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경전과 팔리 주석문헌(청정도론 등)에 나타난 수행법은 상당히 다양하다. 다양한 수행법을 크게 나누면 사마타 수행과 위파사나 수행으로 나누는 것이 초기 및 남방 상좌불교를 포함한 불교의 일반적인 전통이다. 사마타 수행이란 4색계선과 4무색계선을 닦는 것으로 5신통 등을 얻는 이익이 있다. 위파사나 수행이란 무상(無常), 고(苦), 무아(無我)에 대한 통찰을 통해 열반을 얻는 것을 궁극적인 목적으로 한다. 청정도론 근거로 지도 파욱 사야도가 지도하는 사마타 수행과 위파사나 수행 방법은 전통적인 남방불교 수행론에 대한 해설서로 유명한 『대념처경』과 『청정도론』에 근거해 있다고 볼 수 있다. 특히 사마타 수행법에 대해서는 『청정도론』의 40가지 수행주제에 근거해서 지도하고 체험하고 있다. 40가지 수
경전 쓰다보면 번뇌 절로 소멸 피 뽑아 쓰듯 한 사경 77점 전시 하룻밤 꿈으로 내 인생은 완전히 뒤바뀌었다. 거들떠보지도 않았던 불교경전이 어느 순간 내 삶의 전부로 다가온 것이다. 나는 대부분의 시간을 사경에 집중했다. 경전을 쓴다는 게 참으로 묘해서 언뜻 작은 글씨에 한 없이 답답할 것 같지만 실제 쓰면 쓸수록 환희심이 샘솟고는 했다. 거룩한 부처님의 말씀이 내 손끝에서 구현되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속됨을 버려야 하는 사경의 세계는 한없이 광활해 보통의 노력으로 다가설 수 없는 아득하기만 한 경지였다. 나는 부처님께 끝도 없이 절했다. 나를 낮추고 낮추어 마침내 나조차 없어질 때 비로소 글씨가 성스러움 자체가 될 것임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금강경』, 『반야심경』,『법화경』,
밥 대신 죽, 김장독엔 소금 1950년 겨울, 한국전쟁이 한참 치열하게 벌어지고 있을 때였다. 피난지 부산은 말 그대로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다. 마지막 보루로 남은 부산으로 수많은 피난민들이 너도나도 모여든 때문이었다. 상기된 제자를 직접 업고 제자 고향으로 가는 동산 스님의 모습은 숭고한 '자비'로 다가온다. 마지막 피난지 부산으로 모든 피난민이 모여들자 먹을 것, 잠잘 곳이 턱없이 모자랐다. 나라의 운명이 풍전등화요, 모든 백성들의 형편이 아사직전에 이르니 사찰의 형편이라고 예외일 수가 없었다. 더더구나 왜색 대처승들이 사찰의 운영권을 손에 쥐고, 청정 독신 비구승들은 대처승들로부터 양식을 얻어먹고 사는 지경이었으니, 부산 동래 금정산 범어사의 선방인 청풍당의 살림도 말씀이 아니었다.
필자가 일본에서 유학하면서 연구의 일환으로 태국과 미얀마 그리고 스리랑카의 수행처를 방문하며 수행법에 대한 조사를 한지도 8년이 넘었다. 당시 방문했던 곳의 대부분은 본지를 통해서 소개하였고, 지금은 한 번도 만나거나 방문한 적이 없는 스승과 수행처를 소개하고 있는 형편임을 독자들은 양해해 주기 바라면서 이번에도 만난 적도 없는 스승을 소개하고자 한다. 따라서 독자들은 이 글을 주의 깊게 읽으면서 무엇인가 잘못 소개하고 있는 곳이 없는가 점검하여 혹 잘못된 부분이 있다면 경책해 주기 바란다. 청정도론 수행법 고수 미얀마의 수행처를 조사할 때, 양곤을 중심으로 필자의 이해의 역량하에 여러 수행처를 다니고 스승들을 통해 직접 가르침을 들을 수 있었다. 미얀마의 경우는 대부분의 수행전통의 중심도량이나
70년대 말 경찰생활하다 서예가로 10년 전 신비한 꿈꾸고 사경 시작 내가 붓을 잡은 지도 어언 30여년. 시인은 시에 갇혀 살고 소설가는 소설에 갇혀 살 듯 나는 붓에 나를 가두고 긴 세월을 살아왔다. 한 글자 한 글자 뼈를 깎아내듯 온갖 노력을 기울여 쓰고자 했고 또 때로는 희열에 젖어 글씨를 써 내려갔던 깨알 같이 많은 시간들. 번뇌를 덜어내기 위한 그 지난한 세월의 편린들을 모아 이제 곧 사경전시회까지 열게 됐으니 그 감회를 무어라 표현해야 될까. 내가 서예를 시작한 것은 비교적 늦은 나이였다. 청원이 고향인 나는 그저 남들처럼 평범하게 자라 나중에는 경찰관이 됐고 결혼도 했다. 그런데도 늘 무언가 이건 아니라는 생각이 문득문득 스쳐지나가고는 했다. 그러던 어느날 교통계에서 근무했던 탓에
백봉 거사와의 만남으로 수행에 박차 일년에 두 번 ‘7일 철야정진’ 십년째 대전 헌책방에서 우연히 발견한 백봉 선생의 책은 나의 삶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늘 큰 스승의 가르침에 갈증을 느끼던 나는 백봉 선생과 만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수소문 하고 다녔지만 인연이 아닌지 만나기가 쉽지 않았다. 그러던 79년 부산에 내려가 며칠 묵을 기회가 생겼다. 백봉 선생이 부산 보림정사에 있다는 말을 들었던 나는 부산에 내려가자마자 전화번호부를 뒤져 보림정사를 찾아 전화를 걸어 백봉 선생을 만나게 해 달라 간절히 부탁했다. 그리고는 그 다음날 아침 마치 꿈만 같았던 백봉 선생과의 만남이 이루어졌다. 백봉 선생은 나에게 예를 갖춰 대해 주었다. 현문과 우답이 몇 차례 오가고 나서 백봉 선생은 “
Q : 보임(保任)이란 무엇이고 왜 하는 건가요? A : 보임(保任)은 보호하고 맡긴다는 뜻입니다. 돈오를 얻은 사람이 일상사에서 혹시라도 마음이 유혹될까 조심하여 자성을 보호하는 것이고, 또한 행하고 일하고 걷는 것 등을 자성불에게 믿고 내 맡기면서 부처의 행을 익히는 것입니다. 원오(圓悟) 스님은 『심요(心要)』에서 ‘심(心)중에 한 물건도 남아있지 않으면 바로 목석과 같은 무심인(無心人)이 된 듯하여, 우치하고 둔한 것과 같아서 특별한 알음알이를 내지 않는다. 이렇게 기르고 길러서 생사를 관하되 심히 일없는 한가로운 것과 같아 문득 조주, 남전, 덕산, 임제와 더불어 동일한 견지에 서야 되니, 간절히 스스로 보임(保任)하여 이 무생무위(無生無爲)의 대안락한 경지에 머물도록 해야 하느니라.’
형과 아우 죽음 이후 참선 수행 시작 헌책방서 찾은 백봉 선생 책에 감화 61년. 아홉 살 되던 해였다. 동생이 아프다며 징징대는 소리를 들으며 학교에 다녀온 날. 여느때처럼 가방만 내팽개치고는 해가 저물도록 밖에서 뛰어놀다 집으로 돌아왔다. 집안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동생이 죽은 것이었다. 사람이 죽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제대로 알 리 없는 나이였지만 모든 사람들이 우는 것이 분명 슬픈 일이었고 함께 장난칠 동생이 없어졌다니 나에게도 큰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 충격에서 미처 헤어나지 못하고 있던 때 두 살 터울의 형마저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뭔가 이상했다. 얼마전까지만 해도 한 상에서 밥을 먹고 한 이불을 덮고 자던 형제들이 차례로 없어져 버린 것이다. 땅으로 꺼졌는지 하늘로 솟았는지
Q:오매일여(寤寐一如)를 얻어야만 깨달음이 가능한가요? A:그렇지 않습니다. 오매일여는 깨닫지 못한 수행자가 점진적으로 수행하는 과정에서 오는 한 현상일 뿐이지, 누구든지 꼭 이런 과정을 거쳐야 깨닫는 것은 아닙니다. 대표적인 예로 6조 혜능 스님은 아직 스님이 되기 전에 단지 홍인 스님의 금강경 강의를 한번 듣고 깨달았으므로 육조단경에 오매일여에 대한 말이 없고, 3조 승찬 스님이 혜가 스님을 만나서 깨달을 때도 역시 말끝에 즉시 깨달음을 얻은 것이지 오매일여를 성취한 후에 깨달은 것이 아닙니다. 만약 승찬 스님이 오매일여를 얻어서 깨달은 것이라면 신심명에 그런한 구절이 있어야 하는데 신심명 어디를 찾아보아도 오매일여에 대한 말은 없습니다. 또한 영가 현각 스님은 육조스님에게
몽골에서의 사불전시회로 수행에 박차 부모 은혜 되새기며 독거 노인 보살펴 2002년 첫 전시회를 앞두고 작품을 완성하느라 눈 코 뜰새가 없었다. 아이들 준비물 챙겨주는 것을 깜빡 잊기도 하고 남편 와이셔츠 다리는 일을 잊어 아침에 허둥대기 일쑤였다. 그러니 식구들의 볼멘소리가 터져나온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러나 막상 전시회장에 걸린 작품을 보고는 내 열정을 인정한다는 듯 아이들과 남편이 환한 얼굴로 꽃다발을 건넸다. 지금은 예전처럼 그림그리는데만 몰두하지도 않지만 식구들도 나의 수행을 전폭적으로 지원해 주는 덕에 수행이 우리 가족을 하나로 맺어주는 효자역할을 한다. 전시회는 가족들과의 화해 뿐 아니라 나에게도 크나큰 자신감과 용기를 심어 주었다. 특히 지난해 여름에 대한불교진흥원에서 개최한
Q:오매일여(寤寐一如)란 무엇입니까? A: 화두수행하면서 간절히 공을 들이면 어느 날 자동으로 화두가 들리는 경지에 이르게 됩니다. 이 단계는 화두와 친해져서 평상시 생각이 화두이고 화두가 곧 마음이 된 상태입니다. 자동으로 화두가 들리는 단계에 들어가려면 무엇보다도 먼저 간절한 의심이 있어야 합니다. 참선은 마음을 쉬어 동요하는 마음을 근절하게 하려는 수행입니다. 동요가 쉬면 만물의 이치가 저절로 드러나게 되는 것인데, 막상 마음을 쉬려하면 오히려 이 생각 저 생각으로 더 망상이 치열하게 일어나게 되므로 그 번뇌하는 마음을 중지시키고 한 곳으로 마음을 모으기 위한 방편으로 화두를 드는 것입니다. 그런데 화두가 의심이 안되고 다만 관(觀)하기만 하면 알려는 마음이 없는 것이므로 화두의 답도 나
화재로 아버지 잃고 생사의 갈등 사불 전시회 통해 가족들과 융화 사불수행은 서예를 즐겨 하시던 어머니의 권유로 시작하게 되었다. 응용미술을 전공한 나는 그림 그리는 데는 어느 정도 자신감에 차 있었다. 더군다나 이미 있는 그림을 따라서 그리는 것쯤이야 하는 생각에 처음엔 그리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그런데 하면 할수록 마음이 평안해 지는 것을 느꼈고 여느 미술 못지않게 정성과 창의력을 깃들여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다 사불을 더욱 극진한 마음으로 할 수 밖에 없는 사건이 일어났다. 95년 11월 어느 날 새벽이었다. 뜨거운 열기와 함께 숨을 쉴 수조차 없이 독한 연기가 방 안 가득 들어찼다. 전기누전으로 인한 화재였다. 남편, 아이들과 함께 정신없이 밖으로 뛰쳐나왔다. 그런데 그 때 나의 어
수행카페 회원들과 매월 백련암서 삼천배 능엄주 외니 두통없이 청명-꿈에도 하심 미숙아를 업고 다니며 8년을 아비라 기도에 참여시키는 엄마, 시각장애로 눈이 보이지 않아 책을 통째로 외우는 사람, 남편의 장애에도 불구하고 삼천배를 시키며 날마다 참회기도를 하는 사람. 세상엔 참으로 힘들게 사는 사람이 많았다. 온라인 카페로 만난 도반들과 매월 백련암에서 삼천배를 하고 또 아비라 기도를 하면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났다. 다들 나보다 힘들고 눈물 없이는 들을 수 없는 사연을 가진 이들이었다. 그들을 생각하니 도저히 게으름을 피울 수가 없었다. 그 도반들 덕에 더욱 정성껏 삼천배를 하고 아비라 기도를 올렸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내가 삼천배를 할 때마다 범상치 않은 꿈을 꾼다는 것이다. 지난해
성철 스님 감화로 능엄주 시작 수행카페 운영… 매일 500배도 서울에서 직장생활을 하다 고향으로 내려와 사업을 시작한 지도 십여년의 시간이 흘렀다. 처음에는 순조로웠다. 하지만 그것도 몇 년. IMF가 닥치고서부터 빚은 쌓여가고 희망이 보이지 않으채 몇 년이 흘러갔다. 어느 것에도 얽매이지 않으려고 시작한 자영업이었는데 돌아보니 자유로워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수입의 늘어나고 줄어듦에 더욱 매여있는 자신이 보였다. 그러다 결국 인생이 너무 허무하고 ‘이렇게 노력을 하는데도 왜 안되나’하는 자책감만 늘어갔다. 예전부터 늘 결정적인 순간에 행운은 나를 비껴나갔다. 공부를 곧잘 했는데도 학력고사나 고시에서 고배를 마신곤 했다. 그리고 직장시험에서도. 그런 와중에도 부처님과 인연은 끊지 않고
인터넷 명상 동호회 통해 첫 불연 진정한 리더는 마음 이끄는 사람 “진정한 리더는 어떤 사람일까요? 바로 자신을 이끄는 사람입니다” 내가 숱하게 외치는 말 중에 하나가 바로 ‘리더십’이다. 내가 지금 하는 일이 바로 성공하는 삶을 이끄는 리더십 만들기에 관한 교육을 하는 것이기도 할뿐더러 어릴적부터 어떻게 사는 것이 진정으로 멋진 삶인가에 대해 많은 고민을 해 왔기 때문이다. 명상을 하기 전 나에게 있어 성공한 삶이란 사회적 지위와 부를 거느린 삶이란 생각이 훨씬 컸다. 하지만 지금은 그에 앞서 자신의 마음을 바로 들여다보고 이끌수 있어야 진정한 승리자라는 생각이 지배적이다. 사실 나는 이제 막 참선수행을 시작한 초심자다. 마음공부를 하는 일이니 불교는 자연스럽게 관심을 갖고 있었지만
처음엔 재가자로서의 한계에 절망 이제는 화두 놓치지 않고 직장생활 직장생활을 하면서 화두수행을 한다는 것은 참으로 힘이 들었다. 특히 현재의 직업이 고객들과의 접촉이 많은 영업이다 보니 말을 많이 해야 했으며, 술자리 또한 많았다. 따라서 말이 화두수행이지 하루 30분도 정진할 수 없었다. 몽중일여나 숙면일여의 단계가 되지 못하면 깨달음을 얻을 수 없다는 어느 불교관련 책자에서 보았던 내용처럼 나 같은 사람은 시절인연이 안되어 도저히 깨달음을 이룰 수 없는 사람으로 생각되었으며, 영업이란 직업은 더욱이 깨달음을 추구하기에는 거리가 너무 멀어보였다. 출가에 대한 강렬한 열망이 몰려왔다. 가정이고 뭐고 모두 인연으로 돌리고 출가만 하고 싶어졌다. 그 만큼 깨달음에 대한 열망은 내 모든 것을 지배하고 있었
천성적인 다혈질…남들과도 자주 다퉈 이제는 외국 출장 중에도 화두 저절로 7년 전에 고인이 되셨지만 생전에 어머님의 가장 큰 걱정 중 하나는 성격이 너무 급하다는 것이었다. “넌 그 놈의 성질 때문에 될 일도 안된다. 제발 그 놈의 성질 좀 죽여라.” 이렇듯 어렸었을 적부터 성인이 되고 결혼을 해서도 급한 성격과 화를 참지 못하는 성격으로 인해 남들과 다투는 일이 참 많았다. 그리고 한바탕 싸우고 나면 늘 후회를 했다. 왜 못 참았을까? 도대체 나는 왜 이 모양인가? 그러다 결국 원래 타고난 천성이니 어쩔 수 없는 것으로 받아들였다. 그러던 어느날 인생의 큰 전환점을 안겨준 일이 생겼다. 바로 틱낫한 스님의 『화』란 책을 우연히 서점에서 발견하고 읽게 된 것이었다. ‘나도 이 놈의
큰스님 찾아 뵈며 신심 돈독히 키워 금강경 책자-독송 테이트 정기 보시 우리가 불교적 삶을 살고 수행을 하는 목적이 업장소멸과 지혜·복덕의 성취에 있다고 생각한다. 또 이 두 가지를 동시에 해결하고 충족하는 방법은 철저한 믿음을 갖고 『금강경』을 수지 독송하는 것이라고 확신한다. 사실 신심이 청정한 사람이라면 당연히 믿고 받아들이겠지만 어리석은 사람은 아예 들으려고 조차 하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누구에게나 이해되고 받아들여진다면 『금강경』이라 할 수 없을지도 모르겠다. 내가 지금까지 본 『금강경』은 어느 구절이 특별히 더 중요하다고 강조할 필요가 없다. 모든 구절이 서로 연결되어 있고 전체 맥락과 하나로 통하기 때문이다. 그 중 가장 마음 깊이 새기는 구절이 있다.
군복무 마치고 절에서 불교서적 탐독 스님 권유로 금강경 만나 독송 생활화 불교와 인연을 맺은 지 벌써 20여년의 세월이 흘렀다. 군 복무를 마치고 새봄 학기의 복학을 앞두고 한적한 농촌의 고향에 머무는 동안 부처님의 가르침을 배우고 싶어 동네 뒤편 산기슭에 있는 산사를 찾아간 것은 아마도 숙세의 인연이 있어 예정된 수순을 밟은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 후부터 나는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불교서적을 탐독하면서 마침내 참선이라는 것을 해야 하겠고, 화두참선수행에 대한 특별한 관심과 뜻을 두게 되었다. 나는 화두사상을 가진 재가불자의 한 사람으로서 지금까지 나를 화두참선이라는 정법(正法)으로 이끌어주신 이 땅의 무수한 선지식, 선사, 간화선 수행자들에게 깊은 경의를 표하며 설사 훗날에 지옥에 떨어져
어머니 여읜 뒤 불교에 다시 귀의 아내와 매일 새벽예불-108배도 또 다시 빠져든 방황 속에서도 3개월간 배웠던 부처님 가르침이 씨앗이 되었는지 틈 나는 대로 절에 가서 예불과 기도를 올렸다. 다시는 흔들리지 않겠다는 신념으로 서른아홉 늦은 나이에 자동차 정비사라는 새로운 길을 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또 한번 나를 휘청거리게 만든 일이 있었으니 바로 어머니의 죽음이었다. 어머니에 대한 집착과 인생의 허무함이 새로 시작하겠다는 결심 앞에 또 하나의 산을 만들어 버렸다. 그 즈음 어느 날 새벽이었다. 정신은 깨어 있는데 손끝 발끝 하나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 와중에 아내를 깨워 “어머님 영가를 모신 절의 주지 스님을 빨리 불러달라”고 이르고서는 의식을 잃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겨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