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에 일체유심조 또는 삼계유심이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에 대한 정확한 의미를 알고 싶습니다. 방금 질문하신 내용은 화엄경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부처님이 깨달으신 안목에서 보실 때 자아와 세계는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의해서 그려진 허상에 불과합니다. 일체유심조 또는 삼계유심이라고 할 때, 일체와 삼계는 마음에 비춰진 대상으로서의 온갖 모습들을 말하는데 이것들은 자신의 마음이 변화되어서 나타난 현상일 뿐 결코 마음을 떠나서 존재하는 것들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중요한 것은 유심이라는 말 중에 ‘심’은 참되고 한결같은 깨달은 마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거짓되고 변화하는 중생의 마음을 가리킨다는데 있습니다. 중생들은 마음과 객관세계는 서로 대립되어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즉 마음 밖에 세계가
대한불교산악인연합회(총재 양춘동, 이하 산악인연합)는 8월 25일 인천 수미정사에서 인천광역본부 현판식을 가졌다. 이날 현판식에는 양춘동 총재를 비롯해 임대식 사무총장, 김성진 인천광역본부장 등 사부대중 50여명이 동참했다. 산악인연합은 이날 현판식을 통해 인천광역본부의 출범을 알리고 정기적인 산행을 통해 인천지역 불자산악인들의 신행활동에 앞장서게 된다. 한편, 산악인연합은 오늘 9월 문화관광부에 사단법인 서류를 신청할 예정이며, 11월경 사단법인으로서 첫 발을 내딛을 방침이다. 정하중 기자 raubone@beopbo.com
지관 수행에 있어서 지는 사마타를 닦아 얻어진 경지를 말하고 관은 위빠사나를 닦아 법의 본성을 보는 경지를 말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럼 사마타를 닦아 지를 얻게 되면 어떤 경지를 체험하게 됩니까. 지(止)는 번뇌가 그친 상태를 가리킨다고 이미 설명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사마타의 경지는 깨달음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지혜를 낳지 못하기 때문에 번뇌가 그쳤다 할지라도 완전한 경지가 되지 못합니다. 번뇌가 그치기는 그쳤는데 모두 그친 것이 아니라 굵고 거친 번뇌만 그친 것입니다. 중생들의 나고 죽음의 뿌리가 되는 근본 번뇌로서의 무명은 파괴되지 않은 상태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사마타는 미세한 근본 번뇌인 무명을 제거하기 전에 닦는 방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일찍이 부처님께서는 중생의 마음을 정화시켜 청정하게 하
깨달음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지관쌍수 즉, 지와 관을 함께 닦아야 한다고 들었습니다. 그 의미와 방법에 대해서 알고 싶습니다. 그렇습니다. 지와 관은 마치 새의 양 날개와 같아서 함께 갖추어져야만 바르게 깨달을 수 있습니다. 지관쌍수를 다른 말로 정혜쌍수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먼저 ‘지’는 번뇌와 망상을 그치게 한다는 의미에서 ‘그칠 지(止)’로 표현한 것이고, ‘관’은 몸과 마음의 실상을 있는 그대로 본다는 의미에서 ‘볼 관(觀)’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불교의 수행체계는 크게 나누어서 번뇌망상을 그치게 하는 수행과 실상을 관찰하는 수행으로 나눌 수 있는데 이 둘을 먼저 닦든지 나중에 닦든지 결국에는 함께 완성되어야만 바르게 수행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지와 관을 정과 혜로 다르게 말하는 이유
요즈음 미얀마나 태국 같은 나라에서 실천하는 남방불교의 위빠싸나 수행법이 널리 보급되고 있습니다. 왜 대승불교의 가르침 속에서는 위빠싸나가 실천되고 있지 않았는지 말씀해주십시오. 대승불교 용어 가운데 ‘관’이니 ‘견’이니 ‘조견’ 이니 하는 말들이 위빠싸나를 뜻하는 용어들입니다. 반야심경의 ‘조견오온개공도’ 할 때의 조견이나 금강경의 ‘약견지성비상’ 할 때의 견이나 화엄경의 ‘응관법계성’ 할 때의 관 등이 그 예입니다. 위빠싸나의 뜻은 ‘존재의 특성을 본다’입니다. 이때 말하는 존재는 나라고 여기고 있는 몸과 느낌과 마음과 법을 가리키고 특성은 이들이 지니고 있는 공통적 성질로서의 무상, 무아, 고를 가리킵니다. 즉 나라는 것은 몸과 느낌과 마음과 법칙성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들은 모두 생멸을 거듭하는
수행자들이 흔히 쓰는 말 가운데 ‘집착을 놓아라’ 하는 의미의 방하착이 있습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놓아버리기는 정말 쉽지 않습니다. 방하착도 수행방법이 될수 있나요? 우선 방하착이라는 말이 생기게 된 유래부터 살펴봅시다. 이 용어가 생기게 된 유래는 다음과 같습니다. 어느 때 흑치라는 이름을 가진 젊은이가 부처님께 양손에 오동꽃을 꺾어들고 예배를 드리려고 찾아왔습니다. 젊은이가 부처님께 양손의 꽃을 바치려고 하는 순간 부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흑치여, 오른손을 놔라” 흑치는 오른손에 들고 있던 꽃을 놓아버렸습니다. 그러자 부처님은 “흑치여, 왼손을 놔라” 하셨습니다. 역시 흑치는 왼손에 들고 있던 꽃을 놓아버렸습니다. 그런데 부처님은 “흑치여, 또 놔라”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흑치가 부처님께 물었
수행에 있어서 유위행을 버리고 무위행을 닦으라고 합니다. 유위행과 무위행은 무엇이며 무위행은 어떻게 닦아나가야 합니까. 유위행이 무엇이고 무위행이 무엇인지를 알려면 유위와 무위에 대한 의미부터 알아야 합니다. 유위와 무위는 서로 대립되는 용어입니다. 유위란 중생들이 무지와 번뇌로서 일으키는 행위이고, 무위란 불보살이 깨달음의 경지에서 일으키는 행입니다. 따라서 유위행을 버리고 무위행을 닦으라고 하는 것은 우리들에게 중생의 무지와 번뇌를 제거하는 수행을 쌓아 나가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 유위행과 무위행에 대해 초기불교와 대승불교의 입장은 조금 다릅니다. 초기불교의 입장에서는 이미 말한 대로 중생들이 무지와 번뇌를 제거하기 위하여 쌓아가는 갖가지 수행을 무위행이라고 가르칩니다. 가령 삼매를 닦기 위해 염
수행인들이 무심이나 무념의 경지를 말합니다. 무심과 무념의 상태는 무엇이며 이 상태를 깨달음의 경지라고 할 수 있습니까. 불교 속에서 흔히 듣는 말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이 무심이나 무념입니다. 무심·무념의 경지가 어느 상태를 두고 말하는지는 사람마다 다를 수가 있습니다. 글자대로라면 마음이 없는 경지, 혹은 생각이 없는 경지라고 해야겠지요. 그렇다면 마음이나 생각이 없는 경지는 꿈 없이 잠자는 상태나 혹은 목석처럼 아무 분별이 없는 경지라는 말인데, 과연 그 경지를 깨달음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본래 무심 무념이라는 용어는 교리적인 용어라기보다는 중국의 선가에서 사용해왔던 용어입니다. 대표적인 어록으로 육조단경을 들 수 있으며, 여기서 혜능 스님은 무념을 강조하셨습니다. 즉, 무념을 궁극적 깨달음의 경
마음 밖에서 부처를 찾으면 외도마음 안에서 깨달음 구하면 마귀 선가에서 마음이 곧 부처니 마음 밖에서 부처를 구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럼 부처는 마음 안에 있다는 말씀인가요? 사실 이 말을 잘못 알아들으면 자신이 일으키고 있는 현재 마음속에 부처라고 이름 하는 또 다른 어떤 성품이 있는 줄 착각하게 됩니다. 즉 제 마음 안에 절대적인 존재를 하나 만들어 놓고 이를 구하는 것을 수행인줄 잘못 안다는 말입니다. 선가에서 마음이 곧 부처이니 밖을 향해 찾지 말라는 뜻은 현재 쓰고 있는 이 마음을 제외 하고는 또 다른 마음이 없으므로 이 마음 자체를 깨달아 부처를 이룰 뿐이라는 의미 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일어나는 마음, 그 마음이 어떤 마음이든 간에 안에서도 밖에서도 얻어야 될 또 다른 마음은 없는 것입니다
간화선만이 부처님 경지 이른다는 주장부처님 교법과 거리…한국불교 해결 과제 한국불교에서는 간화선이 최상승의 수행이라고 하면서 화두를 참구할 것을 권하고 있습니다. 부처님도 화두를 통해 깨달음을 얻으셨습니까. 부처님이 화두를 참구해서 대각을 얻었다는 말을 하는 사람들이 예로부터 종종 있어왔습니다. 예전에 저도 어느 큰스님으로부터 부처님이 보리수 아래에서 깨달음을 얻은 것이 ‘어째서 생사가 벌어지게 되었는고’ 라는 화두를 참구했기 때문이라는 말씀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후에 부처님이 설하신 수행법에 관해 조금 관심을 갖다보니, 화두와는 전혀 거리가 먼 부처님만이 발견하신 위빠사나를 통해 진리를 깨달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본래 간화선은 중국의 조사들에 의해 만들어진 수행법입니다. 제가 알기로는
미혹의 체험에서 나온 외도·마도의 설법우주의식 운운은 진흙 말려 금칠한 것 뿐몸과 마음을 ‘나’라고 여기는 자아의식과, 자아는 홀로 존재한다는 개체의식을 버리면 우주의식이 드러나 전체가 된다고 합니다. 이것을 올바른 공부라고 할 수 있습니까. 불교계 밖에서 수행하는 사람이 어느날 저를 자신의 집으로 초대했었습니다. 그 집의 거실에 들어섰을 때 벽에 걸린 액자가 눈에 띄었습니다. 액자에는 이러한 글이 쓰여져 있었습니다. “그대가 곧 우주라, 개체를 넘어서면 곧 전체라, 전체가 곧 신이라”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글을 보고 집주인에게 “이 글이 당신 선생이 써준 글이냐”고 물으니, 그렇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이 글의 내용이 최상의 깨달음의 경지를 읊은 것이라고 인정하는가”라고 물으니, 역시 그렇다고
지난 6월 15일 협약서를 체결한 원혜 스님과 진수일 원장. 서울 강남구 봉은사(주지 원혜 스님)가 호스피스 자원봉사단을 출범시킨다. 봉은사는 6월 15일 서울의료원(병원장 진수일)과 자원봉사 후원 및 진료 협약식을 체결하고 호스피스 교육을 받은 자원봉사자들의 체계적인 봉사활동 기반을 구축했다. 봉은사는 서울의료원과의 협약을 계기로 현재 활동 중인 상장례 봉사단 및 간병봉사단과 더불어 호스피스 자원봉사단을 구성해 의료 봉사활동을 완비한다는 계획이다. 봉은사 주지 원혜 스님, 교무국장 혜정 스님, 교육국장 선업 스님, 김경남 신도회장, 진수일 서울의료원 병원장, 김동진 서울의료원부원장 등 관계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봉은사와 서울의료원 측이 맺은 협약에 따르면 봉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