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주의는 무엇보다도 개인에게 엄청난 자유를 부여하였다. 신분의 굴레에서 해방되어 누구든 직업을 선택하고 그곳에 가서 일을 하고 임금을 받아 자신이 원하는 대로 자유롭게 소비할 수 있다. 누구든 자신이 가진 자원을 바탕으로 창의성을 발휘하고 개인의 능력을 구현하여 영리를 추구하고 자본을 축적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바로 이것이 경이적인 대혁신을 낳았다. 앞에서 간략히 말한 대로, 새로운 체제가 나타나자 기독교는 재빠르게 결합하였다. 부자가 천국에 가는 것이 낙타를 타고 바늘귀를 지나는 것처럼 어렵다고 말하던 것이 기독교였다. 하지만, 자본주의가 나타나자 중세 말기의 성직자들은 연옥이란 공간을 설정하여 부자가 지옥으로 가지 않고 이곳에 갔다가 천국으로 갈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었다. 장 칼뱅은 소명으로서
간단히 말하여, 자본주의란 생산수단을 소유한 자본가가 노동자를 고용하여 임금을 주고 상품을 생산하여 시장에 팔아 이윤을 얻어 이를 자본으로 축적하는 체제다. 지금 우리는 모두 이 체제 속에 살고 있다. 노동자는 임금을 받고 자신의 노동을 판매하고 시장에 가서 상품을 사서 소비한다. 자본가는 노동자가 실제로 생산한 것보다 임금을 덜 주고 잉여가치를 착취하여 자본을 축적한다. 이는 우리의 삶을 규정할 뿐 아니라 우리의 사고와 무의식까지 지배하고 있다. 자본주의는 자유경쟁을 바탕으로 한다. 누구나 자유로이 자신의 노동력을 발휘하여 생산을 해내고 그에 대한 대가를 받을 수 있다. 누구든 합리적으로 경영하여 기업을 운영하고 시장에 상품을 내다팔아 자본을 축적할 수 있다. 어떤 상품이든 시장에서 자유경쟁을 하여 수요
200년 기독교가 1700년 불교를 압도한 연유를 살펴보았다. 동해에서 트럭의 수조에 산 오징어를 담아 서울까지 달려오면 생존율은 30% 남짓이었다. 누구인가 꽃게를 수조에 넣자 생존율은 80% 이상으로 올라갔다. 산 오징어들이 꽃게에 잡히지 않기 위해 긴장을 하고 운동을 하였기 때문이다. 그렇다. 불교는 아무런 긴장과 성찰이 없이 너무 오랜 동안 잠을 잤다. 이제 그만 잠을 깨야 한다. 위기는 늘 기회의 도약대다. 지금 기독교와 정권으로부터 당하고 있는 수모와 압박을 잘 성찰하면 외려 한 단계 더 도약할 수 있다. 기독교가 불교를 압도하게 한 요인은 지면관계상 생략한 것까지 합쳐서 대략 열다섯 가지 정도다. 이 가운데 서세동점, 미군정과 대미종속과 같은 역사적 요인을 제하면 나머지는 불교가 해야 하는데 하
교회는 마을을 대체하는 공동체를 형성하여 신비주의와 ‘일상의 구원’을 결합하였다. 우리는 서울 한복판에 골목문화가 남아있을 정도로 공동체 지향성이 강하다. 80년대까지만 해도 아이들은 골목에서 공을 차다가 돗자리를 깔고 숙제를 하고, 남정네는 막걸리를 마시며 시국토론을 하고 여인네는 집집마다 먹을거리를 가져와 수다를 떠는 모습이 흔한 풍속도였다. 그때 마을사람들은 기쁨과 슬픔을 함께 나누었고, 관혼상제의 일을 나누어서 하였다. 공동체가 사라지며 고독한 개인들이 그를 그리워할 때 교회가 이를 대신하였으니 사람들은 그리로 달려갔다. 관혼상제만이 아니라 신도들이 큰 병이나 고통에 처할 때도 목사를 필두로 신도들이 달려가서 위로한다. 기독교의 교리는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아 천당에 가리란 것을 말하지만, 신도들로
정치권력과 결탁…근대 교육기관 설립교회차원 관혼상제로 신도간 유대 강화 자본주의와 근대성과 더불어 이 땅에서 기독교를 꽃 피운 3대 동력은 미국이다. 미군정 이후 남한은 미국의 식민지 국가로 종속되고, 한국은 미국의 자본주의 시장에 본격적으로 편입되었다. 두 가지가 가속도를 내면서 미국의 개신교 또한 한국 대중의 마음을 지배하기 시작하였다. 미군정은 남한을 분할통치하면서 공산주의와 민족주의 이념 및 세력을 배제하고 자본주의, 반공주의, 미국식 자유민주주의를 이식하기 시작하였다. 이를 위해 미군정은 정치세력으로는 친일세력과 야합하고 종교로는 기독교를 끌어들여 유착관계를 맺었다. 미국은 음양으로 기독교와 기독교 지도자를 후원하였으며, 기독교 지도자는 우익 반공, 친미를 지향하는 담론 및 사회활동을 활발히 전
도시의 어느 집에서든 밤에 창문을 열면 붉은 십자가가 스무 개 이상 들어온다. 하늘엔 별, 지상에 십자가다. 대통령부터 장차관과 판검사에 이르기까지 이 땅에서 힘깨나 쓴다는 자들은 대개 교회에 다닌다. 불교계의 최고 수장인 총무원장이 일개 경찰에게 검문 수색을 당하였는데, 대통령은 목사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200년을 갓 넘어선 기독교가 어떻게 1700년 역사를 가진, 얼마 전만 하더라도 2천만 명 이상의 신도를 거느린 불교를 압도하고 주력종교로 부상하였을까. 차분하고 냉정하게 그 원인을 따져보아야 불교의 대안도 가능할 것이다. 무엇보다도 서세동점의 세계사적 흐름과 제국주의적 침략을 무시할 수 없다. 20세기는 현대 과학기술과 새로운 무기로 무장한 서양이 동양을 지배한 역사였다. 세계사는 신의 정당성 여
이 땅에 불일(佛日)이 빛난 지 1700여년 동안 교각스님과 같은 왕족에서 욱면과 같은 노비에 이르기까지 많은 이들이 부처가 되었다. 승랑, 원효, 의상, 대현, 원측, 의천, 지눌 등 수많은 스님들이 동아시아 사상사에 지울 수 없는 족적을 남겼다. 하지만, 이는 과거의 영광일 뿐, 지금 한국 불교는 위기에 있다. 소수종교로 전락하여 이제 모두들 우습게 여겼는지 예서제서 발길질이다. 스님과 불자들의 행동과 발언은 늘 우물 안의 개구리에 머물고, 종단 전체의 힘은 국장급 공무원 수준에도 미치지 못한다. 반면에 기독교는 200여년 만에 불교를 압도하고 주력 종교로 부상하였다. 그 힘의 차이는 비교 자체를 불허한다. 남을 탓할 일이 아니다. 문제는 늘 내 안에 있다. 이번에도 올바르고 철저한 성찰을 바탕으로 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