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철 등, “태고 종조설, 불변의 진리” 주장 이재열 등, 재차 반박…“무의미한 논쟁 중단” 주장도 70년대 들어 ‘조계종 종조’ 논쟁은 성철 스님의 등장으로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다. 1967년 해인사 초대방장으로 취임하며 현대 한국불교의 새로운 중심으로 등장한 성철 스님은 ‘보조의 선수행법’에 대해 신랄하게 비판하면서 아울러 보조를 조계종의 종조로 주장한 이재열과 이종익의 주장에 대해서도 비판을 가했다. 1976년 성철 스님은 『한국불교의 법맥』(해인총림)에서 “이재열, 이종익 등이 창안한 보조 법통설은 절대로 성립될 수 없으며 오직 청허·부휴 양대 문하에서 서로 전해온 임제 태고 종통만이 정당함을 알게되었다”며 “따라서 대한불교조계종은 석존을 시조로 하고 조계 혜능을 원조로 한 임제선 계
교황청 종교간대화평의회 불기 2549년 부처님오신날을 맞아 불자들에게 봉축메시지를 전달해 왔다. 교황청 종교간대화평의회는 의장 마이클 피츠제럴드 대주교는 메시지를 통해 “불자와 불자 가정에 부처님오신날의 기쁨이 가득하기를 기원한다”며 “불자와 그리스도인들이 ‘삶의 대화’를 통해 서로를 깊이 이해하고 협력하는 가운데 세계 평화를 위해 함께 노력하자”고 전했다. 다음은 축하 메시지 전문. 친애하는 불자 여러분. 부처님오신날을 맞이하여 저는 올해에도 여러분에게 진심어린 축하의 인사를 드리며, 여러분과 여러분 가정, 그리고 여러분 공동체에 부처님오신날의 기쁨이 가득하기를 바랍니다. 부처님오신날이 세계 도처에서 불자들과 우리 가톨릭 신자들이 기존의 상호 유대를 굳게 다질 수 있는 계기가
이능화 등, “한국 선종 개창한 인물은 보조” 주장 김영수 등, “가지산문 계승자는 태고” 반박 한국불교 장자 종단이라는 조계종의 종조(宗祖)는 누구일까? 1994년 9월 종단 개혁과 함께 마련된 현행 조계종 종헌(宗憲)에는 도의 국사를 종조로 태고 보우를 중흥조로 하고 있다. 그러나 종명(宗名) 및 종지(宗旨)를 다룬 제 1장 1조에는 “본종은 신라 도의국사가 창시한 가지 산문에서 기원해 고려 보조국사의 중천(重闡)을 거쳐 태고 보우국사의 제종포섭으로서 조계종이라 공칭하여…”라고 규정하면서 종헌 내에서도 다소 상이한 내용을 담고 있다. 따라서 종헌 자체에서도 누구를 종조로 하며 누구를 중흥조로 할 것인지를 명확히 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렇다면 누가 조계종의 종조이며 중흥조일까?
요장수, “방산석경에 지엄 저술로 기록”주장 해주 스님 등, “사상적으로 의상의 것”반박 한국불교의 대표적인 사상이라고 할 수 있는 화엄(華嚴). 화엄은 신라 의상계 스님들에 의해 한국에 정착됐으며 이후 이들의 사상은 한국 화엄의 주류가 돼 왔다. 특히 중국 화엄학과는 달리 수행을 중시하는 의상의 사상은 이후 신라 화엄학의 특징이며 한국불교의 특색으로 평가되기도 했다. 이러한 의상계 화엄 사상을 함축적으로 표현한 것이 일승법계도(一乘法界圖)로 의상의 제자들은 이 법계도에 기초하여 수행했으며 사상을 심화시키기도 했다. 그러나 일승법계도는 의상이 중국 화엄종 조사 지엄(智儼)에게 수학할 때 화엄의 진리에 대해 서술한 책을 불태운 후 타지 않고 남은 210개의 글자를 이용해 게송을 짓고 법계도를 만들
고익진 등 "의상 부각 위한 의도적 폄하" 주장 석길암, "원효가 아닌 中법장 비판한 것" 반박 원효와 의상이 한국불교의 형성에 결정적인 역할을 담당했다는 데 별다른 이견이 없다. 원효는 국내에서 독학하며 『대승기신론소』, 『금강삼매경론』등 100여종 240여권의 저술을 남기면서 귀족 중심의 불교를 민중불교로 전환시켰고 중국의 지엄에게서 수학하고 국내로 돌아온 의상은 한국 화엄종을 개창하면서 실천적 화엄사상을 펼친 인물이기 때문이다. 비슷한 시대에 활동한 이들은 2회에 걸쳐 함께 입당(入唐)을 시도할 정도로 친밀했으며 의상이 귀국한 이후에도 사상적 교류는 활발히 진행됐다. 특히 중국에서 새롭게 정립된 화엄 교학을 수용한 의상은 원효와의 사상적 교류를 통해 한국화엄사상을 발전시키기도 했다.
日학자, “禪 바탕서 정토 수용한 보조 저술” 주장 고익진 등, “보조는 정토사상 배격 했다” 반박 새로운 선사상의 체계를 수립하고 정혜결사 운동을 전개하면서 한국 선종(禪宗)을 중흥시킨 보조국사 지눌(1158∼1210). 그는 고려 후반기 불교 내부에서 발생한 선교(禪敎)의 대립과 시대적인 혼란 등 격동기 속에서도 정법불교·수행불교라는 불교 본연을 재건(再建)하기 위해 실천불교 운동을 전개함으로써 불교계의 모순을 극복하고자 했다. 특히 선교 대립의 극심한 상쟁 속에서 사상적 통일성을 위해 독특한 수행이론과 지도체계를 성립하였으며, 후학들을 지도하기 위해 수많은 저술을 남기기도 했다. 그동안 보조의 저술로 알려진 것은 『권수정혜결사문(勸修定慧結社文)』, 『계초심학인문(誡初心學人文)』,『원돈성불론
황수영 등 “출토지역-조각기법 신라의 것” 주장 강우방 등 “신라 조각기술, 백제 보다 미천” 반박 아스카 시대의 대표적인 불상으로 일본 국보로 지정된 광륭사(廣隆寺) 소장 목조반가사유상은 뛰어난 조각미를 보여 불교미술의 백미로 꼽히고 있다. 특히 그 자세나 분위기가 형언할 수 없이 신비롭고 자비로운 모습이어서 일찍부터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다. 그렇다면 이 불상은 언제 어느 나라에서 조각된 것일까. 그 동안 일본학자들은 일본에서 제작된 것이라는 주장을 거듭해왔다. 그러나 광륭사로 수학여행을 왔던 한 일본학생이 반가사유상의 아름다움에 취해 자신도 모르게 불상을 안게 됐고, 학생의 실수로 불상의 새끼손가락이 부러지면서 일본 국보 1호 불상이 일본에서 제작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 밝혀지게
서울 은평구 인의선원(주지 무공 스님)이 3월 21일 은평구청 앞 도로에서 ‘사찰철거 계획 철회’를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다. 인의선원 신도들은 “은평구청이 지난해 12월 ‘사찰 부지가 북한산 도시자연공원의 일부이므로 올 12월까지 자진 철거하라’고 일방적으로 고지했다”며 밝히고 “대안도 없이 지난 20여년간 펼쳐온 지역 포교와 복지활동은 무시한 체 사찰 철거만을 요구하는 것은 명백한 종교탄압”이라고 성토했다. 인의선원에 따르면 지난 2002년부터 현 사찰 부지가 살림청 소유의 국유림에 속해있어 주거환경 개선지구 편입을 지속적으로 요청했지만 은평구청은 이를 거부해 왔다. 인의선원에서 100여미터 떨어진 70여가구는 동일한 공원구역 내에 위치해 있지만 2000년경 주거환경 개선지구로 편입됐다.
전남 목포 달성사의 목조 지장 보살 반가상 등 5점이 지난 3월 19일 새벽 도난 당해 경찰이 수사에 나섰다. 이날 도난 당한 것으로 추정되는 성보문화재는 목조지장보살 반가상을 비롯해 비지정문화재인 시왕상 1구, 사자상 1구, 판관동자상 3구 등이다. 특히 목조지장보살 반가상은 지방문화재 229호로 조성발원문에 따르면 1565년(명종 20) 남평(나주) 웅점사(운흥사)에서 조성하였음을 알 수 있다. 또 지장보살은 우측 다리를 밑으로 내리고 좌측 다리만 가부좌를 했으며 민머리, 눈과 눈썹, 코와 입 등의 조각 수법이 사실적인 것이 특징이다. 이와 함께 지장보살반가상은 임진왜란 이전에 조성한 불상으로는 유일한 것으로 조선 초기 불교조각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평가돼 왔다. 목조지장
중국학자, “낙양에서 인쇄, 신라가 수입” 주장韓 학자, “피휘자 - 닥종이 사용… 신라의 것” 반박1966년 10월 세계인들은 경주를 주목했다. 경주 불국사 석가탑에서 현존 세계 최고(最古)의 목판 인쇄물로 추정되는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이하 『무구정광경』)이 발견됐기 때문이다. 이는 신라 경덕왕대인 750년께 석가탑 조성과 함께 봉안된 것으로 그 동안 가장 오래된 인쇄물로 알려져 왔던 일본 호류사 『백만탑다라니』(770)보다 20여 년 앞선 것이었다. 이로 인해 한국은 세계 최고의 인쇄 문화를 가진 나라로 평가되기 시작했다.그러나 화약을 비롯해 인쇄물, 나침반, 종이 등 세계 4대 발명품을 만든 것을 긍지로 여기던 중국학계로서는 이 같은 사실을 받아들이기는 곤란했다. 이에 중국학계는 1980년대 이후부터
신용하 등 “독립선언서 쓴 육당 작품” 주장 김상현 등, 증언 근거제시…“만해의 작품”반박 일제의 강압에 비폭력으로 맞선 3·1운동의 정신은 ‘기미독립선언서’의 말미에 나오는 ‘공약삼장(公約三章)’으로 압축된다. ‘최후의 한 사람, 최후의 한 순간까지 민족의 정당한 의사를 발표하라’는 등의 내용을 담고 있는 ‘공약삼장’은 비교적 우회적이고 소극적이었던 ‘독립선언서’의 내용에 비해 민족의 자주 독립을 되찾겠다는 의지를 함축한 행동강령이었다. 이런 이유로 일제는 ‘독립선언서’보다 ‘공약삼장’을 트집 잡아 민족 대표들에게 내란죄를 적용해 중형을 선고하기도 했다. 그렇다면 ‘공약삼장’은 누구에 의해 작성됐을까. 그 동안 학계에서는 “‘공약삼장’은 만해 한용운에 의해 작성됐다”는 것이 일반적인
혜봉 등 “비행기 - 佛具 헌납… 명백한 친일” 주장 박희승 등 “뒤로는 독립군 지원… 위장 친일” 반박 최근 우리 사회를 뜨겁게 달구었던 것 중 하나가 과거사 진상규명에 대한 논란이다. 특히 지난해 12월 ‘반민족행위 진상규명 특별법’이 우여곡절 끝에 국회를 통과했고 또 지난 3월 3일 국가보훈처가 ‘친일전력이 있는 독립유공자에 대한 예우를 취소’함에 따라 일제시대 친일 행위에 대한 철저한 규명이 필요하다는 목소리도 높아가고 있다. 이 같은 사회적 이슈에 발맞춰 최근 설봉산 지족암 주지 혜봉 스님이 일제시대 친일행위에 앞장섰던 불교계 인사들의 친일자료를 묶어 『친일승려 108인』을 발간하면서 불교계에서도 또다시 친일 논란이 거세게 일고 있다. 불교계 친일 논란의 중심에 있는 인물은 일제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