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한 행자 교육 속 버팀목 돼준 미소지금도 힘들때면 스님 모습 떠올려 모두들 특별한 이유도 없이 잔뜩 긴장했다. 긴장해야 할 정확한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들 모두는 군 훈련소에 처음 입소했을 때보다 훨씬 긴장되어 있었다. 인례사 스님들은 마치 우리들의 긴장미를 즐기는 듯 계속 분위기를 잡아갔다. 모두 스스로 발심하여 출가한 길이라서 더욱 그러했던 것 같다. 군에서야 잘못하면 육체적인 괴로움을 당하면 그만이지만 행자교육 때는 그런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만일 문제가 생겨서 퇴방되는 날에는 인생의 큰 전환점으로 삼고자 했던 출가의 길을 접어야 하기 때문에 누구도 큰소리로 윽박지르는 않지만 각자 조바심에 잔뜩 긴장 할 수밖에 없었던 것 같다. 처음 발심하여 출가한 예비 스님들께 좀 따스하
짧은 지면서 만난 자비 실천에 반성언젠간 스님처럼 보살행 실천하리만남은 인연으로 인하여 이루어진다. 아무리 간절한 바람이 있어도 지어놓은 인연이 없으면 만나기 어렵고 만났더라도 쉽사리 헤어지기 일쑤다. 때로는 직접 얼굴을 마주하지 못하였지만 누구보다 다정다감한 느낌을 가지게 되는 경우가 있는 것 같다. 많은 만남의 인연 가운데 직접 만나지 못했지만 항상 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사람이 있다. 짧은 글로 처음 만났던 대만 자재공덕회의 증엄 비구니다. 언젠가 자재공덕회 같은 큰 조직을 결성하고 많은 곳에서 자비보살행을 하게 된 경위를 적은 글을 보았다. 스님께서 출가한지 얼마 되지 않아서 어떤 일로 병원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서 한 원주민 여자가 병원 바닥에 피가 낭자한 것을 목격하였다. 다가가 보니 유산한
물욕 없는 단순한 성격의 도반 스님못 버리는 번뇌 속 내 생활 귀감 되어강원을 졸업하고 온통 선방에 갈 생각뿐이었다. 일타큰스님께서 그래도 중이 됐으면 율장이라도 한번 보라고 권하셨지만 그 간곡한 말씀은 들리지 않았다. 그동안 가졌던 물건들을 정리하면서 이 물건들이 정말 나의 것인가 의아스러운 것들이 부지기수였다. 모으고 모은 책과 버리지 못한 옷가지들, 나름대로 소중하다고 두었던 물건들이 잡다하게만 느껴졌다. 그때는 참선할 때 필요할 옷가지 외에는 모두 버렸던 것 같다. 겨울옷은 두꺼워서 사과상자로 2상자, 여름옷은 1상자 이렇게 정리하고 나니 번뇌마저 홀가분해진 듯한 기분이 들었다. 첫 철 선원방부는 처음 출가 할 때만큼이나 설레었다. 세월이 지난 지금 주변을 돌아보면 수도 없이 많은 물건들과 책, 그
기적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많다. 기적이 아니고는 해결 할 수 없는 현실 때문일 수도 있지만 별다른 노력 없이 손쉬운 해결 방법으로 기적에 기대를 거는 것을 볼 수 있다. 종교계에서도 보면 기적을 강조하는 교리에 쉽게 젖어드는 것이 현실이다. 불교는 인과(因果)의 종교라고도 한다. 불교에 귀의하여 불자가되려는 사람은 절대 기적이나 우연한 요행을 바라서는 안 된다. 불교에 발을 들이는 순간 영원히 우연이나 요행, 기적과는 담을 쌓아야 올바르게 신행활동을 할 수 있다. 불교는 수행의 종교다. 수행은 코끼리 같이 한발 한발 실천실답 해야지 토끼가 뛰듯이 깡충 넘어 뛸 수는 없다. 그래서 실천행의 상징인 보현보살은 코끼리를 타고 있는 것이다. 처절할 정도로 인과를 믿은 분이 계셨다. 스님께 직접들은 얘기다. 상원
삼장법사 현장스님의 16년 동안의 인도 기행을 담은 『대당서역기』는 그 자체로도 뛰어난 문학적 가치를 지닐 뿐 아니라 『서유기(손오공)』라는 중국 역대 최고 문학작품의 근저가 되었다. 뿐만 아니라 정확한 묘사로 근대에 와서는 인도 불교문화유적지 발굴이나 학술탐구의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백마의 등에 불경을 가득 싣고 기러기의 길 안내를 받으며 파미르고원을 넘어 장안으로 돌아와 중원천지를 부처님의 자비로 물들게 하셨던 현장 스님. 그러나 그 여정이 얼마나 힘들었으면 서안에 백마의 공덕을 길이고자 백마사(白馬寺)를 짓고, 탑을 높이 쌓아 절을 창건하여 대안사(大雁寺), 소안사(小雁寺)로 이름 지어 기러기의 고마움을 추모 했을까?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스님께서 직접 갖고 오신 경전보다 암송하고 돌아온 경이
출가 전 일이다.산을 즐겨 산을 오르다가 사찰입구에 가면 늘 듣게 되는 염불 소리가 있었다. 때로는 법구경 등에서 뽑아 엮은 명상의 구절을 성우가 낭송하기도 하지만 염불소리는 전국 절 어디에서나 비슷한 것 같았다. 많은 불자들은 대부분 자신의 주지 스님 염불소리에 제일 편안함을 느끼는 것 같다. 마음으로 의지하고 존경하기 때문에 그 염불 가락도 좋아하게 되는 것인지 아니면 귀에 익다보니 편안하게 느끼게 되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객관적으로는 별로 듣기에 좋아 보이지 않는데도 소위 ‘우리스님’의 염불소리를 신도들은 좋아하는 것 같다. 출가 후 한참이 지나서도 사찰 어귀 확성기에서 들려오는 낯익은 염불 소리의 주인공에 대해 별로 궁금해 하지 않았다. 만행을 하다가 그저 낯익게 들리는 염불소리에 절에 가까웠음
새해벽두에 불이 났다. 국보1호인 숭례문이 온 국민이 지켜보는 가운데 화마의 재물이 되어 버린 것이다. 너무나 안타깝고 어처구니없는 일이다. 그동안 방화에 따른 대비책을 마련하지 않았고 초기진압에 실패한 것이 화근이 되어 국보 1호를 잃게 되었다고 서로 책임전가하기에 급급한 모습이다. 인류는 불을 발견하여 다루면서 급격한 문화성장을 이룩했다. 하지만 이면에는 불에 의한 문화 파괴가 끊임없이 이어졌다. 약탈과 함께 방화는 크고 작은 모든 전쟁의 수식어처럼 되어버렸다. 비단 불뿐만 아닐 것이다. 무엇이든 다루면 양화가 되지만 잘못 다루면 악화가 되기 십상이다.「보왕삼매론」에서는 모든 장애에 대한 긍정적인 면을 정확히 알려주고 있다. 인류의 문화수준을 한층 높여준 불이 하필이면 새해를 맞은 우리들 가슴에 큰 상
출가한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일이다. 얼마간 노스님(일타큰스님)을 시봉하였다. 틈만 나면 어느 스님의 도력이 가장 높은지 자주 질문하곤 했다. 그럴 때 마다 스님께서는 그저 빙그레 웃고만 계셨다. 어느 날 오후 노스님께서 지극한 고요를 즐기시며 옛일들을 회고하고 계셨다. 이 틈을 타서 도력 높은 스님을 알려달라고 졸랐다. 스님께서는 지나는 말로 조용히 ‘B수좌가 공부를 열심히 하지. 공부를 할려면 B수좌같이 해야 할 꺼야.’라고 하셨다. 이후 한동안 온통 B스님뿐이었다. 지족암에 선원수좌들이 오면 B스님에 관하여 여쭈어봤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스님들은 대부분 어떠한 평가도하지 않고 다만 고개만 끄떡이고 마는 것이었다. 스님들의 공부 결과를 평가하는 데에는 어떤 객관화된 시험 같은 것이 없다. 그러니 어떻
혜암 큰스님께서는 오랜 세월 해인사 원당암에 계셨다. 불사하기 전 원당암은 스님께서 머무시기에 어울리지 않게 작은 암자였다. 스님께서 법문 하실 때면 작은 법당은 발 디딜 틈이 없었다. 법문을 훔쳐듣지 말라고 하지만 스님의 수행담을 통한 법문은 첫 발심한 행자에게는 직접 체험하는 냥 온 몸으로 받아들여 질 때라 매번 법당 뒷켠에 앉아 훔쳐 들으며 구법의 갈증을 달래었다. 스님께서 막 출가했을 때 부처님께서 하루 한 끼만 공양하셨다는 것을 몰랐다고 했다. 경을 보다가 부처님 당시 모든 출가 수행자들은 하루 한 끼만 먹었고, 훗날 중국으로 전파되면서 근기가 약해서 저녁을 약으로 여겨 약석(藥石)이라 하고 먹었다는 글을 보신 스님께서는 ‘부처님께서 일종식 하라하셨고 당시에도 한 끼로 살았는데 부처님 제자인 나도
세상사 초연했던 맨발의 조실 스님그 모습 떠올리며 출가자 본분 다져 원만한 대화를 위한 지침이라는 것이 있다. 사람들을 자주 만나는 직업을 가진 사람들에게 들었다. 타인과 충돌을 피하고 좋은 분위기로 대화하려면 삼가야 할 주제가 종교와 정치에 관한 이야기라고 한다. 일상의 말과 행동과 생각까지도 종교를 떠나 살 수 없는 출가자들은 이 말에 의하면 애당초 원만한 대인관계를 형성 할 수 없는 부류에 속한다. 지난해는 유난히 정치에 관한 대화가 많았다. 올해도 총선이 있고, 또 종교적 신념을 정치적 이상과 결합하여 좋은 결과를 이끌어낸 무리들이 있어 아무래도 많은 국민들이 대화 주제를 다루는데 더욱 주의가 필요 할 것 같다. 정치와 종교에 관한 이야기 나누는 것을 경계하는 이유는 지극히 주관적이기 때문이다.
티베트 스님 미소에 봇물처럼 눈물 터져손수 얼굴 닦아준 자비로움 그리워 나이가 들수록 누구를 만난다는 일이 부담스러워진다고 한다. 또 새해가 시작 되었다.싫든 좋든 올 한해도 무수한 사람들을 만나야 할 것이다. 내가 누구와의 만남에 부담을 느낀다고 생각하다가 혹 나를 만나는 상대는 나에게 어떤 부담을 느끼지는 않을까 염려스럽기도 하다. 흔히 도력 높은 스님 일수록 어린아이같이 천진해진다고 한다. 만주에서 짚신을 만들어 오가는 사람들에게 보시하면서 생을 마감한 수월스님이 그렇다고 한다. 사나운 만주 개들까지 스님 앞에서 사나움을 멈추고 함께 어울렸다고 하니 한번 뵈올 수 없음에 그리움이 사무친다. 만남에 관해 얘기하다보면 보제존자 나옹화상의 발원이 항상 생각난다. 스님의 조석발원문에는 이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