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냄이란 무엇인가. 노여워하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마음에 들지 않은 대상과의 접촉에서 발생한다. 안팎의 거슬리는 현상들에 지속적으로 노출되는 가운데 미움과 노여움의 마음이 싹튼다. 거슬리는 현상에 대해 사라져 주었으면 하는 바람이 강할수록 그것의 지속에서 오는 내면의 동요는 더욱 크다. 그리하여 더 이상 참기 힘든 상황에 이르러 폭발적으로 표출되는 감정이 곧 성냄이다. “저리 가! 지긋지긋해! 더 이상 견딜 수 없단 말이야!” 이러한 방식으로 성냄은 내면의 평온을 무너뜨리고 자신을 비롯한 주변의 사람들에게 상처를 남긴다. 성냄은 빨리어(Pāli)로 도사(dosa)라고 하며 ‘미워하다’라는 뜻으로부터 유래하였다. 한편 이것과 동의어로 빠띠그하(paṭigha)라는 단어도 사용되는데, 이것
탐냄이란 무엇인가. 무언가를 가지거나 차지하려는 마음을 말한다. 이것은 즐겁거나 매혹적인 대상과의 접촉에서 발생한다. 우리는 주변의 끌리는 현상들을 마주하면서 자신도 모르게 탐냄에 물든다. 실제로 탐냄의 원어는 빨리어(Pāli)로 라가(rāga)인데 이것은 ‘물들다’라는 뜻으로부터 유래하였다. 한편 라가와 동의어인 로바(lobha)는 그렇게 해서 ‘몹시 탐내는 상태’를 가리킨다. 탐냄이란 마치 끈끈이처럼 좋아하는 대상에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으려는 심리이다. 탐냄은 성냄(dosa) 및 어리석음(moha)과 더불어 깨달음의 장애를 이루는 근본 번뇌가 된다. 바로 이들에 얽매이는 까닭에 우리는 스스로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고 끝없는 윤회의 바퀴 안을 맴돌게 된다. 탐냄과 성냄과 어리석음은 내면
출세간(lokuttara)이란 무엇인가. 일체의 세간적(lokiya) 존재 양태를 벗어난 경지를 가리킨다. 범부 중생들은 탐냄과 성냄과 어리석음에 갇혀 자신들만의 특정한 존재 방식을 벗어나지 못한다. 지옥·아귀·축생·수라·인간·천상계 등이 그것이다. 육도윤회(六道輪廻)란 이러한 6가지 굴레에 얽매여 맴도는 것을 말한다. 지옥계에 속한 이들은 분노와 공포에 붙잡힌 채 스스로의 존재를 유지하며, 천상계에 속한 이들은 도끼자루 썩는 줄 모르는 심미적 쾌락에 심취하여 자신을 보존해 나간다. 출세간이란 그러한 일체의 상태로부터 벗어난 열반(nibbāna)을 의미한다. 초기불교에 따르면 세계의 발생과 유지에는 ‘나’라는 관념이 전제된다. 육신(色)·느낌(受)·지각(想)·지음(行)·의식(識) 따위의 경험적 요인
세계(世界, loka)는 어떻게 구성되는가. 세간(世間)으로도 옮겨지는 이것은 우리 자신의 마음을 반영하여 여러 차원으로 나뉘어 설명된다. 우리가 마주하는 세계란 우리에게 해석된 결과로서의 세계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세계란 우리 자신의 정신적인 역량과 밀접한 상관관계에 놓이게 된다. 그렇다고 세계란 단순히 환상이나 허구가 아니다. 우리는 스스로의 의지와 무관하게 이 세계에 태어나 살아가고 있다. 인간은 오랜 세월에 걸쳐 세계에 대한 이해와 견해를 성숙시켜 왔으며 또한 그 속에서 각자의 삶을 유지하고 있다. 초기불교의 세계관은 고대 인도의 그것을 계승한다. 전통적인 분류에 따르면 세계는 욕망에 지배되는 세계(欲界), 순수한 물질현상의 세계(色界), 물질현상을 벗어난 세계(無色界) 등으로 구성된다. 욕망에
마음(citta)은 무엇이고 세계(loka)란 무엇인가. 또한 이들의 관계는 어떠한가. 일반적으로 마음이란 대상(ārammaṇa)에 반응하여 일으키는 내면의 인식과 정서를 가리킨다. 그리고 세계란 우리가 살아가는 환경 혹은 주변의 현상을 망라하여 일컫는 명칭이다. 서구적 사고에 친숙한 현대인은 이들을 이분법적으로 나누어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리하여 마음과 세계가 별개로 존재한다고 믿는다. 외부의 물리적 세계는 마음과 무관하게 실재하며, 바로 그것에 반응하여 내면의 마음이 발생한다는 것이 상식화된 사고이다. 그런데 초기불교에서는 이러한 사고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다. 과연 우리에게 경험되는 세계는 ‘있는 그대로’의 실재를 의미하는가. 마음과 세계의 본질은 무엇이며, 이들을 따로 구분해서
견해(diṭṭhi)는 어떻게 발생하는가. 그것은 왜 필요하며 또한 그 위험성은 무엇인가. 우리 인간은 동물들과 달리 견해를 지닌다. 험난한 인생의 여정에서 견해를 바로 세우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바른 견해는 우리로 하여금 나아가야 할 목적지를 분명히 해준다. 만약 옳고 그름에 대한 분명한 견해가 없다면 동물적 본능만으로 살아가게 될 것이다. 따라서 바른 견해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을 것이다. 인간이 인간다울 수 있는 이유는 스스로를 다잡는 올바른 견해에 있을 것이다. 그러나 견해의 위험성 또한 간과할 수 없다. 인간은 본능이 요구하는 이상의 행위들에 전념하곤 한다. 단순히 먹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신념과 가치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치기도 한다. 그런데 문제는
무아(無我)란 무엇인가. ‘나’를 구성하는 육신(色)·느낌(受)·지각(想)·지음(行)·의식(識)의 5가지 경험적 요인들, 즉 오온(五蘊)이 ‘나’가 아니라는 의미이다. 또한 이들 모두가 ‘나의 것’도 아니고 ‘나의 자아’도 아니라는 뜻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다섯 요인을 우리 자신으로 여기며 살아간다. 그리하여 갖가지 충동과 이미지 따위에 일희일비의 시간들을 탕진한다. 분노가 일었을 땐 분노와 하나가 되고 탐욕이 일었을 땐 탐욕 자체와 하나가 된다. 스스로의 이미지를 생명처럼 간주하고서, 그것의 손상에서 오는 괴로움에 대해서는 죽음보다 더한 고통을 느끼곤 한다. 물론 자신의 육신이나 느낌 혹은 지각이나 이미지 따위는 잘 다스려 나가야 한다. 그래야만 성공적인 삶을 살아간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들은
괴로움(苦)이란 무엇인가. 우리의 존재 자체가 괴로움이라는 의미이다. ‘나’ 자신을 구성하는 육신(色)괴로움에 대한 가르침느낌(受)·지각(想)·지음(行)·의식(識)의 5가지 경험적 요인들, 즉 오온(五蘊)이 그렇다는 것이다. 흔히 우리는 이러한 다섯 요인을 자기 자신으로 여기며 살아간다. 나의 몸, 나의 느낌, 나의 이미지, 나의 충동, 나의 인식이라는 방식으로 스스로의 정체성을 확립한다. 그러나 이들은 원해서 생겨난 것이 아니며, 또한 맘대로 사라지거나 없어지는 것도 아니다. 우리는 이러한 모든 것들에 대해 지극히 무력하기만 하다. 삼법인(三法印)의 두 번째 진리에 해당하는 괴로움이란 바로 이것을 두고 하는 말이다. 우리는 스스로 선택해서 태어난 것이 아니며, 또한 원해서 병에 들거나 죽어가는 것도 아니
무상(無常)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항상하지 않는다”는 의미로, 모든 것이 변화의 여정에 놓여 있다는 사실을 나타낸다. 우리는 나날이 변해가며 또한 새롭게 태어나고 죽어간다.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는 다르다. 현재의 ‘나’가 10년 후 혹은 100년 후까지 지속되지는 않는다. 불교에서는 바로 이 변화한다는 사실만큼은 고정불변의 진리로 여긴다. 따라서 진리의 인장 즉 법인(法印)이라는 표현으로써 이것을 분명히 한다. 무상의 진리는 삼법인(三法印)의 가르침 가운데 최초의 것에 속한다. 초기불교는 이와 같이 단순하면서도 자명한 진리에 근거한다. 무상의 진리는 결코 난해한 것이 아니다. 사실 변화한다는 것 자체를 이해하지 못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불교는 철학(哲學)인가. 많은 연구자들이 불교에 대해 철학적으로 접근하는 경향이 있다. 물론 불교가 철학의 일종으로 해석될 여지는 많다. 붓다는 어느 종교가보다 철학적으로 뛰어난 면모를 보였고, 당시 유행했던 사상적 경향들을 두루 섭렵하였다. 또한 그의 가르침은 합리적 사고의 토대 위에서 제시되었고, 경험세계에 대한 분석과 해명에 초점을 모으고 있다. 그러나 붓다의 가르침은 결코 철학적 측면에 한정될 수 없다. 그는 일방적인 사변적 견해의 추구가 바른 깨달음을 얻는 데에 오히려 방해가 될 수 있다고 가르쳤다. 주지하듯이 철학이란 그리스어 필로소피아(philosophia)에서 유래한다. 이 말은 사랑(philoso)과 지혜(sophia)의 합성어로서, 온전히 번역하자면 ‘지혜에 대한 사랑’이 된다. 철학이란
요가(yoga)란 무엇인가. 고대 인도로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수행 전통을 가리키는 말이다. 불교 또한 넓게 보아 요가적 흐름의 한 갈래로 귀속시킬 수 있다. 흔히 대승불교의 유식학파(唯識學派)를 일컬어 유가행파(瑜伽行派, yogācāra)라고도 부른다. 이것을 그대로 번역하면 ‘요가의 실천’이 된다. 이러한 용례는 요가라는 명칭이 종교라든가 학파의 구분을 넘어 일반적으로 통용되었음을 의미한다. 몸과 마음을 잘 다스려 이상적인 삶을 살고자 하는 모든 실천적 모색들을 요가의 범위 안에 포함시킬 수 있다. 요가는 5000년 전부터 행해져 왔던 듯하다. 예컨대 그 무렵의 인더스 문명 유물 가운데에 요가 포즈를 취한 신상(神像)이 발견되었다. 이것은 그때부터 요가가 행해졌음을 시사한다. 한편 요가
초기불교에서는 업을 어떻게 보았는가. 인도철학사에 등장했던 다른 종교적 가르침들과 마찬가지로 초기불교 또한 업과 윤회를 인정했다. 사실 업과 윤회는 붓다의 가르침에서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한다고 할 수 있다. 업이란 몸과 말과 마음으로 짓는 행위를 일컫는 것으로, 바로 이것이 미래의 삶에 대해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고 여겨졌다. 이와 관련하여 붓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모든 중생은 업의 상속자이며, 업을 모태로 삼아 태어나며, 또한 업을 의지처로 삼는다.” 이렇듯 업은 우리 자신의 정체성을 이루는 주요 요인이 된다고 할 수 있다. 초기불교에서 업과 윤회는 괴로움에 노출된 현실의 세계를 대변하는 두 용어이다. 한편 해탈과 열반이란 업과 윤회를 벗어난 경지에 다름이 아니다. 초기불교의 가르침은 업과 윤회에
자이나교에서는 업을 어떻게 보는가. 자이나교는 초기불교와 비슷한 시기에 등장했던 개혁적 종교이다. 초기불교와 유사한 가르침을 펼쳤으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인도에서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자이나교는 초기불교와 함께 바라문교의 권위주의에 맞섰던 것으로도 유명하다. 자이나교는 업을 미세한 물질입자의 일종으로 이해했다. 인간이 행한 모든 행위는 미세한 물질입자의 형태로 남아 미래의 삶에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금욕과 고행을 통해 업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고 가르쳤다. 자이나교에서는 모든 존재가 순수·청정한 영혼(j-I va)을 지닌다고 보았다. 그들에 따르면 영혼이란 전지(全知)하며 과거·현재·미래에 대해 막힘없는 앎을 지닌다. 영혼은 스스로 지닌 완전한 능력으로 감관이라든가 추
제식주의에서는 업을 어떻게 보는가. 초기불교가 출현하기 이전 고대 인도사회를 지배했던 바라문교에서는 제사의 실천을 매우 중요시하였다. 바라문교에서는 격식에 따라 잘 치른 제사는 반드시 거기에 상응하는 합당한 결과를 가져온다고 가르쳤다. 제사는 인간의 소망을 이루어주는 효력을 지닌 것으로 믿어졌다. 세습적인 제관이었던 바라문교의 사제들은 엄격한 절차의 제사의례를 주관하였다. 그들은 제사의 집행을 통해 인간의 길흉화복을 조절할 수 있는 존재로 여겨졌다. 제사는 원래 신에 대한 공경과 숭배에서 기원하였다. 신의 은총을 통해 소원을 성취하려는 의도가 제사라는 형식으로 구체화된 것이다. 제사 관념이 정교해지기 이전에 신봉되었던 신들은 제사의 형식에 묶인 존재가 결코 아니었다. 신은 스스로의 의지로 인간에게 자비와
업(業, karma)이란 무엇인가. 문자 그대로 옮기자면 행위(action)·일(work) 등이 된다. 인도철학 일반에서 업이란 “특정한 행위 혹은 결심으로 인해 발생하는 응보적 힘”으로 정의된다. 예컨대 과거의 행위라든가 결심 따위가 현재 혹은 미래의 삶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 경우를 일컬어 업 혹은 업보(業報)라고 한다. 이러한 업 개념은 우리에게 이미 친숙하다.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는 말이 거기에 해당한다. 업 개념은 비단 불교에서만이 아니라, 인도에서 출현한 거의 모든 종교적·철학적 가르침에서 중심적인 지위를 차지한다고 할 수 있다. 업은 살아가면서 경험하는 여러 현상에 대해 원인과 결과를 생각하게 해준다. 어떠한 일이 발생하는 데에는 반드시 원인이 있기 마련이며, 또한 현
불교는 무신론(無神論)인가. 흔히 불교를 일컬어 무신론적 색채가 강하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붓다는 신에 대해 어떻게 말했는가. 과연 그는 신을 완전히 부정했는가. 초기불교 경전에는 무시할 수 없는 빈도로 신들에 관한 이야기가 자주 등장한다. 깨달음 직후 붓다에게 설법을 간청했던 이도, 초전법륜을 찬탄하면서 진리의 등불이 영원히 꺼지지 않을 것이라고 노래했던 이들도 신적 존재들이다. 초기불교 경전에서 신에 대한 묘사는 결코 적지 않은 비중을 차지한다. 초기불교의 전반적인 색채는 경험세계에 초점을 모은다. 따라서 현실과 초현실을 넘나드는 신들의 이야기는 붓다의 가르침에서 주된 지위를 차지한다고 볼 수 없다. 일부의 학자들은 그러한 신적 존재를 내면의 심리현상에 대한 은유로 해석한다. 마음속의 바람이나 희망 따
힌두교란 어떤 종교인가. 흔히 인도(India, Hindu)에 뿌리를 둔 다양한 신앙 형태의 복합체로 설명한다. 불교 또한 인도에서 출현하였다. 따라서 넓은 의미로 불교를 힌두교에 포함시키는 경우가 있다. 실제로 일부 힌두교 추종자들은 붓다를 힌두교의 최고신인 비슈누(Viṣṇu)의 화신(化身)으로 믿는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자면 힌두교의 범위는 고대 바라문의 경전인 ‘베다’의 권위를 인정하고 그 가르침에 따르고자 하는 종교적 신념들에 한정된다. 따라서 불교라든가 자이나교와 같이 ‘베다’와 다른 독자적인 실천의 길을 모색해 온 종교들은 인도에서 발생했지만 힌두교에 포함시키지 않는다. 힌두교는 고대 바라문교와 구분되는 몇 가지 특징을 지닌다. 힌두교가 바라문교에서 유래했고 또한 ‘베다
단멸론(斷滅論)이란 무엇인가. 인간을 포함한 모든 존재는 반드시 소멸하여 없어진다는 주장을 가리킨다. 특히 초기불교에서 문제시하는 단멸론은 죽음 이후의 삶을 부정하고서 업에 의한 지음과 받음을 인정하지 않는 경우를 지칭한다. 이러한 주장은 무아(無我)의 가르침과 혼동을 일으켜 불교적 가르침으로 오인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붓다는 죽고 난 이후의 삶 혹은 내세를 부정하지 않았다. 그는 착한 행위를 하면 천상에 태어나고 악한 행위를 하면 지옥에 태어난다고 가르쳤다. 어떠한 경우라도 죽고 나면 그대로 소멸하여 없어지고 만다는 방식의 가르침을 펼치지는 않았다. 일부 학자들은 초기불교가 무아를 가르쳤다는 사실을 강조하면서 단멸론과 흡사한 방식으로 이를 설명한다. 그들에 따르면 무아란 말 그대로 자아가 존재하지 않
불교는 숙명론인가. 불교에 대한 초보적인 오해 중의 하나가 숙명론이 아닐까 싶다. “뿌린 대로 거둔다”, “전생의 업보다”, “팔자는 못 속인다”는 따위의 말들이 이러한 오해를 부추긴다. 그러나 불교는 숙명론과 근본적으로 다르며, 오히려 숙명의 굴레를 벗어나는 데에 주력한다. 불교의 궁극 목적인 해탈과 열반은 바로 그것을 벗어날 때 얻어지는 절대적인 자유의 경지이다. 따라서 숙명론은 초기불교 이래로 극복의 대상이 되어 왔다는 점에 유념할 필요가 있다. 다만 앞서의 속담들은 더 나은 삶을 개척하기 위해 주변의 환경이라든가 태생에 따른 성향 등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는 취지로 이해해야 한다. 인도철학의 무대에서 숙명론을 표방했던 대표적인 학파로 아지비까(ājīvika) 혹은 사명외도(邪命外
쾌락주의란 무엇인가. 쾌락을 인간 행위의 궁극 목적이자 도덕의 기준으로 삼는 사상적 경향을 가리킨다. 불교가 출현할 당시 일부 사상가들은 잘 먹고 잘 노는 것만이 인생의 유일한 목적이라고 주장했다. 짜르와까(Cārvāka) 혹은 로까야따(Lokāyata) 등으로 일컬어지는 그들은 현상계 너머 혹은 죽음 이후의 세계를 부정하고서 감각적 경험만을 앎의 유일한 원천으로 인정하였다. 그들에 따르면 죽고 이후 다른 더 좋은 세상에 태어날 목적으로 현재의 쾌락을 포기하는 것은 지극히 어리석은 짓이다. 신이라든가, 영혼, 천국과 지옥 따위는 바라문교의 사제들이 대중들을 현혹하기 위해 고안해 낸 거짓에 불과하다. 쾌락주의에서는 경험에 근거하지 않은 지식은 허구로서 거부되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