에
훌륭한 의술가 부처님마음 병들게 하는 번뇌다양한 처방으로 제거자비 닮고자 원 세워야 불교는 종종 의학에 비유되곤 한다. 그것은 의학이 병든 사람을 치료하듯이, 부처님의 가르침은 번뇌로 아파하는 사람들을 치료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육체의 질병은 사람이 살아가는 한, 벗어날 수 없다는 점에서 의학의 한계는 분명하다. 그에 반해 번뇌는 일단 제거하게 되면 다시는 번뇌로 인해 아파하지 않게 된다. 그런 점에서 육체의 질병을 치유하는 의사보다 부처님의 의술이 더 높다고 하겠다. 부처님을 의왕에 비유하는 것은 초기경전 이래 무수한 경전에서 언급하고 있다. ‘화엄경’ 51권에서도 부처님을 의왕에 비유한 내용이 나온다. “마치 뛰어난 의술을 지닌 어떤 의왕(醫王)이 만약 병자를 보기만 해도 모두 병이 치
겨자씨만한 불이라도모든 번뇌 태울 위력생활 속 보시는 수행작은 공덕도 열반씨앗 겨울철이 되면 날씨가 건조해지는 만큼 화재 발생이 많다. 수십 년 가꾼 산림이 한 순간에 재가 되어 버리기도 하고, 재산과 인명 피해까지도 발생한다. 2005년도 양양에서 발생한 산불이 낙산사로 번져 소중한 문화재를 모두 불태워 버린 일은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그런데 이런 화재는 방화도 있지만, 많은 경우 무심히 버린 담뱃불이나 논이나 밭두렁을 태우기 위해 불을 놓았다가 불씨가 날아가 발생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그래서 겨울철이 다가오면 ‘작은 불씨도 다시 한 번’, ‘꺼진 불도 다시 한 번’과 같은 표어를 여기 저기 붙여 경각심을 일깨운다. 한편 이러한 불은 인류에겐 없어선 안 될 것 가운데 하나인데, 그래서 고대로부
성벽 따라 난 물구덩이적 침입 막아주는 방책부끄러움은 삶에 있어막행막식 막는 절제력 지구에서 살았던 혹은 살고 있는 생명체 가운데, 가장 고도의 사회성을 지닌 종(種)이 바로 인류라고 한다. 인류는 다양한 사회를 구성하며 발전시켜 왔고, 더불어 고도의 정신문명도 발달시켜 왔다. 그럴 수 있었던 원동력은 무엇일까. 왜 다른 종의 생명체는 인류와 같은 길을 걷지 못한 것일까. 이에 대해서는 다양한 해석이 있을 것이다. 아마도 한두 가지 요인 때문은 아닐 것이며, 매우 많은 요인들이 얽혀 오늘날의 사회와 문명을 가능케 했을 것이다. 그 많은 요인들 가운데, 한 가지를 꼽으라면 무엇이 가능할까. 필자는 참괴(愧)라는 것을 꼽고 싶다. 참괴는 두 가지 단어로 구성된 것으로, 참은 자신의 죄나 허물을
온갖 물은 한 가지 맛그릇따라 모습만 변해팔만사천가지 법문도마음그릇 모양 닮아가 노자의 ‘도덕경’에 보면, ‘상선약수(上善若水)’라는 말이 나온다. 가장 좋은 것은 물과 같다는 의미이다. 노자는 ‘물은 만물을 이롭게 하지만 공을 다투지 않고, 사람들은 싫어하여 가지 않는 곳도 싫어하지 않고 이르지 않는 곳이 없으니, 가히 도(道)와 가깝다’고 했다. 생각해 보면, 물처럼 생명에 필수적인 것도 드물다. 사람만 놓고 보더라도, 인체의 70%가 물이 차지한다고 하지 않는가. 그만큼 물은 우리 생명이 자라고 유지하는데 없어서는 안 될 요소이다. 노자의 말처럼 물은 참으로 모든 생명을 이롭게 한다. 그리고 물은 더러운 것을 씻어 주어, 깨끗하게 한다. 그래서 많은 종교에서 물은 성스러운 의식을 치룰
상인 집단 이끄는 상주‘화엄경’서 보살 비유크겐 대통령 작겐 가장연민·자비 없으면 폭정 고대 인도에서는 일찍이 상인 계급이 성장하여, 인도 사회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그들 상인은 인도를 넘어 중앙아시아, 유럽, 동북아시아, 동남아시아 등지와 무역을 하였다. 다양한 무역로 가운데 동아시아와 지중해를 이어주는 무역로를 실크로드라고 한다. 이 실크로드를 따라 수많은 인도의 상인들이 물품과 문명을 다른 나라에 날라 주었다. 그 중에서도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불교의 전파였다. 특히 중앙아시아 제국과 중국으로 대승불교가 전해지는 데는 이들 상인들의 공이 적지 않다. 이들 상인들의 무리를 대상(隊商, caravan)이라고 하는데, 사막과 같이 교통이 발달하지 않은 험난한 지역을 여행할 때는 곳
비교하는 마음이 교만높을수록 안팎만 구분수행 방해되는 큰 번뇌누리는 것에 만족해야 민속촌에 가 보거나, 전통 가옥이 보존되어 있는 곳에 가보면 한 가지 눈에 띄는 것이 있다. 울타리나 담장이 아담하며 정담 있게 표현되어 있다. 위압감을 주는 경우는 성곽을 제외하고는 없다. 조선시대 궁궐을 보더라도 담장의 높이는 얼마 되지 않는다. 그런데 요즘의 집들은 담장의 규모가 커지는 것 같다. 담장을 넘어오지 못하게 하는 여러 장치를 하기도 하고, 여기저기에 CCTV가 설치되어 혹여 모를 일에 대비한다. 그런 담장 밑에 있다 보면 몸을 자연스레 피하게 된다. 왠지 그 자리에 있으면 ‘누구냐? 어서 가라’하며 누군가 나올 것만 같기도 하다. 세상이 예전보다 험악해졌다는 방증일 수도 있겠지만, 다른 한편
육근으로 접한 환경평안함 훔치는 번뇌계정혜로 바로 보면마음속 고요는 유지 불교에서는 외적으로든 내적으로든 마음이 어떤 욕구에 끄달리는 것을 도적에 자주 비유한다.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의 육근(六根)을 육적(六賊)에 비유하는 것이 대표적이다. 이것은 초기불교 이래 대승불교나 선불교에서도 마찬가지이다. ‘화엄경’ 59권에는 번뇌를 도적에 비유한 내용이 나온다. 그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보살이 법륜을 굴리는 것이 부처님께서 법륜을 굴리시는 바와 같네. 계율(戒)은 바퀴통, 삼매(三昧)는 바퀴살, 지(智)는 장엄, 혜(慧)는 칼이 되어, 번뇌의 도적 깨뜨리고 온갖 마귀와 원수를 부수니 모든 외도들이 이를 보고 도망가지 않는 자 없네.” 보살이 굴리는 법륜과 부처님이 굴리는 법륜이 같
주위의 선한 벗들에가까이 다가갈수록보름 향하는 달처럼바른 견해들 차올라 불교에서는 달에 다양한 의미를 부여하여 비유적으로 표현하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달이 일천 강에 비치리’, ‘구름을 벗어난 달’과 같은 비유도 유명하고 ‘달을 가리키면 달을 보아야지 손가락을 본다’와 같은 비유도 있다. 이러한 비유 말고도 또 하나 있다. 바로 초승달과 그믐달이다. 초승달은 보름달을 향해 가는 출발점에 놓인 달이고, 그믐달은 사그라져 가는 달을 가리킨다. 본래 달이 차고 기우는 것은 아니다. 다만 지구에 있는 우리들의 눈에 그렇게 보이는 것일 뿐이다. 달은 그대로 달일 뿐이다. 하지만 기울어진 지구와 달의 관계는 다양한 모습의 달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그런 덕분에 인간에게 달은 무한한 상상력의 근원
신체 건강한 사람들도피할 수없는 게 마음병물욕 등 번뇌에서 비롯늘 마음 살펴 닦아내야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죽을 때까지 크든 작든 다양한 병으로 고통을 받는다. 하지만 그 중에는 타고난 건강체질이 있어서 소소한 감기 정도나 가끔 걸릴까 건강하게 삶을 사는 사람들도 있다. 더구나 요즘은 늙음도 더디 오는 것 같다. 70세라면 예전엔 고희라고 해서 동네에서 크게 잔치를 벌이기도 했지만, 요즘은 가족들끼리 간단하게 식사하는 것으로 대신하는 경우가 많다. 70세를 산다는 게 그리 남다른 일도 아닌 까닭일 것이다. 확실히 예전보다 10년 이상은 젊게 사는 것 같다. 그렇다 보니 생로병사가 고통이라고 하면, 죽음에 대해서는 긍정하지만 나머지에 대해서는 고개를 갸우뚱하는 사람도 있다. 그리고 ‘태어남은 축복이지 않은
두려움 낳는 어둠은대상마저 왜곡시켜번뇌로 점철된 삶도지혜의 빛으로 정화 불교에서는 알지 못하는 것을 무명(無明)이라고 한다. 무명이란 밝음이 없는 것, 즉 어두움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 어두움은 진리에 대해 알지 못함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밤하늘에 달빛마저 없는 그 캄캄함을 상상해 보라. 막막함과 두려움, 그리고 온갖 환상과 상상이 대상을 왜곡시킨다. 저곳에 있는 나무가 마치 귀신인양 보이기도 하고, 바람소리가 동물소리처럼 들리기도 한다. 바닥에 떨어져 있는 나뭇가지가 뱀 인줄 알고 화들짝 놀라기도 한다. 이쯤 되면 정신이 제정신이 아니게 된다. 더구나 어느 방향이 옳은지 확신도 없으니, 더욱더 막막하게 된다. 그러다가 저 멀리 불빛을 보게 되면, 마음은 다소 안도하게 된다. 불빛을
구름이 이미 비 뿌리면피해 줄이는 데 애써야생긴 번뇌 바로잡는 건지난한 수행 노력 필요 바람은 비구름을 몰고 오기도 하지만, 몰고 가기도 한다. 바람이 불지 않으면, 비구름은 그 자리에 멈춰 많은 비를 뿌리게 될 것이다. 이렇게 보면, 바람은 상황에 따라 좋기도 하고, 나쁘기도 하다. 메마른 땅에 비구름을 몰고 온 바람은 더할 나위 없이 고마운 바람이며, 많은 비로 인해 비피해가 발생했을 때 비구름을 몰고 간 바람 역시 참으로 감사한 바람이다. 하지만 그 반대는 야속한 바람이 될 것이다. 장마철 강한 비를 뿌리는 비구름이 몰려올 경우를 생각해 보자. 생겨난 비구름에게 비를 내리지 말라고 할 수는 없다. 이미 일어난 일을 두고 탓할 수는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두 가지이
여러 강이 흘러 모여도오직 하나 바다로 귀결간화선·위빠사나 등여러 수행도 열반 추구 경전 속에 나타나는 비유는 자연에 빗댄 표현이 유난히 많다. 이유는 인간은 자연과 분리될 수 없는 일부이며, 자연은 누구나 익히 경험으로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가 경전 속에서 볼 수 있는 비유적 표현들은 당시 사람들이 누구나 알 수 있는 것, 혹은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충분히 들어서 알고 있는 것을 비유로 나타내고 있다. 그 많은 비유 가운데, 잘 알려져 있고 유명한 비유의 하나가 ‘바다’이다. 경전에서 바다의 비유는 무차별, 평등을 의미하는 경우가 가장 널리 알려져 있다. 즉 사회적 계급이나 신분이 달라도, 부의 정도가 달라도, 이념이 달라도, 피부색이 달라도 부처님의 제자가 되는 순간 모든 차
썩은 씨앗 뿌려 놓고열매 바라면 도둑놈분노·위선 습관 되면마음은 연꽃 못 피워 우리가 집에 꽃을 심거나, 혹은 농사를 지을 때 중요한 것이 여럿 있겠지만, 그 중에서 빼놓을 수 없는 세 가지 있다. 하나는 좋은 씨앗이며, 둘은 좋은 토양(흙), 셋은 적절한 수분이다. 이 가운데 핵심은 뭐니 뭐니 해도 씨앗일 것이다. 우리의 목적은 꽃을 피우는 것이며, 농작물을 수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무리 좋은 토양이 있다고 해도 씨앗을 뿌리지 않으면 그 결과를 얻을 수 없다. 그러므로 토양과 적절한 수분은 씨앗이 싹을 틔우는데 필요한 조건일 뿐, 그것들 자체가 결과물을 산출한다고 볼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런데 좋은 토양과 적절한 수분을 공급했더라도 씨앗이 썩은 것이라면,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아무리 노력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