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도가’의 구절을 읊는다. “(필연적 사실을 말하는) 결정설은 진리의 법을 나타냄이로다(탄허스님 번역참조). 어떤 사람이 있어 그 사실을 긍정하지 않고 주관적 감정에 따라 헤아림이라. 근원에로 바로 직입함은 부처님이 인가하신 바요. 잎 따고 가지 찾음은 내가 할 일 아니로다. 마니주(여의주)를 사람들은 알지 못하니, 여래장 속에 스스로 거두어 두고 있기 때문이라.” 불법은 자연과 인생을 아우르는 우주의 필연적 사실을 말하고 있다. 그런데 그 사실을 단지 객관적 지식으로 이해한 사람과 그 사실을 온몸으로 진리의 정신으로서 터득한 사람과의 사이에 커다란 차이가 있다. 전자는 두뇌의 지적 수준에서 인정된 사람이고(解悟의 수준), 후자는 자기의 일거수일투족 모든 것이 그 진리와 하나가 되기 위하여 준비가 된
다시 ‘증도가’의 구절로 되돌아간다. “누가 생각이 없으며, 누가 태어남이 없는가? 진실로 남이 없으면, 나지 않음도 없나니. 기관목(나무장승)을 불러 붙들고 물어보라. 부처 구하고 공덕베품을 조만간 이루리로다. 사대(四大=地水火風)를 놓아버려 붙잡지말고, 적멸한 성품 따라 먹고 마실지어다. 모든 행이 무상하여 일체가 공하니, 이는 곧 여래의 대원각이로다.” 우리가 앞에서 존재론적 사유를 짧게나마 음미해 본 이유가 여기서 뚜렷해진다. 존재론적 사유는 존재자적인 실체적 사유와 달라서 그 사유는 곧 공의 사유와 다르지 않다. 존재자적인 실체의 사유는 나고 죽는 것이 분명히 구별되지만, 존재론적 사유(공의 사유)에는 나고 죽음이 없는 무생무멸(無生無滅)의 사유다. 존재자적인 사유는 사대(四大=地水火風)에 얽매
이번 회에서는 무엇이 존재론적 사고방식인가를 밝혀야 한다. 이것의 이해가 영가대사의 ‘증도가’ 뿐만 아니라, 부처님의 가르침을 소화하는 데에 직결되기에 매우 중요하다. 존재론적 사고방식은 하늘에 구름 잡는 것처럼 몽롱해 보이지만, 그렇지 않다. 또 어떤 이들은 불교가 공사상을 위주로 하기에 존재론적 사유와 무관한 것처럼 잘못 말하기도 한다. 그러면 무엇이 존재인가? 하늘, 땅, 구름, 해, 달, 사람 등등 삼라만상이 있다. 이들 명사적 삼라만상은 그 자체가 존재자이지 존재하는 현상은 아니다. 존재자는 존재하는 현상 자체는 아니고 존재하는 것이다. 존재와 존재하는 것으로서의 존재자는 구분되어야 한다. 존재는 무엇인가? 존재는 그 자체 하나의 의미나 개념이 아니므로 대상적으로 물을 수 없다. 존재자들은 다 개
많은 분들이 부처님은 우리 중생들의 이상 그 자체인 것처럼 생각하는 것을 지난 회에 우리가 논박한 것을 독자들은 기억할 것이다. 대승불교의 기본은 이상주의적 사고방식의 극치로서 부처를 생각하고, 또 고행을 생각하는 영웅적 금욕주의의 극한상황에서 나타나는 수행의 극치로서 부처님을 생각하는 순수주의적 사고방식을 지양하고, 대중이 일상생활속에서 부처를 부활시켜 스스로 부처가 되는 평이한 길을 실천하도록 하는 방편상의 가르침이다. 우리는 우리의 정신문화가 조선조를 지배해 온 이상주의적 주자학의 영향으로 너무 지나치게 원리주의와 순수주의에 물들어 있음을 알아야 하겠다. 그래서 추상적 명분의 요구는 강렬하나 구체적 실현의 방도는 아득한 주장만 쉽게 말하는 풍토에 우리가 빠져 있음을 알아야 하겠다. 조선시대 선비들이
지난 회에 우리가 읽었던 나무장승이 노래하고 돌여자가 춤을 춘다는 말은 무흔적의 존재방식인 부처의 입장에서 읊은 경지이다. 흔적의 존재방식인 삼라만상은 무흔적의 존재방식인 공의 나타난 표현이다. 공은 스스로 아무 것도 나타낼 것이 없는 허허로움 자체다. 일체 중생은 사회생활에서 제행무상(諸行無常)과 일체개고(一切皆苦)의 감정을 느낀다. 중생이 사회생활에서 쾌락과 즐거움을 미친 듯이 찾지만, 그것은 고통과 괴로움을 일시적으로 잊기 위한 몸부림이다. 중생의 몸은 모든 괴로움과 고통의 진원지다. 몸의 집착은 무상감과 괴로움만을 키울 뿐이다. 그러나 부처는 다르다. 중생이 부처로 사고방식을 순간적으로 확 바꿔버리면, 모든 것이 다르게 보인다. 부처는 사고방식이 전적으로 확 바뀌어버린 중생이다. 우리는 종종
지난 회에 이야기된 바와 같이, 여래는 어떤 규정도 정의도 불가능한 무흔적의 존재이다. 무흔적의 존재는 곧 공(空)과 다를 바가 없다. 공이라는 것은 무흔적의 존재방식을 말한다. 지금 여기 내 방 안에 컴퓨터가 있고 전등이 있고. 책들이 놓여 있다는 것은 비어 있는 공간 안에 어떤 흔적의 현상들이 나타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어떤 흔적의 현상들은 어떤 흔적도 없는 무(無)의 공간인 공을 배경으로 해서 가능하다. 그 무의 공간이 없다면, 흔적들의 나타남과 그림이 성립하지 않는다. 마치 흔적들의 현상은 비어 있는 공의 바탕을 배경으로 해서 성립하는 공의 무늬와 다를 바가 없다 하겠다. 어떤 무늬도 없는 공은 곧 어떤 흔적도 없는 무흔적의 존재양식에 다름 아니다. 이 무흔적의 존재양식이 바로 여래요 부처
‘증도가’의 가르침에로 다시 돌아간다. “여래선을 단박에 깨치니 육도만행(六度萬行)이 본체 속에 있는 원만함이라. 꿈속에선 맑고 맑게 육취(六趣)가 있더니, 깨친 후엔 비고 비어 대천(大千)세계가 없도다. 죄와 복이 없고 손해와 이익도 없나니 적멸한 성품 가운데서 묻고 찾지 말라. 예전에 때 낀 거울 갈지 못했더니 오늘에야 분명히 닦아 내었도다.” 이것은 석가모니 부처님이 보리수 나무 아래서 반짝거리는 새벽별을 보신 이후에 성도하신 경지를 말씀하신 것이다. 중생의 몸이 순식간에 부처의 몸으로 바뀐 것과 동시에 나타나는 여래선의 깨침을 노래한 것이다. 육도는 육바라밀을 말한다. 보시, 지계, 인욕, 정진, 선정, 지혜의 바라밀이 그것이다. 육바라밀은 피안에 이르게 하는 여섯가지 방편을 말한다. 피안이라 하여
한국인들은 너무 지나치게 초탈적인 공의 도리와 세속적인 색의 도리를 나누고, 출가와 재가를 너무 분별한다. 이런 생각이 한국불교를 암암리에 지배하기 때문에, 입으로는 다 ‘상구보리(上求菩提) 하화중생(下化衆生)’이라고 말하지만, 기실 상구보리를 모색하고 수행하다가 일생을 마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말하자면 상구보리를 찾다가 끝내 하화중생을 제대로 실천해 보지 못하고 세상을 끝내는 경우가 대부분이라는 것이다. 이론적으로 상구보리가 한없이 멀고 도달점이 끝없이 까마득한데, 언제 상구보리를 졸업하고 하화중생을 할 것인가 생각하면, 기약 없는 수행인것 같고 공부가 한없어 보인다. 그러나 영가대사의 ‘증도가’는 그런 기약없는 공부의 길을 단념시킨다. 하기야 영가대사가 나이 30여세에 이미 ‘증도가’를 지었으니,
불법은 ‘무엇이 정의다, 진리다’ 라고 애써 강조하지 않는다. 그렇게 되면 불법은 도덕윤리적 사고방식에 얽매이는 사상이 되어서 도처에 선/악과 진/위를 너무 뚜렷이 분별하는 경계선을 확연히 긋게 된다. 한국사회가 지금 그런 경계의 병에 시달리고 있다. 우리는 중생신이자 동시에 법신이다. 이 말은 우리가 중생이자 동시에 부처임을 말한다. 많은 분들이 우리가 중생이자 동시에 부처임을 말하나 그것을 실감하지 못하고 있다. 지금 우리사회가 중생의 고집만 꽉 차있으면서 자기 생각이 진리이고 자기 행위가 정의라고만 주장한다면, 우리 사회는 구제불가능의 저주만을 외쳐대는 꼴이 되고 만다. 우리는 원효대사를 본받아 우리 사회를 위하여 시급히 하심(下心)하는 법을 익혀야 한다. 우리는 원효대사의 주장처럼 스스로 하심하여
불심은 나 중심을 산화시켜 나를 우주의 모든 존재방식에 흩어 놓는다. 나 중심의 사고방식이 질투심과 적개심과 편파심을 조장한다. 인류의 역사는 사실상 각자가 다 나중심의 이야기를 정당화시켜나가는 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겠다. 그런 일을 흔히 정의라는 내용 없는 추상명사를 내세워 사람들은 자기 합리화를 꾀한다. 한국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정의라는 말 쓰기를 좋아하고, 또 국민이라는 말을 너무 남용한다. 한국사를 통하여 정의의 개념이 빠진 투쟁이 거의 없고, 자기 입지를 정당화하기 위하여 국민의 뜻을 등장시키지 않는 예가 거의 없다. 그 말은 한국인들이 현실적으로 자기의식과 자기 고집이 얼마나 완고한가를 입증한다 하겠다. 한국인들이 정의와 국민이란 허울 좋은 이름으로 강렬한 자기 고집과 자기의식을 제각기 발
지난 번에 법신은 법성의 보이는 측면이고 법성은 법신의 안보이는 측면이라는 것을 말한 적이 있었다. 법의 몸과 법의 마음과의 관계가 우주 법계를 읽는 두가지 모습이라는 것을 우리가 말했다. 부처님이 가르쳐 주신 불자의 모습은 부처님을 맹목적으로 믿는 신앙의 종교가 아니다. 기독교는 무엇이든지 믿어야 함을 늘 강조하지만, 불교는 믿어야 할 교리가 근원적으로 없다. 오직 불교의 믿음은 이 우주에 늘 있어 온 우주적 사실을 제대로 아는 것이다. 가장 원초적 사실은 더 이상 그것을 더 원초적으로 설명할 방도가 없기에 불교는 그 사실을 믿으라고 말하는 것이지, 기독교처럼 하나님의 천지창조를 믿고, 인격적 하나님의 세상주재를 믿고, 인격적 하나님의 선악심판을 믿고, 인격적 하나님이 영혼을 천국으로 이끄는 구원을 믿
‘증도가’의 구절을 잇는다. “법신을 깨달음에 한 물건도 없으니, 근원의 자성이 천진불이라.” 법신(法身)과 법성(法性)은 어떤 관계일까? 글자 그대로 몸(身)과 마음의 본성(性)과의 관계와 유사하다. 하늘을 나는 새들은 그 종류를 막론하고 경쾌한 몸을 가진 것으로 보이듯이, 육중한 몸을 가진 짐승은 이미 그 몸을 통하여 자신의 성품을 말하여주고 있다. 몸은 마음이 느끼고 있는 바를 이미 말하고 있다. 마음이 느끼고 있는 바를 입으로 말하기 전에 이미 몸이 나타내 보이고 있다. 이처럼 몸은 마음의 생각을 색으로 나타내 보이게 하고, 마음은 몸이 눈에 보이는 물질인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알려준다. 몸은 마음을 겉으로 보이게 하는 현상의 역할을 하지만, 마음은 몸의 모든 한정(限定)을 다 넘어서 있다. 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