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탉이 수정란을 잘 품어 시간이 지나면 알이 부화된다. 그곳에서는 병아리가 나오게 되고, 병아리는 자라 암탉 혹은 수탉이 될 것이다. 이렇게 보면 알은 닭이 될 가능성을 지닌 존재이다. 무정란이 아닌 이상, 모든 알은 가능태인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가능성의 존재인 알이라고 해도, 조건이 갖추어지지 않으면 아무리 오랜 시간이 지나도 병아리가 될 수 없고, 닭이 될 수 없다. 알을 품어주는 어미닭이 있어야 하고, 외부의 공격으로부터 보호받아야 하며, 무엇보다 알 속에 있는 수정체가 건강해야 한다. 이러한 여러 조건들이 잘 갖추어져 있
누군가가 칼이나 총을 들고 있다면, 우리는 그 사람을 피하거나 대하더라도 매우 조심스럽게 대할 것이다. 그리고 만약의 경우 대처할 수 있도록 대비를 할 것이다. 그리고 만약 어린아이가 칼을 쥐고 있으면, 우리는 얼른 칼을 뺏았는다. 왜냐하면 어린아이는 칼을 조심스럽게 다룰 줄 모르며, 그 결과를 예측하지 못하기 때문에 커다란 위험을 초래하기 때문이다. 여하튼 칼이 되었든 총이 되었든, 혹은 몽둥이가 되었든 그 어떤 것이든 다른 사람을 해할 수 있는 것을 갖고 있으면 그것을 지니고 있는 사람은 그것들을 조심히 다루어야 하고, 그 주변
누구에게나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이 있다. 그것이 사랑하는 사람일 수도 있고, 자신의 인생을 바꾸어준 가르침일 수도 있고, 평생 간직하고 싶은 자신만의 추억이나 애장품일 수도, 또 정말 세상에 흔치 않은 보물일 수도 있다. 어느 것이든 가치를 매길 수 없이 소중하게 간직하고 싶어 한다는 점에서는 모두 같다고 하겠다. 어떤 것이든 소중하게 간직하고 픈 무언가가 있다는 것은 삶의 의미이자, 활력소가 될 것이다.불교에서도 세상의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탁월한 보배가 있다. 그것은 대대로 전해내려오는 부처님의 가사도 아니요, 발우도
특이한 성향을 가진 사람은 독특한 냄새를 좋아하기도 하지만 대개의 경우 누구나 좋은 냄새를 좋아한다. 방향제등을 사용하거나 꽃을 키우는 것이 그래서 일 것이다. 같은 이유에서 절에서, 혹은 불자들은 집에서 향을 사른다. 향을 사른다는 것은 ‘공양’의 의미도 있다. 그래서 육법공양(六法供養) 가운데 향공양이 속한다. 그런데 이 향은 단순히 불보살님께 올리는 공양의 의미만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예불문을 봉행할 때, ‘계향·정향·혜향·해탈향·해탈지견향’이라고 할 때에도 ‘향’이 들어간다. 계·정·혜 삼학의 실천을 향에 비유한 것이다
사람은 살면서 이런 저런 비밀들을 만들어 내고, 그것을 이른바 ‘내 사람들’과만 공유한다. 그리고 혹시나 그 공유된 ‘비밀’이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지면, 비밀을 누설한 사람을 색출하여 비난하며, 심지어는 가혹한 대가를 치르게 하기도 한다.때로는 혼자만의 비밀을 간직하기도 한다. 어떤 사람은 일기장에 자신의 비밀을 빼곡히 적어놓기도 한다. 그것은 대개 오래도록 간직하고 싶은 ‘추억의 순간’이거나 ‘아픔’인 경우가 많다.부처님 가르침엔 편 없고서로 인정하면 모두 진짜욕망 움켜쥔 두주먹 펴면비로소 마음 편해지는 것여하튼 어떤 비밀이건
우리는 수많은 문제들로 둘러싸여 있다. 삶이란 어찌 보면 이런 문제들을 하나하나 해결해 가는 과정일 것일 것이다. 이런 문제들은 크게 보면 사회 제도적 문제인 경우도 있고, 관습적인 문제일 수도 있다. 작게 보면, 자신의 습관에서 비롯된 문제일 수도 있고, 가정 내의 문제일 수도 있다. 그 외에도 매우 다양한 원인에서 비롯된 문제들이 있을 것이다.연필 닳아 몽당되기까지닳아가는 시간 필요하듯순간순간 시간 충실하며 날 바꾸기위한 수행해야 하지만 이런 문제들이 야기된 근원적 원인을 추구하다 보면, 결국은 인간의 욕망이라고 하는 것이 그
인간은 다양한 동물을 길들여 키워왔다. 말이나 소와 같은 동물은 교통이나 운반을 목적으로, 개와 같은 동물은 애완동물로써 혹은 집을 지키거나 사냥을 목적으로 길들여 왔다. 그런데 길들인다는 표현을 조금만 고쳐 보면, 사람도 역시 길들여진 것임을 알 수 있다.비판적 입장제시 가능한자유로운 사회형성 위해바른 눈 갖도록 이끄는덕성 갖춘 통치자 필요빨리어에서 ‘길들인다’라는 표현은 담마(damma)이다. 이 단어는 담마띠(dammati)라는 동사의 의무분사형태로 정확하게 표현하면 ‘길들여져야 하는’이란 의미가 된다. 그런데 이 의미는 ‘가
우리는 멈추어야 할 때 멈추고, 가야할 때 가야한다. 이것은 사실 어린아이도 아는 일이다. 하지만 이것을 실천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대부분 우리의 삶을 돌아보면, 멈추어야 할 때 가고, 가야할 때 멈춘다. 뒤바뀐 생각을 갖고 있으면서도, 그것이 뒤바뀐 생각임을 모르기 때문일 것이다.주변 볼 여유주는 멈춤상대방의입장에서 보고살핌과 자비표출 하면또다시 비극은 없을 것이렇듯 멈추어야 할 때 멈추지 못하면, 결과적으로 커다란 고난이 닥친다. 한 두 번이야 어찌 어찌 넘어갈 수 있지만, 늘 그런 행운이 따르지는 않는다. 예를 들어
벌(bhamara)은 부지런함의 상징으로 사용되는 경우가 많다. 부지런히 꽃에서 꽃으로 날아다니며 꿀을 모으는 것을 보면, ‘참, 열심히 산다.’라는 생각이 절로 든다. 그래서 경전에서도 벌을 통해 부처님께서 재가자들을 위해 가르침을 주신 내용이 나온다. 열심히 일하여 재산을 불리라는 것이다.이렇게 말하면, ‘무소유를 말하는 불교에서 어찌 재산을 모으라고 가르칠까?’라고 의아해 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무소유란 사실 집착을 하지 말라는 의미이지, 아무것도 소유하지 말라는 말이 아니다. 아무것도 갖지 않으면 생존 자체가 위협을 받
자식이 부모에게 바라는 것 가운데 하나는 아마도 가능한 많은 부를 상속해 주기를 바라는 것일 것이다. 한국은 예로부터 부모가 자식에게 부를 상속해 주는 것을 당연히 생각했다. 이는 제사문화와 밀접한 관련이 있으리라 생각된다. 흔히 말하는 사대봉사(四代奉祀)가 그것일 것이다. 그리고 만약 종손이라면 더 말할 나위도 없다.하지만 세상은 무상하여, 사회상도 많이 변하였다. 그 중의 대표적인 것이 바로 제사일 것이다. 요즘은 종교에 따라 제사를 모시지 않는 경우도 있고, 제사를 지낸다고 해도 예전보다는 훨씬 간소화되어 있다. 그에 따라 상
사람의 특징을 나타내는 많은 표현 가운데, 사회성에 초점을 둔 것이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인간은 사회적 동물(social animal)’이란 표현이다. 이 말은 인간은 독자적, 유일적으로 존재할 수 없고,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존재할 수 있다는 의미이다.갈애를 반려자 삼으면욕망의 노예를 만들뿐바른 생각 키워낸다면끌려가지 않을 수 있어우리의 일상을 보면 소통하는 사람은 한정되어 있어도, 어떤 방식으로든 관계를 맺는 사람은 일일이 헤아릴 수 없이 많다. 물건을 사던, 교통수단을 이용하던, 식당에 가서 밥을 먹던, 커피숍에서 커
경전에는 많은 천신들이 등장한다. 그 중에서 절대자, 창조자로 군림하는 신이 있는데, 바로 브라흐마(Brahma, 전재성 선생님은 이를 ‘하느님’으로 번역한다. 필자도 이 표현이 오늘날 사람들에게 쉽게 이해될 것 같아 그대로 사용한다.)이다. 바라문교에서는 우주의 창조자라는 위치를 갖지만, 불교에서는 수많은 신들 가운데 하나로 본다. 그리고 경전에서 그 브라흐마는 부처님께 귀의하고, 불법을 수호하고, 수행자를 외호하는 역할을 담당한다. 하지만 신들 중의 신(God of gods)의 위상을 갖고 설해진 경우도 종종 본다.부모님이 하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