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최초 사찰 흥륜사 금당에는 ‘10성(十聖)’이라 하여 동쪽 벽에는 아도(阿道)・염촉(厭髑)・혜숙(惠宿)・안함(安含)・의상(義湘), 서쪽 벽에는 표훈(表訓)・사파(蛇巴)・원효(元曉)・혜공(惠空)・자장(慈藏) 등 10인의 소조상이 안치돼 있었다. ‘중고’와 ‘중대’ 불교사에서 중요한 인물 10인을 선정하여 ‘10성’이라고 이름붙인 것은 부처님 10대 제자에 대응한 조합이라고 추측된다. 또한 10성 가운데 최후 인물로서 화엄종을 개창한 의상과 그를 계승한 표훈을 들고 있는 점, 그리고 의상의 10대 제자와 화엄 10찰이라는 표현에서
지난 호에서 이른바 전불시대(前佛時代)의 가람터에 세운 7개 사찰과 성전(成典)이 설치된 7개 사찰의 비교를 통해 중고불교에서 중대불교로의 변화과정을 이해하려고 했다. 그 결과 삼국통일 뒤 중대불교는 중고불교의 왕실불교 성격을 계승하면서 한편으로 호국불교적인 성격이 다소 퇴색되는 대신 선대 국왕을 추모하는 제사기능이 추가되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 대표적인 사례로 중고 국왕의 권위를 강화하는 역할을 담당하였던 흥륜사・황룡사・분황사・담엄사 등 4개 사찰이 중대불교의 성전사원에서는 제외되었고, 그 반면에 선대왕의 은덕에 감사하
6회에 걸쳐 많은 지면을 할애하여 삼국통일의 역사적 의의와 삼국통일 전후 불교변화의 사회적・사상적 배경을 살펴보았다. 불교 문제에서 다소 벗어나 불교성립의 외적 조건인 왕권강화와 지배체제 정비, 지배이념의 변화와 유교사상의 수용문제를 구체적으로 언급한 것은 당시의 사회적・사상적 상황과 관련하여 살펴보려고 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지금까지 이해를 추구해온 삼국통일을 전후한 시기의 사회적・사상적 변화 내용을 바탕으로 하여 그에 상응하는 불교의 변화과정을 규명하려고 한다. 구체적인 방법으로서는 먼저 불교의 가시적인 상징물인 사찰을
신라는 삼국통일을 전후 중앙집권적 지배체제의 새로운 운영원리로서 유교를 주목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관료의 인사를 담당하는 중앙행정관서인 위화부의 조직을 강화하여 1급관서로서 위상을 높였다. 그리고 관료를 양성하는 교육기관으로 국학을 설치하여 유교를 교육하게 됨으로서 유학자나 문장가라고 할 수 있는 새로운 지식인들이 배출되어 ‘중고’ 시기 불교승려들이 전담하여 왔던 지식인의 역할을 분담하게 되었다. 그 결과 유교는 불교와 구분되어 독립된 사상으로 대두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신라의 교육기관 설치와 유교경전 교육은 고구려나 백제에 비하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나당전쟁을 거쳐 삼국통일을 완성한 문무왕대(661~681) 국가정책기조는 통합과 포용이었다. 삼국통일 원훈인 김유신이 문무왕 13년(673) 병상에서 왕에게 최후로 당부한 말은 당시 상황을 잘 대변해 주고 있다. “(전략) 지금 삼한(三韓)이 한 집안이 되고, 백성이 두 마음을 가지지 아니하니, 태평에는 이르지 못하였다고 하더라도 적이 편안하여졌다고 하겠습니다. 신이 보건대 예로부터 대통(大統)을 잇는 임금이 초기를 초기답게 잘하지 않는 이가 없지만, 나중을 잘하는 이는 드물었습니다. 그래서 여러 대의 공
삼국통일전쟁은 고구려・백제・신라 3국 사이의 항쟁으로 국한된 문제가 아니었다. 동아시아의 중심세력인 당나라를 비롯하여 북방의 유목민족인 돌궐・거란・말갈, 그리고 바다 건너의 왜 등 주위의 다양한 세력들이 가담한 국제전쟁의 성격을 띤 것이었다. 이러한 여러 세력 사이에는 이른바 합종연횡(合從連衡)의 외교전이 전개되었는데, 그 중심축은 당과 신라의 동서동맹(연형)과 고구려・백제・왜의 남북연합(합종)의 2대 진영으로 나뉘어 대립하였다. 신라의 외교정책은 28대 진덕여왕 2년(648) 김춘추와 당 태종 사이의 군사동맹 체결을 분기점으로 하
신라는 ‘중대’에 들어와 왕권의 정치력이 크게 강화되고, 종교적 신성의 요소가 퇴색됨으로서 정치권력의 정상으로서의 위상이 더욱 두드러지게 되었다. 그리고 국왕을 중심으로 하는 지배체제로서 율령제도와 정치제도가 정비되었는데, ‘중고’의 전통을 계승하는 한편 그를 바탕으로 당의 율령체제를 받아들여 접목시킴으로써 신라의 정치를 크게 발전시켰다. 이른바 율령체제라는 것은 당나라의 법률체계, 즉 당률(唐律)을 지칭하는 것으로서 중국의 후세에 이르기까지 계승된 중앙집권적 관료조직의 기본틀을 정립한 것이다. 신라는 김춘추가 집권하면서부터 당나라
신라는 3국을 통일하여 원래의 신라에 견주어 대략 3배에 달할 정도의 막대한 영토와 인구를 지배하게 되었다. 그러나 3국항쟁과 나당전쟁을 겪으면서 막대한 희생을 치렀다. 많은 인명 손실은 말할 것도 없고, 백제・고구려를 멸망시키고 부흥군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신라의 군비만이 아니고 당의 군사의 군량미까지도 신라가 부담해야 했기 때문에 경제적 지출이 막대하였다. 그런데 멸망당한 백제・고구려 측의 피해는 더욱 참혹하였다. 화려한 궁전과 역대 보물 전적이 적병에 의해 잿더미가 됨으로써 두 나라의 역사는 거의 인멸되고 말았다. 특히 백제・고
신라는 3국을 통일해 원신라에 비해 3배의 영토와 인구를 지배하게 된 것을 계기로 정치·경제·사회·사상·종교·예술 등 문화전반에 커다란 발전을 이루었다.신라인 자신은 이러한 변화를 하나의 시대가 끝나고 새로운 시대가 시작된 것으로 인식하였다. ‘삼국사기’에서는 28대 진덕여왕(647~654)에서 29대 태종무열왕(654~661)으로의 교체를 ‘상대(上代)’에서 ‘중대(中代)’로, 그리고 ‘삼국유사’에서는 ‘중고(中古)’에서 ‘하고(下古)’로 바뀐 것으로 표현하였다. 이러한 역사적 발전은 불교계에도 영향을 미쳐 커다란 변화를 초래하였
고구려・백제・신라 3국 중 신라는 국가발전이 가장 늦었을 뿐만 아니라 불교를 공인한 시기도 다른 두 나라에 비해 150여년이나 뒤졌다. 그러나 불교를 공인하면서 왕권강화와 국가발전을 적극 모색하여 이른바 ‘불교왕명시대’를 연출하고, 불교적 신성화를 통한 ‘성골’이라는 신분 개념(실체가 없는 정치적 수사)을 창출하기도 하였다. 당시 승려들은 불교라는 특정 종교의 성직자 역할에만 그치지 않고, 중국의 선진문화를 수입하는 선각자로서 고대문화 건설의 주역을 담당하였다. 또한 승려들은 부족의식의 청산과 국가정신의 수립, 새로운 사회윤리의 제
고구려・백제・신라 3국이 고대국가로 발전하는 과정에서 불교가 주역을 담당하였음은 물론이다. 따라서 이 주제에 대하여는 근대 역사학계에서 일찍부터 크게 주목을 받아 상당한 연구업적이 축적되어 왔다. 그러나 3국 항쟁과 통일전쟁 과정에서 불교가 담당한 역할, 특히 불교승려들의 활약상에 대해서는 알려진 사실이 별로 없다. 이러한 결과를 초래한 원인으로 우선 고려할 수 있는 것은 전해진 자료가 대단히 부족하다는 점이다. 그러나 더욱 근본적인 원인은 불교계로서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불편한 진실이 담겨있다는 사실 때문이다. 불교는 평등과 조
삼국통일전쟁은 당과 신라가 동맹하여 백제와 고구려 두 나라를 멸망시키는 것으로 종결된 것이 아니었다. 나당연합군에 의해 백제와 고구려가 멸망한 뒤에는 동맹관계였던 당과 신라 사이에서 백제의 옛 지역을 점유하기 위한 싸움이 치열하게 전개됨으로서 삼국통일전쟁은 외세의 침입을 격퇴하기 위한 전쟁으로 그 성격이 바뀌었다. 나당전쟁은 전투의 치열함과 7~8년의 장기간이 소요되었다는 점에서 3국간의 항쟁에 못지않은 큰 희생을 치른 역사적 사건이었다. 따라서 신라에 의한 삼국통일전쟁은 전기의 삼국항쟁과 후기의 나당전쟁으로 단계를 나누어 이해할
진덕여왕 2년(648) 김춘추와 당 태종 사이에서 나당동맹협정이 체결된 것은 삼국통일전쟁의 출발점이 된 역사적 사건이었다. 이 사실은 신라인들에게 크게 각인되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신라말기 최치원이 찬술한 ‘성주사낭혜화상비명’에서 구체적으로 특필하였던 내용에서 알 수 있다. 그런데 김춘추의 대당외교에서 간과할 수 없는 점은 군사원조를 요청하는 동맹협정의 체결을 전후하여 다양한 문화외교활동을 전개하였다는 점이다. 김춘추는 당에 도착하자, 먼저 국학에 가서 석전(釋奠)과 강론(講論)에 참관하기를 요청하여 당 태종의 허락을 받았고, 군사
7세기 중반 즈음 달성된 삼국통일은 신라의 역사를 전기와 후기로 양분하는 획기적인 사건이었을 뿐만 아니라, 한국민족의 전체 역사에서도 특기할 만한 커다란 사건이었다. 그런데 그러한 삼국통일이 고구려・백제・신라 3국 가운데 국가의 발전이 가장 뒤떨어졌던 신라에 의해서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우선 주목할 필요가 있다. 3국의 국가발전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여 각 나라의 전성기를 맞게 하였던 국왕들을 비교하면, 고구려의 19대 광개토왕(391~413)과 백제의 13대 근초고왕(346~375)에 견주어 신라의 24대 진흥왕(540~576
신라의 특수한 신분제도 골품제(骨品制)는 고대사회의 실태를 잘 나타내는 핵심적인 주제어다. 골품제는 왕족을 대상으로 한 골제와 일반귀족을 대상으로 한 두품제가 별도의 체계를 이루고 있었으나, 법흥왕대 율령체제 성립으로 하나의 체계로 통합되었다. 신라사회는 골품 등급, 즉 신분 등급에 따라 정치적 지위가 결정됐을 뿐 아니라 일상에 이르기까지 여러 가지 특권과 제약이 부여되었다. 골품제는 왕족인 성골과 진골, 중・하위 귀족인 6~4두품, 평민에 속하는 3~1두품 등 8등급으로 구성되었으며, 관청이나 귀족들에 예속된 노비는 골품제에 포함
한국고대사 기본역사서인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서 신라역사를 3기로 구분한 점은 일치하지만, 시점에서는 상당한 차이를 보여주었다. ‘삼국사기’는 29대 태종무열왕대(654~661)~36대 혜공왕대(765~780)를 ‘중대(中代)’로, 그 이전과 이후를 ‘상대(上代)’와 ‘하대(下代)’로 구분하였다. 반면 ‘삼국유사’는 23대 법흥왕대(514〜540)~28대 진덕여왕대(647〜654)를 ‘중고(中古)’로, 그 이전과 이후를 ‘상고(上古)’와 ‘하고(下古)’로 구분하였다. 이러한 시기구분은 ‘삼국사기’ 편찬자 김부식이 유교사관에 의
28대 진덕여왕(647~654)에서 29대 태종무열왕(654~661)으로 왕위가 교체되었다는 사실은 신라의 역사를 전기와 후기로 양분하는 대사건이었다. 이러한 시기구분에 대해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는 일치된 주장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그 구분의 기준이 왕통의 변화, 즉 왕실의 신분이 성골(聖骨)에서 진골(眞骨)로 강등되었다는 점에서도 같은 견해를 보였다. 그런데 두 역사서 모두 성골과 진골의 구분 기준이나 이유에 대해 일체 설명이 없으며, 특히 성골 신분에 대한 설명 자료도 전혀 발견할 수 없다. 오늘날 역사학계에서는 그 구분의
27대 선덕여왕대(632~647)에 이어 28대 진덕여왕대(647~654)도 왕권은 약화되고 귀족연합의 과두체제가 지속되었다. 이러한 정치상황에서 용수·춘추 부자는 국왕의 측근 인물로서 착실하게 정치권력을 강화해 가고 있었다. 먼저 선덕여왕대 용수는 26대 진평왕의 사위이자 여왕의 제부로서, 그리고 왕궁과 왕실의 관리 책임을 맡은 내성사신으로서 실권을 장악하고, 실추된 여왕의 권위를 높이기 위한 국가적인 불사로써 국가불교를 대표하는 자장과 함께 황룡사의 9층목탑을 조성하였다. 그리고 그 아들인 김춘추는 진평왕의 외손자로서 진덕여왕대
27대 선덕여왕대(632~647)와 28대 진덕여왕대(647~654)는 귀족연합 지배체제로 국왕권력이 약화된 반면 종교적 신성이 강조되던 시기였다. 선덕여왕대는 왕실 최고원로인 을제(乙祭)가 섭정을 담당하고, 상대등 수품(水品)과 내성사신 용수(龍樹) 및 서불한(이벌찬) 사진(思眞) 등이 주도하는 과두체제로 운영되었다. 그런데 선덕여왕 말년 상대등 비담(毘曇)의 반란을 계기로 주도세력이 바뀌어 진덕여왕대는 상대등 알천(閼川)을 대표로 임종(林宗)・술종(述宗,竹旨아버지)・무림(武林,慈藏아버지)・염장(廉長)・유신(庾信) 등이 참여하는
26대 진평왕(579〜632)은 54년이라는 오랜 기간 재위하면서 대내외적으로 왕권강화와 대당친선외교에 성공하고, 중앙행정관서의 정비, 왕궁의 관리와 수비 기구의 설치, 군사조직의 정비 등 지배체제의 정비를 서둘러서 커다란 성과를 이루었다. 그러나 왕위를 계승할 아들을 두지 못한 것이 말년에 가까워 오면서 새로운 정치적 불안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딸만 2인을 두었는데, 큰 딸 덕만은 왕위를 이어 선덕여왕이 되었고, 작은 딸은 진평왕의 4촌 아우인 용수와 결혼하여 김춘추를 출생하였다.진평왕 말년 즈음의 정치적 불안은 결국 53년(6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