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살아가는데 있어선한 벗은 더 없이 중요악함 가까이 하려거든차라리 홀로 나아가야 사람이 살아가는 데 무엇이 가장 중요할까. 이 질문에는 사람마다 답하는 것이 다를 수 있다. 그리고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느냐에 따라서도 다를 수 있다. 만약 생존을 가장 최고의 가치로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당연히 생존과 관련된 의식주를 꼽을 것이다. 부나 명예, 권력을 말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럼 부처님은 어떠하셨을까. 부처님은 생존은 동물에게도 중요하다고 말씀하신다. 그렇기에 그것이 중요한 것이기는 하지만, 인간이 살아가는데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는 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경전을 읽다보면, 부처님은 사람들 사이의 관계, 사람과 자연과의 관계에 관심이 많았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좋은 벗, 그리고 좋은 스
안팎 구분하는 문은6개 감각기간과 같아 ‘알아차림’이 없다면각종 유혹에 마음 뺏겨 우리가 바깥에서 건물 안으로 들어갈 때, 반드시 통과해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을 우리는 ‘문’이라고 한다. 그래서 ‘문’은 안과 밖을 구분하는 하나의 상징이기도 하다. 문이 없으면 안과 밖은 구분되지 않는다. 인간에게는 물론 다른 생명체에게도 적용되지만, 여섯 가지 감각기관이 있다고 말해진다. 이를 부처님께서는 육근(六根)이라고 하셨다. 그런데 이 육근을 문에 비유하여, 육문(六門)이라고도 한다. 말 그대로 여섯 가지 문이란 의미이다. 우리는 이 여섯 가지 문을 통해 외부대상과 접촉하고, 그 내용을 파악하게 되는 것이다. 이 문이 없으면 외부대상을 파악할 수 없게 된다. 말하자면, 이 여섯 가지 문은 인식의 수단, 방법인
시냇물 가두면 썩어죽음은 자연의 이치현대 생명의학 발전인간의 욕망 부추겨 시냇물은 흘러가는 것이 자연의 이치이며, 올바른 것이다. 시냇물이 흘러가지 못하면 그것은 자연을 거스르는 것이며, 바르지 못한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시냇물을 가두어 두려고 한다. 이른바 치수(治水)라고 하는 명목 하에 말이다. 물이 흘러가는 곳이 물길이 되는 것이며, 그것이 강이 되는 것이다. 그런 물의 흐름을 막게 되면 거기에는 반드시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치러야 한다. 한역 경전 중에 ‘중본기경’이란 경전이 있다. 이 경전의 ‘자애품’에 ‘시냇물’이란 표현이 나오는데, 사람의 죽음을 비유하는데 사용된다. 내용은 이러하다. 코살라국의 국왕인 파세나디왕이 부처님을 찾아뵈었는데, 그 얼굴이 매우 야위었다. 이에 그
이미 꽉 차 있는 바위다른 것들 수용 못해‘나’라는 관념도 같아‘자아’는 집착의 포장 ‘절벽을 타고 떨어진 물줄기가 하얗게 포말(泡沫)을 일으키고’, 혹은 ‘하얗게 부서지는 파도의 포말’과 같은 표현은 꽤나 시적이다. 포말은 사전적 정의를 보면, 물이 무엇인가에 부딪혀 생겨나는 거품을 의미한다. 유사한 표현으로 물방울이란 단어가 있다. 불교 경전에서 이 포말은 자주 사용되는 비유가운데 하나이다. ‘상윳따 니까야’에 '포말의 비유 경(Pheṇapiṇḍūpamasutta)’이 있다. 말 그대로 부처님께서 포말의 비유를 통해 가르침을 주신 경전이다. 내용은 이러하다. “비구들이여, 예를 들어 갠지스 강이 커다란 포말을 일으키는데, 눈 있는 자가 그것에 대
기쁨 주는 대상 잃으면상실감에 젖어 눈물 나사랑보다는 집착의 산물집착서 ‘떠남’이 참 출가 사람의 감정 변화를 알 수 있는 가장 빠른 징조는 아마도 ‘눈물’일 것이다. 누군가가 울면 그 사람이 어떤 주체할 수 없는 감정에 젖어 있다는 것을 금방 알아차리게 된다. 눈물은 슬퍼서만 나오는 것이 아니라, 공허함, 분노, 절망 등의 다양한 감정에서도 비롯된다. 그리고 환희의 순간에도 눈물을 흘린다. 그렇지만 눈물의 대표는 슬픔, 상실과 같은 감정일 것이다. 이러한 감정 외에도 눈에 질환이 있다거나 세찬 바람에 오랜 시간 노출되어 있다거나 할 때에도 눈물이 난다. 이 가운데 슬픔과 관련된 눈물에 대해서 이야기 해보자. 우리는 살면서 매우 다양한 상황에서 슬픔을 느낀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 재산의 상실, 질병
시체 태우다 남은 장작아무 짝에도 쓸모 없어출가 뒤 세속 삶 바라면누구도 반기지 않게 돼 이 세상 사람들 가운데 현재 자신의 일에 만족하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내가 이 일을 하지 않고, 다른 일을 했으면 어떻게 되었을까?’하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까? 아마도 적지는 않을 것이다. 하나의 예를 들어보자. 공대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대학 교수가 자신의 일에 회의를 느끼면서, ‘빵을 만드는 제빵사가 되었으면 훨씬 행복했을 터인데’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고 하자. 그 교수는 아마도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거나 연구하는 것이 즐겁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늘 제빵사가 된 자신의 모습을 상상하게 될 것이다. 그런데 그런 그가 결단을 내려 제빵사가 되었다. 하지만 생각처럼 빵을 만드는 것이 잘 되지 않고, 가르쳐주
삼보 향한 청정한 믿음깨달음으로 인도하는노잣돈이자 보증수표 재물, 죽으면 무용지물 우리나라에서는 예부터 죽은 이에게 주는 돈이 있다. 그것을 지전(紙錢)이라고 하고, 저승길에 사용할 노잣돈이라고도 한다. 신라시대 제망매가(祭亡妹歌)란 향가에서는 월명사 스님이 죽은 누이의 제를 올리며 향가를 읊으니 홀연 바람이 불어 지전이 서쪽으로 사라졌다는 이야기에서 지전이 등장한다. 이 외에도 죽은 이의 무덤 속에 온갖 금은보화를 넣는 풍습 역시 망자를 위한 ‘노잣돈’의 의미가 담겨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사고방식은 고대 인도인들, 특히 불을 숭배하는 종교인 조로아스터교를 믿었던 중앙아시아의 쿠샨인들도 갖고 있었다. 그들은 죽은 이의 입에 저승에 가져 갈 노잣돈을 넣어 주었다고 한다. 그리고
쾌락·고정 관념의 물살저항하기 어려운 현실휩쓸리면 집착에 침몰벗어나는 지혜 갖춰야 올해는 근래에 보기 드물게 긴 장마가 이어지고 있다. 그리고 장마도 예전과 많이 달라져, 국지성 폭우의 패턴을 보인다. 그러다 보니 뉴스를 통해 안타까운 소식을 접하기도 한다. 계곡으로 놀러 갔다가 갑자기 내린 폭우로 인해 목숨을 잃거나, 오도 가도 못하고 갇혀 있다가 구출되는 경우도 있다. 무사히 구출되는 것은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나, 그 두려움과 공포에 떨었을 것을 생각하면 그 또한 안타깝다. 이런 경우 ‘비가 내려 봤자 얼마나 되겠어?’라고 하는 안일한 생각이 원인이 된다. 급작스럽게 불어난 물은 모든 것을 휩쓸고 내려간다. 저항한다고 해도 휘말려 들어가는 것을 막을 수는 없다. 일이 이렇게 되면 후회
황금은 무한 탐욕 상징못쓸만큼 있어도 갈구지나침은 화를 자초해만족하는 지혜 갖춰야 얼마 전까지 전 세계의 금값이 치솟아, 금테크 열풍이 분 적이 있다. 한동안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던 금값이 안정을 되찾은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다시 금값이 요동치는 것 같다. 국제 금값이 반등했지만 투자는 시기상조라는 분석기사가 신문에 실리기도 했다. 여하튼 예부터 금은 부의 지표였다. 그래서인지 동서양의 고대 왕국에서는 금화를 주조하여 유통하기도 했다. 금은 불변의 가치를 지닌 것으로 고금을 막론하고 많은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아오고 있다. 다이아몬드나 에메랄드와 같은 보석도 사람들의 이목을 끌지만 여러 측면에서 금이 더 좋은 것 같다. 금은 그 독특한 성질로 인해 다양한 최신 전자제품에 반드시
폭력·분노·욕망 등은우리들의 삶 속박하는마음속 똬리 튼 올가미온 힘 다해 벗어던져야 ‘상윳따 니까야’ 제1권에는 ‘마라 상윳따’라고 하는 품이 있다. 이 품에는 말 그대로 악마인 마라(Māra)와 부처님 혹은 부처님 제자와의 문답을 기록하고 있다. 그 내용을 보면 악마 마라는 끝없이 부처님께 대항하고, 제자들을 유혹한다. 하지만 악마는 곧 그 정체가 탄로 나면, “‘세존께서는 나에 대해 알고 계신다. 선사께서는 나에 대해 알고 계신다’라고 괴로워하고, 슬퍼하면서 그곳에서 사라졌다”라는 정형구로 끝난다. 참 흥미로운 표현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기독교에서 말하는 악마(사탄)와 불교의 악마(마라)는 결정적으로 다른 것 같다. 그리고 결론에서 악마 마라가 낙담하며 슬퍼하는 모습에서 불교적 악마는 결국
재산은 죽으면 사라져인색함과 자만이라는번뇌로 불붙은 마음서탈출해 보시공덕 쌓아야 ‘법화경’에 ‘불난 집’이란 아주 유명한 비유가 있다. 불난 집에서 놀고 있는 아이들을 구하기 위해 아버지인 장자가 아이들이 좋아하는 수레를 주겠다는 말로 위험에서 구한다는 내용이다. 그리고 불난 집이란 바로 우리가 사는 욕망의 세계를 말한다. 하지만 이번에 소개할 비유인 ‘불난 집’은 ‘법화경’의 비유와는 다르다. 이 비유는 Saṃyutta Nikāya 1권에 나오는 비유이다. 그 내용은 보시의 공덕에 대한 것이다. 이 비유는 어떤 천신(devatā)이 부처님 앞에서 읊은 것인데, 그 내용의 일부는 다음과 같다. “집에 불이 났을 때, 가구를 꺼내어 태우지 않는 것, 그것이 이로
연잎은 물에 젖지 않아마음에 고여 있는 갈애잡지말고 떨칠 수 있게바른 지혜·용기 갖춰야 불교의 목적은 분명하다. 그것은 고통스러운 현실을 극복하여 안락함을 얻는 것이다. 그 안락함을 열반이라고도 하고, 해탈이라고도 한다. 그렇다고 해서 해탈이 흔히 말하는 일시적인 행복감이나 편안함을 말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궁극적으로 다시는 고통에 빠져 괴로움을 당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부처님의 가르침은 고통에 대한 명확한 ‘자각’을 전제로 한다. 이 세상이 고통스럽지 않은데 누가 수행을 하겠는가. 수행을 하거나 어떤 종교에 귀의를 하는 것은 이 세상이 고통스럽고 안전하지 않아 불안하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불교만큼 현실에 대한 냉혹한 관찰을 요구하는 종교도 드물 것이다. “이 세상이 고통으로 가득
계행 나쁘고 절제 없다면쇳덩이 삼키는 것과 같아정치인들 특히 유념해스스로 욕망 경계해야 ‘담마빠다’에는 요즘 세태와 관련하여 생각해 볼 많은 이야기가 담겨 있다. 불교의 수행자는 어떠해야 하는지, 재가 신자는 어떠해야 하는지는 물론, 통치자나 사회 지도층은 어떠해야 하는지와 같은 내용도 심심치 않게 보게 된다. 이번에 살펴 볼 비유는 ‘쇳덩이’이다. 그런데 그냥 쇳덩이가 아니라 뜨거운 화염과 같은 쇳덩이이다. ‘불에 시뻘겋게 달구어진 쇳덩이를 먹는 것이 차라리 낫다’는 이야기이다. 생각해 보면, 사람은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이다. 미약하기 그지없다. 하지만 뛰어난 지능을 소유하고, 협력할 수 있는 힘으로 지구상에서 가장 힘센 존재가 되었다. 아무리 지능이 뛰어나더라도 협력을
게으름은 달 가린 구름방일 않는 정진 수행자정각 뒤엔 구름 벗어나마음은 달처럼 빛날 것 2010년도에 개봉한 영화 가운데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이란 영화가 있다. 임진왜란을 배경으로 한 영화이다. 내용은 둘째 치고 이 영화 제목을 보는 순간, ‘법구경’의 말씀이 떠올랐다. 이 구절의 키워드는 ‘구름’과 ‘달’이다. 말하는 사람의 의도에 따라 구름과 달이 의미하는 바는 달라질 수 있다. 영화에서의 구름은 아마도 당시의 왕과 통치계급이 아니었을까. 부처님은 구름을 방일, 즉 게으름에 비유하셨다. 이 비유가 나오는 시의 전문은 이렇다. “어떤 이가 과거에는 방일했지만 나중에 방일하지 않는 자가 있으면, 그는 구름을 벗어난 달처럼 이 세상을 비춘다.” 상상해 보자. 달마저 구름에 가려 있는 어두운 밤이다.
갈애·자만 부모와 같아 내 존재의 원동력이지만 번뇌·윤회 원인이기도 끊어내야 해탈에 이르러 당나라의 선승 임제 의현 스님이 어느 날 법상에 올라 “살불살조(殺佛殺祖) 살부살모(殺父殺母)”라는 법문을 했다. 즉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이고, 부모를 만나면 부모를 죽인다”는 의미이다. 이게 무슨 소리인가? 임제 스님의 이 법문은 사실 ‘담마빠다(법구경)’에 나오는 이야기를 그 근원으로 한다. ‘담마빠다’에 “어머니와 아버지, 그리고 두 명의 크샤뜨리야 출신 왕들을 죽이고 나서, 왕국과 신하를 없애고 나서, 바라문은 두려움 없이 간다”라는 시가 있다. 이 시는 한역 ‘출요경’ 쌍요품에도 나온다. ‘출요경’은 ‘법구경’을 비롯한 여러
숲에서 서늘해진 등골은해로운 일 두려워하는 탓스스로 모든 번뇌 제거해 숲조차 없는 상태 되어야 우리가 밤길을 걷다 보면 익숙한 곳이라고 해도 왠지 모를 두려움이 생긴다. 그것은 어둠이라는 장막 뒤에서 무엇이 갑자기 나와 나를 위협할지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다. 훤히 잘 보이는 낮에는 어떤 두려움도 없던 것이 밤이 되면 저절로 두려움이 생겨나는 것은 아마도 어둠 속에 감추어진 그 무엇이 있다고 보기 때문일 것이다. 한편 드넓은 들판에 있을 때는 확 트인 시원함이 나를 감싸지만, 울창한 숲에 들어가면 시원함이 아닌 두려움에 등골이 서늘해지는 경험을 한다. 더구나 그 길을 혼자 가고 있다고 생각해 보라. 온갖 사나운 동물이나 못된 도적이 어디에서 뛰쳐나올지 모를 일이다. 조그마한 소리만 나도 두리번거리게 된다
쇠로부터 생긴 녹을방치하면 쇠를 녹여악업을 가만 놔두면자신 망치는 지름길 얼마 전 모 방송국 프로그램에 배우 한석규씨가 나온 적이 있었다. 그 때 ‘법구경’의 말씀 가운데 인상 깊은 말씀이 있었다며 ‘쇠로부터 생겨난 녹은 자신에게서 생겨나 자신을 삼킨다’라는 경구를 소개하였다. 이 때 출연자들이 이야기를 나눈 것은 다소 ‘법구경’에서 전달하고자 하는 것과는 맥락이 달랐지만, 많은 생각을 하게 하였다. 이번에 소개하고자 하는 비유는 바로 ‘쇠’와 ‘녹’이다. ‘담마빠다’의 원문을 직역하면, “마치 쇠로부터 생겨난 녹이, 그것(녹)이 생기고 난 뒤, (오히려) 쇠를 삼키듯이”가 된다. 그 뒤에 오는 말씀은 ‘자신이 지은 악업이 자신을 나쁜 곳으로 이끈다’라는 것이다. 쇠붙이에 녹이 생겨난 것을 그대로 방
누렇게 바싹 마르고생기 없는 호리병박영원하지 않은 ‘젊음’집착하면 여유 잃어 지하철이나 버스와 같은 대중교통을 이용하다 보면, ‘노약자석’이란 자리가 마련되어 있다. 이곳은 연세 드신 어르신들이나, 어린아이 혹은 임산부를 위해 마련된 자리이다. 요즘은 연세든 노인분들께서 앞에 서 계셔도 자리를 양보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그러다 보니, ‘양보하는 미덕’을 강조하는 ‘포스터’가 유난히 눈에 많이 띈다. ‘~합시다’라는 계몽구의 포스터가 눈에 많이 띈다는 것은 우리들이 상식적으로 지켜야 하는 사회적 규칙이 잘 지켜지지 않고 있음을 반증하는 것은 아닐까? 70~80년대만 해도, 자리 양보하자는 포스터는 없었다. 어르신들이 타시면 자리를 양보하는 것이 당연했기 때문에 굳이 ‘자리를 양보해 주세요’라
채찍 맞을까 두려운 소는고통 피하려 목장에 몰려폭력이란 잔인함 깨달아타인에 상처주지 말아야 요즘 우리 사회는 각종 폭력으로 몸살을 앓고 있다. 비단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세계가 폭력에 괴로워하고 있다. 폭력은 작게는 가정폭력에서 사회적으로 학교폭력, 직장내 폭력, 성폭력, 조직폭력 등이 있고, 크게는 테러와 국가간 폭력(전쟁)까지 다양하다. 폭력은 어떠한 형태이든 생명을 해치는 행위이다. 그렇기에 모든 성인은 폭력에 대해 반대한다. 폭력에 반대하는 것을 비폭력이라고 하고, 비폭력의 적극적 실천을 자비라고 할 수 있다. 근대 세계사에서 비폭력하면, 마하트마 간디를 떠올리게 된다. 그는 영국의 식민지로부터 조국 인도를 해방시키는데, 무력적 폭력이 아닌 비폭력 저항 운동을 펼쳤던 인물이다. 그가 비폭력 저항운동
낙숫물이 바윗돌 뚫듯삶 속에 시나브로 쌓인사소한 생각·말·행동이선업과 악업 등 만들어 부처님의 제자 중 아누룻다(아나율) 존자라는 분이 계신다. 이 분은 어느 날 부처님의 설법 시간에 깜빡 졸다가, 부처님에게 질책을 받게 된다. 이 일을 계기로 아누룻다 존자는 스스로를 크게 경책하며, 잠을 자지 않고 용맹정진하게 된다. 그러한 아누룻다 존자를 본 부처님께서는 제자의 건강을 걱정하며, 잠을 자며 수행할 것을 권한다. 하지만 존자는 부처님의 설법 시간에 졸았던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 하며 용맹정진을 거듭하였다. 결국 존자는 눈이 멀고 만다. 하지만 대신에 천안(天眼)을 얻게 된다. 그래서 이 분을 천안제일(天眼第一)이라고 하여, 부처님의 10대 제자로 칭송한다. 하루는 눈이 보이지 않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