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이다. 음력을 쓰는 오랜 풍습으로, 음력 1월1일이 돼야 우리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새해를 맞이한다. 설날에 고향을 찾아 아침 일찍 부모님께 절을 올리고, 조상들께 차례를 올린다. 새해 첫날 부모님이나 어른들께 올리는 절을 우리는 세배(歲拜)라고 한다. 요즘이야 설날의 의미가 많이 퇴색했다지만 어찌됐든 차례를 포함한 세배는 오늘의 자신을 있게 한 가장 가까운 인연들께 감사하는 마음을 전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세간에서 설날 차례를 지내고 세배를 하듯이 사찰에서도 뜻깊은 새해맞이 의식이 있다. 통알삼배(通謁三拜)다. 통알삼배는 범종을
과거 독재정권은 국민들에게 자주 겁을 줬다. 전쟁의 위험을 내세워, 반공이념 앞에 줄을 세웠고, 저항하는 사람은 간첩협의로 가두거나 목숨을 뺏는 것으로 국민을 협박했다.이제는 이런 공포를 느끼지 않아도 된다. 매일 청와대 앞 시위가 끊이지 않는 백가쟁명(百家爭鳴)의 민주주의를 만끽하고 있다.그러나 정부가 국민에게 겁을 주는 못된 버릇이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은 것 같다. 정부는 2018년 합계출산율이 0.97명으로, 출산율 0명시대로 접어들었다고 발표했다. 0명대 출산율은 가임기여성이 평균 1명도 채 낳지 않는다는 뜻이다. 정부는 인
초등학교 때였을 것이다. 만화책 손오공을 보다 ‘수리수리 마하수리’란 말이 눈에 들어왔다. 손오공이 도술을 부릴 때면 이 주문을 외웠다. 손오공뿐만 아니었다. 어릴 적 보았던 수많은 만화에서 스님이든, 산신령이든, 도사든 다들 ‘수리수리 마하수리’라는 주문을 외웠고 그 후에 놀라운 일들이 벌어졌다. 그래서 ‘수리수리 마하수리’란 주문을 정성껏 외우면 정말로 마술 같은 일들이 벌어지지 않을까 생각하기도 했다.그러나 이 주문이 도깨비 방망이는 아니었다. ‘수리수리 마하수리’는 입으로 지은 업을 맑게 정화하는 불교의 진언, 즉 ‘정구업진
지난해 12월 소속당 의원이 탈당하자, 바른미래당 손학규 대표는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 말은 언론을 통해 회자됐다. 한자로는 사염승거(寺厭僧去)라고 하는데, 이로 인해 불자들은 해의 마지막을 무척이나 불쾌한 마음으로 보내야 했다. ‘중’은 스님을 천민 취급했던 조선시대의 욕설이다. 중의 어원은 범어인 상가(Samgha)에 있다. 상가를 중국어로 번역하면서 승가(僧伽)라고 했고, 이를 의역한 것이 중(衆)이다. 그래서 중은 많은 스님들이 모여 있다는 의미에서 대중(大衆)이라고도 한다. 그런데 조선시대에 사대
거짓말은 교묘하다. 속여야 거짓말이 성립된다. 그러나 대놓고 하는 거짓말도 있다. 사람들은 거짓말인 줄 알면서도 입을 닫는다. 국가가, 권력이 거짓말을 할 때 그렇다. 진시황이 죽고 권력을 잡은 환관 조고는 사슴을 세워놓고 대신들에게 말이라고 주장했다. 사슴이라 말한 대신들은 모조리 죽였다.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는 18년간 철권통치를 휘두르면서 우울한 국민들에게 명랑사회를 강요했다. 총칼로 정권을 잡은 전두환은 친인척을 비롯해 수많은 부정비리로 몰락하는 순간까지도 정의사회구현을 외쳤다. 측근들과 함께 교도소에 수감돼 있는 이
한해가 진다. 피가 돌았던 365일의 삶들이 곧 추억의 틀에서 굳은 채 1살의 나이로 치환될 것이다. 해가 바뀔 때마다 진한 아쉬움이 남는다. 중생의 업력을 지닌 이상 후회란 생사를 초월한 인간의 숙명일 것이다. 그러나 반성과 참회, 이를 통한 정진의 열망은 인간만이 가지고 있기에 우리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라 성불의 길로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불교에는 4개의 큰 명절이 있다. 부처님의 탄생을 기념하는 부처님오신날, 성도를 위해 카필라 성벽을 넘은 출가절, 위대한 깨달음을 얻은 성도절, 부처님의 육신이 소멸한 열반절이 그것이다.
문무일 검찰총장이 최악의 인권유린 사례로 꼽히는 부산형제복지원 사건에 대해 비상상고를 한 데 이어 피해자들에게도 사과를 했다. 부산형제복지원은 마구잡이로 사람을 잡아다가 가둬놓고 강제노역과 구타, 감금, 성폭행 등 온갖 인권유린을 자행했다. 이 과정에서 12년간 513명이 사망했다. 그러나 당시 원장 박인근은 공금횡령으로 징역 2년 6개월이라는 가벼운 처벌만을 받았다. 폭행, 특수감금 등 모두 것이 무죄였다. 검찰은 정부의 눈치를 보느라 살인혐의는 입에 담지조차 못했다.비록 늦었지만 문 총장이 과거를 참회하고, 판결을 바로 잡으려고
보편적 질량단위인 ㎏의 기준이 바뀐다고 한다. 그렇다고 해서 시중의 저울 속 ㎏을 절대적 수치로 생각하며 살아왔던 대중들의 삶에 변화가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에 대한 기준이 한 치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는 절대상수로 바뀌는 이유가 궁금할 따름이다.㎏의 기준은 130년 전 프랑스 베르사유궁에서 열린 제1차 국제도량형총회(CGPM)에서였다. 지구 적도에서 극점까지 거리의 1000만 분의 1에 해당하는 금속막대를 국제미터원기를 삼고, 1㎥에 해당하는 물의 질량을 토대로 제작된 금속원기둥을 국제킬로그램원기로 삼았다. 그리고 백금과 이리
부처님의 중생에 대한 사랑을 동체대비(同體大悲)라고 한다. 중생이 자신과 전혀 다르지 않다고 여겨 무한한 자비심을 일으키는 것이 동체대비이다. 남과 부대끼며 매일을 살아가는 범인들에게는 머리로는 이해가 되지만, 몸과 마음으로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우리는 틈틈이 동체대비를 느끼며 살아간다. 자식에 대한 부모의 무한한 사랑이 그것이다. 자신을 희생해서라도 자식이 잘되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 그 자체는 부처님의 자비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11월15일 대입수능시험이 끝났다. 자식들의 합격을 바라며 100일
김정숙 여사가 인도 우타르 프라데시 주 아요디아에서 열린 허왕후 기념공원 착공식에 참석한 것을 놓고 뒷말이 나오고 있다. 허왕후는 금관가야 김수로왕의 부인으로 ‘삼국유사’에는 인도 아유타국 공주로 기록돼 있다.일부 학자들은 허왕후 이야기는 역사적 사실이 아닌 설화일 뿐이고, 백번 양보해 역사적 사실이라 하더라도 아유타가 기념공원이 들어서는 인도 아요디아라고 볼 수 있는 증거가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한마디로 신중했어야 한다는 이야기다. 정치권에서는 문 대통령의 가야사 복원 천명 이후 조급증에 빠진 정부가 신화를 역사로 둔갑시키고 있
11월1일 대법원이 양심적 병역거부에 무죄판결을 내렸다. 이로써 종교적 신념이나 양심에 따라 군대를 거부하는 사람들에게 무조건 징역형을 선고하고 감옥에 가뒀던 아픈 역사가 기억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됐다. 일제강점기 일본이 종교적인 이유로 병역을 거부하는 여호와의 증인 신도 38명을 체포한 이래 지금까지 2만여 명이 군 입대 대신 감옥에 갇혔다.그러나 양심적 병역거부는 오랜 세월 국민들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 이상한 종교의 잘못된 신앙심에서 비롯된 일탈행위로 간주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2001년 평화운동을 하던 오태양이라는 불자가 불
의욕이 넘치면 신중함을 잃게 되고, 신중함을 잃으면 문제가 생기기 마련이다. 문 대통령과 교황의 만남이 그렇다. 문 대통령이 교황을 만나 평양 방문에 대한 긍정적 대답을 이끌어 낸 것은 반가운 일이다. 교황의 평양 방문이 성사된다면 한반도의 문제를 세계에 알릴 수 있는 기회가 될 수도 있다.그러나 딱 거기까지다. 교황이 북한을 방문한다고 해결되는 것은 없다. 남북관계의 열쇠는 누구나 알고 있듯이 미국이 쥐고 있다. 그래서 교황이 평양을 방문하는 것은 여론 환기라는 상징적 의미 이상의 결과를 기대하기 어렵다.문제는 문 대통령과 교황의
초발심시변정각(初發心是便正覺)이라는 말이 있다. 처음 품었던 마음을 일관되게 유지하면 마침내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는 뜻이다. 이를 초심(初心)이라고 말한다. 처음 뜻을 품었다고 해서 초심이라고 하지는 않는다. 시류에 물들지 않은 곧은 마음이라는 의미가 담겨있다. 일본의 유명한 선승 스즈키 순류는 “선심초심(禪心初心)”이라고 가르쳤다. 수행자로서 첫발을 디뎠을 때 가졌던 싱그럽고 투명한 마음, 그 자체가 바로 선의 마음이라는 것이다.초심을 잃어버린 뒤의 결과는 혹독하다. 비리로 파국을 맞은 공직자나 정치인, 최근 재판거래로 국민의
김정은 위원장이 가톨릭 교황을 초청했다. 교황청은 “초청장을 기다리고 있다”고 밝혔다. 교황의 북한방문은 남북정상회담 당시 문재인 대통령의 아이디어였다고 한다. 10월13일부터 유럽을 방문하는 문 대통령은 유럽 방문길에 교황을 직접만나 김 위원장이 밝힌 교황초정 의사를 전달할 계획이다.두 번에 걸친 남북정상의 만남으로 한반도는 평화의 큰 걸음을 내딛었다. 이러한 때에 교황이 북한을 방문한다면 화해분위기는 더욱 고조될 것이고, 북한 또한 개방의 길로 나아가겠다는 의지를 세계에 보여주는 신호탄이 될 것이다.그러나 교황의 북한 방문이 성
독일 나치시절 선전장관을 지낸 괴벨스(1897~1945)라는 인물이 있다. 그는 대중선동에 뛰어난 인물로, 독일 국민들을 선동해 유태인 학살의 광기에 휩쓸리게 만든 장본인이다. “대중은 거짓말을 처음에는 부정하고 두 번째는 의심하게 되고, 계속 말하면 믿게 된다.” “99%의 거짓에 1%의 진실이 100%의 거짓보다 더 큰 효과를 낸다.” 그가 남긴 말이다.괴벨스는 결국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그러나 그가 남긴 거짓선동의 망령은 지금도 세계를 유령처럼 배회하고 있다. 그런데 최근 괴벨스의 선동과 비슷한 현상이 세상을 휩쓸고 있다.
`남북정상이 평양서 만났다. 두 정상은 평양공동선언을 통해 북한의 비핵화와 전쟁 없는 한반도를 약속했다. 사실상의 불가침조약으로 평화의 문을 활짝 연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문 대통령은 숙소인 평양 백화원 앞 정원에 나무를 심었다. 남한에서 들고 간 모감주나무였다. 나무 말은 ‘번영’으로 남북의 화해와 통일, 번영을 염원하는 의미를 담았다. 모감주나무는 염주나무라고도 부른다. 문 대통령이 모감주나무를 북으로 가져간 것은 염주를 헤아리는 마음으로 남북의 화해와 상생의 시대가 열리기를 간절히 바랐기 때문일 것이다.모감주나무는 불자들에게
나치의 살육을 ‘홀로코스트’라 부른다. 1980년대 한국에도 홀로코스트가 있었다. 부산 형제복지원이다. 1987년 원생 1명이 구타로 사망하자, 35명이 집단으로 탈출했다. 형제복지원의 엽기적인 실체가 세상에 드러났다. 1975년 정부는 대대적인 부랑인 단속에 나섰다. 부랑인 수용시설에는 보조금을 지급했다. 형제복지원은 보조금을 더 받기 위해 마구잡이로 사람을 잡아들였다. 수용자들에게는 상한 밥을 먹이고 하루 10시간씩 중노동을 시켰다. 구타와 감금, 살인과 성폭행은 예사로 벌어졌다. 강제노역과 폭행을 견디다 못해 12년간 513명
이판사판(理判事判)은 가슴 아픈 불교역사가 담겨있다. 보통 막다른 골목에 몰렸을 때 쓰는 용어인데, 조선시대 불교가 그랬다. 유교의 나라 조선은 불교를 철저히 파괴했다. 도성을 비롯해 번화가에 즐비했던 사찰은 부서지고 스님들은 산으로 들어갔다. 그곳에서 척박한 땅을 일궈 절을 짓고 불조의 혜명을 이었다.함께 출가했지만 어떤 스님은 이판으로 교학과 수행에 전념했고 사판들은 농사짓고 탁발하며 어려운 절 살림을 꾸려갔다. 이판과 사판, 어느 한쪽이 없어지면 불교는 살아남기 힘들었다. 스님이 된다는 것은 천민이 된다는 의미였다. 그래서 이
종교(宗敎)를 풀이하면 ‘으뜸 되는 가르침’이다. 그러나 종교라는 이름으로 일어나는 전쟁과 살인, 일탈들을 보면 의미가 무색해진다. 세계 각지에서 일어나는 분쟁의 한 축이 바로 종교 간 갈등이다.우리는 다종교 사회이지만 종교 간 분쟁이 심각하지는 않다. 물론 평화만 있는 것은 아니다. 개신교 광신도들이 법당과 불상을 훼손하는 일탈도 적지 않았다. 그럼에도 심각한 사태로 번지지 않은 것은 불교의 포용성에 더해 종교지도자들이 서로를 존중하는 상대주의적 관점을 잃지 않았기 때문이다.그러나 최근 신학대학에서 파면됐다가 재판에서 이긴 손원영
삼계화택은 ‘법화경’에 나오는 말이다. 중생들이 사는 세계가 불에 타고 있는 집과 같다는 뜻이다.총무원장 설정 스님의 은처자 의혹으로 시작된 혼란은 총무원장 사퇴로 끝났다. 그러나 은처자가 있었는지 없었는지 진실은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다만 설정 스님의 사퇴가 “종단이 더 이상 혼란에 빠져서는 안 된다”는 결단의 결과였음은 분명하다. 그러나 설정 스님 사퇴로 모든 것이 일단락된 것은 아니다. 설정 스님 퇴진을 극렬하게 요구했던 사람들이 퇴진이 임박하자 오히려 퇴진을 만류하거나 총무원 부실장 자리를 요구하는 등 온갖 추태가 부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