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여름 삼복더위 속에서 장작 불 떼는 방안에 앉아 본 적이 있는가! 숨막히는 공간 속에서 무릎부터 머리끝까지 상체가 수직이 되도록 몸을 꼿꼿이 세우고 두 발끝으로 땅을 지탱하는 자세를 취하는 장궤합장을 하며 능엄주 기도를 하는 사람들이 있다. 바로 해인사 아비라 기도에 동참한 수행인들이다. 1년 중 음력으로 1, 4, 7, 10월 네 번 열리는 이 아비라 기도에 심원(心源·속명 김두만 씨·48세)거사는 1990년부터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빠지지 않고 참여해 올해로 15년째를 맞는다. 중국 출장 중에도 휴가를 받아 아비라 기도에 참여했을 정도니 그의 원력은 짐작하고도 남는다. 집에서도 매일 예불과 108참회를 하며 기도정진을 하고 있는 심원거사는 아비라 기도 원력 20년을 회향한 후 참선을 하겠단다. 다
‘그래! 괴롭고 서러운 세상, 경전이나 실컷 읽고 죽자.’ 95년 2월 20일 여몽(如夢) 이지영(44) 씨는 죽기로 결심했다. 출가자의 꿈을 접고 선택해야 했던 결혼, 하지만 잇따른 제왕절개 출산의 후유증으로 몸은 만신창이가 되고 까닭 모를 남편에 대한 미움과 증오는 커져만 갔다. 남편 또한 집에만 들어오면 짜증을 냈고, 여기에 시댁과의 깊은 갈등은 그로 하여금 삶이 지옥처럼 느껴지도록 만들었다. 삶 자체가 지옥일 때 공부 이 씨는 업장소멸이나 하고 죽자는 생각으로 금강경을 손에 쥐었다. 통도사 덕도 스님의 간곡한 당부에 따른 것이었다. 그는 이른 새벽부터 밤늦도록 금강경을 읽고 또 읽었다. 세살, 네살 된 두 아이들에게 밥 주고 씻기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오로지 금강경 속에서 살았다. 금
괴로운 첫 울음은 인생살이 시작이요 서글픈 끝 놀람은 이 세상을 등짐이니 들뜬 마음 가라앉혀 보리도를 밝혀내어 부처땅에 들어가는 동업보살 되고지고. -백봉거사의 동업보살의 서원 中 1월 5일 새벽 3시30분 정릉 보림선원 법당. 그동안 정진했던 여러 도반들과 함께 예불을 마친 후 마지막 삼배를 드리던 최은미(43)씨는 갑자기 가슴 밑바닥에서 무언가 울컥 솟아오름을 느꼈다. ‘아! 나도 해냈다.’ 처음 두렵고 불가능해 보이던 일을 마침내 해낸 것이다. 지난 7일간 단 한숨도 안 자고 밤낮으로 정진했던 시간들이 마치 한 순간이었던 양 영상처럼 스쳐지나갔다. 최 씨에게 이번 7일 철야정진은 참으로 각별했다. 새파랗게 젊은 자신과 두 아이를 남겨 두고 갑작스레 세상을 뜬 남편. 이후 그는
거침없는 말투, 활달한 손동작, 소탈한 웃음. 거기에 수더분한 옷차림과 몇 년째 신고 있음직한 낡은 신발. 얼핏 보면 그저 소박하게 살아온 평범한 스님일 뿐이다. 적어도 겉보기에는…. 안성 석남사 회주 정무(正無) 스님은 ‘큰스님’이기를 거부하는 ‘큰스님’이다. 그 흔한 승용차 한대 없이 평생을 살고 있을 뿐 아니라 지금까지도 세탁기 없이 손수 빨래를 한다. 계곡의 수질오염을 막기 위해 전통 해우소를 억척스레 고집하고, 연료비를 아끼려 낮에도 방바닥에 이불 깔아 놓는 것을 잊지 않는다. 심지어 해우소에서 휴지 대신 물과 손을 이용해 ‘뒷물’을 하며, 세수가 70대 중반이건만 직접 해우소에서 똥을 치고 그것으로 배추와 무를 기르고 있다. 수십 명의 상좌가 있고 교구본사 주지를 십수 년이나 지냈던 스님의
생사를 해탈함이 쉬운 일 아닐세 사나운 소 코 꿰어 길들이듯 하게. 눈서리 찬 기운 뼛속까지 사무친 뒤 매화꽃 짙은 향기 코를 찌르리. -황벽 희운 20년 넘게 참선수행에 전념하고 있는 권영두(75·법장) 옹. 그가 불법을 만난 것은 그야말로 기연(奇緣)이었다. 고향 영덕을 떠나 피붙이 하나 없는 서울로 올라온 것은 옹의 나이 열일곱 되던 해였다. 옹은 신문배달, 청소부, 외판원, 노점상 등 온갖 궂은 일을 마다않고 돈을 모았다. 또 밤이면 졸린 눈을 치켜뜨고 악착스레 공부해 마침내 대학에도 입학했다. 그러나 곧바로 터진 한국전쟁. 오랜 군복무를 해야 했던 그는 1957년 제대와 함께 사업에 뛰어들었다. 돈을 많이 벌어 학교를 세우겠다는 생각에서였다. 옹은 하루를 48시간 살 듯했고, 사업의
황영채(왼쪽)씨와 오원탁 씨는 사회에서 각기 다른 인생을 살았지만 '수행'을 인연으로 도반이 되었다. ‘응무소주 이생기심’ 봉착 ‘마음 다스리기’ 고민 중 묘원법사 만나 정진 인도 성지순례 후 초기불교 관심 커 위파사나 수행에 전념 인연은 ‘스스로 지어간다’고 한다. 다만 한 개인의 원력이 어떤 것이냐에 따라 맞이하는 인연 또한 달라질 것이다. 서울대 법대 대학원을 졸업한 이후 대학에서 법학 강의를 했던 황영채 씨와 서울대 공대를 졸업한 이후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과 삼성엔지니어링을 거쳐 한국가스안전공사 연구소장을 역임했던 오원탁 씨. 그들의
스스로를 열등시하는 게 성불의 가장 큰 장애요소 알을 깨는 아픔 겪어야 하늘을 나는 즐거움 있어 아름다움을 얘기할 때 우리는 흔히 어머니가 아기에게 젖먹이는 모습이라든가 농부의 땀 흘리는 모습을 말하고는 한다. 사심 없이 묵묵히 자기 일을 열심히 하는 사람의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말일 듯싶다. 이들의 공통점은 아마도 남에게 보이고자 하지 않는데 있다. 그저 자기에게 주어진 역할을 멋지게 소화해 내고 있기에 아름답게 보일 것이다. 영화나 텔레비전 드라마도 마찬가지다. 주인공이건 아니건 잘생겼던 그렇지 않건 자신이 맡은 역할에 최선을 다하는 배우에게 우리는 아낌없는 찬사와 갈채를 보낸다. 이 세상에 태어나 사회에 발 딛고 사는 이상 누구에게나 각자 역할이 있다. 부모님께는 딸이지만 자신의 딸에
정적인 불교에 비한다면 화려하게만 보이는 연예계는 어울리지 않는 분야일 수도 있습니다. 이 둘을 어떻게 엮어볼까 무지 고민이 되는군요. 본격적인 연재를 시작하기에 앞서 제가 불교와 어떻게 인연을 맺었는지에 대해 소개해 올리겠습니다. 초등학교 6학년때 어버지가 갑자기 돌아가시자 서울 보문사 옆 탑골승방(미타사)에 모셨습니다. 막내 아들이라고 유난히도 예뻐하셨는데 저로서는 너무 일찍 아버지를 여읜 것이죠. 그 때 어머니를 따라 처음으로 찾은 사찰이 불교와의 첫 만남이었습니다. 난생 처음으로 부처님을 뵈었는데 첫 번째로 그 웅장함에 놀랐고 두 번째로 편안함에 마음이 고요해져 새로운 세상을 만난 것 같았습니다. 처음 갔던 그 절에는 비구니 스님만 계셨습니다. 그래서 전 어린 시절에 부처님을
청주시외버스터미널에서 화북행 버스에 올랐다. 하루 다섯 번 운행하는 버스지만 평일인지 승객이 거의 없다. 1시간 반가량 한적한 도로를 달리니 입석분교가 나온다. 학교를 끼고 난 좁다란 길을 터벅터벅 올랐다. “얼마나 가야 하나요?” 길가에 있던 아주머니 답변이 걸작이다. “(얼마나 갈지) 잊어버리고 기냥 똑바로 가다보면 나와유.” 열댓 명은 됨직한 아이들이 손에 삽과 괭이를 들고 시끌벅적 오르고 있다. 입석분교 학생들로 전교생이 19명인데 오늘 오후 수업은 칡 캐기란다. 어설픈 시멘트포장길 끊기고 다시 산길을 10여분 올랐다. ‘이곳은 수행도량’ ‘정진 중’이라는 글씨가 새겨진 나무 팻말이 서있다. 여기부터 ‘푸른누리’다. 상주군 입석면에 자리 잡은 ‘푸른누리’는 지난 95년 말 무소유, 무아집,
1. 부처님의 특징적 모습을 설명한 표현으로 바른 것은? ① 32상 70종호 ② 30상 80종호 ③ 32상 80종호 ④ 32상 82종호 2. 부처님 탄생시 인도사회는 4성 계급사회였다. 부처님 출신계급이 맞는 것은? ① 수드라 ② 바라문 ③ 바이샤 ④ 크샤트리아 3. 부처님의 성도와 열반시의 나이가 바르게 연결된 것은? ① 29세-80세 ② 29세-75세 ③ 35세-80세 ④ 35세-70세 4. 부처님의 사대성지와 기념일이 바르게 연결되지 않은 것은? ① 탄생 - 룸비니 ② 성도 - 코살라 ③ 전법 - 녹야원 ④ 열반 - 쿠시나가라 5. 우리나라에서 부처님의 사대명절로 틀린 것은? ① 부처님 탄생일 : 4월 8일
무불선원 선원장 석 우 스님 (cafe.daum.net/mubulsunwon) 국내 인터넷 이용 인구 3천만 시대. 별의별 사람과 온갖 종류의 정보가 모여드는 인드라망에 눈 밝은 선지식이나 수행의 고수라고 없을까. 무불선원 선원장 석우 스님. 인터넷 다음 카페 ‘무불선원’의 운영자인 스님은 요즘 가장 주목받는 사이버 스타다. 스님의 인터넷 카페가 불과 1년 만에 5000여 라이벌들을 물리치며 12위로 껑충 뛰었을 뿐 아니라 여전히 급격한 상승곡선을 그리고 있기 때문이다. 다른 불교 카페들이 사찰순례, 봉사, 염불, 찬불가 등 보다 대중적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묵묵히 선(禪)을 고집하는 ‘무불선원’의 순위는 놀라운 결과라 할 수 있다. 종횡무진 인터넷을 누비는 석우 스님은 전통 선으로 무장한
혹, 자신이 갖고 있는 염주가 ‘율무’로 만든 염주라면, 더구나 누구에게서 선물 받은 염주라면, 그 염주는 틀림없이 자비행 보살의 손길이 닿은 것이다. 조정희씨. 교계에는 그의 이름 석자 보다는 ‘자비행 보살’로 더 잘 알려져 있다. 1996년 3월부터 2003년까지 8년간 무주상보시한 염주는 모두 10만개. 초겨울, 그는 오늘도 자신의 20여평 아파트에서 염주알을 꿰고 있다. 밭에 율무 심어 직접 재배 “왜 하기는요. 그냥 제가 좋아서 하는 거예요. 염주알 한개씩 꿰면서 ‘관세음’정진도 하고 좋잖아요.” 자비행 보살이 염주를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처음 한 것은 지난 10년 전 가을 성지순례길이었다. 한 노인이 “염주줄이 끊어졌다”며 좀 봐달라는 거였다. 순례를 마친 자비행 보살은 새실로
창작무용가 윤 덕 경 교수 지난 11월 10일, 어둠이 짙게 내린 양재동 서울교육문화회관에는 내로라하는 한국의 무용가들이 모여 춤사위를 펼치고 있었다. 불교를 주제로 각각의 안무자들이 서로 다른 관점에서 주제를 해석하고 창작한 작품을 선보이는 자리였다. 승무(僧舞) 이수자인 김경주 씨의 해학 넘치는 오프닝 ‘비범벅춤’을 시작으로 김난현 씨의 ‘해먹’과 오은희 씨의 작품 ‘환(幻)·멸(滅)’이 이어졌다. 10~20명의 춤꾼들이 펼치는 화려한 몸짓은 관객의 탄성과 갈채를 이끌어냈다. 이어 무대에 오른 건 ‘고요한 시간, 그 깨달음-위파사나’. 이번 대회를 주관한 한국무용연구회 이사장인 윤덕경(서원대) 교수가 직접 안무를 맡은 작품으로 이미 몇 차례의 공연을 통해 숱한 찬사를 받은 작품이기도 했다.
한 노보살님의 말이 화두가 되어 참구 1주일간 참회의 눈물 이제는 날마다 좋은날 오래 전 공부하러 다닐 때 있었던 일이다. 나는 오랜 여행 끝에 지친 몸을 끌고 안거에 들어가기 위해 방부 들였던 절에 들어가던 길이었다. 일주문에서 어떤 허름한 노보살님이 몇몇 분들과 성지 순례를 오셔서 법문을 하고 계셨다. 지나가며 언뜻 들은 얘기로는 “왜 저 나무를 관세음보살이라 하면 말이죠, 나무는 어쩌고저쩌고….” 나는 지나가면서 피식 웃었다. ‘저 무식한 할매 아는 척 하는 것 좀 보소. 나무(南無)란 말은 산에 있는 나무가 아니고 인도 말인데 의지한다, 귀의한다란 뜻이에요. 제대로 알고 얘기하소, 할메요.’ 약간의 비웃음과 함께 이 말을 해주고 싶었지만 귀찮기도 피곤하기도 해서 그냥 지나갔
지난해 가을 방기연 법사는 아내와 아이를 데리고 고향 원주로 돌아왔다. 오랜 도시생활로 몸과 마음이 지칠대로 지쳐있었던 까닭이다. 남에게 도움을 주는 삶을 살겠다는 서원에서 시작한 상담자의 길. 지금까지 수천 명의 얘기를 들어왔건만 정작 자신의 내면에서 나오는 깊은 울림은 외면했었는지 모른다. 때로 상대방을 위한다는 생각에 상담자로서 지켜야할 원칙보다 의욕이 앞서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미숙함이 오히려 상대방의 상처를 덧나게 했고 자신을 괴롭히는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다. 절망감 안고 낙향 깊은 수렁에 빠진 듯한 절망감, 불연 듯 마음 속 밑바닥까지 휘감고 도는 싸늘함은 온몸을 움츠러들게 했다. 그 때 서울생활을 접고 먼저 고향으로 향했던 형님이 같이 살자는 제안을 해왔다. “그래, 회색의 콘크리트
어떤 것에 집착해 내 것으로 만들겠다는 망상을 쫓는 것은 참으로 허망한 것… 지혜는 자신의 내면을 관찰하는 수행을 통해 비로소 완성. 탐심 버리고 바르게 사는 지혜를 배워야 금강경을 제대로 본 것. “길 잃은 나그네에게 나침반이 필요하듯 끊임없는 경쟁과 물질 지상주의에 빠져 혼탁하게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금강경은 삶의 방향을 제시해 줄 것입니다.” 세납 70세의 지관 스님은 하루 4시간 이상 잠을 청하지 않으며 공부에 매진하고 있다. 가산불교문화연구원 원장 지관 스님. 스님은 지난 10월 1일부터 매주 금요일 오후 7시부터 9시까지 가산불교문화연구원 부설 불교원전전문학림 삼학원에서 연구원과 일반인을 대상으로 ‘금강경오가해’ 강의를 시작했다. 칠순을 훌쩍 념겼음에도 불구하고 스님이 다시
임사체험을 한 참가자들은 “죽음은 피하고 싶은 그 무엇이 아니라 또다른 삶을 시작하기 위한 관문”이라고 말한다. “이제는 내가 수십 년 동안 정들었던 나의 육신과 이별해야 할 시간입니다. 마지막 이 호흡이 끊기고 나면 나의 육신은 곧 생명 없는 고깃덩이가 되어 냄새를 풍기겠지요. 짧디짧은 인생에서 맛보았던 성취와 쾌락이 모두 꿈같기만 할 뿐입니다. 그동안 일생을 살아오면서 알게 모르게 지었던 많은 잘못 참회합니다.” 발원 후 입관 …장엄염불도 짙은 먹구름이 상현달을 삼킨 10월 23일 자정 무렵, 북한산 의상봉 자락에 위치한 국녕사에서는 올해 마지막 임사(臨死)체험 프로그램이 한창 진행되고 있었다. 서울 능인선원에 다니고 있는 이철교(57·무량광) 씨도 그 중의 한 사람. 하얀 수의를 갈아입
더불어 하는 수행은 더불어 행복 만든다 한 지역에만 갖힌 문화는 이젠 다시없다. 오랜 동안 아시아 지역에 국한되었던 불교도 특정 지역의 종교가 아니다. 따라서 종교의 우열도 분명히 판가름 나게 되었다. 불교가 세계적으로 급속히 확산되어가는 것은 그 우위성 때문인가. 불교 수행에 더없이 가치를 부여하는 것은 세계적 추세이기도 하지만, 국내에서도 그 수행인의 수가 나날이 늘어가고 질적으로도 일진월보(日進月步)의 감이 없지 않다. 그러나 나 자신의 경우를 돌아보더라도 수행의 입문이 그리 쉽지 않은 것만은 알 수 있다. 처음부터 끝까지 그 내용을 설명하기도 어렵고, 또 이해하기도 쉽지 않다. 경(經)자체가 그런 것인가. 참선 공부는 화두를 들고 의심을 내야 한다. 이런 가르침은 천편일률적. 어떤 공안
수진 스님은 교(敎)가 번뇌의 자리를 부처님의 말씀으로 채우는 것이라면 선(禪)은 그 가르침을 직접 체화하는 과정이라고 말한다. 경전에서는 한번 스치는 옷깃에도 숱한 전생의 인연이 맞닿아 있다고 말한다. 하물며 ‘인천(人天)의 스승’이라는 출가자의 길에 있어서야…. 부산 해인정사 주지 수진 스님. 지난 30여년 간 수행자의 길을 걷고 있는 스님은 어쩌면 깨알 같이 많은 과거세부터 삭발염의 했던 납자였는지도 모른다. 스님의 고향은 연화산 옥천사 법당이 멀리 보이는 경남 고성의 한 작은 마을. 또래들과 어울리기보다 혼자 있기를 더 좋아했던 소년은 초등학교 졸업과 함께 부모님께 출가의 뜻을 밝혔다. 저학년 때부터 출가하겠다는 아들의 말을 종종 들어온 터였지만 막상 출가선언을 들었을 때 부모는 당혹스러울 수
남산의 철쭉꽃이 흐드러지던 68년 어느 봄날. 당시 스물다섯 청년이었던 홍익대 김원수(62) 교수는 집을 나섰다. 그가 가진 것이라고는 약간의 옷가지와 『금강경』 한 권. 지금의 고통스러움을 해결하지 못한다면 돌아오지 않겠다는 굳은 각오였건만 오직 아들 하나 바라보고 살아온 어머니가 못내 눈에 밟혔다.영원한 스승 백성욱 박사명문대학 출신에 훤출한 외모. 속 모르는 이들이야 뭔 걱정이 있겠냐고 부러워했지만 당시 그에게 삶은 마치 어깨 위에 큼지막한 바윗덩어리를 올려놓은 듯 힘겹고 고통스러웠다. 아버지에 대한 원망과 미움, 거기에 끊임없이 밀려드는 온갖 번뇌와 망상들은 하루가 다르게 그를 황폐화 시켜갔다.이런 김 교수가 향한 곳은 경기도 부천시 소사동의 ‘백성목장’. 그곳에는 독립운동가이자 교육자이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