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승은 “정사(政事)에 관심을 갖되 정치에 간여하지 않는다”를 주장합니다. 정사에 임하는 이치는 포용과 평화, 존중, 평등으로 전 국민을 복되게 하는 것으로, 중화문화에서 ‘왕도(王道)’는 ‘패도(覇道)’ 보다 중요합니다.”빈승을 아는 분들은 저에게 많은 이름이 있는 것 외에도 많은 사람들이 빈승을 ‘정치화상’이라고 부르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빈승이 어려서 출가하여 일생 관직에 오른 적이 없었고 정부의 보조금을 받은 적도 없었기 때문에 ‘정치화상’이라는 호칭을 아주 싫어합니다. 심지어 저와 정부관직에 있는 사람들 간에는 간혹 방
“염라대왕은 “너는 글을 쓰는 문인으로 온종일 없었던 일을 있었던 것처럼 그려내면서 헛소문을 퍼트리고 말썽을 일으켜서 너의 글을 본 많은 사람들이 부부간에 싸우고, 가정불화가 생기고, 친구가 의절하는 등 사회에 보이지 않는 불량한 영향을 야기했으니 너의 죄가 매우 엄중하여 무간지옥에 보내지 않을 수 없다. 네가 과거에 썼던 문자들이 이 세상에서 없어져야 너의 죄업이 가벼워질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미국 샌디에이고에서 모래톱에 걸린 고래를 바다로 되돌려 보낸 것을 ‘중국시보’에서 전면 특집기사로 보도했던, 그 따뜻하고 사랑스러웠던
“이런 매체는 좋은 것은 보도하지 않고 나쁜 것을 보도하고, 진실은 보도하지 않고 거짓을 보도하며, 선한 것은 보도하지 않고 악한 것을 보도하고, 바른 것은 보도하지 않고 잘못된 것은 보도합니다.”대중매체가 대만을 구해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일부 유망한 매체의 기자들로 하여금 이 시대에서 그들의 ‘펜대’로 나라를 구하고 사회를 구하며 민심을 바로잡을 수 있도록 하여 사회의 선도자가 되게 합시다.여러 해 전 저는 ‘천하’라는 잡지에 “대중매체가 대만을 바닥으로 끌어 내린다”라는 문장을 읽은 적이 있는데 이 글은 오랫동안 제 마음
“우리 삼륜차 대열은 큰 스피커를 싣고 “우리들의 불교가 찾아왔어요! 어르신들,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들의 불교가 왔어요! 우리들의 불교가 왔어요!”라고 알렸습니다.”많은 사람들은 빈승이 군인으로서 대만에 왔다고 생각하는데 사실 저는 승려구호대에 참가하기 위해 대만에 온 것입니다. 저는 군인이 아니라 일생동안 총을 들어본 적이 없으며 총알 한방 쏴 본적도 없습니다. 나중에 공산당이 신(新) 중국을 세웠고 대만에 있던 저는 나라가 있어도 돌아갈 수 없고 집이 있어도 돌아갈 수 없어서 그냥 대만에서 살게 되었습니다.아침에 우리는 기륭항
“농구는 개인기를 발휘하는 것보다 ‘팀플레이’라는 단체 창작이 필요하며 팀원을 위해서 기회를 만들어 줄줄 알아야 하며 서로 마음을 모으고 협력해야 승리할 수 있습니다. 농구를 하면 불교 젊은 승가들의 많은 문제점을 뿌리 뽑을 수 있습니다.”빈승은 일찌기 청소년 시기에 불교단결의 중요성을 알았습니다. 농구경기에 팀플레이 정신이 필요하듯이 개인기를 드러내는 것보다 공동 창작을 필요로 하기 때문입니다. 빈승의 불교혁신 운동은 일생의 원력이었습니다. 출가자로서 자신을 완성하는 것은, 빈승의 모든 일상은 ‘불교를 위한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남이 나를 대사라고 부르지 않고 작은 스님이라고 불러도 나쁠 것은 없고 젊음을 나타내니 아마저도 저는 더욱 기뻐할 것 같습니다. 젊은 스님들이 보통 ‘작은 스님’으로 불리고 있지 않나요? 불교에 ‘가볍게 여기면 안 되는 네 가지 작은 것(四小不可輕)’이란 말이 있듯이 작다고 해서 그리 기분 나빠할 것도 없습니다.”빈승은 적당한 호칭은 존경의 의미이자 예절이라고 생각합니다.불가에서는 이 호칭으로 자주 분란이 있었습니다. 예를 들면 자항 스님은 남들이 ‘선생님’이라고 불러주는 것이 친근하다며 좋아했습니다. ‘선생님’이라는 호칭은 아주
“‘성운’과 발음이 비슷한 다른 스님을 찾는 전화도 자주 있어서 받아보면 저와는 상관없는 경우도 자주 있었습니다. ‘성운 스님’이라는 호칭이 단체에 갈등을 가져오게 되었습니다. 제자들은 우리 모두가 ‘스님’으로 불리고 있는데 은사스님도 ‘스님’으로 불리니까 도대체 누가 크고 누가 작은지 어떻게 구별할 것인지 연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가 자용 스님이 “은사스님을 우리들은 ‘대사’라고 하는 게 좋겠다”는 의견을 내놓았고 모두가 박수로 동의했습니다.”‘대사’라는 말에는 ‘보살’이라는 뜻도 있습니다. 보살에는 초발심의 보살이 있으며 십
“대만 사람은 자신이 중국인임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대륙의 시진핑 주석이 ‘양안은 한 가족’이라고 말한 것처럼 이러한 평화롭고 평등하고 조화로운 관계가 본토와 대만 양안의 인민들에게 나쁠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빈승은 정부로부터 많은 협조를 받아 종찰을 복원했습니다.10여년 전, 당시 강소성 종교국 옹진진(翁振進) 국장과 전 국가종교국 엽소문 국장이 우리들과 같이 ‘불지사리 대만 이운법회’를 거행하였는데 참배행렬에 수백만명이 동참하였습니다. 나중에 다시 ‘중화불교음악 순회공연단’을 함께 구성해 전 세계 여러 나라에서 공연을 했습
“대만 사람들은 저를 ‘본토사람’이라고 하고 중국대륙 고향에서 친척들을 만났는데 헤어진 지 수십 년이 된 고향 사람들이 저를 알아보지 못하고 “대만에서 온 스님”이라고 했습니다. 저는 도대체 어디 사람일까요? 할 수 없이 빈승은 스스로를 조소하듯 “저는 ‘지구인’입니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인생에서 빈부란 단지 금전과 물질적으로 따지는 계산이 아닙니다. 국가와 사회에 대한 이바지에 대해서도 마음을 내야 합니다.빈승이 어린이였을 때로 기억하는데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누군가 “너는 어디 사는 아이니?”라고 물으면 저는 “만복신촌입
“스스로 생각해보니 어른께 부끄러운 짓으로 윗사람에게 대들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젊은 승가들이 이러한 말씀이나 생각을 가진 어른들을 거스르지 않으면서 절 집안에서 생존하기란 정말 쉽지 않은 일입니다. 이오 선생이 중국 노인들은 권한은 물려주지 않으면서 청년들에게 도리어 몽둥이질을 하려고 한다는 말과도 같습니다.”1948년 봄, 저는 남경으로 돌아왔습니다. 당시 남경 화장사(華藏寺)는 지용(智勇) 스님이 주지를 맡고 있었는데, 저와는 동기로 형제처럼 아주 친하게 지냈습니다. 그는 돌아온 저를 보고 갑자기 “주지를 맡지 않
“국군과 공산당 간의 싸움에 끼인 고통은 생명이 마치 간들간들한 거미줄 같았습니다. 절 바깥에서 개가 짖는 소리라도 나면 놀란 마음에 가슴이 덜컹했고 어떤 때는 한밤중 지붕으로 기어 올라가 주위에 어떤 토적이나 나쁜 사람이 숨어있는가를 살펴야 했습니다. 그것은 저의 사숙되시는 분께서 대각사에서 토적에게 다리를 잘렸다는 소리를 전해 들었기 때문입니다. ”빈승의 90년 가까운 세월에서 생사의 갈림길까지 갔다가 살아 돌아온 적이 여러 번 있었고 언급할 거리가 되지 않는 것도 물론 있습니다. 그렇지만 빈승이 겪은 수많은 수난의 과정을 여기
“‘사람이 불도를 널리 알릴 수 있지만 불도가 사람을 키울 수는 없다(人能弘道 非道弘人)’는 말이 있듯이 불자들 모두 부처님의 가르침이 지구상에 널리 퍼져나가도록 함께 노력하기를 희망합니다. 이것이 바로 빈승이 가장 바라는 것입니다.”불교의 국제화와 본토화, 인간화, 생활화를 위한 과정에서 가치가 있는 일들은 아주 많이 일어났습니다.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미국 캘리포니아주(州) 의회의 새해 개원을 축하하는 의식을 주의사당에서 진행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습니다. 백악관에서도 방문해 달라고 우리를 초청했으며 브라질 경찰 총감 부부도 불
“홍콩에서 강연을 경청한 불자들은 집으로 돌아가 미국, 유럽, 호주에 살고 있는 가족들에게 전화를 걸어 “방금 콜로세움에서 어떤 내용의 설법을 듣고 왔노라”고 말을 전해 주었습니다.”세계적으로 부처님의 가르침을 널리 펼치는데 콜로세움 강연은 매우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홍콩에서 불법을 펼치는 강연은 빈승이 인간불교를 국제적으로 펼치는데 있어서 아주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왜 일까요? 제가 홍콩에서 강연을 마치고 나면 이미 밤 9~10시가 되는데 불자들이 집으로 돌아가면, 마침 미국이나 유럽의 경우 다음 날 아침이 밝는 시간입니다.
“어떻게 수 만의 많은 청중들이 동참할 수 있었을까요? 제 생각에 가장 주요한 원인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사회 속에 가져오고 가정에 가져오고 사람들의 생활 속에 가져 와 불교가 사람과 깊이 관계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해준 ‘인간불교’에 있었다고 확신합니다. 즉 모두가 다 알아들을 수 있도록 쉽게 법문을 했다는 의미로, 이것이 아주 중요한 원인입니다. 두 번째 원인은 노래와 무용을 법문에 융합한 것을 들 수 있습니다. 강연을 하기 전 먼저 문화공연을 하였는데 당시 시대에 이러한 것은 아주 새로운 시도였습니다. ”빈승이 의란에서 매주 수
“홍법 초기 대만에 절은 있었지만 불교는 없었습니다. 부처님이 누구를 말하는 이름인지, 불법이 무엇을 뜻하는지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고 오직 민간신앙만 있었습니다. 민중 대다수가 신명의 가피를 바라는 민속신앙이 아주 보편적이었습니다. 저는 불법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는 것에 대해 불만을 느끼고 대만에 불법은 없고 민속신앙만이 번창한 것을 풍자하는 ‘성군선녀가 세속에 내려오다(星君仙女下凡塵)’‘종교동맹대회’라는 제목의 동화를 쓰기도 했습니다.”반복해서 탐구하고 마음을 쏟고 노력하면서 모든 부처님 말씀을 현대적인 언어로 바꾸어
“빈승에게 다른 재주가 없었기에 가난과 어려움 속에서 방법을 찾으면서 단지 한 걸음 한 발자국 발전하였습니다. 현재는 불광산의 청년 빈승에 의지하여 런던, 베를린, 파리, 마드리드, 네덜란드 심지어는 세계 곳곳의 많은 유명도시에 절과 도량을 지었습니다.”빈승은 면세로 비용을 줄이면서 미국에서 홍법의 길을 시작했습니다.자장과 의항 스님이 아주 능력이 있었던 덕분에 다음날 오후 그 스님들은 돈을 한 푼도 쓰지 않고 12명이 탈 수 있는 차를 운전해서 돌아왔습니다. 차 가게주인이 “종교인은 세금을 낼 필요가 없다”면서 차 값 1만 달러에
“불광산 창건 이후인 1975년 정부에서는 미국 건국 200주년 경축행사에 불교계를 대표하여 또 저를 파견하였는데 갑자기 시야가 넓어지니 저에게 불교를 위해서 한바탕 사업을 펼쳐서 부처님의 자비광명이 삼천 세계에 두루 비추고 불법의 법수가 오대주에 널리 흐르게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마음에 중생제도의 자비원력을 품고 몸은 법의 바다와 같이 배를 묶어 두지 않으며 일생으로 무엇을 추구했는지 나에게 묻는다면 이렇게 답할 것입니다. 빈승은 끝없이 ‘평안함과 행복으로 오대주를 비추리라’라고.” 빈승은 동년에 출가한 이후로 자신의
"빈승 개인의 밥 한 그릇 죽 한 그릇은 모두다 남들이 준 인연으로 허기를 채울 밥이 저에게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빈승의 봄여름가을겨울에 입는 옷가지도 비록 몇 벌로 갈아입고 있지만 매번 입을 때마다 모든 수많은 인연을 마음 가득하게 감사하고 있습니다. 소위 말하는 “죽 한 그릇, 밥 한 공기 힘들게 온 것임을 생각해야 하고 실 한 가닥 한 가닥이 쉽게 만들어진 것이 아님을 항상 생각하라”는 말처럼 수많은 인연이 없었다면 어찌 제가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 30년 전 어느 날, 타이베이 보문사에서 머물고 있을 때 한 노부인
“선생님과 어른 스님들의 매질과 욕설 교육, 수많은 억울함과 난감함, 손바닥 매 맞기, 벌로 무릎꿇기 등은 수시로 겪던 일이었지만 선생님들께서는 저에게 성장의 인연을 주신 것입니다. 저와 원한 관계도 아닌데 왜 저를 때리고 욕하셨겠습니까?”요즘 ‘돈(錢=前과 동음)을 향해서 봐라’라는 말이 유행하고 있는데 돈이 그리도 중요할까요?‘돈을 향해서 보는 것’ 이외에도 세상에는 봐야 할 것들이 너무 많습니다. 산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고 물을 좋아하는 사람도 있으며 사람을 좋아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온갖 공연을 좋아하기도 하고
“많은 젊은이들을 위해 ‘불광친속회(佛光親屬會)’를 특별히 개최하고 있습니다. 제자들의 부모님과 가장은 우리들의 친족이자 사돈 집안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당신의 아들과 당신의 딸이 불광산으로 결혼해서 들어온 것과 같고 우리들이 받아들였으니 가족이고 사돈인 것입니다. 친속회를 열어 부모님이 자신의 자녀를 보러 와서 불가에서도 전도가 유망하다는 것을 알도록 합니다. ”불법을 탐구하고자 기독교도가 불자가 되기도 합니다.빈승이 불법을 펼치던 초기 대만 사회에서 불교는 그리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습니다. 예를 든다면 ‘웅양화(熊養和)’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