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8년 10월 8일 입적 살신성인, 정화 앞장 월산-탄성 스님 등 현대 이끈 후학 배출 “스님이 가신지 한세대가 훌쩍 지났지만 추모의 정은 해가 갈수록 짙어만 가고 있습니다. 그것은 스님의 덕화가 그만큼 광대무변 했기 때문입니다. 종단의 화합과 교단의 중흥에 기여하는 것이 스님의 유지를 받드는 것인 만큼 이일에 게을리 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지난 9월 30일 법주사 대웅전에서 진행된 ‘태정당 금오 대종사 36주기 추모다례’에서 몇 남지 않은 직계 상좌 중 한 분인 혜정 스님은 이 같이 금오스님을 추모했다. 금오 스님은 현대 한국불교의 구심점과 같은 인물이었다. 조계종의 수행가풍을 진작시키는가 하면 정화불사에 살신성인의 정신으로 앞장섰으며 수많은 후학들을 길러내 종단 발전에 이바지했
1천m가 넘는 장대한 연봉이 날개를 펼친 독수리와 닮았다는 영축산 기슭에 자리잡은 극락암의 대나무 밭과 소나무 숲이 영축산과 이룬 조화는 보는 이에게 감탄을 자아냅니다. 극락영지 위에 놓인 무지개다리와 영월루의 조화는 극락선원의 선풍을 크게 일으킨 경봉스님의 안목을 짐작케 합니다. 영월루 좌측 여여문의 편액글자는 경봉스님의 소문난 서예솜씨를 보여줍니다. 스님이 조실로 계실 때 초하루 법회 때면 늘어선 차량 행렬이 통도사 산문까지 십여리를 넘었다고 합니다. 스님이 세운 호국선원의 선풍은 국내 여러 선원의 모범으로 손꼽습니다. 경남 양산 통도사의 암자인 극락암은 뛰어난 명당터로서 큰 스님 세 명이 나온다고 하는데 경봉스님 이후 남은 두 자리 때문에 하안거나 동안거 때가 되면 많은 스님들이 한
불교 서적의 유통구조를 획기적으로 개선하고 여러 개의 불교 출판사가 공동으로 출판 작업을 기획하고 제작하는 등 침체의 늪에 빠진 불교 출판의 활성화를 꾀하기 위한 불교 출판인들의 모임인 ‘불교출판문화협회’가 9월 20일 출범했다. 장경각, 민족사 등 20여 불교 출판사 대표와 관계자들은 이날 창립 총회를 갖고 ‘불교출판문화협회’를 설립했다. 초대회장에 장경각 대표 원택 스님을, 수석부회장에 민족사 윤창화 대표를 각각 추대했고 부회장은 불서총판 운주사 임희근 대표가 맡기로 했다. 불교출판문화협회는 불교 출판 전문인력을 양성하고 불교 출판 문화 사업의 디지털화, 불교 독서 인구의 증대 및 독서 문화의 진흥을 위한 사업 등 불교 출판을 살리기 위한 다각적인 노력을 기울인다. 남수연 기자 namsy
1996년 10월 1일 입적 효봉 스님 문하 수행 73년 염불만일회 결성 재소자 포교 앞장 “늘 내 몸은 낮추고 다른 사람을 높이고 돕는 하심(下心)을 생활화해야 합니다. 그런 마음이 꼿꼿하지 못하면 겁이 생겨 극락세계에 가지 못합니다. 그리고 작은 선이라도 모이면 큰 선이 된다는 걸 명심하시어 염불 외에도 착한 일을 많이 하십시오.”(수산 스님 ‘유언 법어’ 중에서) 수산 스님은 평생을 염불 수행으로 일관하면서 정토신앙의 전파와 정법 수호를 위해 몸을 아끼지 않은 인물이었다. 스님은 철저한 지계(持戒)를 통해 수행자로서의 모범을 보이면서 대중들에게 염불을 통해 생사해탈 할 것을 강조했다. 1906년 경남 함양에서 태어난 스님은 뛰어난 한학을 바탕으로 한의학을 공부했으며, 한국
“자기 정체성이 완전히 정립되지 않은 사춘기 시절에 하나의 종교를 맹목적으로 따르기보다는 다양한 종교를 이해함으로써 타 종교에 대해 관용의 마음을 지니는 것이 중요합니다.” 성남의 대안학교인 이우중학교 철학교사 이현영(44·사진)씨는 2학년 학생들을 대상으로 ‘종교 프로젝트 수업’을 진행하고 있다. 한 학기 동안 진행되는 이 수업은 불교, 개신교, 가톨릭, 이슬람교 중 학생이 원하는 종교를 선택해 각 종교가 지닌 역사와 문화 예술 사회성을 다른 과목과 연계해서 연구·발표하는 심층수업이다. 일부 개신교계 학교의 종교 강요가 사회적 이슈로 떠오르고 있는 시점에서 이번 종교 수업은 “학생들에게 올바른 종교관을 심어주고 또 학교 내에서의 종교 수업을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해 고민하는 많은 학교들에 대안
1989년 9월 28일 입적 정화 당시 할복 위법망구 실현 수행자 실천궁행 강조 지효 스님은 용성, 동산, 동헌 스님의 뒤를 이어 범어사의 선 수행가풍을 이은 근·현대 대표적 선승으로 추앙 받는 인물이다. 평생을 전국 제방의 선원을 돌며 용맹정진 하며 후학들에게 모범을 보이는가하면 재가자들에게는 언제나 “헛된 욕망과 육체에 대한 애착심에서 벗어나 모든 중생을 부처님의 모습처럼 생각하는 자비관을 실천해야 할 것”을 강조했다. 특히 스님은 수행에 전념하면서도 1950년대 비구·대처간의 분규 등 종단의 중대사가 발생하자 직접 나서 종단의 안정을 이끄는데도 공헌했던 인물로 더욱 알려져 있다. 1909년 평안남도 정주 운흥리에서 태어난 스님은 생사의 문제에 깊이 고민하던 중 불가에
2003년 9월 22일 입적 망월사 30년 결사 참여 만공 스님 문하서 수행 고송당(古松堂) 종협(宗協)스님은 봉은사 조실 석주 스님으로부터 “일생동안 선원에만 다니며 선(禪)만 한 조계종 최고의 수행자”라고 칭송받을 정도로 평생을 수행에만 몰두한 ‘선승 중의 선승’으로 평가받는 인물이다. 고송 스님은 1906년 10월 10일 경상북도 영천군 신령면 부산동 726번지에서 경주 김씨 김재수의 아들로 태어났다. 속명은 김외룡(金外龍)이며 법명은 종협(宗協), 호는 고송(古松)이다. 스님은 15살 되던 해인 1920년 10월 15일 팔공산 파계사에서 상운 스님을 은사로, 월하 스님을 계사로 사미계를 수지했다. 3년 뒤인 1923년 4월 15일에는 도봉산 망월사에서 용성 스님을 계사로 구
1983년 9월 10일 입적 69년 대각회 설립 전북 종무원장 역임 교단 안정에 헌신 1969년 9월 11일. 3·1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이자 대중불교운동을 전개했던 용성 스님의 사상과 업적을 기리기 위한 재단법인 대각회가 종로 봉익동에 문을 열었다. 일제시대 수많은 옥고를 겪으면서도 한국불교의 근대화를 위해 역경 사업 등을 펼치며 중생 교화에 앞장섰던 용성 스님의 뜻이 비로소 세상 밖으로 나오는 순간이었다. 용성 스님 입적 30여년 만의 일이다. 이 자리에 참석한 동헌 스님은 비로소 무거운 짊을 덜 수 있었다. 이제야 스승의 유지를 받들고 실천할 수 있게 됐기 때문이었다. 동헌 스님은 용성 스님의 제자로 90 평생을 운수 납자의 삶으로 일관하면서 스승의 유지를 받들며 대각교 사상
27일 동국대에서 영결식 2004년 8월 24일, 무애 서돈각 박사가 기세(棄世)했다. 향년 85세. 서 박사의 숙환으로 별세했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일원동 삼성의료원 영안실에 마련된 서 박사의 빈소에는 불교계를 대표하는 수많은 인사들의 조문이 줄을 이은 것은 물론 생전에 이룬 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한 이름 모를 재가불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또 빈소에 모인 재가불자들은 “수행과 포교의 모범이었던 선지식이 떠났다”며 애도의 눈물을 쏟아냈다. 무애 서돈각 박사는 사회에서는 상법(商法)의 일인자요, 불가에서는 신행(信行)하는 생활불자의 으뜸 인물로 손꼽혔기에 근현대 재가불자들의 대표적 사표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해방이후 한국 법학계의 기틀을 다지고 수많은 대학에서 후진을 길러낸 원로 법학자
" 기득권을 축소하고 책임은 강화하려는 중앙종회의 변화 조짐 관심 갖고 지켜볼 것" 취재 차 또는 종단 돌아가는 현장을 직접 보고자 종회 회의장을 찾을 때마다 느꼈던 감회는 주로 ‘과연 이 종단에 희망이 있는가’ 라는 일종의 회의감이었다. 각 교구에서, 또는 각 분야에서 내로라하는 스님들이 모여 진행하는 회의의 수준은 으레 실망을 자아내기에 충분한 것들이었기 때문이다. 특히 불교 전체의 이익보다는 종단의 이익을, 종단의 이익보다는 파벌의 이익을 아무런 부끄럼 없이 앞세우는 모습을 보면서 안수정등의 교훈을 떠올리곤 했었다. 계파의 이익 또는 개인의 영달을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거나 말과 행동이 다른 결과가 빈번하게 표출되고, 때때로 신중에 신중을 기해야 할 사안을 너무도 가
1984년 8월 23일 입적 삼보회 설립 인재양성 64년「대한불교」인수 덕산 이한상 거사는 60∼70년대를 거치는 동안 재가불자로서 한국불교의 현대화를 견인한 대표적인 인물이다. 64년 삼보회와 삼보장학회를 설립해 한국불교를 이끌 인재 양성에 누구보다 앞장섰으며 재가불자들의 올바른 신행 활동 정립에도 선구적인 역할을 담당했기 때문이다. 또 자금난에 어려움을 겪던 「대한불교신문」을 인수해 불교언론 발전의 초석을 다졌으며 세계불교도우의회(W.F.B) 상임부회장으로 선출돼 한국불교의 세계화에도 앞장섰다. 덕산 이한상 거사가 한국불교의 발전을 위해 괄목할 만한 활동을 시작한 것은 1960년대. 당시 한국을 대표하는 건설회사였던 풍전산업주식회사와 대한전척공사의 설립해 기업인으로 명성을 날
1977년 8월 22일 입적 만해 스님 유일한 제자 당대 최고의 화엄법사 춘성 스님은 만해 한용운 스님의 유일한 제자라는 이력보다는 거침없는 언행과 행동, 평생을 무소유로 일관했던 스님으로 세상에 더 회자됐던 인물이다. 특히 스님은 ‘욕쟁이 스님’이라는 별호를 얻을 정도로 수행자로서 차마 입에 담지 못할 음담패설을 즐겨했지만 그럴수록 그에 대한 비판보다는 오히려 수많은 운수객들이 그의 법문을 들으러 더 몰려들었다. 스님의 한마디 한마디가 모두 삶의 골수를 찌르는 촌철살인(寸鐵殺人)과 같은 법문이었기 때문이었다. 춘성 스님은 1891년 3월 강원도 설악산 설악동에서 태어났다. 아홉 살 되던 해 어머니를 따라 우연히 신흥사를 찾은 스님은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법당에 모셔진 불상을 한동안
만해 스님 시 정신 이어 사찰 전답 소작인 분배 ‘신앙이 곧 시’ 강조 ‘나도 푯말되어 너랑같이 살고 싶다/ 별 총총 밤이 드면 노래하고 춤도 추랴/ 철 따라 멧새랑같이 골속골속 울어도 보고.…’(나도 푯말되어 살고 싶다 中) 지금으로부터 꼭 14년 전인 1989년 8월 31일은 불교계 원로이자 한국시조문학계의 큰별이었던 철운 조종현(1904∼1989) 스님이 입적한 날이다. 스님은 구한말 격동기에 태어나 불교와 시를 등불 삼아 역사의 소용돌이를 헤치며 시처럼 살다가 극락정토로 떠난 것이다. 가람 이병기, 노산 이은상 선생의 뒤를 이어 현대시조의 중흥에 있어 선구적인 역할을 했던 종현 스님은 승가교육과 경전 번역에도 큰 관심을 기울여 많은 업적을 남기기도 했다. 190
85년 9월 비구니회 출범 1985년 9월 5일 울산 울주군 가지산 석남산에 승가는 물론 세간의 이목이 집중됐다. 한국불교전래 1600여 만에 명실상부한 비구니회가 본격 출범하기 때문이었다. 이미 60년대 말 몇몇 비구니 스님들에 의해 ‘우담바라회’가 구성되긴 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어느덧 활동은 유야무야해진 상태였다. 이날 모임의 초대회장으로 선출된 이가 바로 가야산 보현암 혜춘 스님(慧春, 1919∼1998). 평소 비구니의 사표로 칭송받던 스님이 회장으로 추대된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그동안 알게 모르게 푸대접 받던 비구니들에게 늘 용기와 희망이 되어 주었던 까닭이다. 초대 회장을 맡은 혜춘 스님은 비구니들의 정체성의 확립과 종단내 위상을 높이는데 온갖 노력을 기울였다.
75년 9월 9일 입적 지난 8월 31일 서울 남산에 위치한 대원사에서는 고 장경호(1899~1975) 거사를 뜻을 기리기 위한 작은 추모행사가 열렸다. 입적 28주기를 맞아 가족들과 후학들이 함께 한 이날 행사에서 송석구 전 동국대 총장은 “거사님은 재가불자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온몸으로 보여준 위대한 선지식”이라며 장경호 거사를 회상했다. 장 거사는 일제 암흑기를 살며 역경에 굴하지 않고 동국제강 등 기업을 통해 한국경제발전의 기틀을 마련했으며 대원회와 대한불교진흥원을 비롯해 오늘날 불교방송이 있도록 토대를 마련한 입지적인 인물이다. 1899년 9월 10일 부산 동래에서 태어나 17세 때 동생의 죽음을 지켜보며 불교에 귀의했다는 그는 한 평생 재가수행자로의 삶을 일관되게 살
85년 9월 16일 입적 백봉 김기추(1908~1985) 거사는 한국의 유마거사로 추앙받는 인물이다. 그는 50세를 훨씬 넘어 불교에 입문했지만 용맹정진으로 큰 깨달음을 얻었고, 이후 20여 년간을 후학지도와 중생교화에 힘쓴 위대한 선지식이다. 일제시대와 한국전쟁 등 격동의 세월을 살아야 했던 사람치고 파란만장한 삶을 살지 않은 사람이 누가 있을까마는 백봉 거사만큼 고단한 삶을 살았던 이도 드물다. 1908년 부산에서 태어난 그는 1923년 부산제2상업학교에 입학, 뒤늦게 설립한 일본계 학교를 ‘부산제1상업학교’라고 하는데 반발해 동맹휴학을 주도하다 퇴학당하며 수난의 세월은 시작된다. 20세 때 부산청년동맹의 3대 위원장직을 맡아 독립운동을 하다가 1931년 형무소에 수감되고, 만기출소 후
1961년 9월 28일 입적 고봉(1890∼1961) 스님은 현대 한국 선불교를 대표한다. 평소 철저한 무소유를 실천한 고봉 스님은 근대 선불교를 이끈 선지식이며, 쇠망하는 국운을 만회하려 애썼던 위대한 독립투사로 그 명성이 드높다. 고봉 스님은 1890년 9월 29일(음력) 대구에서 태어났다. 부유한 집안 자손으로 태어나 여러 학문을 두루 접한 고봉 스님은 당시 젊은 지식인들이 그러했듯 사회적 혼란을 평정할 독립운동가가 되기를 마음먹는다. 그리고 독립운동으로 인해 행여 집안에 누를 끼칠 것을 염려해 혈족과의 인연을 끊을 수 있는 출가를 결심한다. 1911년 9월 고봉 스님은 양산 통도사에서 혜봉 선사와의 만남으로 불가(佛家)와의 인연을 맺는다. 그러나 혜봉 선사와의 만남으로 그의 입산
1927년 10월 12일 입적 “그대의 일찍 가심은 그대의 앞날을 위하여 애통함을 금할 수 없거니와, 황폐한 우리 불교계를 위하여 더욱이 비탄을 억제할 수 없구나. 석원(釋苑)에 가을이 늦어 불일(佛日)이 스러지려할 때 그대조차 입적하니, 등을 이을 자 그 누구며 빛을 돌이킬 자 그 누구냐.”(재일본 조선불교청년회) 범란 이영재(1900~1927) 스님이 스리랑카의 한 사찰에서 운명을 달리했을 때 조선의 불교계는 비탄에 빠졌다. 조선불교중앙교무원은 물론 국내외 조선불교청년회들은 고인의 극락왕생을 기원하는 추모법회가 잇따라 개최했으며, 좥불교좦 좥금강저좦 좥조선불교좦 등 불교지에서는 그를 추모하는 특집 글들이 게재됐다.
인도철학 대중화 견인 1986년 10월 14일 입적 혜안 서경수(1925∼1986) 박사는 긴 수염과 반짝이는 대머리의 외모만큼이나 학계에서는 당대의 기인으로 평가받는 인물이다. 국내 최초로 인도 네루대에서 5년 동안 한국의 언어, 역사, 문화 등 한국학을 가르쳤던 인도철학자였으며 이를 바탕으로 인도불교철학을 국내에 대중화시킨 장본인이었다. 또 종교간의 대화가 전혀 없던 70년대 후반 불교와 기독교간에 ‘종교대화’를 처음으로 시도함으로써 동서양 종교의 비교연구에 선구자적 역할을 담당하기도 했다. 1925년 함경북도 경성에서 태어난 서 박사는 나라 잃은 일제시대를 살아가는 자신에 대해 늘 개탄하며 ‘우리 고유의 것을 지키겠다’는 민족 주체성을 가슴 한구석에 키우며 학창시절을 보냈다. 일
88년 10월 17일 입적 평생을 병마와 싸우면서도 불교학의 끈을 놓지 않았던 병고(丙古) 고익진 교수는 한국불교학이 초기불교에 눈을 뜨게 한 선구자적인 역할을 담당했던 인물이다. 초기불교에 대한 연구가 미천했던 1970년대 한국불교학계에 혜성처럼 등장한 젊은 학자 고익진은 그의 석사 논문 ‘아함법상의 체계성 연구’를 통해 불교를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아함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치면서 불교계에 신선한 바람을 몰고 왔다. 이후 그는 한국불교가 가지고 있는 병폐에 대해 날카로운 지적과 함께 새로운 대안을 제안함으로써 한국불교가 나아가 할 방향을 제시하기도 했다. 1934년 전남 광주에서 태어나 53년 전남대 의과대에서 의학을 공부하던 고 교수는 대학에서 갑작스럽게 발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