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미술의 다양한 장르 가운데서 가장 흔히 보는 것 중 하나가 범종(梵鍾)일 것이다. 어느 절이든 대개 마당에 커다란 범종이 걸린 종각 혹은 종루가 있기 마련이이니까. 종각에는 범종만 있는 게 아니라 운판(雲板)·목어(木魚)·법고(法鼓)가 함께 있어 이 네 가지 공양구(供養具)를 한데 불러 ‘사물(四物)’이라고 한다. 쓰임새는 모두 당목이나 채로 두드려서 소리를 내는 타악기이지만 각자 나름대로 깊은 의미가 있으니 어느 것 하나라도 소중하지 않은 게 없다. 그래도 전각 이름이 종각이듯이 이 사물 중에서 가장 중요한 건 아무래도 범종일
대웅전이나 극락전 같은 전각은 불교미술의 관점에서 보면 보배가 그득히 담긴 보물창고 같은 곳이다. 그 안에는 갖가지 다양한 작품들이 제자리를 지키며 광채를 발하고 있다. 전각 자체가 궁극적으로 하나의 불국토를 만들고 있으니 이런 전방위적 장엄은 당연한 일이다. 대웅전은 석가모니의 영산회상 불국토를, 극락전은 서방의 극락정토를, 미륵전은 먼 훗날에 출현하여 사바세계를 제도하는 용화세계를 표현한 곳이다. 한 마디로 전각은 그 자체로 경전에 나오는 영원하고 행복하고 자유롭고 번뇌가 없는 상락정토(常樂淨土)를 묘사한 것으로 보면 된다.수미
옛날 사람의 글은 기회 되는 대로 찾아서 읽는 편인데 주로 사찰의 역사와 관련된 사적기나 시(詩)들을 자주 본다. 지은이 중에는 스님도 있고 내로라하는 유명 문인들도 있다. 어떤 이는 마지못한 듯 약간 건성으로 쓰고, 어떤 이는 자신이 유학자임을 잊은 듯 불교와의 오묘한 이치에 감탄사를 연발하기도 했다. 진정한 마음은 어떻게든 드러나는 법이라 그런 글을 읽으면 마치 오랜만에 만난 친구와 밤새워 도란도란 얘기하는 느낌이 든다. 고금의 세월을 뛰어넘은 대화라는 게 바로 이런 것인가 싶다. 지금 소개하는 이는 조선시대 후기 문예의 황금기
사람들은 눈앞에 있는 화려한 보석에는 열광해도 진흙 속의 진주는 잘 못 본다. 누가 원석을 잘 골라 멋지게 ‘커팅’해 보여주면 좋아하지만, 스스로 원석을 찾아나서는 수고로움에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보석을 예로 들었지만 사찰에서 문화재를 대하는 태도도 별반 다르지 않은 것 같다. “이야말로 중요한 것이로군요”하는 감식이 나와야 관심을 보이지, 스스로 나서서 문화재를 꼼꼼하게 들여다보려는 적극성은 별로 없는 것 같다. 예를 들어 강원도 양양 낙산사(洛山寺)의 사리탑과 탑비가 그렇다. 홍련암 가는 길목의 언덕 한 귀퉁이에 삐뚜름하게
달리 비교할 만한 대상이 없을 정도로 아주 솜씨가 뛰어난 작품을 가리켜 ‘교탈천공(巧奪天工)’이라고 한다. ‘하늘의 솜씨를 빌려온 듯 교묘하게 만들었다’는 뜻으로 어떤 작품에 대한 최고의 헌사라고 이해하면 될 것 같다. 물론 당대 최고의 작품이 아니면 쓸 수 없는 표현이다. 투명하듯 속이 파르스름하게 비치는 중국 송나라의 영청자(影靑瓷)나 고려청자의 아름다움을 말할 때 이 말이 주저 없이 사용되었다. 또 신라의 경덕왕이 중국 당나라 대종(岱宗)에게 선물한 ‘만불산(萬佛山)’도 그만한 반열에 들 명품이다. 길이 1미터 정도의 틀 위에
근래 초상화가 우리 문화가 지닌 또 하나의 가치로 조명을 받고 있다. 윤두서(1668~1715)의 자화상에는 목 이하를 과감히 생략하고 얼굴만 그려 주인공의 내면을 강조한 파격이 높게 평가받는다. 또 사방으로 뻗치다시피 한 수염과 상대방을 꿰뚫을 것처럼 강렬히 내뿜는 눈빛도 돋보인다. 이조판서 이덕수(1673~1744)의 초상화에는 천연두 때문에 생긴 얽은 자국이 뚜렷하고, 한성부 판윤을 지낸 홍진(1541~1618)은 혹이 달린 것처럼 커다랗게 부어오른 코를 사실 그대로 표현해낼 만큼 있는 그대로의 꾸밈없는 모습들이다.스님의 초상
문화재를 감상할 때 가장 염두에 두어야 할 점은 무엇일까? 역사는 마음이 아니라 머리로 해야 하는 학문이지만 문화재는 예술품이니 마음과 느낌이 더 중요하다. 그런데 문화재는 한편으론 역사의 한 부분이 되기도 한다. 그렇다면 문화재를 감상의 대상에서 더 나아가 역사의 한 자료로 삼기 위해서는 어떤 방법이 있을까? 미술사를 연구하는 사람마다 자신만의 방식이 있을 수 있겠지만, 나는 시대성·희소성·역사성 등 세 가지를 가장 중요한 잣대로 삼는다. 이 외에 ‘예술성’도 함께 놓으면 금상첨화인데, 다만 예술성 자체가 미학적 관점에서 볼 때
우리나라 역사에는 확실히 정리되지 않은 아이템들이 있다. 다시 말하면 분명히 역사의 한 중요한 흐름이나 사건인데, 이에 대해 학자 또는 보통 사람들의 인식이 온전히 정리되지 못한 항목이 있다는 뜻이다. 예를 들면 흥선대원군이 시행했던 쇄국정책이나, 그 반대로 발달된 서양문명을 도입해야 한다는 갑신정변이 그렇다. 두 사건 모두 성공 못한 정책이었다는 점에서 우리는 곤혹스러움을 느낀다. 과연 무엇이 옳은 일이었던가? 근현대로 더 내려오면 굳이 열거하지 않아도 역사적 정리가 안 된 이런 애매모호한 아이템들이 훨씬 많다.불교사와 역사가 만
우리나라 사찰의 역사를 들여다보면 기이하고도 흥미로운 이야기가 참 많다. 이런 이야기들을 잘 엮으면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할 가치가 충분하다. 그런데도 요즘 사람들이 쓰는 사찰 역사는 종종 무미건조하고 맥 빠진 사실의 나열에 그쳐 도중에 책을 그만 덮어버리고 싶게 만든다. 1700년 불교사에서 흥미진진한 이야기가 여간 많지 않겠는가? 그런데도 역사 읽기가 마치 건조한 사막을 건너는 듯한 기분을 들게 하는 건, ‘정사(正史) 콤플렉스’라고 해도 될 만큼 정사만 고집하고 거기에 근거하는 도식적인 서술 태도를 고집하는 데 문제가 있는
윤회만 돌고 도는 줄 알았는데 원한과 복수, 권력에 대한 욕심도 끝없이 돌고 도는 것 같다. 그게 미망(迷妄)인줄 알면서도 헤어나지 못하고 욕심을 떨치지 못하니 그게 중생이다. 아비가 억울하게 죽은 원한을 자식이 복수로 갚으려 들고, 복수를 당한 쪽은 또 그들대로 가슴에 사무친 원한을 품은 채 복수를 위해 칼을 간다. 그렇게 원한은 또 다른 원한을 낳고 복수는 복수를 부른다. 돌고 도는 원한과 복수 그리고 배신의 쳇바퀴를 멈출 수는 없을까? 중생의 지독한 욕심은 중생 스스로는 못 풀고 불보살의 자비심에 기대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일까
‘관찰사(觀察使)’; 조선팔도 각 도의 우두머리 벼슬. 고려 때인 1390년에 처음 생겼고, 조선에서는 도내의 행정·군정·재정·사법·형벌을 독자적으로 관장했던 정2품 또는 종2품의 외직(外職). 감사(監司)·방백(方伯)·도백(道伯) 등으로도 불렀다. / ‘웅신사(熊神寺)’ 또는 ‘곰절’; 성주사의 또 다른 이름. 1686년 성주사를 중건할 때, 진경대사가 법문할 때마다 산에서 내려와 듣고 가던 곰이 불사에 쓸 재목을 날랐다는 전설에서 유래. / ‘요천시사(樂川詩社)’; 창원 지역에서 명망이 높고 존경받던 선비들이 만든 시회(詩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