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상 부처의 가르침을 따라 사는데 인생의 의미가 있다. 부처는 항상 현실을 열반이라 가르친다. 반대로 중생은 세상을 고통의 바다라 부른다. 무엇이 이러한 안목의 차이를 낳는가. 수행정도의 차이라 해야 할 것이다.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은 수행의 정도 따라 다르다. 수행의 완성자인 부처님을 따라 끝없이 배워야만 하는 도리가 여기에 있다. 자기를 향상시키지 않는 것이 죄라 하였듯 우리는 부처님을 따라 영원한 진보를 숙명으로 알고 나아가야만 하는 존재다. 왜 우리들은 부처님 따라 몸과 마음을 다해 걸어야만 하는가. 부처님을 따라 배우면 우리의 몸과 마음 가운데 부처님이 투영되기 때문이다. 꽃에 향기가 따르듯 부처님 따라 수행하는 진실한 수행자들에게는 부처님의 향기가 피어오른다. 부처님 따라 사는 삶에서는 부처님
바람은 공기의 흐름이다. 생각은 마음의 흐름이다. 파도는 바다의 흐름이다. 바람은 공기와 다르지 않지만 방향을 갖는다. 생각도 마찬가지다. 방향성을 갖는다. 한 생각 속에 우주가 들어있다고 하고 한 생각이 우주를 머금는다 하는 것은 바닷물 한 방울이 바다를 품는 것과 같은 이치다. 바람이나 생각이나 파도나 하나같이 에너지의 흐름이다. 갈망이라는 이름의 상념을 생각해보라. 얼마나 강렬한가. 갈망을 인연하여 집착이 생겨나고(愛緣取), 집착을 인연하여 생성이 일어나고(取緣有), 생성을 인연하여 재생이 펼쳐진다(有緣生). 갈망은 진실로 강렬한 에너지의 표현이다. 존재에 대한 갈망이 그를 다시 존재하게 하며 살겠다는 의지가 그를 살게 한다. 부처님께서도 갈망의 강렬함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셨다. “왓차여, 하나의
얼마 전에는 조류독감이 한바탕 난리를 치더니 이번에는 신종플루라는 게 또 등장해 공포를 안겨주고 있다. 세월이 흘러갈수록 이 세상에는 좋은 뉴스보다 고통스럽고 힘겨운 뉴스들이 횡행한다. 왜 이럴까? 인류의 미래는 과연 어떠할 것인가? 과학자들에 따르면 소립자의 세계인 원자 전자들은 아무렇게나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한다. 불교에서 말하는 것처럼 인연 따라 생겨난다는 것이다. 부처님 말씀대로 천상천하에 유아독존인 존재는 부처님밖에 안계시고 그 외에는 모든 것이 상대적 인연 따라 생겨난다. 인간이란 생명체도 아버지와 어머니 의 인연 따라 생겨난다. 광활한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만상들도 하나같이 어떤 인연의 소산이다. 생겨난 어떤 존재도 완전하지 않다. 완전한 것은 영원하지만 불완전하기에 언젠가는 눈물 속에 사라
중생들은 누구나 끌어들이는데 일등이다. 그러나 불법을 깨달은 자들은 하나같이 버리라 한다. 비우라 한다. 이처럼 기막힌 아이러니가 또 있는가? 모두가 끌어들이려 혈안인데 버리라니 도무지 가당한 일인가? 깨달은 자들은 세상을 이겼으니 더 이상 구할게 없다. 그들은 세상의 일등도 내던지고 부모와 처자와 재산 모두를 버렸다. 모두가 높아지려 악을 쓰는데 그들은 낮아지라, 낮아지라 외친다. 한쪽은 끌어들이려는데 일등이고 한쪽은 버리는 데 일등이다. 모두 다 일등이 되려고 하는 점에서는 같다 하겠는데 전혀 차원이 다르다. 왜 이 같은 괴리가 벌어지는가? 누구나 마음 가운데 천상천하 유아독존인 존재를 모시고 있으면서도 그를 깨닫고, 깨닫지 못하고의 차이다. 진리를 아는 사람은 버리는 일에 일등이 되려하지만 어리석은
우리의 현실은 불완전하다. 모두가 불성을 지녔다 하지만 나도 남도 모두 부족하다. 말도 부족하고 생각도 행동도 모두 부족하다. 내가 남에게 하는 말을 생각해 보라. 남을 위한 쓸만한 말을 얼마나 하고 있는가. 남을 비난하고 비방하고 비판하는 데 너무 익숙하지 않은가? 우리는 좀 더 어른스러워져야 한다. 부처님께로 나아가야 한다. 부처님과 가까워지고 부처님의 말과 생각과 행동을 배우면 점차 완전에 가까워진다. 말과 생각과 행동이 법이 된다. 그런데 문제는 거기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내 주변이 온통 부족한 사람들로 가득 차 있기에 그들로부터 듣는 말, 그들이 나에 대해 하는 생각 행동 등이 모두 고통이다. 온통 비난이고 이기심에 가득 찬 악행과 그릇된 생각들 투성이다. 내가 성장하면 할수록 그들의 비방은
우리는 매일매일 업을 쌓는다. 말과 생각 행동을 삼업이라 하는데 말과 생각 행동을 하지 않는 사람 있는가? 문제는 업에도 선업과 악업이 있다는 것이다. 이기심을 바탕으로 한 것이냐, 이타심에서 우러나온 것이냐의 둘로 갈라진다. 불행하게도 우리들 매일 매일의 업은 악업일 가능성이 크다는 점이다. 이타심보다 이기심이 클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정녕 우리는 선업보다 악업에 익숙한 삶을 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같은 사실을 직시한 사람들은 어떻게 해야만 할까. 참회가 선택이 아니고 삶의 필수과목이 되어야만 하리라. 매일을 삼업 속에 살고 이기심 속에 살기에 참회는 우리들 일상의 근간이어야만 한다. 항상 참회하는 삶 이참사참(理懺事懺)이어야 한다. 참회가 없는 곳에 청정은 없다. 참회를 하면 맑아진
우주는 부처님 왕국이다. 부처님은 지금 무얼 하고 계실까? 기도가 부처님과 하나 되는 성스런 작업이라면 부처님은 지금도 기도 가운데 계시리라. 무슨 기도를 하고 계실까? 무량중생들의 번창과 번영 성불을 위한 기도이실 것이다. 부처님께서 열반에 계시다는데 그러면 기도와 열반은 같은 것인가. 그렇다. 맞닿아있다. 기도와 열반은 정말 같은가, 맞닿아있는가. 그 대답도 마찬가지다. 진정 그렇다. 우리는 참기도를 통해 참된 행복감을 느낄 수 있다. 행복의 원천이 기도인 이유는 기도가 곧 열반의 문이기 때문이다. 수증불이(修證不二)라는 말이 있다. 수행하는 자체가 부처님 마음과 하나이고 부처님과 하나라는 얘기다. 기도하는 마음 자체가 부처님이다. 기도를 통해 진리의 왕국에 들어갈 수 있으며 영원의 나라와 하나가
불교는 수행의 종교다. 체험의 종교다. “선무당이 사람 잡는다”고 한다. 제대로 알지 못하고 남에게 얘기했다가 크게 잘못된다는 얘기다. 가장 훌륭한 상태의 ‘깨달음’은 체험이다. 그 밖의 앎은 모두 표면적인 알음알이다. 부처님 가르침의 진면목은 체험을 통해 확고부동하게 깨닫는 것이다. 신해행증(信解行證)의 가르침이 바로 그를 의미한다. 제대로 알지 못하고 가르치고 행할 때 항상 문제를 야기한다. 육바라밀행도 실천 아닌가? 불교에 가장 빈번하게 등장하는 단어는 자비다. 정말 자비행을 펼쳐본 일이 있는가? 실제 자비와 사랑을 실천했을 때의 마음이 어떠한지 체험해 본적이 있는가? 부처님께서는 “그의 마음 가운데 얼마나 큰 자비심을 가지고 있는지 내게 말해보라. 그가 얼마나 많은 시간을 부처와 함께 있는지
우리는 자신이 갖고 있는 것만을 줄 수 있다. 가시나무는 가시밖에 만들지 못하고 대추나무는 대추만을 열 것이다. 또 씨를 뿌린 다음 땅이 아무리 비옥하다 하더라도 경작하지 않으면 좋은 열매를 얻을 수 없다. 가꾸지 않는 마음 역시 마찬가지다. 닦여진 것이 없으면 줄 것이 없다. 자기수행이 중요한 이유다. 수행은 항상 진리의 본고향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아름다운 노력이다. 수행하는 만큼 힘이 쌓이고 진리를 따르는 만큼 강력해진다. 항상 스스로의 생각과 말과 행동을 관찰하라. 삿된 허위의 가면을 벗기고 진리의 빛을 선물하라. 진리는 항상 특별한 용기와 수행을 통해 드러난다. 수행을 통해 우리는 우리의 본성을 정확히 알게 된다. 황금과 욕망의 포로가 된 자들은 정도를 쉽게 일탈한다. 진리의 길 정도는 영원으로
사람들은 누구나 잘 되기를 바란다. 그런데 잘되는 사람이 많지 않아서 일까? 모두들 어렵다고들 한다. 잘 되지 않는다 말한다. 왜 잘 안될까? 왜 잘 살지 못할까? 어떻게 하면 잘 될까? 어떻게 하면 잘 살까? 잘 살고 잘 되는 방법이 부처님 경전에 있는가? 분명히 ‘예스다.’ 부처님 가르침은 모두가 잘 살고 잘 되는 가르침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 가르침을 공부하려 하지 않고 실천하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생각해보자. 세속공부도 잘 하고 열심히 하면 효과가 있지 않는가. 부처님 가르침을 어떻게 세속의 가르침과 비교를 하겠는가? 진정 잘 살고 잘 되는 부처님 법을 생각해 보자. 부처님 법은 항상 버리는 법이다. 역설의 가르침인 듯 느껴지지만 버리는 마음 베푸는 마음이 참으로 어렵고 힘들기에 잘 되고 잘 살기
4성체(聖諦)를 보라. 위대한 법의 황제의 말씀이시다. ‘여래 응공 정변지 명행족 선서 세간해 무상사 조어장부 천인사 불세존’ 불생불멸의 영원한 법왕이신 부처님의 명호다. 부처님께서는 깨달음의 문을 여신 뒤 “참으로 기이하도다. 모든 중생들이 나와 똑같은 지혜와 덕성을 갖추었건만 어리석음에 가려 자신을 깨닫지 못하고 있도다”하셨다. 불경의 공통분모 중 하나는 우리의 마음 가운데 불생불멸의 영원한 법왕이신 부처님께서 자리하고 계시다는 것이다. 불생불멸의 영원한 우주의 제패자이신 부처님을 모시는 우리들의 자세는 어떠해야만 하는가? 우리의 말과 생각과 행동 모두를 지켜보시는 왕이 계시다 할 때 정말 지고의 정성을 다해야만 하리라. 그러나 영원불멸의 위대한 황제를 모시고 있는 우리들의 자세는 어떤가? 참으로 형
한 치 앞을 내다 볼 줄 모르는 인간이라고들 한다. 1년 뒤를 10년 뒤를 알 수가 없다. 그러나 원력보살들은 투철한 원력을 바탕으로 기도 정진하며 10년 뒤의 나를 그린다. 불교가 원하는 인간상은 바로 원력보살이다. 자신의 서원에 따라 미래를 창조하는 인간이다. 그들은 기도 가운데 내일을 꿈꾼다. 그들은 고난을 이겨내며 무서운 정진력으로 찬연한 미래를 창조한다. 몸과 마음을 던지는 기도 정진은 그들의 전매특허다. 원력 속에 사는 인간은 꿈의 인간이다. 그들은 내일의 꿈속에 몸과 마음을 던진다. 그들의 삶은 항상 부처님의 법과 함께 하기에 무량가피의 연속이다. 원력의 길은 부처님 법 따라 가야만 하고, 고난을 극복하는 기도 정진 따라 가야만 한다. 우주는 법으로 만들어져 있고 부처님 나라는 법 따라 가는
사람들은 도둑이 밖에만 있는 줄 안다. 내 안의 도둑이 내 집과 내 지갑을 털어간다는 사실을 모른다. 견물생심이라던가? 사람들은 욕심나는 물건이나 사람을 보면 넋을 잃는다. 물건을 파는 사람들은 구매자들의 혼을 빼려고 이효리를 등장시키고 장동건, 구준표를 모델로 쓴다. 물건에, 이효리에 넋이 빠진 어른 아줌마 아이들은 자신들의 호주머니가 털리는지도 모른다. 백화점에 가면 명품에 넋을 잃은 아줌마, 아이들이 마냥 카드를 긁어댄다. 혼이 빠진 사람은 집주인이 떠난 집 같아 도둑에게 모든 것을 털린다. 현대인들이 이처럼 갖가지 욕망에 넋을 잃고 살기에 현대를 자기 상실의 시대라 부른다. 수행은 잃어버린 자기를 찾는 길이요 ‘욕망의 나’, ‘도둑의 나’로부터 나를 보호하는 비법이다. 부처님께서도 이 몸뚱이가 여
생사의 고통은 죗값이다. 사성제도 그를 얘기하고 있다. 모든 위대한 도인들은 하나같이 생사의 해탈을 지상명제로 했다. 부처님께서도 인간의 생로병사 문제를 해결하시기 위해 출가하셨고 그 해답을 찾아 우리들에게 가르치셨다. 결국 우리들의 삶은 무명 때문에 생겨난 것이고 무명은 부처님 말씀대로 대죄(大罪)다. 우리들은 죗값을 치르기 위해 이 땅에 태어난 존재다. 그래서 우리들의 삶은 『열반경』의 가르침대로 대단히 힘겹고 어렵다. 『안수정등』의 비유를 들어보자. 어떤 사람이 사나운 코끼리에 쫓겨 도망을 치다가 우물을 발견했다. 우물곁에 있는 나무 덩굴을 타고 우물 안으로 몸을 숨겼다. 웬 걸, 우물 밑바닥에는 독룡이 입을 딱 벌리고 떨어지면 삼키려 했고 우물 안에는 네 마리의 독사가 혀를 날름대면서 잡아먹으려 했
인플루엔자 바이러스가 세계적으로 문제가 되고 있다. 호흡할 때 우리의 몸속에는 수많은 병균들이 들어온다. 대부분이 우리 몸의 항체와 싸우다 죽는다. 그런데 살아남아 병변을 일으키는 녀석들 중의 대표선수 격이 독감 바이러스다. 독감 바이러스가 몸속에 들어온다 해서 숨을 쉬지 않을 도리는 없다. 수많은 미생물들이 몸속에 들어와 죽는다 해서 그들을 살리기 위해 숨을 쉬지 않아야 하는가? 우리는 수많은 살생을 하며 우리들의 수명을 유지한다. 감기가 걸린 경우 그들을 퇴치하기 위해 강한 항생제를 쓴다. 강한 항생제가 감기에 제대로 통하지는 않지만 병원에선 고단위 항생제를 쓴다. 의도적으로 얼마나 많은 균을 죽이고 있는가? 병균을 죽이지 않기 위해 항생제를 쓰지 않는 바보도 있는가? 우리가 건강하다는 것은 외부의
전직 대통령이 몸을 던졌다. CNN은 며칠 동안 헤드라인 뉴스로 전 세계를 향해 쏘아댔다. 도저히 있을법하지 않은 사건이 벌어졌다. 얼마나 안타까운 상황이었으면 세상을 등질 마음을 내었을까? 내 방에 들어와 호기 있게 얘기하던 그분의 목소리와 웃음이 오버랩 된다. 부산 자갈치 아지매는 “그 보다 더한 놈들도 사는데 용서 빌고 살면 되지 죽긴 와 죽노?” 오열하며 닭똥 같은 눈물을 떨군다. 앞으로의 추이가 어떻게 전개될지 가슴이 답답해온다. 유언대로 “우리는 본래 자연의 한 조각”이라더니 진정 자연으로 돌아가셨는가? 아무리 이해하려해도 마음이 먹먹하다. 이 같은 상황을 맞닥뜨리면서 진실로 누구에게나 필연적인 죽음에 대한 올바른 교육이 참으로 중요하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든다. 바로 그 점이 종교인들의 진정
사람들은 자주 자연을 칭송한다. 자연이 오염되지 않은 순수의 세계이기에 그러하다. 마음 닦는 수행이 수풀만큼 좋은 곳이 없기 때문인지 모든 위대한 사상은 자연에서 나왔다. 자연은 진정 순수와 만날 수 있는 가능성이 큰 세계라 할 수 있다. 인간이 순수를 사랑하는 이유는 왜일까? 자신의 본질이 순수하기 때문이다. 우리 마음의 근원, 생명의 원천은 오염되지 않은 순수의 세계라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누구나 오염되지 않은 것을 사랑하고 청정하고 맑은 것을 찾는다. 사람들이 순수를 찾고 맑고 청정한 것을 찾는 것 역시 본질과 통하기 때문이고 부처님과 통하는 때문이다. 부처님께서는 우주의 무량한 대천세계를 마음의 얼룩이요 오염된 세계라 말씀하셨다. 우리 모두가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오염돼 있다는 것이다.
信心이 중요하다는 말들을 많이 한다. 信心은 무엇인가? 무엇을 믿는 게 신심인가? 부처님을 믿는 게 신심이라는 데는 이의가 없다. 그렇다면 왜 부처님을 믿는가? 부처님은 도대체 누구이신가? ‘열반경’에 보면 부처를 알려면 법을 알라 했다. 신심은 법을 듣는 것으로 생겨나고 법을 듣게 되는 것 역시 신심에 의한다했다. 법이 없는 곳에는 부처도 없다. 법이 佛이요 佛이 곧 법이다. 신심이란 부처님께 큰 이익이 있기에 믿음이요, 법에 큰 이익이 있기에 믿음이요, 승가에 큰 이익이 있기에 믿음이라 했다. 부처님과 삼보는 중생들에게 크나큰 이익을 주신다 했다. 성불의 길을 걷는 우리들 역시 그 같은 점에 유념해야 한다. 도대체 부처님의 아들과 딸이라는 우리들은 이 세상에 얼마나 이익을 끼치는 존재인가? 흔히 잘 알
진리의 등불은 어디에서 빛나는가. 지금 여기 이 자리에 빛나고 있다. 부처님의 광명은 어디에서 빛나고 있는가. 지금 여기 우리와 함께, 우리의 몸과 마음과 함께 빛나고 있다. 우리 몸의 무수한 세포들을 살펴보라. 모두가 지혜와 자비의 등불들이다. 그 모든 세포 하나하나가 정성을 다해 빛나는 대우주의 지혜를 바탕으로 자신의 일을 해낸다. 세포마다 대우주 지혜의 광명이 깃들어있다. 또한 세포 하나하나는 이웃세포와 대단히 사이좋게 지내지 않을 수 없다. 문자 그대로 자비와 사랑의 등불들이다. 세포들의 세계는 지혜와 자비로 빛나는 세계이고 부처님의 위신력과 가피력이 함께 하신다. 어디서 진리의 광명을, 부처님을 멀리서 찾을 것인가? 세포 하나는 부처님의 지혜를 머금고, 무한한 사랑과 자비로 빛난다. 그들의 확장판
사람들은 누구나 지기 싫어한다. 누가 나보다 나은 사람이 있다면 시기 질시한다. 자신이 남보다 부족하다는 사실을 인정하기를 꺼려한다.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려 들지 않는다. 아이들이나 어른들이나 지기를 싫어하니 갈등이 끊일 리가 없다. 도처에 다툼이다. 지구에서는 단 한순간도 작은 싸움, 큰 싸움으로 편할 날이 없다. 칸트가 『영구 평화론』이라는 논문을 쓴 다음 ‘이것은 나의 환상곡’이라는 부제를 달았듯이 평화는 환상이다. 그 같은 싸움의 원인은 무엇일까? 내 마음 가운데 지기 싫어하는 존재가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남들과의 싸움은 둘째 치고 부처님 말씀대로 내 자신 내면세계에서의 싸움 역시 대단히 치열하다. ‘참 나’와 ‘가짜 나’의 싸움은 영원으로 이어지는 전쟁이다. 부처님께서도 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