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에는 승복을, 저녁엔 교복을 입었다. “난 스님인가, 학생인가?” 빗속을 걸었다. “그래, 난 스님이야!”어머니가 그의 등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스님, 공부 열심히 하시게.” 아이들이 버스타고 산길을 걸어 산사를 찾아왔다. “경운기 스님 보고 싶어서. 도량에서 놀고 싶어서. 그냥 오고 싶어서….” 눈물이 흘렀다. 지역 주민들에 보답하고 싶어 산사음악회를 열었다. 폭발적이다. 1만 신도에 연간 참배객 50만.나누자. 매일 봉사하고 공부하자. 향기가 날 것이다. 9세 소년이 ‘삼촌스님’ 손을 잡고 출가했다. ‘이 몸이 얼마나 살겠기에 일생을 닦지 않겠느냐’는 원효 스님의 말 한마디도 모르던
▲현엽 스님 부산 명지동에 자리한 청량사. 포구나무를 스쳐 온 바람이 청량하다. 청량사는 지금의 이름이고 이전에는 연화사였다. 그 이전에는 장유암 교당으로 불리어졌는데 그만한 연유가 있다. 청량사가 위치한 명지동 사취등(沙聚登) 마을은 1800년 중반까지도 존재하지 않았다. 지금의 청량사터 300여평만이 바다 위 섬처럼 떠 있을 뿐이었다. 낙동강 모래가 쌓여 형성된 모래톱으로 존재했던 것이다. 당산나무라 불리는 포구나무는 절이 세워지기 100년 전부터 모래톱과 함께 존재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1864년과 1865년에 변혁이 일어났다. 두 해에 걸쳐 일어난 대홍수와 산사태가 바다를 육지로 바꾸어 놓은 것. 지금의 대동, 대저,
▲노현 스님 ‘…아이로서 출가하여 귀와 눈이 총명하고 말과 뜻이 진실하며 세상일에 물 안 들고 밝은 행실 닦고 닦아 서리 같은 엄한 계율 털끝만도 어기리까….’ 이산혜원 선사 발원문 중 한 구절이다. 동진출가(童眞出家)한 스님의 경우 장점은 세상일에 물 안든 것이리라. 물론 이산혜원 선사의 뜻을 좀 더 헤아린다면 ‘아이로서 출가’는 꼭 지금의 동진출가만을 뜻하진 않을 것이다. 출가한 사람은 모름지기 어린마음, 순진무구한 마음으로 출가의 길을 걸어야 한다는 ‘당부’이리라. 그렇다 해도 어린 나이에 출가한 분들의 인연, 즉 불연은 매우 깊다고 봐야 한다. 전생에 수행승이었을 것이라 말하는 연유가 여기에 있을 터. 노현 스님의 출가
인생의미 찾다 화엄사 발길 금오스님 법문에 17세 출가 달마 그리려 처음 붓 잡은 후 91년부터 작품 10만장 보시 ▲정현 스님 마곡사 일주문을 지나 ‘백범 김구 선생 명상길’을 따라 올라가다 보니 두 갈래 길이 나온다. 왼쪽 길, 마을로 가는 길이다. 오른쪽 길, 산 중턱으로 오르는 길이다. 정현 스님이 머무는 ‘화림산방(畵林山房)’은 분명 오른쪽 길 어딘가에 있을 터. 오르고 또 오르니 길 끝나는 곳에 작은 암자가 다소곳이 자리하고 있다. 여기다! 예쁘게 생긴 목인(木人)이 암자를 찾은 이에게 허리 숙여 인사를 건넨다. “날마다 좋은 날 되소서!” 중국 선사 운문(雲門) 스님이 제자들에게 물었다.“안거
종단 개혁 선도·분규 수습 후실상사로 돌아가 화엄에 천착 이념·계층·정치경제 갈등 대립치유 해결 고민하다 ‘생명’화두 갈등과 소유, 상생과 존재! 우리는 두 갈림길에서 서성이고 있다. 어쩌면, 갈등과 소유에 치우쳐 상생과 존재를 이상과 관념의 상자에 집어넣어 놓고는 외면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사회의 한 단면이라면 그나마 위안이 될 터인데 계층, 이념, 정치, 경제 갈등이 계속 증폭 되고 있는 현상을 보면 전면으로 보인다. 그냥 이대로 방치할 것인가. 그 누구도 ‘그래서는 안 된다’고 한다. 그럼에도 뾰족한 답은 없다. 이 문제를 직시한 스님이 있다. 1994년 조계종 개혁 불사를 이끌고, 1998년 조계종
1·4후퇴 마지막 배 승선 위해원산 앞 겨울바다에 뛰어 들어 오대산 적멸보궁 용맹정진 후日·美· 캐나다로 유학 대장정 ▲ 인환 스님 ‘무(無)’ 화두로 유명한 조주 스님은 승찬 스님의 ‘신심명’ 첫 구절 “지극한 도는 어렵지 않으나 오직 취사선택을 피할 뿐이다”는 ‘지도무난 유혐간택(至道無難 唯嫌揀擇)’을 무척이나 좋아한 듯하다. ‘벽암록’ 제2칙 ‘조주의 명백함도 필요 없다(趙州不在明白)’에서 보이듯 ‘지도’를 들어 많은 납자들을 제도하기도 했고, 무엇보다 자신이 머문 암자 이름을 ‘지도암(至道庵)’이라 한 데서 그 연유를 엿볼 수 있다. ‘신심명’의 첫 구절이 유명하듯 영가 현각 스님의 ‘증도
15세 출가 후 46년 수행 한 길해제 때면 ‘선재난야’ 정법지도 세 평 토굴서 17년간 수행 정진파초·다람쥐·새·달·별이 도반 ▲ 하동 연암토굴 도현 스님 2010년 1월 ‘조용한 행복’(뜰 출판)이라는 책 한권이 세상에 나왔다. ‘조용한 행복’은 적멸위락의 또 다른 표현일 것이라는 상념이 드는 순간 부제에 눈길이 꽂혔다. ‘세 평짜리 오두막 수행자가 보내는 산중편지!’ 첫 장을 열자 도현 스님의 짧은 이력이 소개되어 있었다. 열다섯 나이에 덕명 스님을 은사로 범어사에서 출가했고, 쌍계사 금당선원 선덕을 지낸 것 외에 승려생활 45년 동안 선방과 산속을 오가며 수행한 스님이었다. 5년 동안 태국에서 위빠사
현 시대 ‘부루나 존자’로 정평교육원장 놓고 백양사서 정진 산답게 살겠다며 ‘如山’ 법호산사 가꾸며 ‘마음 밭’도 경작 ▲담양 마하무량사 여산 암도 스님 이 시대의 ‘부루나 존자’ 한 명을 꼽으라면 누구라도 암도 스님을 떠올릴 것이다. 한 사찰에 주석하며 법을 편 게 아니라 전국 각지를 마다하지 않고 하루 네, 다섯 법문도 소화한 스님이니 그럴 만하다. 그러나 암도 스님이 ‘부루나 존자’로 소문난 것은 이 때문이 아니다. 설법 속에 재미와 감동이 있기 때문이다. 스님은 법문 전에 ‘무엇을 말할 것인가’를 깊이 고민하고, 이를 풀어 나가기 위해 나름대로 애를 쓰며 공부한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대중들에게 ‘이해
오대산 한암도인 있다 귀띔에고교졸업 직후 월정사에 안착 천년숲길걷기·단기출가 성황‘길’ 여니 불자·시민 인산인해 월정사 숲 속 전나무 길을 걷고 있다. 산사 밖은 벚꽃놀이가 한창인데, 산사 안은 어젯밤 내내 내린 함박눈 탓에 ‘4월의 설원’이 한껏 펼쳐져 있다. 누군가는 ‘봄이 오니 꽃이 핀 게 아니라, 꽃이 피니 봄’이라 했다. 지금 이 길은 ‘봄 길’인가, ‘겨울 길’인가? ‘비 오는 여름 풍광은 월정사에서 바라보는 게 최고요, 겨울 풍광은 오대산에서 바라보는 게 최고’라는 우중월정 설중오대(雨中月精 雪中五臺)라는 말이 스님들 사이에 내려오지만, 오대가 아니더라도 눈 쌓인 전나무 숲길은 일품이다. 중국에서 문수보살을 친견한 후 큰 깨달
2천만원 시줏돈으로 토지매입경학·화두 들다보니 사찰우뚝 자책·경책하며 매 순간 정진남은 일생 ‘양심’따라 살겠다 충남 아산의 봉수산(鳳首山)은 정상이 534m 밖에 안 되지만 한 마리의 봉황이 살아 꿈틀거리는 듯 그 기세가 등등하기 이를 데 없다. 만공 스님이 주석하며 깨달음을 얻었다는 봉곡사가 북쪽, 봉황의 왼쪽 날개에 자리하고 있다. 남쪽의 천방산 능선은 오른쪽 날개에 해당되며, 갈막고개가 꼬리다. 남북으로 날개를 활짝 편 채 광덕사가 자리하고 있는 동쪽의 광덕산(699m)을 향해 힘차게 날아가는 형상의 이 산은 한 눈에 보아도 영산이다. 봉황의 머리(정상) 아래 기슭에 자리한 봉수사(鳳首寺)에 만인(萬仁) 스님이 주석하고 있다. 봉수사가
신도 10명·월세로 시작해10년 만에 8층 능인선원 우뚝 전국 가정법회 만도 1000여 곳4개 말사·3개 해외지원 거느려 ▲능인선원 제공. 서울 능인선원. 매년 이 곳에서 적게는 6000명, 많게는 1만여 명의 불자가 배출된다. 지역별로 구성된 가정법회 만도 1000여개. 교구본사도 아닌 도심사찰인 능인선원이 지원하고 있는 사찰도 4곳이나 된다. 굳이 비교한다면 본사의 말사 개념이라 할 수 있는데 북한산 국녕사, 서울 관악구 등룡사, 경기도 고양 석룡사, 경기도 수원 용장사가 그것이다. 중국 톈진을 비롯해 태국, 뉴욕 등 해외에도 지원을 두고 있다. 보시금과 신도들의 저축 및 대출을 관리하는 능인신협은 현재 2300여명의 회
극빈곤자 전 세계 14억여명한명 굶을 때 다섯명 뭐하나 ▲마곡사 주지 원혜 스님. 천년고찰 마곡사가 ‘행복공동체 도량’으로 거듭나고 있다. 교계에서도 낯설게 다가오는 행복공동체는 수행과 나눔, 그리고 생태공동체를 하나로 묶은 새로운 패러다임의 공동체다. 사실 불교를 비롯한 종교계의 공동체 개념을 벗어난 ‘공동체 바람’이 우리사회에 분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는다. 전남 장성의 ‘한마을 공동체’가 90년에 시작했다 해도 그 역사는 20년이고, 1990년대 중반부터 전국 각지에서 공동체가 형성되기 시작한 게 90년 중반부터이니 그 시점으로 따져보면 15년 정도의 ‘짧은 역사’다. 이제 첫 걸음을 내딛었다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생 솔잎에 물 한 모금 마시며 목탁 쳐 남한산 성불사 창건 34년간 포교·나눔불사 매진 재정 40% 소외이웃에 회향 서울 지하철 5호선 마천역을 나와 성불사를 향해 10여분 걷다 보면 작은 사하촌이 나온다. 옹기종기 모여 있는 마을 골목길을 지나면 곧 성불사 일주문이다. 일주문 편액에는 ‘남한산 성불사’가 새겨져 있다. 남한산! 남한산성! 뭔가 ‘콱’ 막혀오는 느낌이다. 아마도 우리 민족이 안고 있는 ‘한(恨)’ 때문이리라. 청나라 침입에 인조는 이곳 남한산성으로 피신했으나 결국 피신 45일 만에 식량 부족으로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성문을 열었다. 소복을 입은 인조는 삼전도에서 ‘항복의 예’를 올렸다. 맨 아래층에
‘詩’란 사원서 나누는 가르침진실’은 현상 그대로의 모습 중징계에도 사설사암 공찰전환법·정진 끊이지 않아야 ‘명찰’ 영축산 계곡을 따라 흘러내려온 개울물은 설풍의 한 겨울 동안이나마 잠시 쉬어가려는 듯 멈춰 있다. 울창한 소나무 숲만이 얼어붙은 개울을 내려다보고 있을 뿐이다. 이곳의 숲과 계곡이 서로 도반의 인연을 맺으며 법담을 나눈지도 어언 1300여년. 통도사(通度寺) 가는 길에 잠시 절(寺)과 시(詩)에 대한 단상을 해 본다. 통도사 주지 정우 스님은 “시(詩)는 말씀 언 변에 절 사자가 합쳐진 말로, 사원에서 전해지고 사원에서 나누는 가르침이라는 뜻”이라 했다. 천양희 시인은 “말씀의 절, 말 속에 절이 있다니! 말이
불교대중·현대화 이끈 광덕스님 유지 계승36년 佛光정신 담을 대가람 2013년 봄 완공수행·전법 함께하는 불교공동체 견인 준비 ▲지홍 스님은 “현대사회가 직면한 다양한 문제들에 대해 불교는 적절한 해답을 내 놓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불광사 사진제공 “비구들이여, 나는 모든 속박에서 벗어났다. 그대들 또한 모든 속박에서 벗어났다. 중생의 이익을 위하여, 중생의 행복을 위하여 길을 떠나라.” 1982년 도심 한복판에 우뚝섰던 지금의 불광사에는 아직도 광덕 스님의 법열이 그대로 배어 있는 듯하다. 1999년 입적에 들기 전까지 광덕 스님은 부처님의 전법선언처럼 묵묵히 홀로 길을 걸었다. ‘세상에 대한 자비심’과 ‘존재하는 모든 것에 대한 자
화두 어렵다 탓하기 전에간절했는지부터 점검해야‘목숨을 걸라’ 말 하지만세수하는 것만큼 쉬운 것 ▲축서사 금곡 무여 스님. 경북 봉화 축서사에는 두 개의 선원이 있다. 하나는 수좌가 머물며 정진하는 ‘문수선원’이고 다른 하나는 재가불자를 위해 문을 연 ‘보현선원’이다. 이 두 선원은 여느 선원과는 다른 독특한 특징이 있다. 문수선원의 하루 정진 시간은 15시간이며 결제도 5개월이다. 해제는 딱 한 달인 셈이다. 보현선원의 하루 정진 시간은 10시간인데 큰 방이 따로 하나 더 있다. 이 방은 24시간 개방되어 있어 10시간 이상 정진하고자 하는 사람은 누구든 이곳에서 가부좌를 틀 수 있다. 묵언은 물론이고 한 번 입방하면 마칠
1959년 혜진 스님 은사로 출가토굴 정진 통해 무상-공 체득 2004년 동화사에서 열린 ‘담선대법회’는 참으로 신선했었다. ‘선을 놓고 왈가왈부 따지는 게 아니다’라는 통념을 완전히 뒤집었기 때문이다. 초기불교와 남·북종선, 육조단경 등의 사상과 실천, 조사선과 간화선의 성립과 수행체계에 대한 집중적인 논의가 이뤄졌다. 한국 간화선 수행에 대한 문제점을 짚고 나아갈 방향까지 밝혀 한국의 선사상을 내외에 널리 알리기 위한 큰 걸음이었다. 당시 주지직을 수행하던 지성 스님의 원력이 아니었다면 엄두도 내지 못했을 일이었다. 이 뿐인가. 담선대법회 직전에는 ‘화엄논강무차대법회’를 열었고, 담선대법회 직후에는 ‘계율대법회’를 열었다. ‘계정혜’에 대한 나름대로의 고민에서 비롯된 ‘야단법석’이 세 번의 대법회였던
종법은 알아도 갈마법은 몰라계율 모르는 게 아니라 등한시 올해로 조계종 단일계단이 출범된 지 30년이 되었다. 계사로부터 비구(니)계를 받아야만 공식적인 ‘스님’으로 인정받을 수 있으니 승가에서의 ‘계(戒)’는 ‘생명’과도 같다. 그렇다면 단일계단 30년을 맞은 조계종의 지계정신은 어느 정도인가. 최근 ‘계율’을 주제로 한 세미나에서 도일 스님은 이렇게 주장했다. “비구계는 승려가 되는 관문인 동시에 평생을 실천해야 하는 비구의 덕목이다. 그러나 현재 한국의 승단에서 인식하는 비구계는 단지 승려가 되는 요식행위 정도로 그치고 있다. 왜냐하면 비구가 된 뒤 계를 잘 배울 수 있는 전체 초보 비구들에 대한 보편적 교육제도가 없고, 계를 범하여도 갈마하고 참회를 구하여 청정을 회복할 수 있는 승가가 없기 때문
설산 동자 무상게 듣고 가슴 뭉클했던 소년광덕 스님 은사로 출가…40여년 수행정진한국불교 최초 대품반야-방거사어록 완역 圓覺山中生一樹(원각산중생일수)開花天地未分前(개화천지미분전)非靑非白亦非黑(비청비백역비흑)不在春風不在天(부재춘풍부재천) 깨달음의 원각산 가운데 나무 한그루 있으니 / 하늘땅이 나눠지기 이전에 이미 꽃은 피었다. / 푸르지도 않으며 희지도 않고 까맣지도 않은데 / 봄바람도 하늘도 관여할 수 없도다. 혜담 스님이 주석하고 있는 각화사(覺華寺) 요사채에 걸려 있는 주련이다. 네 번째 구를 ‘봄바람 속에도 없으며 하늘 어디에도 없어라!’라 해석하기도 한다. 혜안에 따라 읽고 새길 뿐이니 어느 것이 맞다, 틀리다 할 필요까지는 없을 것이다. 검단산 기슭에 자리하고 있는 각화사의 사명(寺名) ‘각화
종단-문중 구분 거북스러워‘사바세계 석가종’ 에둘러 표현 가끔은 아주 원초적인 물음을 던져 볼 때가 있다. 부처님이 이 세상에 오신 뜻은 무엇일까? 물론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서다. 그러나 부처님은 분명 “모든 중생들이 부처의 지혜와 덕성을 갖고 있다”고 말씀하셨다. ‘부처의 지혜와 덕성’을 이미 갖고 있는데 부처님은 왜 굳이 이 땅에 오셨던 것일까? 여기서 출발하면 또 하나의 의문이 꼬리를 문다. ‘부처의 지혜와 덕성을 갖고 있는 우리는 왜 그 지혜와 덕성을 발현시키지 못하고 괴로운 인생의 나날을 보낼까’ 하는 것이다. 첫 의문을 간단명료하게 풀어낸 스님이 있다. 부산 원효센터 주지 공파 스님은 자신의 저서인 『부처님의 유언』에서 “부처님이 중생을 제도하러 오셨다는 말은 잘못된 말”이라며 “중생을 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