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랫동안 비가 오지 않으면 우리는 ‘가뭄이 든다.’라고 한다. 계절을 불문하고 적당한 비는 반드시 내려 주어야 생태계가 조화를 유지할 수 있다. 너무 비가 안와도, 혹은 너무 많이 내려도 사실 생태계로서는 반가운 일이 아니다.가뭄이 오래 지속되면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명체는 생기를 잃어 간다. 그래서 인간들은 다양한 방책을 마련하고자 애쓴다. 인공 강우를 시도한다든가, 담수용 댐을 건설한다든가, 해수를 담수로 만들려고 하는 노력들이 그것이다. 그래도 비가 오지 않으면 그러한 노력은 결국 부질없는 일이 된다.베풀지 않음은 가뭄같고베풂
‘장자(莊子)라는 책에 대나무 열매와 관련된 내용이 나온다. 원추(鵷鶵)라는 새는 “오동나무가 아니면 머무르지 않고, 대나무의 열매(練實)가 아니면 먹지 않는다.”라는 내용에서 나온다. 원추라는 새는 전설상의 새로, 봉황으로도 해석된다. 이 새는 아무것이나 먹지 않고 대나무 열매를 먹는다는 것이다. 장자가 자신은 사사로운 욕망에 사로잡히지 않는다는 것을 표현하기 위해 이 이야기를 한 것이다.대나무 열매가 자라나대나무 자신을 죽이듯탐욕은 더 큰 탐욕 불러절제만이 지혜로운처신대나무 열매는 매우 희귀하여, 이것을
사람은 더러움을 싫어하고, 깨끗함을 좋아한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그러한 것은 아니다. 더러움을 더러움이라고 알지 못하는 사람은 더러움을 싫어하지 않는다. 오히려 더러움을 좋아하기까지 한다. 하지만 더러움을 더러움으로 알기만 하면, 다시는 더러움을 좋아하지 않게 된다. 더러운 것을 더럽다고 아는 것, 이것이 바로 지혜이다. 그래서 지혜는 나의 삶을 변화시키는 힘을 갖는다.외적인 면에 치중하면개인·사회 병들기 마련내면에 관심 기울이면진정으로 깨끗해질 것‘법구비유경’에 때에 대한 가르침이 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진리의 말씀을 배
‘인생은 나그네길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라는 노랫말이 있다. 우리 인생이란 한곳에 정착된 것이 아니란 의미일 것이다. 정착이란 어떤 곳에 주인으로 산다는 것이다. 하지만 인생을 길게 100년이라고 볼 때, 우리가 머물며 주인행세를 할 수 있는 시간 역시 100년에 한정된다. 그 제한된 시간이 지나면 원하지 않아도 우리는 어디로 가는지는 둘째 치고라도 이곳에서 떠나야 한다. 떠나고 싶지 않은데 떠나야 하기에 ‘나그네’인 셈이다. 그래서 사랑하는 사람은 물론 내가 평생 살던 곳에서도 이별해야 한다. 그렇게 보면 ‘내 집’, ‘내
집안에 향기로운 냄새가 가득하면 선한 천신이 찾아오고, 고약한 냄새가 진동하면 악한 신이 찾아온다는 말이 있다. 길을 지나가다 향긋한 냄새가 나면 기분도 상쾌해지고, 냄새나는 곳을 찾아보게 된다. 반대로 지독한 냄새가 나면 갑자기 짜증이 나고, 나도 모르게 고개를 돌려버린다.우리들이 청정한 스님들을 뵙고 설법을 듣고 공양하는 것은 그분들에게서 향긋한 삶의 냄새가 나기 때문이다. 그 향기가 많은 사람들을 불러 모으는 것이다. 오라고 하지 않아도 절로 모여든다. 이는 꽃향기를 따라 나비가 모이는 것과 같다.방탕 욕망 익히기 쉽고나쁜버릇
우리는 누구나 살아가면서 크던 작던 상처를 안고 산다. 때로는 누군가에서 상처를 주기도 하고, 받기도 한다. 그런데 대부분 상처를 주거나 받는 경우 나와는 전연 상관없는 사람과 관련된 경우는 드물다. 요즘이야 인터넷이 발달하여 정말 일면식도 없는 사람에게 상처를 받는 경우가 늘고 있긴 하지만. 그래도 마음속에 남는 커다란 상처는 가족이나 친구와 같이 나를 잘 알고 있는 사람, 혹은 내가 잘 아는 사람에게서 받고 주는 경우이다.또 다른 상처는 몸의 상처이다. 예기치 않은 사고로 인해 몸에 상처가 난 경우와 질병으로 인해 수술로 남은
오늘날 사회는 자본이 지배하는 사회, 즉 자본주의를 기반으로 운영된다. 여기에 사회주의적 요소를 가미하여 복지나 부의 사회적 재분배가 가능하게 하는 것이 대부분의 나라에서 채택하는 국가 운영 시스템이다. 이것을 수정자본주의라고 부른다. 하지만 오늘날의 세계시스템은 신자유주의라고 한다. 이에 대한 다양한 비판의 목소리가 높은 것은 시장원리에 모든 것을 맡기는 탓에, 빈익빈부익부가 심화되고, 전체적인 사람들의 삶의 질이 하락했다고 보기 때문이다. 여하튼 이러한 시스템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포인트는 ‘자본’이다.재물이 가치 우선되면자본
‘말 한마디가 비수가 되어 가슴에 꽂힌다’라는 표현이 있다. 말을 칼에 비유한 표현이다. 우리가 무심코 던지는 말이 상대방에게 커다란 상처가 될 수 있음을 표현한 것이다. 손에 든 칼보다, 때로는 마음에 품은 칼이 더 위험하고 잔인할 수 있다.부처님의 가르침 가운데 ‘신구의삼업(身口意三業)’이란 가르침이 있다. 신은 몸으로 하는 행동, 구는 말로 하는 모든 것, 의는 의도를 말한다. 이것이 세 가지 행위라는 것이다. 업(業)이란 카르마(karma)를 번역한 말인데, 카르마의 본래 의미는 ‘행위, 행동’을 의미한다. 말하자면 내가 한
들판에 목동이 소를 모는 모습은 목가적 분위기를 물씬 풍긴다. 해가 뉘엿뉘엿 지는 무렵의 소 모는 목동은 더욱 그러하다. 그런데 목동과 소에 집중해 보면, 목가적 분위기는 일순 변하고 만다. 목동의 손에는 어김없이 막대기가 쥐어져 있기 때문이다. 멀리서 보는 그림과 같은 풍경에서 의미가 없었던 막대기가 문득 눈에 들어오면, 경우에 따라서는 비극이 떠오르기도 한다. 소의 입장에서 보면 목동은 친근한 벗이 아닌, 두려운 존재일 가능성이 높다. 소가 목동의 말을 듣는 것은 아마도 막대기의 의미를 알기 때문일 것이다. 실제 폭력을 가하는가
우스갯소리로 술자리에서 다른 사람 험담하는 것을 ‘술안주 삼는다’라고 표현한다. 우리는 두 사람 이상 모이면, 다른 사람 이야기를 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하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어색한 분위기를 모면하기 위한 방편으로 다른 사람을 화제로 끌어 올리곤 한다. 물론 좋은 이야기도 한다. 하지만 대부분, 험담이 아니더라도 흉을 보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그러다 보면 이것이 씨앗이 되어 소문이 퍼져, 곤란한 경우를 겪기도 한다. 어쩌다 그런 곤란한 경우를 당하면, 다시는 다른 사람 이야기는 하지 말아야지 하고 다짐하기도 한다. 간혹 칭
불교에는 두 가지 커다란 기둥이 있다. 하나는 깨달음이요, 다른 하나는 자비이다. 이 두 가지는 서로 다른 것이 아니다. 만약 이 가운데 하나가 없다면 다른 하나도 존재할 수 없다. 따라서 깨달음의 무게와 자비의 무게는 다르지 않다. 그런데 깨달음만 강조하고 자비를 강조하지 않게 되면 불교를 지탱하는 기초가 흔들리게 된다. 이 두 가지가 만나는 접점이 바로 ‘수행’이다. 따라서 수행이란 깨달음을 구하는 것과 동시에 자비를 실천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불교기둥은 깨달음·자비접점은 수행이라는 노력내 안에 선한 덕성 키워모든 생명에
훌륭한 의술가 부처님마음 병들게 하는 번뇌다양한 처방으로 제거자비 닮고자 원 세워야 불교는 종종 의학에 비유되곤 한다. 그것은 의학이 병든 사람을 치료하듯이, 부처님의 가르침은 번뇌로 아파하는 사람들을 치료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육체의 질병은 사람이 살아가는 한, 벗어날 수 없다는 점에서 의학의 한계는 분명하다. 그에 반해 번뇌는 일단 제거하게 되면 다시는 번뇌로 인해 아파하지 않게 된다. 그런 점에서 육체의 질병을 치유하는 의사보다 부처님의 의술이 더 높다고 하겠다. 부처님을 의왕에 비유하는 것은 초기경전 이래 무수한 경전에서 언급하고 있다. ‘화엄경’ 51권에서도 부처님을 의왕에 비유한 내용이 나온다. “마치 뛰어난 의술을 지닌 어떤 의왕(醫王)이 만약 병자를 보기만 해도 모두 병이 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