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세상에 엄청난 홍수가 일어났다 무섭게 소용돌이치며 흘러내리는 흙탕물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사람들이 “사람 살려”를 외치고 있다. 이 위급한 상황을 보다 못한 예수님께서 구명보트를 노저어 사람을 살리기 위해 흙탕물을 뒤집어 써가면서 첫 번째 사람에게 접근해서 다급히 물었다. “너는 예수를 믿느냐?”그러자 첫 번째 사람은 고개를 흔들었다. “저는 마호멧을 믿습니다.”그러자 예수님은 젓고 있던 노로 그 사람의 머리를 치며 외쳤다. “너는 예수를 믿지 않았으니 지옥으로 가거라!” 예수님은 두 번째 허우적거리는 사람에게 다가가서 다시 급히 물었다. “너는 예수를 믿느냐?” 그러나 두 번째 사람도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저는 부처님을 믿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또다시 노를 들어 두 번째 사람을 사정없이 내려치
지난 해 11월에 경북 안동에서 처음 발견된 구제역이 경기도, 강원도, 충청도로 확산되어 이제 살처분되어 매장된 소와 돼지가 전국적으로 220만 마리가 넘었다고 한다. 또 지난 해 12월에 전라도와 충청도에서 시작한 조류독감으로 매몰된 닭과 오리도 400만 마리가 넘었다고 한다. 살처분되어 매장된 이들 가축들의 피맺힌 원한의 비명이 온 강산의 하늘에 가득하다. 또 이 가축들 자식처럼 길러오던 축산농가의 슬픔과 절망은 뭐라고 적절히 위로할 말을 찾을 수가 없다. 뿐만 아니라 이들 농가에게 지급된 보상비만도 2조원이 넘었다고 한다. 엄청난 국가적 재앙이라고 할 수 있다. 구제역으로 무참하게 살처분된 소와 돼지의 영혼을 제도하기 위한 천도재가 지난해 12월에 가평불교사암연합회에서 시작하여 월정사. 봉은사로 이어
“바보야, 문제는 복지야” 복지가 화두다. 지난해 6·2지방선거의 승패가 무상급식으로 갈라진 데 이어 내년에 치러질 제19대 총선과 제18대 대선도 복지로 판가름 날 것으로 보인다. 그 때문일까. 정치권은 복지를 놓고 힘을 겨루는 중이다. 복지화두를 선점한 건 민주당이다. 민주당은 지난해 전당대회를 치르면서 당헌에 ‘보편적 복지’를 못 박았다. 정동영 최고위원은 일찌감치 ‘역동적 복지국가’를 제안했고, 천정배 최고위원도 ‘정의로운 복지국가’를 내세웠다. 이에 뒤질세라 손학규 대표도 신년기자회견에서 ‘사람중심의 함께 가는 복지국가’를 제시했다. 이로써 차기 대선주자로 이름이 오르내리는 이들이 대부분 ‘복지국가’를 약속한 셈이다. 민주당은 새해가 되자마자 무상의료를 선언했다. 비급여의료의 전면 급여화, 간병
종교 간의 갈등, 종교와 정치권력 간의 갈등이 극에 달하고 있다. 대부분의 경우 불교는 다른 종교 또는 다른 종교에 편파적으로 힘을 보태준 정치권력의 공격에 피해를 입고 분노하거나 반발하는 피동적 입장에 있었다. 가해자로 나서지 않은 것을 자랑해야 할 것인가? 그렇게 자위하기에는 그 동안 불교계의 대응은 너무도 안이한 태도에 머물러 있었으며, 근본적인 문제 해결에는 등을 돌리고 있었다는 데 문제가 있다. 우선 타 종교, 또는 타 종교에 편파적으로 힘을 보태주는 정치권력에 대한 대응 양상을 보자. 잠시 발끈하여 성토하고 항의하다가 던져주는 떡 몇 개에 입을 다무는 일들이 반복되지 않았던가를 반성해야 할 일이다. 그렇게 되면서 불교계의 반발쯤은 별로 무서울 게 없다는 인식만 심어주고 만 것이 아닐까? 예를
새해다. 어제와 오늘의 시간차이는 24시간 하루이지만 어제는 구랍이고, 오늘은 새해다. 중생심에서 지어놓은 한 번의 ‘매듭일 뿐’이라 해도 어제 일은 지난 해 일이고, 오늘 일은 2011 신묘년의 일이다.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이맘때쯤이면 모든 것을 잊고 새롭게 출발하려 한다. 작심 3일이라 해도 한 번쯤 원력을 세워 본다는 게 그저 무의미한 일 만은 아닐 것이다. 스스로 파했던 원력을 잊지 않고 매 해 새롭게 다시 한 번 세워보려는 노력도 정진의 일편은 되리라. 새해 아침 두 손을 보았으면 한다. 올 한 해를 살며 이 두 손에 무엇을 들고, 잡아야 할지를 생각해 보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좀 더 많은 재물을 손에 담고 싶어 하고, 누군가는 좀 더 많은 책을 들어 보려 하고, 또 누군가는
겨울방학 동안에 점심을 굶어야 하는 어린 학생들이 어림잡아 전국에 70만 명에 이른다고 한다. 국회에서 한나라당이 날치기로 내년 예산안을 통과시키면서 아이들의 급식예산을 통째로 삭감해버렸기 때문에 결식아동급식비가 ‘0원’인데 비해 이른바 ‘형님 예산’, ‘국회의장 예산’, ‘사모님 예산’은 제대로 다 챙겼다는 게 야당들의 주장이다. 게다가 이번에는 전면 무상급식을 둘러싸고 서울시가 서울시의회와 서울시 교육청을 싸잡아 비난하는 대량광고전을 벌여서 또 한번 국민들을 슬프게 만들고 있다. 서울특별시 오세훈 시장은 지난 21일과 22일 주요 일간신문에 무상급식을 반대하는 두 가지 종류의 대형광고를 대대적으로 게재했다. 이번 무상급식을 반대하는 광고비만 해도 무려 3억8천만원에 이른다니, 그토록 엄청난 광고료로
눈을 떠보니 창밖에 하얀 눈이 내리고 있다. 메마른 잎을 떨쳐버린 앙상한 나무 가지에, 그리고 거기 아직 매달려 있는 시든 잎새 위에 소복이 눈이 쌓였다. 설국정토(雪國淨土)이다. 세모(歲暮)다. 이제 경인년이 우리를 떠나고 있다. 나뭇가지에 매달린 잎들은 아직도 떠나가는 해에 회한이 있나보나. 올해 불교계는 엄청난 시련을 겪었다. 봉은사 사태, 그리고 작금의 템플스테이 문제 등. 왜 이러한 불상사들이 발생했는가? 조용히 되새겨봐야 하지 않을까? 남을 탓하기 전에 우리가 반성해야 할 점은 없을까? 지두 크리슈나무르티는 세계에서 일어나는 어떤 일에도 우리 모두가 책임을 져야한다고 말했다. 불교계에서 발생한 모든 불상사들에 가장 큰 책임을 져야할 사람들은 바로 우리 불자들이다. 캐나다의 뮤지션 미쉘 르
12월이다. 1년의 마지막 달 12월, 흔히 한 해를 마무리 짓는 달이라고 하지만 12월은 새로운 한 해를 준비하는 달이어야 한다. 그래서 영국시인 테니슨은 12월을 “옛것을 울려 보내고, 새것을 울려 맞으라(Ring out the old, ring in the new.)”고 노래했을 것이다. 새로운 한 해를 준비하기에 많은 사람들이 너무 지쳐있는 것 같다. 어려운 경제상황도 힘 빠지게 만들고, 연평도 포격으로 불거진 전쟁의 위기감은 마음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국민을 좌절하게 만든 것은 ‘미친 국회’, ‘파산한 정치’이다. 예산안 통과를 언급한 대통령의 말 한 마디에 거대여당은 대화 노력을 포기하고 국회를 난장판으로 만들어버렸다. 천안함 사태에 이어 연평도 포격은 현 정부의 대북정책이 얼
불교계에서 인권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인권신장을 위해 노력해 온 사람으로 진관 스님을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그는 항상 검은 승복에 가사를 걸치고 거리를 누빈다. 이로 인해 인권문제하면 진관 스님이 연상되고, 그의 이색적인 모습이 떠오르게 된다. 그런데 소승이 금년 2월부터 불교계의 추천으로 국가인권위원회 인권위원으로 참여하게 되었다. 취임하자 처음에 기자들이 인권에 대해 물어왔다. 이 때 “인권(人權)은 불권(佛權)이다”고 하였다. 부처님께서는 단순히 인간만의 권리가 아니라 모든 중생의 권리를 인정하였고, 더 나아가서 “일체중생에게는 모두 불성이 있다”고 하셨다. 불성이 있으므로 우리는 부처가 될 수 있다고 한다. 따라서 “모든 중생에게는 부처가 될 수 있는 권리가 있다”고 하는 논리가 성립된다. 그래서
드디어, 해인사가 골프장 건설에 대한 입장을 내놓았다. 적어도 해인사 주지 선각 스님이 밝힌 입장이니 일단 해인사 입장이라 해 두어야겠다. ‘해인사는 골프장 건설에 대해 이렇다 저렇다 할 찬반 입장이 없다.’했는데 찬반 입장이 없다? 찬성할 입장도 없고, 반대할 입장도 없다는 이 뉘앙스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골프장 건설이 교계 이슈로 떠오른 1월로 잠시 돌아가 보자. 골프장 사업을 추진하고 있는 백운은 환경영향평가서 초안을 환경부와 국립공원관리공단 등 관계기관에 제출한데 이어 지역 주민을 상대로 한 사업설명회를 가졌다. 1월 한 달 동안 해인사 행보는 어떠했나. 언론을 통한 반대 입장은 고사하고 조계종 총무원에 골프장 건립 재추진 보고도 하지 않았다. 한 해가 저무는 시
10여년 전의 일이었다. 어느 얼빠진 스님이 천년고찰의 경내에 골프 연습장을 만들어 놓은 일이 있었다. 필자는 바로 이 ‘논설위원 칼럼’ 난에 ‘골프치러 다니는 얼빠진 수행자’들을 준엄히 비판하는 글을 썼다. 신문이 발간된지 며칠 후, 자칭 스님이라는 분이 항의전화를 해왔다. “스님은 운동도 하지 말란 말이냐?”는 게 자칭 스님의 항변이었다. 그래서 필자는 이렇데 대답했다. “아침저녁, 하루에 두 번씩만 부처님께 108배를 제대로 올린다면 운동부족으로 스님의 건강을 해치는 일은 없을테니, 골프 칠 생각 말고 108배나 제대로 올리시오.” 그때 필자에게 항의전화를 했던 자칭 스님은 그 후로도 계속 골프를 즐기고 계시는지, 아니면 필자의 충고를 기꺼이 받아들여 골프를 그만두고 108배를 열심히 올리고 계시
인생을 고해(苦海)라 한다. 인생 전반에 고통이 만연해 있다는 뜻이다. 이것을 불교에서는 일체개고(一切皆苦)라 하며 불교의 핵심인 사성제(四聖諦)의 첫째가 된다. 불교는 따라서 일체개고로부터 출발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석가모니는 깊은 자비심으로 끝없이 반복되는 생사의 고해에서 중생을 영원히 제도하는 방편을 베푸셨으니 소위 팔정도(八正道)이다. 이 팔정도를 크게 계(戒), 정(定), 혜(慧)로 구분하고 이를 삼학(三學)이라고 한다. 삼학의 첫째인 계는 소극적으로 말해서 악행을 금하는 것이고 적극적으로는 선행을 권장하는 것이다. 소위 칠불통게의 제악막작(諸惡莫作), 중선봉행(衆善奉行)에 해당한다. 왜 계를 지켜야 하는가? 계가 없이는 정을 이룰 수 없기 때문이다. 악행을 범하면 마음이 불안해져 평정한 상태
40년 전인 1970년 11월 13일, 서울 청계 6가 평화시장에서 젊은 노동자 한 사람이 자신의 몸을 스스로 불살랐다. 그의 이름은 바로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이다. 전태일이 일하던 손바닥만한 공장은 사람이 지나다니기 힘들 정도로 빽빽하게 재봉틀이 놓여 있었다. 공장주인은 작업공간을 최대한 이용하려고 한 층의 공간을 쪼개어 반으로 나누어 이층 작업장을 만들었다. 키가 작은 어린 사람들도 몸을 낮추고 다녀야 했다. 창문 하나 없었다고 한다. 어두운 공장 안은 늘 옷감먼지가 가득 차 있어서 기침소리가 그치지 않았다. 여공들은 그런 환경 속에서 하루 열 네 시간씩이나 일을 했다. 그렇게 고생하여 번 돈은 하루 세 끼 밥을 먹기에도 부족한 형편이었다. 물론 전태일도 마찬가지였다. 그들 모두 어려운 집안 살림을
봉은사가 공개한 개신교들의 ‘사찰 땅 밟기’ 동영상이 사회적 파장을 불러 일으켰다. 삼보를 ‘우상’, ‘사탄’이라며 ‘사찰 파괴’ 기도까지 올리는 동영상이 이것 하나만은 아니다. 그럼에도 이렇듯 큰 파문이 인 것은 봉은사라는 조계종 유수의 사찰이 법회를 통해 신도들에게 공식적으로 공개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불교계가 느끼는 충격은 사회적 파장보다 더하다. 이전에 공개된 동영상이 그들 식의 ‘구호’나 ‘비난’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던 반면, 봉은사가 공개한 동영상은 ‘비난’과 ‘구호’에 그치지 않고 직접 경내까지 들어 와 ‘행동’으로 옮기고 있음을 여실히 보여 주고 있기 때문이다. 당사자들이 봉은사를 찾아 사과했다고 덮어질 일이 아니다. 불교계에서의 ‘김영삼 정부’는 ‘종교편향’으로 직결된다. 왜 인가
부처님의 가르침은 밥 먹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대부분의 대승경전에서는 부처님께서 공양하시고 난 후에 설법이 시작된다. 그만큼 공양을 중시하고 있다. 각 나라마다 상황에 따라서 다소 차이는 있지만, 대부분의 불교국가에서는 발우공양을 원칙으로 하고 있다. 남방불교에서는 거리에 나가서 공양을 받지만, 대승불교권은 사원에서 공양을 지어서 대중이 함께 먹는다. 공양을 할 때 여법하게 하기 위해 식당작법이 있으며, 이를 외우면서 부처님께 불공을 올리듯이 한다. 특히 총림이나 선원에서는 발우공양이 기본이 된다. 그런데 요즈음 많은 사원에서는 발우공양을 하지 않고 상공양을 하며, 식당구조도 의자를 놓고 편안하게 밥을 먹을 수 있게 설치하고 있다. 어찌 보면 편리한 점도 있지만, 발우공양정신이 훼손되어 가는 것 같아
우리 불교계에는 오래전부터 “중벼슬 닭벼슬보다 못하다”는 말이 전해져 내려왔다. 이와 함께 “주지 자리 하나에 지옥이 삼천개”라는 말도 대대로 전해져 내려왔다. 출가수행자가 감투를 쓰려고 덤벼서는 안된다는 경고의 말씀이었다. 사실, 출가수행자인 스님의 감투에 무슨 대단한 권력이나 권세가 따르는 것도 아니요, 또 무슨 특별한 혜택이 주어지는 것도 아닌데, 출가수행자가 공연히 감투에 욕심을 내면 수행자로서의 본분과 사명을 어기고 속된 욕망과 시비와 분별과 잡된 일에 얽혀들어 추한 모습을 드러내게 되니, 아예 닭벼슬보다도 더 못한 중벼슬을 쳐다보지도 말라는 경고의 말씀이었다. 그래서 이 가르침을 제대로 실천한 옛 스님들은 대중공사에서 공평무사하게 당신을 주지로 결정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주지직을 맡지 않으려고
G-20 정상회의가 임박했다. 이명박 대통령은 작년 10월 이 회의 유치를 국민에게 보고하면서 이를 우리나라의 국격(國格)을 높이는 계기로 삼자고 제의했다. 또 우리는 반세기만에 산업화와 민주화를 동시에 성취해 선진국의 대열에 진입한 위대한 민족으로 자부할 만 하다고 했다. 지나친 자만도 안 되지만 지나친 자기비하도 바람직하지 않다. 정견(正見)은 언제나 양극단을 지양하는 곳에 있다. 우리는 G-20 정상회담이 서울에서 개최된 것에 자부심을 가져도 되리라 생각한다. 왜냐하면 이는 우리가 역경 속에서 피와 땀으로 이룩한 것을 전 세계가 인정한 결과이기 때문이다. 그럼 어떻게 국격을 높일 것인가? 사전에 국격이란 단어가 없다. 사람에게는 인격(人格)이 있다. 인격은 “사람의 품격”으로 사전에 풀이되어 있다.
인사청문회의 문제점이 드러나고 있다. 먼저 인사청문회가 정책검증과 능력검증보다는 도덕성 심의로 치우치는 경향이 강하다. 청문회에서 법적인 하자가 발견돼도 임명에 아무런 지장이 없어서 주요 공직자에 대한 인사검증기능이 유명무실해지고 있다. 청문대상자에 대한 정당한 비판과 지적을 마치 정치공세나 후보자를 괴롭히는 잘못된 행위인 것처럼 보도되는 것도 문제이다. 인사청문회가 국민의 관심에서 벗어난 것은 이명박 정부의 공직윤리가 약화되었기 때문이다. 인사청문회 때마다 탈세, 투기, 위장전입, 불법행위 등 도덕성과 관련한 의혹들이 무더기로 제기되었다.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정부 때에는 한 가지만 해당되어도 탈락했다. 그러나 청와대는 “문제가 없는 인사는 없다”며 부도덕 부적격한 인사를 강행했다. 이명박 정부 출범
지난 칼럼에서 “미래를 위한 맞춤형 인재를 양성하자”고 주장한 바가 있다. 그런데 우리 불교계를 살펴보면 참으로 많은 인재들이 있다. 개인적으로 스님들을 만나보면 대부분 한가지씩의 뛰어난 면이 있다. 도반들 가운데는 그냥 보아 넘기고 썩히기에 너무나 아까운 재주와 능력을 가진 분들이 많다. 겉으로 보면 모두가 같은 먹물 옷을 걸친 스님이지만, 각자가 타고난 재주와 능력이 다양하다. 그런데 이 ‘끼’를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 사진을 잘 찍는 스님이 있는가 하면, 붓글씨에 능하거나, 그림에 재주가 있는 분도 있다. 또 시를 잘 쓰거나 어학에 능한 분도 있으며, 식물이나 동물을 잘 기르는 분도 있다. 말을 잘하고 음식을 잘 만들며, 노래를 잘 부르는 스님도 있다. 운동에도 만능인 분이 있고, 학문에도 깊은
교리상 상생과 원융을 심도 있게 말하며 실천하고자 하는 종교 하나를 꼽으라면 단연 불교일 것이다. 매년 전해지는 교계의 신년 메시지가 이를 방증하고 있지 않은가. 상생과 원융 속에는 평등과 조화라는 핵심 코드가 자리하고 있다. 이 코드가 작동되지 않는다면 상생과 원융은 허울 좋은 ‘개념’으로만 존재할 것이다. 따라서 교계는 애써 ‘평등’을 부르짖지 않았던 듯싶다. 상생과 원융 속에 이미 녹아져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교계는 항상 사회를 향해 ‘인권’을 말해왔다. 부연하면 사회 속 ‘인권 유린’만을 감시하며 ‘각성하라’, ‘고쳐라’ 했던 것이다. 이러한 틀만 놓고 보면 교계가 암묵적으로 전제하고 있는 게 하나 있다. 교계 내 인권은 확실하게 보장되고 있다는 전제 말이다. ‘과연 그럴까?’ 최근 조계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