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세 때 불공 갔다 발심출가 운봉 스님은 백양사 운문암에서 깨달음을 얻은 이후 번뜩이는 선기로 후학들을 제접했다. 천하의 선객 혜월(慧月)스님으로부터 인가를 받은 운봉 성수(雲峰 性粹) 큰 스님은 1889년 음력 12월 7일, 부처님 성도일 전날 밤에 경북 안동에서 출생했다. 속가의 성씨는 동래 정(鄭), 이름은 성수였고 운봉은 법호이다. 13세 때 부친을 따라 경북 영천 은해사에 불공을 올리러 갔다가 발심하여 김일하 스님께 의지하여 출가 득도하였고, 23세에 범어사 금강계단에서 만하 스님으로부터 구족계를 받았다. 그 후 금강산, 오대산, 지리산 등 천하의 명산고찰을 찾아다니며 당대의 선지식들을 친견하고 고행정진하던 중 호남땅 백암산 운문암에서 홀연히 깨달음을 얻고 게송을 읊었다.
남편과 불화…시간 갖기 위해 절 찾아 처음접한 수행…고요한 분위기에 매료 수행을 시작하기 전 나의 삶은 고통과 욕망으로 가득 차 있었다. 남편과의 성격차로 다툼은 잦았고 삶에 대한 불만은 하루하루 커져만 갔다. 그러던 어느날 나는 남편에 한 가지 제안을 했다. 지금 이 상태로는 서로에게 도움이 되질 않으니 당분간 떨어져 생활할 것을 요구했다. 남편의 표정은 황당 그 자체였다. 불같이 화를 내며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주장했지만 남편도 별다른 해결책이 없다는 것을 자 알기에 이내 허락을 했고 대학을 갓 졸업한 딸아이에게 살림을 부탁하고 무작정 인연 있던 절로 길을 떠났다. 이왕 온 길 제대로 한번 불자가 돼보겠다는 생각에 절하는 법부터 새로 배웠고 부처님 공부도 하나씩 시작했다. 그렇게 절
인도에서 발생한 불교가 인도 이외의 땅에 전해질 때, 각 지역의 전통적인 문화와 조화를 이루면서 토착화되었다. 전통문화에는 종교와 사상뿐만 아니라 다양한 민간 신앙과 세계관이 내포되어 있다. 동남아시아에 전해진 남방상좌불교는 각 지역의 민간 신앙과 종교적 심성과 어우러졌다. 티베트에 전해진 인도 대승불교는 전통 신앙인 본교와 결합하면서 린포체 사상으로 승화되었다. 중국에 전해진 불교는 천태학과 화엄학 등의 고도의 교학불교를 잉태하였고, 노장사상의 영향을 받아서 가장 중국적인 불교인 선불교를 잉태하였다. 한국에 전해진 불교는 전통적인 샤마니즘과 습합되었으며, 중국불교의 영향 아래에 선불교를 한국불교의 정통불교로 정착시켜면서도 티베트불교의 진언 수행이나 염불 수행 등 폭넓은 수행의 전통을 아우르는 종합불
아침마다 참선·간경…주변서도 도움 이제부터는 도움주고 베푸는 삶 서원 밑 없는 절망에서 발견한 실낱같은 희망. 걱정과 근심이 앞섰지만 참선을 하면서 생긴 용기로 무언가를 시작해야겠다는 마음이 솟았다. ‘그래 한 번 다시 해보자’라는 각오로 식당을 운영하게 되었다. 금정선원에서 만난 대명화 보살님은 우리가 시작할 수 있도록 정말 많은 힘이 되어주셨다. 인생의 어려움에 처해 있을 때 모두가 떠나갈 것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이 분이 주신 용기와 희망은 ‘세상은 혼자만 잘 살 것이 아니라 모두가 합심해서 사는 것이다’라는 진리를 다시 깨닫게 해주셨다. 예전에 절에 다녀도 불교의 참된 진리를 이해하는 마음 없이 가곤 했지만 이때부터는 정성을 다해 매일 아침 6시, 『천수경』, 「화엄경 약찬게」를 틀어놓고
IMF로 사업 실패로 빚더미 올라앉아 절망서 참선 한 후 비로소 희망 가져 더웠던 올 여름, 구슬 같은 땀방울을 흘려가며 무더위와 싸우면서도 마음 한편으로는 시원한 가을바람을 기다렸나 보다. 오늘은 신선한 바람이 불어와 절로 힘이 났으니까 말이다. 그래도 지금의 나는 그 어느 때보다 행복하다. 그러나 지금의 행복이 있기까지 나도 많은 시행착오와 시련을 겪었다. 비록 보잘 것 없는 내 이야기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인생의 막다른 골목에서 희망을 잃고 방황하는 분들에게 이 이야기들이 조금이라도 힘이 됐으면 하는 바람으로 이 글을 쓴다. 나는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나 그런대로 좋은 집안으로 시집와 자상한 시어머니와 남편과 함께 풍족한 여유로움을 누리며 남부럽지 않은 삶을 살았다. 그러
숲속에 자리한 수행처에서는 매년 25번이 넘는 집중수행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 위빠사나 수행이 본격적으로 전해지기 시작한 1970년대 이후 미국불교의 중심 문제를 조셉 골드스틴과 함께 위빠사나 수행협회(Insight Meditation Society, 이하 IMS로 약칭)를 설립한 잭 컨필드는 3가지로 정리하고 있다.(Jack Kornfield, ‘Is Buddhism changing in North America’, Buddhist America : Centers Retreats, Practices, edited by Don Morreale, Santa Fe: John Muir Pub., 1988, pp. xi-xxviii) 1989년 ‘배리 불교센터’ 건립 첫 번째는 민주화(democ
버려진 이들 60명 가족처럼 돌봐 숱한 고난 경전 독송하며 이겨내 버려진 땅을 개간해 농사를 짓고 개를 사육해 마련한 수입으로 공동체 생활을 시작했다.‘불자가 운영하는 저렴한 복지시설’이 있다는 소문은 입에서 입으로 전해서 전국 각지에서 어려움을 호소하며 자기 가족을 맡아달라는 사람들이 줄을 이었다. 식구는 점점 늘어났다. 20명이 30명이 되고 30명이 다시 40명이 되더니 결국 60명이 넘는 이들이 이곳에서 생활하게 됐다. 장소가 협소해 컨테이너를 개조 목욕탕과 식당, 화장실 등으로 사용하다 보니 불법 건축물에서 환자를 수용한다며 관청으로부터 제재가 시작됐다. 당시의 고초와 어려움을 어찌 다 표현을 할 수 있을까. 다시한번 지인들의 도움으로 가까스로 부지를 마련하고 건물을 신축해 정식 절차를
고봉 스님이 충남 예산의 덕숭산 정혜사 만공 스님의 문하에 있을 때의 일이었다. 이 무렵만 해도 삼천리강토가 가난했던 탓에 덕숭산 정혜사의 절 살림도 늘 빈궁하기 그지없었다. 수행자는 많고 식량은 모자라니 그해 겨울 삼동안거가 걱정이었다. 그래서 정혜사에 있던 모든 수행자가 걸망을 메고 양식을 탁발해 오기로 하고 마을로 내려갔다. 그 후 어떤 분은 열흘을 탁발한 뒤 걸망에 곡식을 가득 짊어지고 돌아왔고, 또 어떤 분은 보름을 탁발한 뒤 곡식을 짊어지고 절로 돌아와 양식을 보탰다. 숭산(崇山) 법호 하나에 담긴 스승의 뜻 고봉 스님이 충남 예산의 덕숭산 정혜사 만공 스님의 문하에 있을 때의 일이었다. 이 무렵만 해도 삼천리강토가 가난했던 탓에 덕숭산 정혜사의 절 살림도 늘 빈궁하기 그지없었다.
조셉은 오늘날 미국에서의 위빠사나 붐을 주도한 대표적인 인물이다. 남방불교의 위빠사나 수행 전통은 20세기 초부터 미얀마와 태국에서 대중화되기 시작한다. 미얀마에서는 레디 사야도와 마하시 사야도의 스승인 밍군 제타완 나라다 사야도가 있었고, 태국에서는 아찬 문을 위시로 많은 수행승들이 제자들을 지도하면서 출가 수행승들 중심의 수행법이 점차 재가자들에게 적극적으로 전해지기 시작하였다. 본 「법보신문」의 ‘세계의 수행자들’에서 이 스승들을 소개해 왔다. 이번 호부터 이러한 남방의 수행법을 1970년대 중반부터 약 30년 동안 미국을 중심으로 한 서양에서 가르치고 있는 재가 수행지도자들을 소개하려고 한다. 먼저 소개하고자 하는 이는 조셉 골드스틴(Joseph Goldstein)이다. (조셉에 대한 자세
아이 못낳는 괴로움 속 자살시도 정신질환자 도우며 희망 되찾아 지금 나의 삶은 평안하다. 비록 규모는 소박하지만 노인요양원을 운영하며 요양원 식구들과 하루하루를 바쁘게 생활하고 있다. 매일 오전 4시에 눈을 떠 『금강경』 독송으로 하루를 시작해 저녁 12시에나 취침에 들 때도 『금강경』으로 하루를 마감한다. 그러나 예전의 내 삶을 돌이켜보면 나도 이런 때가 있었구나 싶다. 25년 전 나도 남들처럼 결혼을 했다. 겉으로 보기엔 여유있고 행복한 생활이었지만 정작 나는 그렇지 못했다. 결혼을 하고 6년이 지나도록 아이가 없다는 것은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는 용서받지 못할 죄였다. 이 병원 저 병원을 돌며 검사와 진료를 받아야 했고 그럴수록 몸과 마음은 점점 지쳐만 갔다. 결국 정신적인 문제까지 동반하
Q : ‘마음’과 함께 ‘마음의 작용’을 말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마음의 작용이란 무엇이며 어떤 기능을 하는 것입니까? A : 인간은 정신과 물질로 구성되었는데 물질은 오온의 색(色)이며 정신은 수(受), 상(想), 행(行), 식(識)을 말합니다. 그러나 정신을 세분화하면 식은 아는 마음이며 수, 상, 행은 마음의 작용이라고 합니다. 마음의 작용을 빨리어로는 쩨따시까(cetasika)라고 하는데 마음에 속하는 것, 또는 심소(心所)라고도 합니다. 마음의 작용은 항상 마음과 함께 일어나며 함께 사라집니다. 그래서 마음의 기능을 돕는 역할을 합니다. 또한 마음의 작용은 마음이 없으면 일어날 수가 없습니다. 마음이 있어서 마음의 작용이 있는 것입니다. 태어날 때의 마음을 재생연결식이라고 하는데 이
절 꺼리던 남편이 독실한 염불행자로 시어머니 등 가족도 염불하며 큰 가피 내가 부처님 법을 만나지 못했더라면 하루하루 지옥 같은 생활에 더 이상 견디지 못했을 지도 모른다. 특히 염불은 막연히 갖게 된 고정관념, 그중에서도 ‘금생에 열심히 수행해서 다음 생에는 남자 몸으로 태어나 출가해 참선하는 것’을 최고로 여기던 내 생각을 완전히 바꿔놓았다. 이 몸으로, 그것도 수미산 같은 업보중생의 몸으로 정토에 갈 수 있다는 말은 기쁨을 넘어선 충격이었다. 나는 열심히 염불하고 또 염불했다. 그리고 나를 염불의 길로 이끌어준 혜명화 보살님을 따라 경주 미타사에 가서 큰스님의 법문을 듣기도 했다. 처음 절에 간다는 얘기에 시큰둥한 표정을 짓던 남편도 나중에는 차로 경주까지 데려다 주었다. 그렇지만 법당에
권위주의 남편 탓에 하루하루가 고통 매주 3000배 하다가 아미타염불 시작 지난 96년 불교에 처음 입문 했을 때 처음 만난 노스님께서는 “너는 놋그릇과 같다. 놋그릇은 닦으면 닦을수록 빛이 난다. 잘 닦으면 극락에 갈 것이다”라고 하시며 『아미타경』을 한권 주셨다. 하지만 그때는 무슨 뜻인지 몰랐고 그저 덕담이라고 생각하고 잊어버렸다. 그리고 얼마 후 가까운 곳에 사시던 한 분이 해인사 백련암에 다니셨는데 그 분을 따라 매주 토요일마다 절에 다녔다. 108배도 해 본적 없는 나에게 무작정 3000배를 시작했고 매주 토요일 밤이면 삼천 배를 하면서 전생의 업장이 두터운 탓인지 따르는 고통이 이루 헤아릴 수 없었다. 같이 삼천 배 수행하던 분 중 성철스님께서 아끼시던 보살님의 아드님을 알게
1960년대 말부터 인도를 여행하던 서양인들에게 명상수행을 통해서 마음의 안정을 찾게 해주던 재가 스승들이 몇 분 있다. 본지를 통해 소개된 바 있는 S. N. 고엥까-지는 1969년부터 서부 인도를 중심으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한편 인도 북동부 지역에서는 미얀마에서 9년간 수행과 교리를 공부하고 돌아온 아나가리카 문인드라 바루아 법사(Achariya Anagarika Munindra Barua, 1914~2003)였다. 이 분을 사람들은 문인드라 선생님이라는 의미로 문인드라-지라고 불렀다. 문인드라 지는 방글라데시의 치타공 출신이었다. 방글라데시의 치타공은 12세기 이후 이슬람의 침탈로 인도불교가 모습을 감춘 후부터 현재까지 인도불교의 명맥이 이어져온 곳이었다. 문인드라 지는 인도불교의 전통을 이어온 바루
매일 금강경 15독…시어머니도 변화 “밥은 굶어도 금강경은 꼭 독송” 다짐 나는 매일 4시 30분경에 일어나 제일 먼저 금강경 1시간 독송으로 하루 생활을 시작한다. 출근해서 일과 시작 전, 점심, 그리고 저녁시간을 이용하여 15독까지 독송을 하기 시작했다. 많게는 20독을 넘길 때도 있다. ‘여시아문 일시불 재사위국 기수급고독원…’ 머리속에서 늘 금강경 글귀를 떠올리며 생활해 온지 2년이 지난 지금, 돌이켜보면 나는 너무도 많은 것을 부처님께 받았다. 금강경을 독송하면서 내가 입은 가장 큰 가피가 나의 병을 일찍 발견한 것. 언젠가 꿈에 넓고 넓은 하천에 서 있었는데 발아래 물이 아닌 뱀이 끝없이 꾸물거리며 기어가는 것을 보았다. 뱀은 업장소멸이라고 하였는데, 내 업이 그렇게 녹아내리고
만암 스님은 백양사에 주석하며 계율청정을 엄격히 해 칼날같은 승풍을 확립했다. 만암 스님은 흉년에 끼니를 굶는 백성들의 참상을 가장 마음 아파 하셨다. 그래서 당신이 해결해주실 수 있는 정도면 늘 백양사 안에서 도와주려고 애썼다. 개울에 보를 쌓게 하고 양식을 품삯으로 준 것도, 산에 나무 심는 일을 시키고 품삯을 양식으로 준 것도 모두 굶고 있는 농민들을 돕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한 해의 흉년이 아니라 2년, 3년 계속된 흉년은 만암 스님의 도움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창고 속 곡식 자갈과 뭐가달라 흉년이 거듭된 어느 해 보릿고개를 당해서 만암 스님은 소달구지에 자갈을 담은 가마니를 몇 개 싣고 어떤 부잣집을 찾아갔다. 그 부잣집 곡식창고 안에는 해묵은 벼가 가득 쌓여 있
고부 갈등으로 지옥 같은 10년 금강경 독송하니 ‘모든 게 내 탓’ 누가 그랬던가. 인생은 살아볼 만한 가치가 있다고…. 지금 내가 그렇다. 그러나 예전 결혼이란 새 옷을 입고 살아온 그 세월을 거슬러 돌아가 보면, 그것이 ‘정말 내가 살아온 모습이었던가?’ 하며 스스로에게 반문하게 된다. 겉으로 보면 나는 팔자 좋은 여자였다. 그러나 그 누가 알았으랴, 10년의 긴 세월동안 시집살이로 인해 시름시름 죽어가고 있다는 것을, 시어머니의 끊임없는 욕설, 억장 무너지는 억지, 욕심, 아들에 대한 지나친 집착. 그 많은 것들을 속으로 삭히려 했지만 나의 몸과 마음은 점점 병들어가고 있었음을 주변의 그 누구도 알지 못했다. 지금으로부터 2년 전인 2003년, 겨울도 다 끝나가던 2월이었다. 결혼을
1967년 인도로 돌아온 디파 마는 전문적인 수행처에서 행해졌던 전통적인 위파사나 수행법을 바쁘게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위해서 특별한 수행법으로 정교하게 바꾸어 가르쳤다. 디파 마는 마음챙김 수행은 말하고, 다림질하고 요리하고, 쇼핑하고, 아이를 돌보는 등의 모든 행동의 매 순간에 적용할 수 있다고 말했다. 디파 마가 말하는 마음챙김 수행의 전 과정은 ‘우리가 무엇을 하더라고 그것을 알아차리는 것’이다. 디파 마는 시끄러운 일상생활 속에서 수행의 힘이 발휘될 수 있다는 믿음을 굳게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그녀를 존경하는 어떤 사람은 “가정생활을 하는 이들의 수호성자”라고 불렀다. 정기적인 수행과 일상생활 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느냐는 질문에 디파 마는 “삶에서 수행을 분리할 수 없습니다.”라고
처음 3개월 고행이 삶의 즐거움 잡념 크게 줄고 늘 가피 속 생활 사경은 나에게 새로운 삶을 가져다주었다. 물론 처음 한지에다가 붓으로 선도 직접 긋고 그림도 그리고 글까지 쓰는 힘든 과정이었다. 붓을 잡아서 힘이 드는데다가 먹물조절이 어려워서 선 긋기는 고행 중의 고행이었다. 잠시 한눈이라도 팔면 선이 삐뚤게 그어지고 먹물이 퍼져서 글도 뜻대로 쓰이질 않았다. 도중에 몇 번씩이나 포기하고 싶었지만 이걸 못 이기면 다른 어려움은 어찌 이겨내랴 하는 생각으로 마음을 다잡았다. 그렇게 3개월 쯤 지나니 가장 고통스럽던 일이 가장 큰 즐거움으로 찾아왔다. 선과 그림도 자연스럽게 그려지고 먹물 조절도 적절하게 되어갔다. 사경은 마음을 한 곳에 모음으로써 다른 온갖 잡념들을 털어버릴 수 있도록 만들었다.
굶는백성 구하려 일시키고 양식 줘 어린 나이에 만암 스님이 출가한 1880년대의 우리나라는 말 그대로 초근목피로 연명하던 가난한 형편이었다. 더더구나 네 살에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열한 살에 어머니마저 별세했으니 만암 스님의 소년시절은 그야말로 궁핍의 연속이었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이 설움 저 설움 해도 배고픈 설움이 가장 크다”는 옛말이 있듯이, 만암 스님은 어린 나이에 혹독한 가난과 배고픔을 뼈저리게 겪었기에 훗날 스님이 된 후 흉년이 닥치면 가장 먼저 걱정하는 것이 굶주리는 백성들의 호구지책이었다. 근대화되기 이전의 우리나라 농촌은 아직 수리시설도 형편없었고, 영농기술도 발전되지 못했고, 비료, 농약, 농가구 어느 것 하나도 변변치 못했다. 그래서 걸핏하면 가뭄이 들어 농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