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 이후 수십년 동안 한국불교는 갈등과 분쟁이 이어지면서 내부 안정을 기하기조차 어려웠다. 이처럼 힘든 상황에서도 ‘다른 나라 불교계와 교류를 통해 한국불교의 위상을 높이고 세계 평화와 인류 화합에 기여하겠다’는 뜻을 세우고 해외 교류를 추진했던 점은 높이 평가해주어야 할 것이다. 특히 전 세계 불교도들의 연합체인 ‘세계불교도우의회(World Fellowship of Buddhists, 이하 WFB)’에 1960년대 초반의 어려운 상황에도 참여하기 시작했고, 그렇게 다져온 바탕 위에서 1990년 서울, 2012년 여수와 2016년
160cm도 안 되는 작은 체구로 늘 직경 50cm가 넘는 큰 목탁을 들고 보통 염주알보다 몇 배나 큰 염주를 돌리는 스님이 있었다. 웬만한 사람이 따라가기 어려울 정도로 걸음이 빨라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했던 이 스님, 언제인가부터 홍도라는 법명보다 ‘방울스님’이라는 애칭으로 더 많이 알려졌다. 홍도(1935~1979) 스님은 한창 활동해야 할 40대 초반의 젊은 나이에 세연을 다했지만, 현대 한국불교 포교 역사에 그가 남긴 자취는 크고 넓고 깊어서 ‘작은 체구로 짧은 삶을 멋지게 회향하고 떠난 큰 인물’이라는 평을 들었다.동
흔히 ‘서산마애삼존불’이라고 부르는 서산 보원사 마애불은 오랜 세월 그 존재가 알려지지 않았다. 1959년 4월, 당시 부여박물관장 홍사준과 미술사학자 황수영 박사 등이 용현리 계곡 위쪽에 있는 보원사지 조사를 마치고 내려오던 길에 우연히 만난 나무꾼이 아니었으면 그 뒤로도 한참 동안 숨어 있을지도 모르고, 이제는 산림이 우거지고 나무꾼도 사라져서 아예 그 존재가 드러나지 않을 수도 있을 것이다.그때 홍사준과 나무꾼 사이에 이런 대화가 오고갔다고 전해온다. “이 근처에 불상이나 사람이 새겨진 바위가 없습니까?” “바로 저 위의 큰
박정희 정권에서 대통령 비서실장과 중앙정보부장 등 요직을 지낸 이후락(1924~2009, 이하 HR)은 숱한 사건의 주역 또는 배후 인물이었다. 3선 개헌‧10월 유신 강행과 김대중 납치사건 등 현대사의 비극과 치욕에는 박정희와 그의 이름이 나란히 등장한다. 그런가하면 HR는 1972년 5월 극비리에 평양을 방문해 김일성을 만나고 두 달 뒤인 7월4일에는 남북한이 합의한 ‘7‧4 공동성명’을 발표해 세상을 놀라게 했으며, 그 뒤 남북조절위원회 남측공동위원장을 맡는 등 남북대화 역사에도 큰 자취를 남겼다.HR이 2009년 10월31일
대원 장경호 거사가 현대 한국불교를 지탱하고 일으켜 세운 공로는 말과 글로 담아내기 어려울 정도로 컸고, 아들 중원 장상문(이하에서는 ‘중원’) 또한 부친을 이어 한국불교 현대화와 대중화에 헌신하면서 불은(佛恩)에 보답하고 효도를 다해 ‘아버지를 더욱 빛나게’ 하였다.대원의 여섯 아들 중 유일하게 사업에 참여하지 않은 중원은 멕시코‧스웨덴‧UN주재 대사, 청와대 의전실장 등 외무공무원으로 봉직했다. 부친이 떠난 뒤 재산은 여섯 아들에게 똑같이 분배되었는데 중원은 “동국제강 경영에 참여하지 않았으니, 아버지 유업이 깃든 대원정사와 대
1987년 1월14일 발생한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이후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요구하는 시위가 전국에서 이어졌다. 그러나 4월13일 대통령 전두환은 국민의 바람과 완전히 어긋나게 “여야 합의 개헌 전망이 절망적이라 임기 중에 개헌이 불가능한 상황이 되었다”면서 “평화적 정부이양과 서울올림픽이라는 양대 국가대사를 성공적으로 치르기 위해 개헌논의를 지양”하라고 요구하였다.4월13일 대한변호사회를 시작으로 야당과 종교계‧학계‧문화계를 비롯한 각계각층에서 이 ‘4‧13호헌조치(4‧13조치)’를 반대하는 성명이 이어졌고, 전국 대학에서는 이
1990년 5월1일, ‘깨치는 소리 나누는 기쁨’을 기치로 내세운 라디오 불교방송(이하에서는 ‘방송, BBS’)이 첫 방송을 시작했을 때 수많은 불자들이 감격하였다. 방송국 임직원들의 원력과 의지가 ‘하늘을 찌를 것’ 같았으며,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외부 출연진들도 정성을 다하였다. 아마 그 때 진행자들의 이름과 목소리를 아직도 기억하고 있는 청취자들이 많을 정도로 방송 개국이 불자들에게 자긍심을 심어 주었고 큰 기쁨을 선사해 주었다.방송 설립 추진은 이미 오래 전부터 두 방향에서 진행되고 있었다. 조계종은 1967년 ‘포교 현대화
라틴아메리카 나라들이 미국과 정치‧경제‧문화적으로 얽혀서 그 그늘을 벗어나기 어렵듯이, 한국‧티베트‧몽골‧베트남 등 중국을 둘러싸고 있는 아시아 국가들은 중국의 상황에 밀접하게 얽혀 있었다. 19세기 말 닥쳐오기 시작한 제국주의 국가들의 침략 물결은 ‘청불(淸佛)’ 및 ‘청일(淸日)’ 전쟁에서처럼 주변 국가들을 방어벽으로 여기고 있는 중국의 저항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결국 중국의 패배로 한국과 베트남은 식민지로 전락했지만, 조공(朝貢)과 책봉(冊封)체제로 묶여 있던 티베트와 몽골은 1912년 신해혁명으로 청 왕조가 붕괴되자 ‘완전
‘용미리 미륵불’로 잘 알려진 경기도 파주 용암사에서 1954년 10월28일 이승만 대통령, 함태영(목사) 부통령, 이기붕 민의원의장을 비롯하여 내무부장관, 문교부장관, 경기도지사, 파주군수 등과 미국대사 부부, 미군 사단장 등이 참석하여 ‘미륵불 이대통령각하 기념탑 봉안식’이 열렸다.이 행사를 담은 흐릿한 사진을 보면 행사장 장막 위로 태극기가 휘날리고 그 가운데에는 가로로 ‘미륵불 리(이)대통령각하 기념탑 봉안식장’, 양 옆으로는 세로로 ‘국보적 존재’ ‘지성으로 기리(길이) 보존하자’라고 쓴 펼침막을 달았다. 그 뒤로는 미륵부
1948년 제헌의회에서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된 이승만은 자신이 민주국가의 행정수반이기보다는 ‘조선왕조의 피를 물려받은 왕’으로 대접받아야 한다고 여기고 있었다. 국회에서 이루어지는 선거에서는 재임 가능성이 낮아지자 직선제 개헌을 추진하였다가 1952년 1월 국회에서 부결되자, 애국단체연합회를 비롯한 수많은 단체들이 궐기대회를 열어 ‘국회 해산과 총선거’를 주장하도록 하였다. 이런 조작된 분위기를 ‘민의’로 내세운 이승만이 상하양원제와 대통령직선제를 절충한 ‘발췌개헌안’을 타협책으로 제시하자 이번에는 이를 지지하는 궐기대회가
1967년 성철 스님(이하 ‘스님’)이 해인총림 초대 방장으로 취임한 뒤, 12월4일부터 이듬해 2월18일까지 상당법문과 성도재일 등 특별한 날을 빼고는 거의 매일 대적광전의 법상에 올라 훗날 ‘백일법문’이라고 부르는 ‘특별법문 청법 대법회’에서 설법을 이어갔다.추운 겨울, 난방도 제대로 되지 않는 깊은 산속에서 100일 동안 이어진 법문을 들으러 총림의 스님뿐 아니라 전국에서 수많은 불자들이 찾아왔다. ‘불교의 본질‧중도, 근본 불교, 인도 대승경론의 중도, 중관·유식, 화엄종·삼론종의 중도사상, 선종의 중도사상, 선종의 본질,
서울 성북구에 자리 잡은 길상사는 독재정권 시절 권력자들이 밤놀이를 즐기던 ‘3대 요정’ 중 하나인 대원각이 있던 곳인데, 그 주인 김영한 여사가 당시 시가 1000억원에 이르는 대지와 건물들을 법정 스님에게 시주해 탈바꿈한 것이다.김영한의 일생은 우여곡절이 많았다. 나이 열여섯에 원하지 않는 결혼을 했다 실패하고 서울로 올라와 조선권번에 들어가 궁중아악과 가무를 익혔고, 시‧수필‧글씨‧그림에서도 탁월한 솜씨를 자랑하는 일류 기생이 되었다. 이 시절 그의 능력을 알아본 신윤국(흥사단과 조선어학회에서 활동)과 만나 그를 스승으로 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