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투도계. 재가불자가 지켜야 할 오계 가운데 두 번째에 위치하는 이 계는 남의 것을 훔치지 말라는 정도의 뜻으로 일반적으로 이해되고 있지만,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자신에게 주어지지 않은 것을 취하는 행동으로부터 자발적으로 떠나고 멀리 함을 의미한다. 남의 소유물은 말할 것도 없고, 설사 특정한 누군가의 소유물이 아니더라도 자신에게 주어지지 않은 것은 어떤 것이든 함부로 취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출가자의 경우, 연못에 핀 연꽃의 향기를 맡는 것만으로도 향기를 훔친 자라 불렸다고 할 정도이니, 불교에서 자신의 소유물이 아닌 것을 취하는 행동이 얼마나 엄격히 경계되고 있는지 엿볼 수 있다. 남의 것을 탐내는 인간의 행위가 인류의 불행을 발생시킨 주범으로 묘사되는 경우가 많은 점은 흥미롭다. 잘 알려진 바
재가불자가 지켜야 할 오계(五戒) 가운데 첫 번째는 불살생계이다. 살아있는 생명에게 해를 입히거나 목숨을 빼앗는 행위를 경계하는 계이다. 그런데 필자는 학생들로부터 자주 이런 질문을 받는다. “불교에서는 살아있는 것을 죽여서는 안 된다고 하는데요. 그러면 파리나 모기, 바퀴벌레 이런 것도 죽이면 안 되나요?”참으로 난감한 질문이다. 절대로 죽여서는 안 된다고 하자니 이런 종류의 불결한 해충들이 가져다 줄 불이익이 마음에 걸리고, 그렇다고 죽여도 좋다고 하자니 불살생계의 의미 자체가 애매모호해진다. 결국 명확한 답변을 회피한 채, 스스로도 납득이 안 가는 궁한 대답으로 얼버무리기 일쑤다. 그런데 어느 날 필자는 지금껏 자신이 생명에 대해 얼마나 큰 편견을 지니고 살아 왔는지 문득 깨닫게 되었다. 그것은 곤충
“불을 섬기는 바라드와자 바라문은 부처님께 다음과 같이 말씀드렸다. ‘부처님이시여! 놀랍습니다. 마치 쓰러진 사람을 일으키듯, 가려진 것을 벗겨주듯, 길을 잃어 헤매는 자에게 길을 알려 주듯, 혹은「눈뜬 자는 빛을 보리라」며 어둠 속에서 등불을 비추어 주듯, 부처님께서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법을 설하셨습니다. 저는 부처님과 법, 그리고 승단에 귀의합니다. 부처님께서는 부디 오늘부터 저를 우바새로 받아주십시오. 목숨이 끝날 때까지 귀의하겠습니다.’” 이 구절은『숫따니빠따』라는 초기 경전에 나오는 것으로, 부처님으로부터 가르침을 받고 감동한 바라드와자 바라문이 우바새, 즉 재가불자로 평생 살아갈 것을 부처님께 청하는 내용이다. 여기에서 나타나듯, 불교도가 되고자 마음먹은 사람은 먼저 불법승(佛法僧) 삼보에 귀
얼마 전 TV의 한 프로그램을 보다가 가슴이 철렁했다. 어쩌다 그리 높은 곳까지 올라가게 되었는지, 아직 어려 보이는 개 한 마리가 아득한 절벽 위에서 내려 갈 곳을 찾으며 주춤거리고 있었다. 주민의 신고를 받고 출동한 몇 명의 관공서 직원들이 포획하려 애썼지만, 겁먹은 개는 더 놀라 미친 듯 주변을 맴 돌았고, 그렇게 한 시간 이상을 보내다 결국 밑으로 추락하고 말았다. 다행히 밑에 안전망을 쳐둔 덕에 아슬아슬 목숨은 부지했다. 그 장면을 보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만약 개가 안전망에 걸리지 못하고 떨어져 죽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위험한 상황에 놓인 개를 안타깝게 여겨 살리고자 한 행위는 의심할 여지없이 선행이다. 그러나 만약 그 개가 죽었다면 이는 결과적으로 살생이라는 악행이 되는 것은 아닐까
‘불교는 윤리적인 종교이다.’이 제목을 본 일부 독자들은 분명 기이하게 여길 것이다.‘그럼, 윤리적이지 않은 종교도 있나? 나쁜 짓 하라고 시키는 종교가 어디 있어.’옳은 말이다. 비윤리적인 종교를 어찌 종교라 이름 하겠는가.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자가 굳이 불교의 특징으로 윤리를 든 것은, 많은 종교들 가운데서도 불교는 특히 철저하게 윤리적이기 때문이다. 악행의 금지와 선행의 권장. 이 세상에 태어나 철이 들 무렵부터 집에서는 부모님으로부터, 학교에서는 선생님으로부터 귀가 따갑도록 듣고 살아왔다. 종교인이 아니라도 인간이라면 누구라도 지키고 살아가야 할 도덕적 가르침이다. 이렇듯 어찌 보면 너무나도 당연한 가르침을 불교 경전에서는 수없이 반복한다. “악행은 저지르지 말아야 한다. 악행을 저지
수계식에서 이루어지는 자발적인 결의는‘계체(戒體)’라는 보이지 않는 힘이 되어 수계자의 마음속에 자리 잡게 되고, 이후 그 사람이 불교도로서 올바른 삶을 살아가게 해 주는 하나의 길잡이가 된다. 그런데 수계식을 통해 얻은 계체는 영원불멸한 것이 아니다. 계를 받은 후, 여러 가지 요인에 의해 계체의 힘이 약해질 수도 혹은 사라져 버릴 수도 있다. 수계식이 거행되는 동안에는 앞으로 불교도로서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겠노라 가슴 벅찬 결의를 하지만, 수계식이 끝나고 현실로 돌아오는 순간, 여러 가지 유혹 앞에서 그 결의는 눈 녹듯 서서히 사라져 간다. 재가불자의 불도(佛道) 실천법을 다루는 몇몇 경전들은, 수계 후 계체의 힘이 약해지거나 아예 잃어버릴 경우를 전제로 그 후의 실천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예를 들
며칠 전에 반가운 메일 한통을 받았다. 2년 전 쯤, 필자의 강의를 들었던 학생이 보내 온 새해인사 메일이었다. 속 썩이는 자식이 효도한다 했던가, 그 당시는 통제가 안 될 만큼 산만한 청강 태도로 필자의 마음을 그리도 상하게 하더니, 언제부터인가 가끔 소식을 전하며 안부를 묻곤 한다. 이번에는 얼마 전에 받은 수계식에 관한 이야기였다. 그 동안 사이비 불교신자로 살다가, 최근 어머니가 다니시는 절 주지스님의 권유로 계를 받게 되었다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괜히 계를 받은 것은 아닐까 요즘 들어 후회막급이라고 했다. 이유인즉, 계를 받고 나니 그 전에는 아무렇지 않게 하던 행동 하나하나가 모두 신경 쓰이고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이었다. 친구들과 술 한잔 할 때도 왠지 찜찜하고, 친구에게 장난삼아 하던 거짓말도
“계율이란 말을 듣기만 해도 왠지 숨이 막혀요. 이것도 하지 마라, 저것도 하지 마라. 그럼 뭘 하면서 살라는 거예요?”주변에서 심심찮게 들려오는 불평이다. 이 불평 속에는 계율이란 출가수행자들이나 지키면 그만이지, 왜 우리 같은 재가불자까지 그 속박 밑에 있어야 하는가라는 생각이 잠재하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즉 ‘계율=출가수행자의 율’을 동일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엄밀히 말하자면, 계율이란 말은 적절한 표현이 아니다. 계율이란 계와 율이라는 두 말이 합쳐져 이루어진 용어인데, 이 합성어는 빨리어나 산스크리트어 문헌에서는 그 용례를 발견할 수 없다. 즉 중국에서 한역되는 과정에서 계율이라는 합성어가 생겨나고, 한국이나 일본불교도 이 영향을 받고 있는 것이다. 계율이라는 표현이 크게 잘못되
새해가 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몇 가지 계획을 세우며 새로운 삶을 다짐하곤 한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야지, 담배를 끊어야지, 운동을 해야지 등등. 지난 한 해 동안 자신에게 만족스럽지 못했던 점 등을 고쳐, 새해에는 좀 더 멋진 모습으로 거듭 나 보겠다는 참으로 가상한 생각이다. 그러나 서글프게도 이 가상한 생각은 작심삼일로 끝나는 것이 보통이다. 하루 이틀은 의욕으로 불타지만, 몸은 곧 게을러지고 마음도 적당한 핑계거리를 제공하며 자신의 행동을 합리화시켜 준다. 필자 역시 작심삼일녀다. 그래서 요즘 삶에 크고 작은 자극을 주는 책들을 틈나는 대로 뒤적거리며 스스로를 바꿔 보고자 노력 중인데, 흥미롭게도 이런 종류의 책들이 성공의 비결이라 한결같이 강조하는 것은 바로 ‘좋은 습관’이다. 생각해 보면, 새해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