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소에 걷거나 앉고 설 때 허리와 다리 통증이 상당했다.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는데 2020년 봄, 결국 길에 주저앉고 말았다. 초기에 치료받지 않은 게 결국 곪아 터진 것이다. 선천적 일자허리로 인한 디스크 증상과 더불어 ‘무릎 힘줄염’진단을 받았다. 도저히 다리를 땅에 딛을 수 없었고, “당장 입원치료를 하지 않으면 수술을 해야 한다”는 의사의 간곡한 권고에 2달간 병상에 눕게 됐다.입원을 위해 짐을 챙기기 시작하며 세상이 무너지는 것 같은 절망에 빠졌다. 수술이라도 하게될까봐 무서웠다. 혹시나 잘못하면 ‘다시는 걷지 못 할 수도
살아가며 부처님과 단 한순간도 떨어져 있던 적이 없다. 어릴 적에는 어머니를 따라 절에 다녔고, 어린이법회와 중고등학생회, 현재는 청년회를 다니고 있다. 당연한 듯 매일 염불을 외우고 부처님께 절을 올린다. 스님께서 이름을 지어주셨기에, 이름이 생겼을 때부터 부처님 제자이지 않았나 조심스레 생각해 본다.어린이법회를 다니며 매달 108배를 했던 것이 수행의 첫 기억이다. 스님, 선생님, 친구들과 하는 절이 재미있었다. 절을 마치면 스님께서 소원도 들어줬다. 항상 흐뭇하게 응원해주는 스님과 선생님들 덕에 무슨 일이든 1등을 할 수 있을
40대에서 50대까지는 마음공부에 매진하며 매년 하안거, 동안거기간에 재가자도 참가할 수 있는 집중수행 프로그램을 찾아다녔다. 그러면서 템플스테이를 참가한 대중에게 명상을 안내하고 청소년캠프에서 아이들이 자연과 부처님 도량에서 마음 편히 지내다 갈 수 있도록 도와주기도 했다. 아이들과 함께하며 느낀 건 요즘 아이들에게 불교의 신앙 부분이 잘 와닿지 않는다는 것이다. 내가 감정의 기복에서 헤맬 때 부처님 가르침과 참선·명상 수행으로 벗어날 수 있던 것처럼 아이들에게 몸과 마음이 편해지는 부처님 가르침을 전해주고 싶었다.현시대에 맞춰
부처님이 좋아 지금까지 열심히 법에 의지해 살아왔다. 나로 인해 용기를 갖고 새로운 삶에 도전하는 사람이 많아지길 발원하고 있다.신심 깊은 불자였던 부모님 덕분에 어릴 적부터 절에 다니는 것이 익숙했다. 아이의 시선으로는 초파일에 등을 달러 가거나 기도하기 위해서만 절에 가는 것으로 받아들여져 불교가 어떤 종교인지, 어떤 교리를 가르치는지, 어떤 수행을 하는지 전혀 모른 채 소원을 빌러 다녔다. 모든 어머니들이 자식 입시기도에 정성을 다하듯, 친정 어머니도 다섯 자식들을 위해 정성껏 기도를 올렸던 기억이 생생하다.대학교 4학년 때
매일 108배를 하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무수한 생각을 지켜보고 있었다. 합장하며 1배를 할 때 내려가고 올라오는 과정 속에서 그동안의 추억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다. 5살 시절 살던 동네의 모습부터 대학교 친구와 웃으며 먹던 음식들까지. 내가 원해서 생각한 것들과 원하지 않았던 생각들. 왜 이렇게나 많은 생각들이 찾아들어 오는지 알 수 없었다.내가 이 몸의 주인인지, 몸이 나를 지배하는 주인인지 의심이 들었다. 사실 몸은 잘못이 없다. 언제든, 어떤 장소든, 어느 상황에서든 생명을 유지시키기 위해 스스로 할 일을
어릴 적 나는 조용하고 말 없는 아이였다. 잘하는 것이 없고, 잘 해야 하는 것도 못하는 편이었다. 게다가 가족의 잦은 이사로 여러 초등학교를 다녔고, 주변에 친구가 적어 혼자 있는 시간들이 많았다. 그러던 어느 날 길을 걷다 찌그러진 사이다 병뚜껑을 봤다. 동시에 ‘저 병뚜껑은 왜 이름이 병뚜껑인 걸까' ‘누구의 생각으로 꼭 저렇게 생겨야만 하는 걸까' ‘그럼 난 왜 신상욱인걸까'하는 의문이 들었다. 또 ‘신상욱’이라는 이름을 가졌기에 이렇게 무능력한 건지, 그래서 이렇게 못나게 생긴건지, 왜 나는 이렇게 살아가야만 하는 건지,
“이 겁니다. 이 것뿐입니다.”손가락을 들어 나지막하지만 단호하게 뭔가를 가리키는 모습이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그렇게 무심선원 김태완 선생님과 인연이 시작됐다. 당시 선생님은 일요일마다 동국대 대각전에서 법회를 열었다. 매주 그 곳을 찾았고, 이곳이 내 마지막 공부처가 될 것이라는 막연한 믿음이 들었다.“생각으로 찾지 말고, 머리로 헤아리지 말고 (손가락을 들며)이 겁니다.”머리로 헤아리는 공부가 아니라고 하시니, 오로지 선생님이 가리키는 손가락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법문은 귀에 들어오지 않았고 온몸으로 선생님의 손가락에만
학창시절부터 신비주의, 영성, 도가사상에 심취해 있던 나는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에 다니며 결혼하고 애 낳고 살다 늙고 병들어 죽는 뻔한 삶이 너무 허무해 보였다. 쳇바퀴 안에 들어서는 순간 아무 의미없이 내 삶을 허비할 것만 같았다. 그렇게 망설임없이 구도자의 삶을 택했다.명상 붐이 불던 80년대 후반. 영성에 대해 공부할수록 스승의 존재에 대한 간절함이 생겨났다. 그러다 한국의 라즈니쉬라 불리는 분에 대해서 알게 됐고, 뭔가 답을 얻을 수 있길 기대했다. 졸업 후 그 단체에서 운영하는 회사에 입사하면서 서울로 올라왔다. 상경하며
30여년전 청주로 내려와 남편과 행복한 신혼생활을 시작했다. 어느 날 한가로이 집 근처를 산책하다 문득 고개를 들어보니 4층 높이의 포교당 앞에 서있었다. 그 만남이 불교신자로서의 첫걸음이다. 마야부인상이 있던 그 절은 봉명동에서 안쪽으로 10여분 걸어가면 나온다. 대웅전 한채와 함께 유치원을 운영했던 비구니스님의 포교당이었다. 단순히 불교를 알고 싶은 마음에 다니기 시작했다. 스님을 따라 성지순례를 다니기도 하며 불교 기본예절과 찬불가 등을 배웠다. 그러나 모든 것이 처음이었기에 그저 겉으로만 신행생활을 했다.결혼 후 2년이 지났
초등학생 6학년 무렵, 정각사 어린이법회에 입회했다. 가족들을 따라 종종 산속 사찰을 가봤기에 풍경은 익숙했지만 108배, 찬불가, 반야심경 등은 생소했다. 어린이법회에서 친구들과 함께 불교교리를 배우면서 불교에 점점 흥미가 생겼고, 매주 일요일 정각사에 갈 시간만 손꼽아 기다렸다. 중학생이 되고 나서 청소년법회에서 불교를 제대로 배울 수 있었다. 당시 법회 담당 스님은 부처님의 생애, 불교의 상징, 반야심경 낭독, 108배를 가르치셨다. 이중 가장 힘들었던 것은 108배다. 청소년법회 스님과 선생님께서 108배를 시키셨고, 그럴
그러던 중 옛 도반이 아무런 설명없이 메일로 김태완 무심선원 선원장의 법문 여러 개를 보내왔다. 전에도 법문들을 몇 개 보내왔던 터라 별 기대 없이 듣기 시작했다. 그런데 법문 중 ‘모든 게 있는데 아무 것도 없다’는 말이 귀에 꽂혔다. 바로 내가 했던 경험이었다. 왜인지 알 수 없는 믿음과 제대로 길을 찾은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무심선원 홈페이지에 들어가 보니 선원에 대한 소개와 함께 여름정진법회 공지가 있었다. 앞으로 혼자서 공부하리라는 결심은 까맣게 사라지고 일체 망설임 없이 바로 신청했다.들뜬 기대감으로 정진법회에 참석
어릴 적 나는 무척 내성적인 학생이었다. 어머니가 홀로 3남매를 키우며 생계를 꾸렸기에 경제적으로 매우 어려웠고 불안정했다. 이 때문인지 바깥세상에는 별 관심이 없었고 무엇이든 혼자서 해결하는 습관이 들었다. 어머니의 부담을 덜어드리고자 학창시절엔 열심히 공부했고, 초등학교부터 대학교까지 겉으로는 온순한 모범생이었다. 그러나 내면은 언제나 우울함과 허전함, 알 수 없는 그리움과 답답함으로 먹먹했다. 고등학교 때부터 종교에 관심을 갖고 정신 서적을 제법 탐독했지만 답답함을 쓸어낼 수 있는 해결책을 찾지 못했다. 이따금 찾아낸 시원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