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청해성에 속해 있는 시닝의 타얼사는 티베트 불교 개혁의 주역이고 달라이라마 제도를 만들었다고 하는 총카파를 기념하며 만들어진 사원이다. 총카파의 탄생지에 만들었다는 대금와전(大金瓦殿)은 지붕의 기와를 전부 금으로 칠을 했다고 하여 더 유명한데, 안내자에게 들으니 기와를 칠하는 데 금 850kg이 들었다고 한다. 거의 1톤에 가까운 금을, 실내의 불상이나 전을 장식하는 데 쓴 게 아니라 비바람에 일 년 내내 노출된 기와에 칠해놓았다는 말에 다들 당혹의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왜 그랬을까? 뿐만 아니라 절 안에 있는 수많은 ‘걸게
‘자아’라고 하든 ‘성격’이라고 하든, 일정한 사고패턴이나 제한된 행동패턴을 형성하는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우리는 낯선 공간에 들어가면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파악하기 위해 매우 많은 주의를 기울인다. 낯선 사람을 만났을 때도 그렇다. 적절한 대처의 방식(이를 ‘행동도식’이라고 한다)을 찾게 되면, 적은 에너지를 들여 편하게 행동하게 된다. 이런 행동도식들이 모여 ‘나’의 일정한 행동패턴을 형성하게 된다. 어떤 사람이나 상황에 대해 익숙하고 편하게 느껴지는 것은 이런 행동패턴이 형성되었음을 뜻한다. 그게 안 되면, 우리는 매번
‘카게(影)’란 일본어로, 그림자란 뜻이다. ‘카게무샤’란 말은 구로자와 아키라의 영화 때문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는데, 적들의 정탐에 대처하기 위해 비슷하게 생긴 사람으로 성주와 같은 중요한 이를 대신하게 하는 ‘무사’를 뜻한다. 구로자와의 영화 ‘카게무샤’는 전국시대 유명한 가문의 성주인 다카다 신겐의 카게무샤가 되어 살았던 한 도둑을 둘러싼 얘기를 다룬다. 자신의 죽음이 알려지면 적의 공격에 가문이 몰락할 것을 예감한 다케다 신겐은 3년간 자신의 죽음을 감추라는 유언을 남긴다. 그러나 적의 정탐이 있을 것이기에, 그들을 속이려면
변하는 것을 멈추게 하고, 사라져 가는 것을 붙잡으려는 이런 시도를 두고, 자유주의자라면 개인적 고통이니 개인이 감당하라고 할지도 모른다. 치유적 관점을 가진 ‘종교인’이라면, 애착과 집착이 낳는 그런 고통을 특별한 개인들의 병적 증상이니 그 애착과 집착을 내려놓으면 된다고 말할지도 모른다.반복이 동일함 규정하지만동일함 속에는 차이가 존재차이의 힘을 인정하는 것이무상을 바르게 이해하는 것그러나 동일성의 사유, 동일성의 욕구가 산출하는 고통은 개인적인 것에 그치지 않는다. 이는 필연적 무지의 또 하나의 특징을 지적해야 분명해진다. 유
세상의 실상, 그것은 무상이다. 차이만이 존재하건만, 왜 우리는 어디서나 동일성을 찾으려 할까? 동일성과 짝된 차이만을 보게 되는 것일까? 사실 철저하게 무상함을 보는 것만으로는 대단히 곤혹스런 상황에 처할 수 있다. 가령 학교에서 수업을 할 때 출석을 부르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러나 무상을 깊이 통찰했다면, 출석을 부르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건 지난주에 온 사람과 오늘 온 사람의 동일성을 멋대로 부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 이 글을 쓰는 나 역시, ‘이진경’이라는 같은 이름을 써서 기고하고 연재하는데, 이 또한 어느새 어
'벽암록' 제27칙은 운문(雲門) 스님의 유명한 얘기를 다루고 있다. 들어보라.어떤 스님이 운문 스님에게 물었다.“나무가 메마르고 잎새가 질 때면 어떠합니까?”“가을바람에 완전히 드러났느니라(體露金風).”동일한 이름의 사람조차매순간 세포들의 생멸로 동일한 상태를 찾지 못해무상, 동일해 보이는 것서끊임없이 달라짐 보는 것무엇이 완전히 드러났을까? 누구는 잎이 다 져서 나무의 몸(體)이 드러났다고 하지만, 이는 질문이 겨냥하는 바를 완전히 오인한 것이고, 누구는 번뇌와 같은 잎들이 다 져서 본체(體)가 드러났다고 하지만, 이는 본체
분석적 인과성은 두 변수 간 관계를 ‘정확히’ 하기 위해, 즉 최대한 예측가능하게 하기 위해, 관여된 변수를 최대한 줄여 둘로 만든다. 변수가 셋을 넘어가면, 그리고 그 변수들이 서로 영향을 미치기 시작하면, 결과를 전혀 예측할 수 없기 때문이다. 가령 태양의 주위를 도는 지구의 궤적은 태양과 지구라는 두 항만을 고려하면 계산될 수 있지만 거기에 달이 지구 주위를 도는 것까지 함께 계산하려 하면 계산할 수 없는 사태에 빠지고 만다. 그래서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도는데 달의 영향이 없다고 혹은 일정하다고 가정하고 계산한다. 이렇게 구성
백장(百丈) 스님이 법문을 하면 언제나 듣고 있던 노인이 있었다. 어느 날 법문이 끝나 대중이 모두 흩어졌는데, 그 노인은 가지 않고 남아 있었다. 백장이 물었다. “그대는 뉘신가?” 노인의 대답은 믿을 수 없지만, 아주 흥미로운 것이었다. “저는 과거 가섭불 시대에 이 산에 주석하여 살고 있었는데, 어느 날 한 학인이 ‘위대한 수행자도 인과에 떨어집니까?’라고 묻기에 ‘인과에 떨어지지 않는다(不落因果)’라고 답했다가 그 과보로 오백생을 여우 몸을 받아 이리 살고 있습니다. 제가 이 처지를 바꿀 수 있도록 한 말씀 해주소서.” 그러
사물이 이렇다면, 사람이라고 다를까? 사람에겐 다른 동물과 다른 특별한 본성이 있다는 식의 생각은 아주 흔한 것이다. 인간은 ‘생각하는 동물’이니 ‘언어를 사용하는 동물’이니 ‘놀이하는 동물’이니 하는 얘기는 안 들어본 이를 찾기 힘들다. 그리고 여전히 많이들 당연하다고 믿고 있을 것이다.동일한 물질도 환경에 따라다른 형태의 성질로 나타나인간인 흑인이 노예된 것은끔찍한 백인 만난데서 기인그러나 동물의 행동을 관찰한 동물행동학의 연구에 따르면, 사람만이 생각한다는 건 오래된 착각이다. 생각하는 방식의 차이가 있긴 하지만, 대부분의 동
불교의 가르침을 한 마디로 요약하는 많은 방법이 있지만, ‘연기’라는 말로 그것을 요약하는 걸 부정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연기(緣起), 연하여 일어남이다. 어떤 조건에 연하여 일어남이고, 어떤 조건에 기대어 존재함이다. 반대로 그 조건이 없으면 존재하지 않음, 혹은 사라짐이다. ‘중아함경’에 있는 유명한 문구가 그것을 요약해준다.변하지 않는 실체란 없다조건 달라지면 본성 달라져세상이 불변의 진리 찾을 때불교, 무상함 보는 지혜 제시“이것이 있으면 저것이 있고, 이것이 생겨나면 저것이 생겨난다. 이것이 없으면 저것이 없으며, 이것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