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최대의 호랑으로 일컬어지는 둔황 막고굴. 백양나무가 기도하듯 경건하게 서 있다. 헤매고 돌아다닌 거/나를 찾아/가고 또 간 길. 모래산 나즉이 누웠고/월아천 눈썹 눈물이 나/천수천안 백양나무 앞에 서 있었다. 흙벽 소담한 돈황의 언덕,/흙산을 뚫으며/부처님 찾아 관세음보살 외치던/수천 수만 염원의 손,/그 세월의 벽화를 만나며/옛 사람이 되기도 하였다. 황량한 흙먼지,/오래지 않아 무너질 흙굴,/가도 가도 자갈사막 이어지던/천산의 만년설 흘러내린 곳에/“기다리면 가득하리라”/초록 물빛 산에 잠기고 있었다. - 정영자의 ‘막고굴의 서원’ 中 272굴 사유보살상. 우리나라의 금동미륵반가상(국보118호)과 대단히 비슷하다. 하루 종일 차에서 지내다보니 온 몸에 피로가 덕
거센 모래 바람이 그치지 않는 황량한 산웨이산(三危山). 둔황 막고굴은 그 곳 산기슭에 고요히 둥지를 틀고 있다. 4세기 중엽인 5호16국 시대부터 14세기 원나라 때까지 약 1000여 년간 조성된 까닭에 막고굴의 불상과 벽화들 모습도 제각각이다. 초기의 굴, 그러니까 수나라 이전의 굴들에서는 불상의 얼굴이나 의상 등이 서역풍에 대단히 가깝다. 불교가 아직 이 지역에 정착하지 못한 때문인지 어딘지 모르게 세련된 멋은 없지만 정겹고 소박한 아름다움이 매력적이다. 반면 북위시대를 거쳐 당대에 이르면 정교함과 화려함은 극치를 이루고 불상과 보살은 마치 살아있는 듯 생동감이 물씬 넘친다. 벽화도 초기에는 부처님의 전생 등을 표현한 것이 많다면 시간이 지날수록 대승불교를 주제로 한 경전들이 주로 나타나고 있으며
둔황 막고굴과 함께 이 지역의 대표적인 명물 밍사산. 수많은 시안과 가객들이 이곳에 들려 밍사산의 아름다움을 노래했다. 바람에 모래가 버석인다. 때문일까. 시원하기보다 오히려 숨이 턱턱 막혀온다. 일주문 뒤로 서 있는 막고굴이 떠나는 우리를 천년의 시선으로 굽어보는 듯 하다. 그 척박한 실크로드가 아직도 몽환의 이미지로 남아있는 것은 어쩌면 막고굴이 갖는 신비로움 때문일지도 모른다. 차에 올라 밍사산으로 향했다. 굴곡이 심한 도로에 차도 사람도 덜컹거린다. 20여 분 달렸을까. 멀리 하얀 모래산이 머리를 조금씩 내밀고 있다. 어떻게 이런 황무지에 저런 곱디고운 산이 솟아날 수 있었을까. 둔황에서 남쪽으로 약 4km 떨어진 밍사산은 50~60m 높이의 모래산이다. 남북으로 약 20km, 동서로 약
소설 서유기에 나오는 불타는 산, 후오이엔산. 산줄기가 위로 솟구치는 불길 같다. 둔황의 아침이 뿌옇게 밝아온다. 오늘 달려야 할 거리는 약 900km. 이른 새벽부터 서둘러 출발했다. 숙소 앞에는 두 마리 개가 이리 저리 뛰놀고 있다. 우리나라의 시골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풍경과 크게 다르지 않다. 둔황. 이곳은 불교미술에서 뿐 아니라 역경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지금으로부터 1800여 년전 지참, 구마라집, 현장과 더불어 중국 4대 역경가의 한 사람인 축법호(竺法護)는 둔황에서 태어났다. 8세 때 출가해 불법을 전하겠다는 뜻을 세운 그는 스승을 따라 서역 각지를 유람하며 불교를 배우고, 또 수많은 경전을 수집해 고향 둔황으로 돌아왔다. 당시 서역의 36개국 언어에 능통했다고 하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