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는가, 파타차라여. 그대의 가족은 세상을 떠났다. 그대 때문도, 세상 때문도 아니다. 누구도 죽음을 피할 수 없고, 누구도 인연의 흐름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대의 가족은 인연이 서고 지는 자리에서 태어났고 떠났다. 그러니 파타차라여. 죽은 이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 말라. 그 대신 자신을 청정하게 하고 깨어있게 하라. 열반으로 나아가라.”모든 것은 머물지 않고 변하며 우주만물 인연따라 움직이니해가 뜨고 지듯이 해탈 이루어파타차라의 한 생애가 동쪽에서 떠올라 하늘 가운데로 올라선 뒤, 낙조가 길게 늘어진 서쪽으로 빠르게 떨어졌다
기억을 더듬는 파타차라의 눈에서 눈물이 쉴 새 없이 떨어졌다. 하늘이 뚫린 듯 쏟아지던 빗속에서 피를 토하며 고통스럽게 죽은 남편, 세상에 나온 지 몇 시간도 안 돼 독수리의 발톱에 찍힌 채 허공으로 사라진 둘째, 범람한 강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다 물속으로 가라앉으며 어미의 눈을 간절히 쳐다보던 첫째. 자던 중 순식간에 무너진 집에 깔려 비참한 죽음을 맞았을 부모. 모든 일이 하루 만에 일어났다고는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이보다 더 기구할 수 있을까. 이보다 더 허망할 수 있을까. 손 뻗으면 당장이라도 잡힐 것 같은 얼굴들을 이제
“여보, 저기 봐. 먹구름이 몰려오네. 한바탕 큰 비가 내리겠어. 오늘은 글렀으니 일단 집으로 돌아가서 하늘이 개이길 기다리는 게 어떨까.”폭우 속에 고향집 돌아가다남편· 아들 모두 잃고 실의고향집선 부모가 비명횡사남편의 말처럼, 지평선 언저리의 시커먼 구름이 빠른 속도로 하늘을 물들여가고 있었다. 큰아이는 간간이 들리는 천둥번개 소리가 무서웠는지 그대로 주저앉아 울먹거리기만 했다. 파타차라가 원망 섞인 눈빛으로 먹구름과 남편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궁색한 생활로 돌아갈 순 없는데, 저들은 어찌 나를 가로막는 것인가. 파타차라는 입술
파타차라의 일상은 변함없었다. 호화로운 음식과 옷이 매일 방으로 배달됐고, 파타차라는 아무렇지 않은 듯 순순히 먹고 입었다. 부모를 대하는 것 또한 예전과 다르지 않았다. 아버지가 꼭대기 층 자신의 방으로 올라올 때마다 상냥한 미소로 맞이했다. 이따금 결혼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면 잠자코 들을 뿐이었다. 고분고분한 딸의 모습에 아버지는 늘 흡족히 웃으며 방을 나가곤 했다. 파타차라의 의도대로였다.아버지 원망하며 다 버리고세상과 타협 않겠다 했지만가난은 견디기 힘든 괴로움“주인님께서 아가씨의 남편감을 고르셨어요. 높은 계급에 재물도 주
“딸아. 너는 커서 나랏일을 하거나 재력 있는 집의 남자와 결혼해야 한다. 그래서 평생 남편을 봉양하며 살아야 해. 알겠느냐?”“아빠, 나랏일이 뭐고 재력이 뭐야? 봉양?”“차차 일러주도록 하마. 지금은 이 아비 말을 명심하기만 하면 된다.”옹알이를 끝내고 말을 하기 시작할 무렵부터 파타차라는 결혼 이야기를 들었다. 결혼에 대해선 남자와 여자가 한집에서 같이 사는 것이라고 얼핏 알긴 했다. 하지만 나랏일이니, 재력이니 하는 말은 어린 파타차라에겐 어렵기만 했다. ‘그래도 아빠 말이니 꼭 그렇게 할 거야.’ 가물거리는 파타차라의 옛
“이보게. 저것 보이는가. 벌써 열흘을 넘긴 것 같은데. 백주대낮에 무슨 추태인가 그래.”“그러게 말일세. 가만히 앉아라도 있다면 모를까 하루 종일 똥 마려운 개처럼 돌아다니니 어딜가도 눈에 띄는구먼. 오늘도 재수 옴붙었네. 퉤.”시장통서 돌팔매질 당하면서모두들 미친여자 취급했지만붓다만은 그녀를 거두어들여두 노인이 거리 한복판 시커먼 물체를 손가락질했다. 못 볼 것이라도 본양 불쾌한 표정이었다. 그들만이 아니다. 사위성 시장통을 오가는 모든 사람이 얼굴을 찌푸리고 쳐다보았다. 고약한 악취에 더러는 코를 막았고 더러는 고개 돌렸다.
맛자가 승원에 당도한 건 어스름 내릴 무렵이었다. 쉼 없이 내달렸던 하인들은 승원이 보이자 다리에 힘이 풀려 풀썩 주저앉고 말았다. “미련한 것들. 그러고 있을 때가 아니다. 당장 일어나지 못하겠느냐.” 가까스로 몸을 일으킨 하인들의 안색이 공포에 사로잡힌 듯 창백해졌다. 주인의 얼굴이 사람의 그것보다 짐승의 몰골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실핏줄 터진 눈에서 분노 서린 안광이 사방으로 튀어나왔고, 피부는 열에 들떠 붉으락푸르락했다.미소로 자신 맞는 딸에게서평화롭게 빛나는 별빛 만나딸 향한 욕망과 집착 벗어나“딸아. 나오너라. 나와서 보
‘따님께서는 집을 나선 뒤 쉬지 않고 걸어 동이 틀 무렵 승원에 도착하였고, 붓다라는 자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먼발치에 있었기에 자세한 내용은 알지 못하였으나 따님의 표정이 점점 밝아지는 것만은 똑똑히 보았습니다. 그러곤 단도를 꺼내 스스로 머리카락을 잘랐는데, 한 올도 남김이 없어 민머리가 드러났습니다. 그때부터 태양이 중천에 오른 지금껏 눈을 감고 그 자리에 앉아있습니다. 하명을 기다립니다.’깊은 명상에 잠긴 아노파마감촉도 소리도 형상도 없어소식들은 맛자, 딸에게 향해아노파마가 집을 나선 이튿날 밤, 딸의 소식을 담은
“아노파마여. 네가 살아온 나날들을 보았다. 그리고 밤새 어둠을 밟는 소리를 들었다. 참으로 갸륵한 여정이었구나. 이제 마땅히 당도하여야 할 곳에 이르렀으니, 너를 옭아맸던 첫 번째 족쇄는 끊어졌다. 더는 흔들리지 않을 것이고 더는 떨어지지 않을 것이다.”드디어 붓다 만난 아노파마자신 인도한 무엇 궁금해져머리카락 자르고 수행 정진 기쁨에 휩싸인 아노파마가 붓다의 두 발에 입을 맞추었다. 아득해졌던 새들의 노랫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고, 사람들은 호기심 어린 눈빛을 보이며 둥글게 모여들었다. 영겁과도 같던 직전 순간이 영원불변의 흐름
문을 열자 별빛이 바싹 다가왔다. 조심스레 손을 뻗어 별의 감촉을 어루만졌다. 시작도 없었고 끝도 없을 진리의 빛이 손끝에서 반짝였다. 목걸이와 팔찌를 빼고 신발을 벗어 가지런히 놓아두었다. 흙으로 얼굴을 문질러 화장을 털어냈다. 덧입혀진 것들 벗겨져 헐거워진 육신이 바람 따라 한들거렸다. 다시 한 번 손을 뻗었다. 별빛이 반짝였다. 이제 더 이상의 망설임은 없을 것이다. 아노파마는 붓다가 계시는 곳을 향해 첫 번째 발걸음을 내디뎠다.속세 물건과 화장 털어내고붓다 향해 첫발걸음 내딛어벅차오르는 기쁨 온몸 흡수한참을 흐느끼던 맛자가
“아버님, 온갖 금은보화에 감싸여 손끝에 먼지 하나 닿지 않던 세월이었습니다. 산해진미에 입을 놀리며 진귀한 보석들로 몸을 치장하였고 하인들의 달콤한 말에 귀 기울였습니다. 그 무엇이든 가지 아니한 채 끌어올 수 있었으니, 저에게 부족함을 어디서 찾아볼 수 있었겠습니까.”풍족함 뒤 찾아오는 공허함세월이 흐를수록 더욱 커져아버지 만류에도 구도 다짐“네 말이 맞고 또 맞다. 너는 지금까지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풍족함을 누렸다. 이제는 공주가 되고 왕비가 되어 세상의 우러름까지 받게 될 터인데, 그와 같은 삶은 나조차 들어본 적 없구나.
“내 너를 키운 이야기를 하려면 7일 낮밤도 부족할 것이다. 혹여 바스러질까 행여 무너질까 안고 어르고 달래며 보낸 세월이 저 하늘 별빛처럼 선명하다. 네가 조금이라도 이 애비의 마음을 헤아린다면 고집을 꺾고 왕자와의 혼사를 받아들이거라.”세계 최고 거부 딸로 탄생눈부신 아름다움까지 갖춰높은 경지 위해 출가 결심맛자의 말투에 노기와 회한이 함께 서려 있었다. 그의 말대로 애지중지 키운 딸이었다. 딸 아노파마의 용모는 그 아름다움으로 날 때부터 온 세상에 이름을 떨쳤다. 희고 고운 살결, 우뚝 솟은 이마, 깊고 그윽한 눈빛, 베일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