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 불교 시민운동 단체에서 주관한 행사에 참여했을 때 일이다. 행사 첫머리에 주제발표가 있었다. 들어보니 연기사상에 입각해 사회운동을 활발히 펼쳐야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발표자가 말하는 연기와 관련한 내용들이 너무 빈약하고 문제도 적지 않았다.우선 어떤 연기설인지가 확실하지 않았다. 연기설에는 십이연기설을 비롯해 업감연기설, 육육연기설, 육대연기설, 진여연기설, 아뢰야식연기설, 법계연기설 등이 있다. 발표자는 어떤 연기설에 입각해 불교운동을 해야 하는지는 고려하지 않고 그저 피상적으로 “연기적 삶”이니 “연기적 관계”니 하면서
명상단체의 분원장이라는 여성 한분이 일행과 찾아왔다. 진지한 성격에 말솜씨가 좋은데다가 마음도 열려있어 상대방이 믿음을 갖게 하는 사람이었다. 대화를 나누다 보니 그의 스승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분원장은 자신의 스승을 깊이 존경하고 있었다. 그는 스승을 부처님과 같은 분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자신의 스승이 깨달음을 얻을 때 읊었다는 오도송을 읽어주었다. “마음이 곧 우주요 우주가 곧 신이더라. 마음과 우주와 신이 모두 하나이니 천국극락이 여기를 벗어나지 않았노라. 나를 버려 참 생명을 얻으니 모든 성인이 눈앞에 있더라.”분원장은
신중기도를 열심히 해서 가피를 받았다는 그 불자처럼 신중신앙은 기복적인 성향이 짙다. 신중을 인간의 능력을 뛰어넘는 초월적 대상으로 여기고 자신의 소원을 이루어주거나 우환을 없애주는 존재로 여기는 것이다. 어떤 이들은 신중기도를 열심히 하면 신중이 늘 자신을 따라다니며 지켜준다고 믿는다. 불자들의 이러한 신중 신앙이 잘못되었다고만 볼 수는 없다. 수많은 경전에서 신중은 삼보를 보호하고 신심이 깊은 중생들을 지켜주는 역할을 한다.신중의 종류는 다양하다. 불법을 지키는 대표적 신중은 제석천과 범천이다. 제석천은 천계의 왕이고 범천은 세
지방의 어느 사찰에 초청을 받아 법회에 갔을 때였다. 점심 공양을 끝내고 일어서려는데 몇몇 불자가 차 한 잔 모시겠다고 해서 다시 자리에 앉았다. 차를 마시면서 얘기를 나누던 중에 한 여성불자가 옆에 앉은 분을 가리키며 “법사님, 이 보살은 신장님 가피를 받고 사는 사람입니다. 신장 기도를 열심히 해요”하고 말했다. 나는 당사자에게 칭찬을 곁들이며 “불자님은 어떻게 기도 하시기에 신장님 가피를 받으십니까?”하고 물었다. 그는 자신이 신중기도를 하게 된 사연을 설명해주었다.그는 어렸을 때부터 몸이 약해 늘 우울했다. 그러다 시집을 갔
1990년대 후반 여름이었다. 가야산 해인사 뒤편에 위치한 모 명상단체를 몇몇 지인들과 함께 방문한 적이 있다. 며칠만 수련하면 깨달음을 얻어 인생의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는 소문을 들었고, 내게 불교공부를 한 불자가 그곳에서 수행체험을 했다고 해서 궁금한 마음에 찾아가게 됐다.나는 명상원을 찾기 전에 인근 해인사에 먼저 들렀다. 이왕 가야산에 왔으니 부처님께 참배라도 해야겠다 싶어서였다. 부처님 참배 후 해인사 이곳저곳을 둘러보던 중 대중선방을 보게 되었다. 몇몇 노보살님들이 회색 법복을 입고 좌선하고 있는데 한 스님이 장군죽비를
30여년 전 가깝게 지내던 분을 만났다. 세월이 많이 흘렀다지만 모습이 영 딴판이었다. 수염을 길게 기르고 도사 복장을 했다. 반가워 인사를 건넸더니 명함 한 장을 건네주었다. 명함에는 정체도 알 수 없는 종단의 이름이 새겨져 있고 그 밑에 종정 아무개라는 법명이 적혀 있었다.불교 일을 하다보면 이런 부류의 사람들을 종종 만나게 된다. 아무런 근거도 없고 정통성도 없는 종단을 제멋대로 만들어 놓고 종정이니 총무원장이니 하는 직책을 버젓이 쓴다. 당연히 불교를 조금이라도 바르게 아는 사람이라면 결코 이런 일에 좋은 감정이 일어날 리
살다보면 견해가 바뀌는 일들이 종종 있다. 과거에는 철썩 같이 옳다고 생각했던 일이나 판단이 지금 생각해보면 틀린 것들이 적지 않다. 과거에 스승이셨던 스님을 모시고 지낼 때였다. 포교 관계로 미국에 몇 번 다녀온 적이 있다. 그때 미국의 한인 신도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스님과 법회장소를 가는데 스님이 운전하는 신도에게 이렇게 말했다.“지금 운전하고 있지? 차는 운전수가 하라는 대로 움직이잖아요? 마찬가지야. 이 몸뚱이는 자동차고 마음은 운전수지! 온종일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 마음이 몸의 운전수니 차만 잘 몰지 말고 몸도 잘 운행
양산 정토사 주지 정목 스님은 내가 존경하는 비구스님이다. 크게 알려진 분은 아니지만 치열한 연구와 수행으로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탁월한 실력을 갖췄다. 거기에 포교 의지도 강해서 부처님의 바른 법을 전해야 한다는 신념으로 불자들을 향해 끊임없이 법문을 설한다. 내가 평생 불교활동을 하면서 가장 인상적인 스님을 꼽으라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분이기도 하다.내가 그 스님을 알게 된 것은 불교 언론에 실린 내 글로부터 비롯되었다. 입만 열면 ‘참나’를 찾으라는 어느 큰스님의 법문을 내가 비판했는데 정목 스님께서 내 글을 반박했던 것이다
숭산 스님은 한국 선법을 서구에 알리고 수많은 외국인 제자들을 배출한 선승이다. 뛰어난 수행력과 특유의 달변, 열정적인 원력으로 한국불교 세계화에 크게 기여한 고승이다. 내가 스님을 만난 것은 1990년대 중반이었다. 내가 대행 스님이 설립한 한마음선원 상임법사로 있었을 때 숭산 스님이 한마음선원을 방문했다. 대행 스님은 손수 마당까지 나와 숭산 스님을 맞이했고, 나도 숭산 스님과 자리를 함께 할 수 있었다.두 분이 서로 안부를 묻고 차를 마시는 도중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흥미로운 풍경이 벌어졌다. 숭산 스님이 갑자기 대행 스님에게
이왕 ‘한 물건’을 비판했으니 내친김에 계속하겠다. 한국불교의 선사들이 마음을 ‘한 물건’이라고 부르는 일은 공공연하다. 역시 오래전 일이다. 요즘은 서울에서 두어 시간이면 도달하는 충청도 유서 깊은 사찰을 버스로 6시간이나 걸려 간 적이 있다. 그것도 한겨울에 눈길을 걸어 올라갔다. 방장큰스님의 성도재일법문을 듣기 위해서였다.일행과 도착해보니 그야말로 대법당은 초만원이었다. 드디어 사시불공이 끝나고 대법회가 진행됐다. 진풍경은 방장큰스님이 법상에 오르는 모습이었다. 두 수좌가 법상 아래 무릎을 꿇고 앉자 그들의 어깨를 밟고 법상에
40년 가까이 됐는가보다. 지금도 기억에 남는 법문이 있다. 수선회라는 참선단체에서 어느 조실스님을 초청해 법문을 청했는데 그때 들은 말씀이 아직도 지워지지 않는다.“대중은 들으라. 여기 한 물건이 있으니 일찍이 하늘을 덮고 삼세를 관통한다. 형상도 없고 빛깔도 없어 육안으로는 보려야 볼 수도 없고 손으로 만지려야 만질 수도 없다. 그러나 만약 이 한 물건이 아니라면 능히 살았다고 할 수 없으니 이것이 있어 보고 듣고 말하고 움직이는 것이다. 대중은 알겠는가? 누구건 이 한 물건을 가져올 수 있다면 가히 비로자나 부처의 상투를 떨어
지난주에 혜해 선사의 ‘마음 안에서 도를 구하면 마귀’라는 법문을 소개했다. 이에 대해 많은 불자들과 수행인들이 혼란을 일으키는 것 같다. 부처나 법은 결코 마음을 떠나 존재하는 것이 아닌데 마음 안에서 구하지 않으면 어찌 하란 말이냐는 것이다.그러나 ‘마음 안에서 도를 구하면 마귀’라는 말씀은 천하의 명법문이다. 많은 경전이나 선지식 법문에 ‘마음 밖에서 부처나 법을 구하지 말라’는 가르침은 있었어도 ‘마음 안에서도 부처나 법을 구하지 말라’는 충고는 없었다. 그렇다면 대체 부처와 법은 어디에 있다는 말인가? 여기서 부처란 인격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