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진리 일컫는 세가지 위대성공성(空性)은 불법의 절대적 진리불교의 진리를 말하는 세 가지의 위대성을 마명(馬鳴)은 그의 ‘대승기신론’에서 체대(體大), 상대(相大), 용대(用大)라고 언표했다. 체대는 불법의 본질적 진리인 공성(空性)의 위대성으로서의 법신불을, 상대는 불법의 현상적 존재의 위대성으로서의 보신불을, 용대는 공성과 존재의 위대성을 다 활용하는 마음의 위대성으로서의 화신불을 각각 천명한 것이다. 공성은 불법의 절대적 진리를 말한다. 절대적 진리가 공함으로 말미암아 절대성이 항구불변한 고정된 가치로서 각인되는 것이 아니라, 기실 그것은 텅 비어있는 허공과 같다. 절대적이지만 절대적인 진리라고 우길 것이 없는 그런 의미를 공성이 내포하고 있다. 그 공성이 개념화가 안 됨으로써 진리의 유일성에 대한
무의식적으로 어떤 공업에 젖어 있나인식하게 하는것이 이 시대의 급선무한국정신문화의 한 특징은 대단히 명분적이라는 것이다. 주자학적 정신문화가 낳은 업보겠다. 모든 가치론은 동시에 반(反)가치적인 어둠을 동반한다. 예컨대 선은 필연적으로 위선을 낳고, 정의는 편협한 마음으로 세상을 단죄하는 진노심을 낳고, 용기는 거칠은 만행을 낳고, 정직은 주위사람들을 숨막히게 하는 경직성을 낳고, 예의는 필연적으로 번례(煩禮)의 형식적 낭비를 빚는다.우리는 그 동안 도덕적 선의지가 좋은 점만을 낳고, 나쁜 면과는 동거하지 않는다는 단순 도덕주의에 오랫동안 물들어 왔었다. 이것도 주자학적 도덕주의의 교조성이 낳은 결과겠다.사람들은 현재 한국의 반도덕적 문화의 범람은 도덕교육의 강화로 청소되어야 한다고 외친다. 도덕성의 강화는
미세한 무명의 때가 곧 소유욕본능의 욕망이자 아상 낳는 진원지나는 불교의 대승사상이 세상살이를 근본적으로 바꾸는 혁명의 사상이라고 여긴다. 왜냐하면 대승사상은 생멸의 세상을 살아가는 소유집착적 자아를 공사상으로 해체하여 여래장의 진여가 세상을 비추게 하는 가르침을 말하기 때문이다. 원효가 이미 『대승기신론소』에서 해석한 바이지만, 마음이 이 생멸의 세상을 살면서 아주 미세한 분별심을 무의식적으로 아뢰야식에 생기시켜 여래장의 본심을 덮으면서, 무명의 때가 마음에서 일어나게 되었다는 것이다. 바로 이 미세한 무명의 때가 소유욕이고, 본능의 욕망이고, 아상을 낳는 진원지가 된다.본능과 본성, 이 두가지 성향은 마음이 무의식적으로 지니고 있는 자발적인 욕망의 기호다. 동물에게 본능과 본성은 일치한다. 생명을 유지하
중생 주장하는 정의는 늘 ‘편파적’정의 이름으로 전쟁 사라진적 없어나는 불교가 복락의 종교라고 생각한다.세상을 복락케 하는 길은 세상을 심판하는 일을 중지하는 데서 시작한다고 불교는 가르친다. 언뜻 수용하기 어려운 가르침이다. 세상에 악행을 일삼는 가증스런 이들이 얼마나 많은데, 그런 이들을 심판하지 말라니 세상의 일이 뒤죽박죽으로 되지 않겠는가 하고 분노가 일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세상에 정의가 필요하다고 역설한다.정의는 악에 대한 심판과 징벌을 뜻한다. 사기꾼도 사기꾼으로 낙인찍히는 것을 싫어하니 모두 다 악을 싫어하는 것이 분명해 보인다. 악이 무의식적으로 싫어서 나오는 마음의 반작용이겠다. 모두가 다 정의를 외친다.그 소리의 강도만큼 아전인수격으로 각자는 마음의 호오에 따라 제각기 정의를 요구한다
우리사회의 격렬한 주관적 감정말 없는 자연의 상생에서 식히자불교는 자연과 마음과의 상응성을 진리로 가르쳐 준다. 자연의 법과 마음의 법이 둘이 아니고 서로 대응된다는 것을 가르치는 불교는 자칫 정신의 세계를 섣불리 인격화하거나 관념화하여 정신이 자연을 지배하는 주인인 양 착각케 하는 인간중심주의와 다르다. 신중심주의도 인간중심주의의 변용에 불과하다.불교는 마음이 무한 허공의 에너지와 상응한다고 생각한다. 무한 허공은 아무 것도 없는 허무의 빈 공간이 아니고, 무한대의 고갈되지 않는 기(氣)의 보고와 같다. 그래서 허공은 유식학에서 말하는 제8식인 아뢰야식의 능력에 상응한다고 본다. 하늘의 구름과 새들의 이동, 해와 달의 운동, 그리고 밤하늘의 별들의 반짝임은 다 허공의 안보이는 바탕을 근거로 해서 자동사적으
자본주의는 경제적, 사회주의는 도덕적 소유론탐욕없는 마음으로 세상 보는 것이 불교의 사유산업혁명, 프랑스혁명, 러시아혁명 등을 우리는 근대세계를 만든 삼대혁명이라 부른다. 각각 경제기술혁명, 부르주아 정치혁명, 프롤레따리아 계급혁명이라고 요약된다. 이 혁명들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면, 좋은 세상을 만들어 보려는 선의지를 나타낸다. 경제기술주의가 부르주아 혁명과 결부되면 자본주의로, 그것이 프롤레따리아 혁명과 합쳐지면 사회주의로 진행되었다. 전자는 이기심을 실질적 사회적 동력으로 이용한 개인적 자유주의를, 후자는 반이기적 도덕심을 명분으로 내건 집단적 평등주의를 이념으로 제창한다. 프롬(E. Fromm)과 같은 미국의 사회심리학자는 사회주의가 소유적 삶을 거부하는 존재지향의 사회창조를 겨냥한다고 말했으나, 그는
불교의 자유는 세간 잊은 마음 아닌마음 근원 그대로 보는 ‘비어 있음’불교의 자유론은 서구의 사상과 좀 다르다. 서구의 사상은 개인의 자유를 불가양도적(不可讓度的)인 기본권리로 보고 있다. 사회적 원자로서의 개인의 실체를 인정하고 그것을 존중하려는 의도를 담고 있다 하겠다. 이런 개인주의적 자유론의 근거에는 오랜 서구 사상의 전통인 인간은 ‘이성적 동물’이라는 정의가 깔려 있다. 인간은 동물이되 이성이 첨가되어 그 이성이 인간의 불가양도적인 존엄성의 핵심이므로, 이성의 생각과 의지를 존중해야 한다는 원칙이 거기에 깃들어 있다. 이런 논리적 인간론을 회의하고 인간의 자유를 좀 더 구체적 삶과의 관계에서 보려는 철학적 사유가 현대에 와서 독일의 철학자 하이데거에 의하여 크게 제기되기 시작했다. 그는 인간을 이성
인간은 서로 다르므로 서로 필요한 존재상호차이 인정하고 의존하는 삶이 평등20세기 프랑스의 구조주의 사상가인 레비-스트로스(L?i-Strauss)의 인류학에 따르면, 토템(totem)과 카스트(caste)의 두 제도는 종이 한 장의 차이와 같다. 서로 다른 자연물들이 상호 교환의 방식으로 존재하듯이, 토템은 인간집단들이 서로 거래방식으로 존재하기를 바라는 인간 문화제도다. 즉 곰 토템과 호랑이 토템을 가진 종족들은 각각 자기 토템인 곰과 호랑이를 죽이지 않는데, 그것은 종교적 숭배의 신성한 대상이기에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사회적 삶이 곧 교환이므로 토템제도는 자연의 존재방식에 따라 교환적 삶을 모방한 것이라는 것이다. 곰과 호랑이를 자기 종족에서 안 죽이는 것은 곰과 호랑이를 타 종족과 서로
창조론은 대상에 대한 지배구조 정당화 시켜불교적 인과 관점에서 자연은 나와 같은 존재내가 불교로부터 배운 큰 철학적 진리가 있다. 그 진리는 타동사적인 세계관이 아니라, 자동사적이거나 재귀동사적인 세계관이라는 것이다. 타동사적인 세상보기는 주관과 객관을 구분하여 주관이 바깥에 놓여 있는 객관을 만들거나 영향을 미쳐서 어떤 변화를 초래하는 것을 뜻한다. 그러나 자동사적이거나 재귀동사적인 세상보기는 주어가 다른 목적어에게 타력적으로 영향을 끼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주어의 행위나 생각이 스스로 생기하거나 또는 자기자신에게로 되돌아오는 그런 상태를 말한다. 예컨대 불교의 인과법은 서양 철학과 신학이 말해 온 인과법과 다르다. 서양의 인과법은 타동사적 인과법이다. 신이 세상을 창조했다는 인과법은 대표적인 타동사적
불교의 선악은 세상 보는 마음 상태 의미선 의지도 고집하면 탐욕이며 악이 될 뿐세상은 선악으로 나누어져 심판되곤 한다. 우리가 비록 불자라도 학교의 도덕시간과 사회의 매스컴에 의하여 선악을 이분화해서 실재론적인 것으로 여기는 습관에 많이 익숙하게 길들여져 왔다. 우리는 선을 좋아하고 악을 증오하는 주체가 되기를 종용받아 왔다. 그러나 불교는 이런 선악관을 망상이라고 본다. 내가 아는 한에서 오직 불교만이 세상의 선악을 실재론적으로 인식하기를 거부하고, 그것을 마음이 스스로 내는 생각의 방향으로 깨닫게 한다고 여긴다. 악을 불교는 대부분 번뇌로 표현한다. 세친(世親)의 『유식삼십송』에 의하면 인간의식(제6식)은 11개의 선의 마음가짐과 26개의 번뇌의 마음가짐으로 나누어진다. 26개의 마음가짐은 또 6개의 근
상생-상극의 상존 원리 밝히는게 화쟁의 핵심변증법 이성의 논리라면 화쟁은 자연의 법칙원효의 사상을 정확히 인식하기가 쉽지 않다. 필자의 짧은 공부에서 가장 어려운 철학자 중의 한 사람이 원효인 것 같다. 지나치게 그가 붕 띄워져 신비화된 측면이나, 또 대강 서술되어 엄밀한 법칙으로 그려진 그의 사유가 안타깝게 가려진 경우가 혹시 없는지 자문해 본다. 우리는 그를 흔히 화쟁의 사유인이라 부른다. 화쟁은 문자 그대로 불법의 다양한 관점상의 쟁점들을 모순적 대립으로 보고 서로 옳다고 다투는 것이 아니라, 그 모든 쟁점들을 상응하는 관계로서 보게 하는 이법의 발현이겠다. 화쟁의 이법은 상쟁하는 대립의 관계를 변증법적으로 지양하는 제삼의 인위적인 논리의 구성을 뜻하지 않는다. A와 A'(非A)가 논리적 모순대립의 관
인간이 성인될 수 있을까능력의 이타행이 보살도인간은 그의 수준만큼 세상을 보고 말하고 살아간다고 말할 수 있다. 그래서 철학교수 자리를 지망하는 사람에게 나무나 물이나 구름 등에 대해서 즉흥연설을 한 번 부탁하면, 그 사람의 즉흥연설이 그의 생각과 느낌의 수준을 에누리 없이 정직하게 표현하는 것이 아닐까 늘 생각해 왔었다. 그러나 그것을 한 번도 실천한 적은 없었다. 즉흥연설이 그 사람의 사람됨의 수준을 여실히 짐작케 하는 길일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나는 공부하는 과정에서 완전한 인간으로서 성인이 되는 길이 과연 현실적으로 가능한가 하고 회의한 적이 많았다. 그래서 인간은 불가능한 그런 성인의 헛된 꿈을 추상적으로 갖기 보다 차라리 신처럼 절대자를 믿고 거기에 의지해서 살아가는 것이 인간에게 현실적으로
‘유심’은 유물 대립접 아닌 생기의 원형“색은 마음의 표상이 먼지를 결성한 것”『화엄경』에 나오는 일체유심조의 사상을 보통 유심론이라 여기려 한다. 나는 저 구절이 서양철학의 개념에 따라서 유물론과 대립되는 뜻에서의 유심론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불법의 본성을 말한다면, 그것은 공성(空性), 일심(一心), 그리고 원기(元氣)와 서로 상통하는 뜻으로 풀이되겠다. 법계의 법성이 공이면서 마음이고 그리고 결코 마르지 않는 생기(生氣)의 원형이라는 것이다. 법성이 일심이라는 것은 단지 인간의 마음만을 말하지 않는다. 그것은 이 우주의 법계가 곧 절대적 무아로서의 우주적 마음과 같다는 것이다. 그러나 법성을 원기로 읽는 법은 흔하지 않다. 그것은 불교적 용어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 마음의 본질은 욕망이다. 자아의
현상이 환상이고 동시에 실상이라는 철학인간 중심주의 아상의 진원임을 깨달아야「반야심경」에 나오는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 空卽是色)의 구절은 불법의 이치를 가장 선명하게 압축한 부처님의 가르침이겠다. 색상이 있는 모든 현상은 다 본성에서 공하고, 공한 본성은 다 색상이 있는 현상으로 나툰다는 의미는 현상과 본성의 관계를 풀이한 가르침이라 여겨진다. 두 구절이 각각 다르다. 전자는 모든 소유론적 현상의 무상함을, 후자는 모든 존재론적 현상이 공의 본성에서 자발적으로 생기한 공의 보시임을 가르친다고 생각된다. 소유론적 현상은 결과적으로 환상이고, 존재론적 현상은 실상임을 저 구절이 말한다고 여겨진다. 같은 현상이 환상이면서 실상이다. 그런 분기점을 낳게 하는 것이 자아의 유무(有無)다. 자의식에 축을 둔
남 지배하려는 공동 無明에 자각-참회를인간만이 사회생활을 영위한다. 군서생활을 하는 동물이 있으나 그것은 사회생활이 아니다. 오직 인간만이 언어활동을 펼친다. 언어활동은 인간의 마음이 개인적인 것이 아니라, 이미 사회적인 존재양식을 선천적으로 지니고 있음을 나타낸다. 자연적인 사고로 다친 경우를 제외하면, 인간의 질병은 거의 심인성(心因性)이고, 이것은 또한 사회생활이 분비한 것이겠다. 말하자면 마음의 병은 사회생활의 병이라는 것이다. 지금 우리 사회에 엄청난 심신의 질병들이 도사리고 있다는 것이다. 예컨대 암의 발생이 세계가 놀랄만큼 증가하고 있다는 것이다. 사회생활에서 마음이 편치않고, 불쾌감이 누적되어 드디어 암으로 진행된다는 것이다. 자살율도 과거에 비하여 엄청나게 증가했다는 것이다. 사는데 즐거운
이성적 가치판단은 언제나 양면 지녀무아의 길만이 평안 부르는 ‘안심법’3조 승찬(僧璨)대사의 가르침이다. “지극한 도는 어렵지 않다. 오직 간택을 꺼릴 뿐이다… 틀림(違)과 바름(順)이 서로 다툼은 마음의 병이 됨이니… 얻고 잃음과 옳고 그름을 일시에 놓아 버려라.” 사람들은 이것이 현실의 도가 아니고, 출세간의 도라고 여긴다. 현실의 도는 선악과 시비를 따져 올바른 판단을 통해 좋은 사회를 만들어가는 것이라고 여긴다. 선악과 시비 판단이 없으면, 사회생활이 뒤죽박죽이 되어 정의의 기준이 사라진 혼란이 도래할 것이라고 여긴다. 따라서 불교의 가르침은 현실적이 아니라고 주장되어 왔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저 승찬대사의 가르침이 가장 현실적인 세상의 도를 말한 법문임을 깨달아야 하겠다. 그동안 인류의 사회생활과
존재는 연기법 따르는 생기 현상일 뿐‘空’이해한 존재론이 미래적 사유 방식불교가 존재론적인가? 전통적 불교철학에서 불교는 공(空)사상이므로 존재론적 사유와는 결을 달리한다고 주장되어 왔다. 또 심지어 불교의 공사상은 중국불교가 말한 자성(自性)의 가르침과도 결을 달리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불교를 존재론이라 여기면, 아마도 그 말이 초기 불교인 설일체유부의 아공법유설을 연상시켜 이의를 제기하게 되는 것 같다. 그러나 우리가 불교를 존재론이라 부르는 이유는 존재를 고정된 불변의 명사로 보기 때문이 아니다. 명사로서의 만물이 자기 존재근거인 본질을 소유하고 있다고 여기는 그런 사유가 아니다. 그런 사유를 현대의 포스트-모더니즘 철학에서는 존재자학(存在者學)(ontic science)이라 부른다. 존재자학
현세에 집착하는 과시적 삶이 탐욕 부추겨명분적 도덕 대신 삶을 생각하는 교육 필요한국의 정신문화를 한 단계 향상시키지 않으면, 세계가 부러워하는 그런 나라를 가꿀 수 없겠다. 한국인은 현세적 속물주의의 근성을 넘기 위한 문화를 익혀야 하겠다. 그 근성이 절대 빈곤국에서 세계 12대 무역강국으로 한국을 부상케 한 원동력이 되었지만, 그것이 다시 한국인의 정신적 향상을 방해하는 엄청난 장애로서 작용하고 있는 것 같다. ‘이승의 거지 팔자가 저승의 정승 팔자보다 낫다’라는 속담이 한국인의 무의식에 깊이 박혀있는 현세적 속물주의를 보게 한다. 한국인은 대개 죽음을 생각하지 않으려 한다. 무덤도 생가에서 가급적 멀리 둔다. 마을 근처에 묘지가 있는 서양이나 일본과 다르다. 살아가는 것이 죽어가는 것인데도, 죽음의 생
각자 타고난 기질이 여래되는 방편서로 주고 받는 존재의 다이나미즘‘중생심이 여래심’이라고 보조국사가 화엄사상의 연장선상에서 말했다. 중생의 이기배타적 탐욕이 여래의 자리이타적 원력과 동거하고 있다는 마음의 이중성으로서 나는 저 말을 해석하고 싶다. 6바라밀이외에 다시 4바라밀이 추가되는 것이 매우 의미심장하다고 본다. 이 4바라밀 중에 먼저가 방편 바라밀이다. 방편은 중생의 수의(隨意)에 따라 쉽게 여래심을 발양할 수 있는 길을 말하는 것이겠다. 중생은 천백억의 다양한 성격과 기질을 타고 태어났다. 어떻게 원만보신해질 수 있나? 불가능해 보인다. 중생은 운명적으로 편파적이고 부분적인 성격을 띠고 있는데, 어떻게 그 어려운 해인삼매에 들어가서 부처님처럼 원만한 보신불의 보상을 얻을 수 있을까? 그 지난한 6년
당위 앞세우며 억압-강요하기 보다이기적 욕망 원력으로 바꾸는 길 제시사람들은 꽃을 보면서 거의 ‘아! 좋다!’라고 감탄을 토하면서 사진을 찍고 꽃내음 아래서 김밥을 먹기도 한다. 그 정도의 수준으로 꽃을 감상할 뿐이다. 떠나면서 아쉬워 한다. 이 감정은 바깥에 있는 꽃의 미(美)를 소유할 수 없거나, 또는 떨어지는 낙화(洛花)의 소유 거부의 방식 때문에 미에 대한 미련을 나타내는 것이겠다. 아직도 야생 생활을 하는 원주민들의 기록 필름을 보면, 그 생활은 두 개의 요인으로 점철되어 있다. 하나는 먹거리를 구하는 경제적 욕망이요, 다른 하나는 여가 시간에 몸과 생활도구들을 아름답게 장식하려는 미적 욕망이다. 그 두 욕망은 자연적이고 자발적인 것 같다. 인간은 동물이므로 먹어야 산다. 그래서 경제적 욕망은 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