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왼쪽부터)이동인, 김법린, 백성욱 스님. 조선시대에 숭유억불 정책이 이어지는 동안 불교는 크게 위축되면서 산중불교로 돌아설 수밖에 없었다. 이에 따라 법을 구하고자 인도·중국 등 해외 유학 길에 나서는 스님들의 발길도 크게 줄어들었고, 결국 이 시대 유학승에 대한 자취를 언급한 기록을 찾는 것 자체가 어려운 상황에 이르렀다. 해외 유학승에 대한 기록은 조선의 국운이 다해 쇠망의 길을 걷게 되는 한말에 이르러서야 다시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 시기 유학은 조선침략의 전략에 따라 접근한 일본의 영향을 받으며 일본으로의 쏠림 현상이 두드러졌다. 물론 여기에는 한국불교가 500년 가까운 세월 침체를 면치 못하는 사이에 서구문물과 서양의 교육체계까지 받아들인 일본불교가 크
중국 황메이현 사조사 비로탑안에 도신 스님 입상과 함께 봉안된 법랑 스님 입상. 삼국시대 초기 유학승들은 아무도 가지 않았던 길을 열어야 했기 때문에 그야말로 생사를 건 고난의 길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중국으로 유학한 한국불교 최초의 유학승 백제 발정이 그랬고, 인도로 가는 첫 번째 뱃길을 열었던 겸익이 그랬다.그러나 신라가 삼국을 통합한 통일신라시대로 접어들어서면서 해외로 나가는 위험요소가 줄어들었고, 그만큼 유학승들의 수도 부쩍 늘어났다. 그리고 유학승들의 구법행이 통일신라 후대까지 이어지면서 한국불교에는 또 다른 변화가 일기 시작했다.한국불교사에 있어서 이 시기에 일어난 가장 큰 변화는 바로 선종의 등장이다. 중국으로 유학했던 신라 스님들이 고국으로 돌아오면서 선종이 전
서쪽의 바닷길이 제대로 열리지도 않았던 삼국시대에 신라 최초 유학승 각덕 스님은 “도를 배우는 사람으로서 스승을 구하지 않고 편안히 지낸다면 불자로서의 보은에 어긋나는 일”이라는 말을 남기고 양 나라로 유학을 떠났다. 백제 무령왕(462∼523)은 아버지 동성왕이 좌평 백가에게 살해되자 왕위에 올라 국가의 위기를 기회로 바꾸기 위한 백제 재건 프로젝트를 수립했다. 무령왕의 백제 재건 프로젝트는 첫째가 백제의 옛 땅을 되찾는 일이었고, 이어 문화의 발전을 꾀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한편으로 백성들의 생활에도 관심을 갖고 백성들의 삶이 윤택해 질 수 있는 길을 찾았다. 무령왕은 이에 따라 중국 양 나라에 사신을 보내 중국의 선진 문화를 많이 받아들였으며, 이 과정에서 불교의 사상과 문화에 지대한
(사진 위부터)1308년 건축 수덕사 대웅전. 화재로 소실된 후 1376년에 다시 지은 부석사 무량수전. 1200년대 초에 조성된 봉정사 극락전 내부. 사찰에서 불·보살을 봉안한 전각을 이르는 법당. 법당은 본래 선종(禪宗) 사찰에서 법을 설하는 집으로 불렸고, 교종(敎宗)의 강당과 같은 기능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규모가 작은 사찰에서는 법당(法堂)과 불전(佛殿)을 하나로 만들어 그곳에서 예배·설법 등 각종 행사와 의식을 병행해왔다.법을 설하는 건물인 법당은 어느 사찰에나 한 채 이상은 꼭 있고, 법당에 봉안된 불·보살에 따라서 대웅전, 대적광전, 극락전, 미륵전, 약사전, 원통전, 지장전, 나한전 등 여러 가지 다양한 이름을 갖게 된다. 이 법당이 우리나라에서 언제
사진 위부터 부석사 무량수전 앞 석등, 법주사 쌍사자 석등, 미륵사지 석등 하대석. 『불설시등공덕경(佛設施燈功德經)』에서는 “비록 신심이 없어 여래를 비방하던 자라도 등불을 받들어 올리면 현세에 3종의 맑은 마음을 얻을 수 있고, 임종할 때는 3종의 밝은 마음을 얻고, 4종의 광명을 볼 수 있다. 죽어서는 33천에 태어나며 다섯 가지 청정함을 얻을 수 있다”고 등(燈) 공양의 공덕을 찬탄하고 있다. 우리나라 사찰에서는 고구려에 불교가 전래된 이래 불상과 탑 뿐만 아니라 경내를 밝혀온 석등(石燈)도 신앙의 대상으로 자리잡았다. 석등은 주로 법당 앞에 탑과 함께 조성되었고, 등불이 들어앉은 화사(火舍·불의 집)에서 퍼져 나오는 빛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뜻하는 진리로 표현되고 있다.
신라 문무왕 14년(674). 당나라는 신라가 자신들의 계림도독부를 공격한다고 트집을 잡아 50만 대군을 동원해 신라를 공격하려 했다. 뒤늦게 당나라의 술책을 눈치챈 문무왕은 명랑법사에게 급하게 계책을 구했고, 명랑은 신유림에 사천왕사를 짓고 부처님의 힘을 빌리도록 했다. 그러나 당의 침략이 예상보다 앞당겨지면서 절을 완성시킬 시간이 부족하게 되자 비단과 풀로 절의 모습을 갖추게 하고 12명의 명승과 더불어 밀교의 비법인 문두루비법(신라와 고려시대에 행했던 밀교의식)을 사용하자, 갑자기 큰 풍랑이 일어 전투를 시작하기도 전에 당나라 배가 모두 침몰하고 말았다. 당나라 대군을 물리치기 위해 짓기 시작했던 사천왕사는 신라가 당나라의 힘을 빌어 삼국을 통일하고 3년이 더 흐른 679년에 완성됐으며, 이는 곧 신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가장 오래된 불탑인 익산 미륵사지 석탑. 현재 해체 복원작업이 진행 중이다. 서기 48년 5월 인도 아유타국. 꿈속에서 ‘공주를 가락국에 보내 수로왕의 배필이 되도록 하라’는 하늘 상제의 명을 받은 국왕과 왕후는 딸 허황옥을 동쪽의 가락국으로 보냈으나, 바다 신의 노여움을 사 가지 못하고 돌아오고 말았다. 국왕은 고심 끝에 배에 탑을 싣고 가도록 했다. 허황옥은 배에 탑을 싣고 2개월 여에 걸친 항해 끝에 7월 27일 마침내 가락국에 도착해 이미 그녀가 올 것을 알고 기다리던 수로왕을 만나 혼례를 치를 수 있었다. 그리고 호계사를 지어 배에 싣고 온 파사석탑(婆娑石塔)을 세웠다. 『삼국유사』에 기록된 ‘금관성의 파사석탑’조와 ‘가락국기’조에 따르면 우리나라
불화가 언제 어디서 어떠한 모습으로 그려지기 시작했는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다. 단지 학자들의 연구에 의해 조각과 건조물의 성립시기와 거의 같을 것이라는 추측만 있을 뿐이다. 그러나 초기의 불교사원에 불화들이 그려졌던 사실은 여러 경전에서 발견된다. 『근본설일체유부비나야잡사(根本設一切有部毘奈耶雜事)』라는 경전에서는 인도 최초의 사원인 기원정사에 불전도(佛傳圖), 본생도(本生圖), 야차(夜叉) 등 넓은 의미의 불화가 그려졌다고 기록돼 있다. 따라서 적어도 기원전 3세기에는 어떠한 종류로든 불화가 그려졌다고 보는 게 전문가들의 시각이다. 그리고 기록을 떠나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불화로는 기원전 2세기경에 그려진 아잔타 석굴의 벽화가 꼽힌다. 아잔타 석굴은 인도 중서부 마하리수트라주의 아우랑가바드시에서 10
『삼국사기』열전(列傳) 등 문헌에 따르면 신라시대에 유명한 화가 솔거가 있어 황룡사 벽에 노송도(老松圖)를 그렸고, 고구려 승려 담징과 그 제자들은 일본에 건너가 법륭사 금당의 벽화를 그렸다. 새들이 앉으려다 부딪쳐 떨어지는 일이 잦았다고 할 정도로 뛰어난 작품을 그렸던 솔거는 황룡사 벽화 외에도 분황사의 관음보살과 진주 단속사의 유마거사상을 그리기도 했다. 하지만 담징이 그린 일본 법륭사 금당벽화는 1949년 화재로 소실되기 전까지 남아 있었던데 반해 안타깝게도 솔거가 그린 그림들은 자취조차 알 수 없다. 고구려 장천 1호분 예불도가 최고 이처럼 사찰에 그려진 모든 그림을 불교회화, 즉 불화(佛畵)라고 한다. 그러나 ‘불교의 종교적 이념을 표현한 그림’으로 요약할 수 있는 불화가 언제 어디서 처음 그려
불상의 손 모양은 부처의 성격을 알려주는 것으로 이를 수인 또는 인상이라고 부른다. 수인의 종류는 다양하며, 그 가운데 많은 사찰에서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 모습이 시무외인이다. 시무외인(施無畏印)은 오른손을 위로 올려 손바닥을 밖으로 향하는 모습을 하고 있는 것으로 두려워하지 말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그 다음으로 많이 볼 수 있는 모양은 왼손을 밑으로 하여 소원을 받아들인다는 뜻의 여원인(與願印)이다. 그리고 오른손으로 땅을 가리키는 것으로 지신에게 부처가 마귀의 유혹을 물리치고 보리수 아래에서 깨달음을 얻었다는 것을 나타내는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이 있다. 또 법륜을 돌려 불법을 설교하는 모습을 하고 있는 전법륜인(轉法輪印)이 있으며, 전법륜인은 설법인(設法印)이라고도 한다. 그리고 불자들이 자주
불상은 시대별로 재료가 달라졌고 양식 또한 변화했다. 그 가운데 최근 주목을 받고 있는 소재 중 하나가 목불(木佛)이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목불은 12세기말에서 13세기초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현재 10여 구 정도가 존재한다. 현재 불교계와 불상을 연구하는 학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불로 공식 인정하는 불상은 1199년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는 안동 봉정사 관음보살좌상. 전나무를 소재로 조성된 106cm의 등신대 불상으로, 대웅전 현판 기록에 따라 현존 목불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인정받고 있다. 경상북도가 도지정문화재에서 국가지정문화재로의 승격을 추진 중이다. 이어 서산 개심사 목조아미타불좌상이 1280년 보수한 기록이 남아 있어 그 뒤를 잇고 있다. 개심사 아미타불은 1280년
불상은 언제 어디서 처음 만들어졌을까. 불상은 부처의 존상에 한정되는 명칭으로, 보살이나 제천상 등은 불교상으로 부르는 게 옳다. 불교상 가운데 가정 먼저 만들어진 것은 제천상이며 범천, 제석천, 길상천 등은 불상이 만들어지기 전에 고대 인도조각 가운데 나타난다. 불교상이 아닌 최초의 불상은 석가상으로 소재는 나무였다. 『아함경』을 비롯한 여러 경전에서 코삼비국의 우다야나왕이 향나무로 석가의 모습을 조각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으며, 이것이 불상 조각의 시초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실제 불상이 출현한 것은 석가모니 부처님 입멸 후 500년이 지난 기원전후 무렵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설명이다. 전문가들의 설명에 따르면 최초의 불상은 인도의 서북부 간다라 지방과 북부 마투라 지방에서 거의 비
서기 539년 고구려 수도 낙양. 동사(東寺)의 주지 승연을 비롯해 40여 명의 스님과 불자들은 전국 곳곳에 부처님 가르침을 널리 알려 국가가 번영하고 백성을 평안하게 할 것을 발원했다. 그리고 그 발원을 실현하기 위해 천불을 만들어 전국에 배포하기로 하고 함께 힘을 모아 불상을 만들기 시작했다. 이때 자리에 참여했던 비구 법영은 그 가운데 스물 아홉 번 째 불상인 인현의불(因現義佛)을 모시고 공양하게 됐다. 그러나 이 불상은 세월이 지나면서 어느 때인가 모르게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1963년 1400년만에 발굴 그리고 1400년의 시간을 훌쩍 뛰어 넘은 1963년 7월 16일. 경남 의령군 대의면 하촌리에서 홀로 시어머니와 다섯 남매를 돌보며 막일로 생계를 꾸려나가던 41세의 강 모 여인은 이날도 일
불교 역사에서 최초로 등장하는 사찰은 인도 마가다국 왕사성의 죽림정사다. 북방에 있는 가란타죽림에 최초로 생긴 불교사원이라고 해서 가란타죽원 또는 죽원가람이라고도 한다. 코살라국 사위성의 기원정사와 함께 불교 최초의 2대 가람으로 불린다. 인도에서 불교를 받아들인 중국의 첫 사찰은 75년 건립된 낙양의 백마사로 알려져 있다. 후한 명제 영평 10년에 인도에서 두 스님이 백마에 불경을 싣고 낙양에 들어와서 외국 손님을 주관하는 홍노사에 머물게 되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중국으로부터 불교를 받아들인 우리 나라는 고구려 소수림왕 5년인 375년에 세워진 초문사와 이불란사가 최초의 사찰이며, 백제에서는 385년 건립된 영광 불갑사가 첫 번째 사찰로 꼽히고 있다. 이어 신라의 경우 『신라본기 제4권』의
석가모니 부처님은 35세에 깨달음을 얻은 후 녹야원에서 다섯 비구에게 최초로 그 깨달은 바를 전했다. 그리고 80세에 열반에 들 때까지 45년간 대중 곁에 머물며 진리에 눈뜰 것을 역설했다. 오늘날 전해지는 경전은 이러한 부처님 생전의 설법을 문자화한 것으로 부처님 열반 후 수 차례의 결집을 통해 이뤄졌고, 중국을 거쳐 서기 372년 우리 나라에 전해졌다. 이후 한국불교는 대중들이 모여 신앙생활을 영위할 구심점으로 사찰을 세우기 시작했고, 사찰을 장엄하는 수많은 불교문화가 함께 형성되어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법보신문」은 1700년 한국불교 역사에서 불교와 관련해 처음으로 모습을 보였거나 생겨났던 불교문물의 탄생 배경과 역사를 살펴보고자 ‘여기가 한국불교 최초’를 주제로 연재를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