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찬주 장편소설 삽화·송영방 “『화엄경』 80권을 맷돌에 넣고 갈면 나중엔마음 심(心), 한 자만 남을 것이다. ” 목탁소리가 일정한 간격으로 들려왔다. 저녁공양 시간을 알리는 목탁소리였다. 추금이 부엌을 나서면서 말했다. “절에서는 목탁소리를 잘 들어야 한다. 그래야 굶지 않는다. 누가 말해주지 않으니 늘 귀를 세우고 있어야 한다.” 그런데 추금은 공양간으로 가지 않고 법당으로 갔다. 김사의는 추금의 행동이 이상해서 물었다. “할아버지 스님, 공양 시간이라고 했잖아요.”“음, 나는 하루 한 끼만 먹는다.”“저는 먹을래요. 배고파요.”“절밥은 부처가 되기 위해 먹는 밥이다. 밥이 법(法; 진리)이 되어야 하느니 어서 가 먹어라. 먹고 나선 장작불 지핀 방으로 가거라. 나도 그 방으로 가마
정찬주 장편소설 삽화·송영방“수월스님은 북방으로 가셨고, 만공스님은 충청도에 계시고, 혜월스님은 남방으로 내려오시어 제자들을 가르치고 있단다. 세 분은 모두 달처럼 컴컴한 세상을 밝히는 분들이지. 그래서 우리나라가 동서남북으로 밝은 것이야.” 며칠 후.김사의는 성호가 시킨 대로 대구에서 경부선을 타고 물금역에서 내렸다. 물금역에서 내린 김사의는 갈대숲 사이로 드러난 바다처럼 넓은 낙동강을 한동안 넋을 잃고 쳐다보다가 다시 20리를 걸어 양산읍에 있는 양씨 술도가를 찾아갔다. 외할아버지 추금이 계시는 천성산 내원사로 가려면 그곳에서 하룻밤을 자야만 했다. 술도가 주인인 양씨를 찾아 내원사로 가는 길이라고 하니 술에 취한 듯 대낮부터 얼굴이 벌건 그는 두말 않고 행랑채 방을 내주었다. 양씨는 내
정찬주 장편소설 삽화·송영방 “좋은 일 하면 좋은 일이 생기고 나쁜 일을 하면 나쁜 일이 생긴다. 부처님 제자가 되려면 인과를 믿어야 한다. 인과가 무엇인지 깨달아야 한다.” 좁은 오르막 산길 끝까지 오르자 어수룩한 내원암이 나타났다. 인법당의 암자는 비가 새는지 지붕 한쪽에 멍석이 덮여 있었고, 암키왓장 골마다 파한 이끼가 듬성듬성 끼어 있었다. 김사의는 외갓집 안채처럼 규모가 큰 기와집을 생각했다가 실망했다. 시큰둥한 김사의를 보고 영천이 말했다. “옛날에 다 찌그러진 암자였다. 외갓집 돈으로 고쳐 그나마 이 정도다.” 성호가 기다리고 있다가 사립문 안쪽에서 세 사람을 맞아들였다. 등에 짐을 지고 산길을 올라오느라 김봉수가 땀을 가장 많이 흘리고 있었다. 그러나 성호는 속가 남편인 김봉
글·정찬주 삽화·송영방 “김사의는 가슴이 뛰었다. 산자락에 흐드러지게 핀 진달래꽃 때문이 아니었다. 어머니가 계신다는 내원암을 본 순간 심장이 콩콩 두근거렸다.” 세 사람은 대전역에 도착했다. 역사 앞에는 지게꾼들이 양지쪽에 몰려 잡담을 나누고 있거나 졸고 있었다. 헐벗은 거지들도 보였다. 거지들은 영천을 보더니 얻어먹을 것이 없다는 듯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김사의는 처음으로 기차를 보았다. 멧돼지처럼 생긴 머리통이 연기를 풀풀 내며 용을 쓰듯 기적소리를 내뿜어댔고, 그 뒤로는 네모 난 기차 칸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있었다. “사의야, 이것이 대구 가는 특급기차다.” 기차표를 끊어 온 영천이 역사 안으로 앞서 들어가며 말했다. 김봉수와 김사의는 두리번거리며 들어가다 이불보따리가 좁은
글·정찬주 삽화·송영방 “김사의는 지쳐가던 다리에 힘이 나는 것 같아 영천을 바짝 따라붙어 중얼거렸다. ‘나도 스님이 되고 말거야.’” 30대 중반으로 보이는 누더기 장삼을 걸친 한 승려가 산모퉁이 마른풀 위에 앉아 있었다. 죽은 듯이 쪼그리고 앉아서 숨을 고르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목구멍을 할퀴는 듯한 기침은 멎지 않고 있었다. 쿨럭쿨럭. 승려는 두 손으로 자신의 가슴을 누르며 기침이 잦아지기를 고통스럽게 기다렸다. 빈 지게를 지고 지나가던 늙은 농부가 승려를 보더니 가까이 다가와 말했다. “봉수 집에 가는 스님이 아닌감.” 그래도 승려는 고개를 들지 못하고 기침을 토해냈다. 그러자 농부는 혀를 차며 혼잣말을 하고는 가버렸다. ‘쯧쯧. 천하의 난봉꾼이더니 중이 됐구먼.’ 그제야
글·정찬주 삽화·송영방 “그렇다고 고명인은 어린 아이가 일타스님의 환생이라고 단정 짓고 싶지는 않았다.” 고명인은 어깨가 차가워 눈을 뜨는 순간 깜짝 놀랐다. 누군가가 홑이불을 덮어주었는지 자신은 법당 한쪽에서 자고 있었던 것이다. 간밤 늦도록 기도를 하다가 잠이 들어버린 모양이었다. 법당은 텅 비어 조금은 무섭기조차 하였다. 마주친 비로자나부처님도 무덤덤하고 위압감이 느껴질 만큼 어제보다 더 크게 보였다. 고명인은 홑이불을 각지게 개놓고 법당 밖으로 나왔다. 6시가 가까워지고 있는데 날은 이제야 겨우 밝아지고 있었다. 그는 밤이 길어졌음을 새삼 실감했다. 경내 마당은 서리가 내려 은가루를 뿌린 듯 반짝이고 있었다. 조금 전까지 꿈결처럼 범종소리가 나고 목탁소리와 염불소리가 난 것 같았는데
글·정찬주 삽화·송영방 “눈을 감고 합장한 채 고명인은 이십대 젊은 시절의 예쁜 어머니를 허공에 그려놓고 새 한 마리를 떠올렸다.” 빛바랜 단청의 대적광전 처마에는 하얀 잠자리 날개 같은 날빛이 아직 스러지지 않고 있었다. 고명인은 빛바랜 단청 위에 얹힌 저물녘의 날빛을 한동안 바라보았다. 세월의 이끼가 있다면 바로 저런 빛깔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한국의 산사에서만 발견할 수 있는 아련하고 은근한 빛깔이었다. “무얼 그리 넋을 잃고 쳐다보고 있습니까.”“단청빛깔이 이렇게 아름다운지 몰랐습니다. 도회지의 낡은 건물에서 느껴지는 칙칙한 것과는 차원이 다릅니다.”“해인사의 천년 역사가 묻어 있기에 그럴 것입니다. 아마도 미국의 어느 건축물도 이처럼 아름다운 연출을 해내지는 못할 것입니다.
글·정찬주 삽화·송영방 “김사의는 세상이 허망했다. 세상이 허망하다는 것을 태어난 후 처음으로 느꼈다” 그때 사내는 절에서 기도하겠다는 어머니를 모시고 해인사를 들렀는데, 해인사 구광루에서는 전국불교학생회 회장단 140여 명과 재가 신도들이 일타스님의 법문을 듣고 있었다. 사내도 어머니 옆에 앉아 스님의 법문을 듣고자 했으나 성능이 나쁜 스피커의 음질 때문에 앞뒤의 법문이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 많았고, 옆 자리에서 웅성거리는 경상도 아주머니 신도들의 잡담이 귀에 거슬려 집중하는 데 애를 먹지 않을 수 없었다. “친가 외가 할 것 없이 마흔 몇 분이 출가한 집안이라카니 부처님 은혜가 얼마나 크겠노. 그러니 일타시님 같이 큰시님이 나올 수밖에 없는기라.” “저기 보그래이. 당신 손가락을 태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 20여 명의 북소리가 하나로 모아져 독특한 리듬을 이룬다. 무대를 지켜보는 객석 여기저기서도 몸이 들썩거리더니 리듬감이 최고조에 이르자 마침내 함성들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한 학생의 아리랑이 리듬을 타고 시작된 것은 이 무대의 하이라이트. 무대 위의 긴장감, 벅차오르는 희열감에 실수도 없진 않았지만 힘찬 북소리 가락에 맞춘 구성진 아리랑 곡조는 지켜보는 이들에게 털끝이 주뼛거리는 전율을 선사하기엔 충분했다. 부산 파라미타 청소년협회(총재 대성 스님, 이하 부산 파라미타)가 9월 9일 부산 KBS공개홀에서 개최한 파라미타 창립 10주년 기념식 및 청소년 예술제는 부산 지역 청소년들의 열정이 넘치는 자리였다. 창립 10주년을 기념해 마련된 이
글·정찬주 삽화·송영방 어머니의 혼은 어디로 간 것일까 “범종소리의 여운마저 다 타버린 재처럼 스러지자 20년 전에 구광루에서 손가락이 없는 주먹손으로 분필을 잡고 법문하시던 일타 스님이 떠올랐다” 가을은 해인사 가는 산길에도 발자국을 남기고 있었다. 붉고 노란 만추(晩秋)의 낙엽들이 산길에 점점이 떨어져 바람이 불 때마다 뒹굴었다. 산길 왼쪽으로는 홍류동 계곡물이 허연 반석 위를 차갑게 흘렀고, 계곡 가에는 낙락장송들이 능구렁이 같은 통통한 허리를 드러낸 채 우우우 소리치고 있었다. 평일이어선지 해인사 가는 길은 한산했지만 이따금 관광버스와 승용차들이 나타났다가는 급히 사라지곤 했다. 저잣거리의 빠른 속도가 산중의 산길에까지 전염된 느낌이었다. 아스콘으로 포장된 산길은 이미 자연의 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