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은 ‘신심명’을 강의하고 책으로 펴냈다. 청담 스님은 한국불교 정화에 나서면서 ‘불교의 대중화를 위한 포교’, ‘도제양성을 위한 교육’, ‘경전의 대중화를 위한 번역 불사’를 종단의 3대사업으로 정하고, 3대사업 성취를 위해 정진했다. 특히 스님은 “불경은 승려들의 독점물이 아니다. 차라리 더 많은 대중의 것이어야 한다. 그리고 오늘은 한문을 해독하지 못하는 한글세대들이 계속 자라나고 있기 때문에 불경 번역은 한국불교의 가장 시급한 최대 사업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라며 경전 대중화를 위한 번역 불사에 각별한 관심을 보였다. 그리고 “역경과 포교를 통해서 불교의 대중화를 꾀해야 한다”는 점을 누누이 강조한 스님은 196
▲스님은 화엄경을 가장 깊이 연구해 해득했다. 불교정화의 주역으로 각인된 청담 스님은 정화승 이전에 수행승이었다. 개운사 강원 대교과를 졸업하고 몇 년간 운수행각에도 견처를 얻지 못한 스님은 “내가 그토록 뼈에 사무친 각의 본처는 찾으면 찾을수록 아득하고 좇으면 좇을수록 어둡기만 하다. 조용한 암자에서 견성대오의 소식이 있기 전에는 절대로 나오지 않겠다”는 원을 세우고 수행에 전념했다.그리고 마침내 만공 스님에게 인가를 받았음에도 “아직 부족하다”며 가행정진 하던 중 “옛부터 모든 불조는 어리석기 그지없으니, 어찌 현학의 이치를 제대로 깨우쳤겠는가. 만약 나에게 능한 것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길가 고탑이 서쪽으로 기울어졌다 하리.”라는 게송을 지어 견처
▲스님은 한국불교정화에 자신의 신념을 다 바쳤다. ‘성불을 한 생 미루더라도 한국불교 정화는 기필코 완수하겠다’는 신념으로 불교정화에 앞장섰던 청담 스님은 1902년 진주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봉부차제라는 한문사숙에서 처음 글을 배운 후, 18세에 이르러 보통학교에 입학해 신학문을 배우기 시작하면서 숨겨진 재능이 나타나기 시작했고, 3·1만세운동이 들불처럼 번질 때는 앞장을 서기도 했다. 그 때문에 경찰서에서 7일 동안 훈계를 받다 풀려났고, 이는 진주농업전문학교 불합격 이유가 됐다. 이때 스님은 낙방 이유가 만세운동에 앞장섰던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고 교장을 찾아가 며칠간이나 부당함을 역설한 끝에 입학 허가를 받았다. 이처럼
▲혜암 스님 출가 전 일본에서 수많은 동서양 철학서와 사상서를 탐독했던 혜암 스님은 ‘경전을 여의지 말고 외도의 서적은 마음에 두지 말라’며 수행자들의 경전 이외 서적 읽기를 경계했고, 스스로도 출가 후에는 경전과 선어록 이외의 서적을 가까이 하지 않았다. 수많은 경전 중에서도 혜암 스님에게 있어서 특별한 경전이 ‘금강경’이다. 일본 교토에 머물고 있던 당시 그곳 임제종 계열의 절에서 유나 소임을 맡고 있던 서옹 스님을 만났을 때, 서옹 스님은 발심하고 출가를 결심한 혜암 스님에게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凡所有相 皆是虛妄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 무릇 형상이 있는 것은 모두가 허망하니, 모든 형상을 형상이 아
▲ 스님은 염화실 다락방에서 조사어록을 보기도 했다. 일본에 체류하면서 일본 고승 일휴 선사의 모친이 쓴 유언문을 보고 발심한 혜암 스님은 ‘선관책진(禪關策進)’에 나오는 “나에게 한 권의 경전이 있으니, 종이와 먹으로 이루어지지 아니하였네. 펼치면 한 글자도 없으되, 항상 큰 광명을 놓고 있도다.”라는 게송 한 구절에서 입산 출가를 결심했다. 일본에서 인생을 어떻게 사는 것이 보람 있고 옳은 삶인지 고심하며 수많은 서적을 뒤적였고, 그 가운데 ‘선관책진’ 속 게송들이 마음에 닿아 탐독했던 혜암 스님은 일휴 선사 모친의 유언문을 보고 진리를 향한 마음이 간절하던 중, 바로 그 ‘선관책진’에서 비로소 나아갈 바를 정할 수 있었다. ‘선관책진’은 중국 명
▲혜암 스님은 평생 장좌불와와 일종식으로 정진했다. 한 평생 장좌불와와 일종식으로 정진했던 전 조계종 종정 혜암 스님은 항상 후학들에게 ‘공부하다 죽으라’며 참선 공부만큼 중요하고 귀한 공부가 없음을 강조했다. 1920년 전남 장성에서 태어난 스님은 집안 형편이 어려워 외가에서 성산보통학교를 다니게 됐고, 학교를 졸업하고 17세에 일본으로 가기 전까지 인생행로에 대한 고민을 거듭하던 중에도 장성에 있는 서원을 찾아다니며 유생들에게 한학을 귀동냥했다. 봉암서원, 필암서원, 학림서원, 고산서원 등 서원에서 유생들이 공부하는 ‘사서삼경’을 익힐 수 있었다. 그리고 이때 익힌 한학은 훗날 원당암 법상에서 법문을 하며 인용하기도 했다
▲스님은 선문촬요를 보고 수행의지를 더욱 다졌다. 경봉 스님은 졸음과 망상을 쫓기 위해 겨울 내내 입에 얼음을 물고 수행했고, 통도사 안양암에서는 자결할 각오로 6개월 동안 누에고치처럼 들어앉아 정진하는 등 상상을 초월한 수행 끝에 36세 때 야반삼경에 촛불이 춤추는 것을 보고 홀연히 대도를 성취했다. 경봉 스님이 이처럼 치열하게 수행할 수 있었던 것은 ‘화엄경’의 한 대목에서 재발심한 연후 찾은 양산 내원사에서 본 한 권의 책이 이미 불붙은 구도열에 열기를 더했기 때문이다. 내원사에서 경허 선사의 제자 혜월 스님에게 참선 공부를 청했을 때 혜월은 경허선사가 직접 엮은 ‘선문촬요’를 꺼내들고 첫 장에 나오는 달마 ‘혈맥론’을 펼친 뒤 손가락으로 한자
▲경봉 스님 자화상. 어린 시절 한문사숙에서 공부하며 ‘사서삼경’과 ‘명심보감’을 통달한 경봉 스님은 출가 후 ‘사미율의’, ‘초발심자경문’을 시작으로 내전 공부에 전념했다. 그리고 그 재능을 알아본 은사 성해 스님의 도움으로 신학문을 배울 수 있는 명신학교에 입학해 역사, 지리, 산술 등을 배우기도 했다. 이어 전문강원 대교과에 들어가 ‘능엄경’, ‘금강경’, ‘원각경’, ‘기신론’ 등을 차례로 배울 때 재발심의 계기가 됨은 물론 오도의 인연이 되는 ‘화엄경’을 만났다. 경봉 스님은 ‘화엄경’을 처음 접하면서 만해 한용운 스님과 인연을 맺기도 했다. 대교과에서 이 경전을 가르쳤던 스승이 만해였고, 만해로부터 월남의 사례를 들으며 나라 없는 설움이 무엇인
▲스님은 독서량이 상당히 많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통도사 군자’이자 ‘영축산 도인’으로 추앙받았던 경봉 스님은 18세에서 85세에 이르는 67년 생애를 소상히 담은 ‘삼소굴 일지’를 남겨 후학들에게 길을 제시할 정도로 섬세했던 당대의 선지식이다. 성품 꼿꼿하기가 댓가지 같으면서 더 이상 청정할 수 없는 출가자의 올곧은 모습을 보였던 스님은 자신이 거처하는 방문 앞에 ‘삼소굴(三笑窟)’이라는 현판을 붙여놓았었다. 삼소는 과거·현재·미래의 미소인 삼세(三世)의 소(笑)와 과거·현재·미래의 꿈인 삼세(三世)의 몽(夢)을 초탈한 뜻을 간직하고 있으나, 이런 설명을 알아듣기 어려워하는 사람들에게 스님은 “삼소의 ‘삼’은 우주의 극수인 3이요, ‘
▲스님은 제자들에게 외전중 ‘채근담’을 추천했다. 해안 스님은 공부하고자 원을 세운 대중들이 기다리는 곳이라면 어디든 기꺼운 마음으로 찾아가 법을 설하고 그들과 함께 정진의 고삐를 당겼다. 특히 재가불자들의 수행공덕이 출가자의 그것과 다르지 않고, 그 결과 또한 차별이 없음을 역설하며 수행정진을 독려했던 스님은 재가불자들에게 더없는 스승이기도 했다. 따라서 1969년 봄 무렵엔 스님을 따르던 불자들이 모여 ‘불교전등회’를 창립, 스님을 최고 지도자로 모시고 봄·여름·가을·겨울 계절마다 정진법회를 개최하며 정진에 정진을 거듭했다. 스님은 이때도 ‘7일이면 깨칠 수 있다’는 가르침을 역설하며 이들에게 7일간 혹은 3·7일간 지극한
▲해안 스님 진영. ‘동(東)경봉(鏡峰) 서(西)해안(海眼)’이라 하여 동쪽의 경봉 스님과 비견되며 수행납자들의 존경을 받았던 스님은 자신이 7일 용맹정진에서 견처를 얻는 체험을 했듯, “누구나 7일이면 깨달을 수 있다”며 항상 출·재가 수행자들에게 철저하게 공부할 것을 강조했다. 때문에 언제나 자신이 있는 자리에서 출가자는 물론 재가 수행자들과 동등하게 수행하고 공부하는 모습을 보였던 스님은 “일반적으로 정진을 오래 해야만 깨치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으나, 견성은 단시일을 두고 결정내지 않으면 안 된다”면서 아무리 미련하고 못난 사람이라도 7일이면 도를 성취한다는 옛 조사들의 경책을 긍정했다. 그리고 7일 만에 깨치지 못하는 원인
▲스님은 “잘 사는 법이 금강경에 있다”고 했다. 은산철벽을 뚫고 마치 광대무변한 허공으로 날아가는 봉황처럼 일생을 살다간 내소사 서래선림 조실 해안(海眼) 스님. 1901년 전북 부안에서 태어나 열 살 무렵 마을 서당에서 한학 공부를 시작했을 때 이미 인근 동리에 신동이 출현했다는 소문이 자자할 정도로 범상치 않은 모습을 보였다. 스님은 고매한 한학자가 ‘맹자’ 천 독 중이라는 소식을 듣고 찾아간 내소사에서 한학자 고찬 선생을 만나 수학하던 중 만허 선사의 눈에 띄어 절 생활을 시작했다. 스님은 이때 스님들의 수행하는 모습에 감명 받아 출가를 결심, 17세에 백양사에서 송만암 스님을 계사로 사미계를 받은 후 백양사 지방학림에 입학해 내전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