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벳 불교의 지도자의 한 분이자 영화 의 감독인 종사르 켄체 린포체가 가 8월 초에 방한하여 법회와 기자회견을 열었다. 그의 저서를 번역한 인연으로 해서 나는 린포체와 대담할 기회를 가졌다. 선종이 주종이 되는 한국불교에 속한 나로서 평소에 관심을 가졌던 문제들에 대한 밀교 큰 선지식의 견해를 들을 수 있었던 것은 요행이었다고 생각한다. 선과 밀교 그리고 정토에 대한 린포체의 생각을 묻자 선은 단순하고 명료하나 밀교는 이와 정반대로 매우 복잡하고 혼란스럽다(chaotic)고 대답했다. 혼란스러운 주된 이유가 우리의 고정관념을 깨트리기 위함이 아닌가라고 묻자 그렇다고 했다. 그러나 그 혼란스러움에 정연한 질서가 있다고 했다. 린포체는 정토는 잘 모르겠으나 매우 심오하다고 말했다.
음력 7월 보름은 백중이자 우란분절이다. 백중은 온갖 것이 풍부해 음식을 백 가지나 마련할 수 있다 하여 백종(百種)이라고도 한다. 백중날 밤 술과 안주, 밥, 떡, 과일 등을 차려놓고 돌아가신 분의 넋을 불러들여 재를 지내므로 망혼일(亡魂日)이라고도 부른다. 또한 이날은 부처님과 대중에게도 공양하는 우란분재를 지낸다. 우란분은 부처님 10대 제자의 한 분인 목련존자가 죄를 짓고 아귀도에 떨어진 어머니를 구하려 부처님 가르침에 따라 큰 잔치를 벌인데서 유래한다. 많은 사람들이 목련존자를 본받아 조상의 성불을 기원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때 분(盆)에 음식을 가득 차렸다고 해서 우란분이라 불렀다. 백중날은 석 달 동안 진행된 하안거가 끝나는 날이기도 하다. 올해도 100개 가까운 사찰에서 2000명이 넘는 스
개성 공단 문제가 극단으로 치달을 때 참으로 많은 사람들이 참담해 하였다. 남북한 교류의 중요한 교두보이며, 남과 북이 각각 윈-윈으로 협력관계를 구축할 수 있는 중요한 모델이 파국을 맞이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눈에 보이는 손실 이상의 큰 의미를 가지기 때문이다. 다행히 앞으로는 영구히 폐쇄 조치 같은 것은 없도록 하겠다는 합의에 도달했다는 반가운 소식이 있어 그 때의 참담했던 느낌이 좀 가라앉는 듯하다. 또 광복절을 맞으며 박근혜 대통령이 비무장 지대에 대한 새로운 제안을 포함하여 전향적인 제안을 내 놓았기에, 그 동안 경색 일변도로 치닫던 남북한 관계에 새로운 물꼬가 트일 것을 기대하게 된다. 그러나 정권 차원의 남북한 관계 개선에 대하여는 이미 신뢰가 많이 떨어져 있다고 할 수 있다. 정권의 성향에
무지와 착각. 일찍이 붓다가 깨우쳐준 인간의 굴레다. 모든 굴레가 그렇듯이 무지와 착각에서도 쉽게 벗어날 수 없다. 종종 망각하기 일쑤이지만 수행의 고투가 필요하다. 스님들이 굳이 선방에 ‘안거’하는 까닭이기도 하다. 딱히 스님들만이 아니다. 일상을 쳇바퀴 돌듯 살아가는 재가자들에게 수행은 오히려 사무쳐야한다. 화두에 정진하는 수행은 자신을 비우는 시간이자 공간이다. 현대인들이 ‘템플스테이’에 매혹하는 이유다. 그런데 무지와 착각은 단순히 개인적 차원에 그치지 않는다. 사회적 맥락에서도 일어난다. 더구나 붓다가 살던 시대와 21세기는 사람들이 살아가는 사회적 조건에 큰 차이가 있다. 붓다가 살던 시대에는 개개인이 수행을 통해 탐·진·치 삼독의 무명을 깨우칠 수 있었다. 실제로 붓다는 깨달음 이후 열반에
2012년 이형우 화가의 작업실을 찾아 광주로 향한 적이 있었다. 여느 때라면 화가의 창작 공간을 엿볼 수 있다는 설렘으로 가득했을 그날, 발걸음은 무거웠다. 이 화가가 서울 살림을 정리하고 고향 광주로 간 건 1997년. 안정적인 작업실을 구하기 위해서다. 작가의 작업실이란 생계를 버티고 꾸려가야 하는 투쟁의 공간이다. 이 싸움을 이겨내야 작업실은 창작 공간으로 다가 온다. 말 그대로 ‘먹을 게 있어야 예술도 하는 법’이다. 친분을 핑계로 그림 한 점을 부탁했었다. 법보신문 사옥 마련을 위한 전시회에 작품을 기증해 달라는 말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지만 ‘두 눈 딱 감고’ 전화를 걸었다. 그는 흔쾌히 승낙했다. 어떤 말로 고마움을 전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는데 다소 떨리는 듯 한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현대 도시주거문명을 특징짓는 것의 하나가 아파트다. 단독주택이 주류를 이루었던 옛날에는 주거환경에 전원적인 여유로움이 있었다. 그러나 여러 세대가 밀집하여 사는 고층의 아파트단지에는 그 여유로움이 사라지고 어쩐지 각박한 느낌을 갖게 된다. 요즘 층간 소음문제로 위 아래층 사람들의 갈등이 폭력으로 이어지는 불상사도 이와 무관하지는 않으리라 생각한다. 아파트 1층에 사는 사람들에겐 특권 이라고 할까, 단독주택의 전원적 분위기를 누릴 수 혜택이 주어진다. 즉 창문 앞에서 옆 동으로 펼쳐지는 녹색공간이다. 이 공간의 오솔길을 걷노라면 어떤 창 앞에는 예쁜 꽃들이 화사하게 피어있음을 볼 수 있다. 그 꽃들이 뿜는 빛과 향기가 산책하는 사람들을 기쁘게 한다. 김춘수는 ‘꽃’에서 내가 그 이름을 부르기 전에는 꽃은
“세계를 밝힐 찬란한 빛이 한국의 사찰에서 나올 것이다.” 1974년 우리나라를 찾아온 노벨문학상 수상자 콘스탄틴 게오르규의 말이다. 그는 우리나라를 새로운 고향이라며 다섯 번이나 찾았고, ‘한국찬가’라는 책도 썼다. 그리스정교 신부이기도 한 게오르규는 왜 이렇게 한국의 불교에 대한 기대가 컸을까. 그는 원래 불교에 심취해서 수도원에서 ‘반야심경’과 ‘법화경’ 강의를 했다고 한다. 이런 게오르규가 우리나라의 불교를 높이 평가한 것은 통도사의 새벽예불에 감동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로부터 40년 세월이 흘렀다. 게오르규가 세상을 떠난지도 20년이 넘었다. 만일 게오르규가 살아있어서 다시 한 번 우리나라를 방문한다면 똑같은 찬사를 되풀이할까. 아마도 우리나라 불교에 대한 찬사를 슬그머니 거두어들일 것 같다.
동아시아권 국가들이 친구가 되어 함께 나아가게 하는데 우리 한국이야 말로 그 중심이 될 수 있는 나라이다. 중국이 함께 가자고 하면 우선 겁부터 날 수 있다. 패권주의가 경계된다. 일본은 역사적으로 너무 큰 원죄를 지니고 있다. 그리고 그 역사에 대한 반성과 참회도 제대로 되지 않고 있다. 역사 왜곡 등의 파문이 지금도 계속 일고 있다. 감히 함께 가자고 외칠 입장이 되지 않는다. 한국만이 ‘우리 함께’를 당당히 외칠 수 있다. 마침 한류의 열풍도 계속되고 있어 분위기도 좋다. 세계사의 흐름 속에서 우리가 선 위치를 확인하고 그 임무를 져야 할 것이다. 그런데 그러한 측면에서 한국은 그 성장에 걸 맞는 역할을 아직도 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우리보다 조금 뒤늦은 가까운 이웃들에 대하여 손
주지(住持)란 무엇일까? 국어사전 상으로는 ‘절이 잘 유지되도록 총괄적으로 책임지고 관리하는 승려’다. 뭔가 부족해 보인다. 마치 ‘회사가 잘 유지되고 발전하도록 총괄적으로 관리하는 최고 책임자’ 의미의 사장과 유사하기 때문이다. 질문을 좀 달리해 보자. 주지의 참다운 본질은 무엇일까? 당장이라도 숨이 막힐만한 질문이다. 세상 그 무엇이든 ‘본질’로 들어가면 난해하기 마련 아닌가.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우리의 숨통을 틔어주는 책 한 권이 있다. ‘산방야화(山房夜話)’다. 장경각이 편 낸 선림고경총서에도 포함돼 있는 이 책은 원나라 중봉명본 스님의 광록 11권에 들어 있는 문답집으로, 수행병통 치료부터 생사해탈, 깨달음의 문제까지 조목조목 설득력 있게 전개되어 있다. 한 객승이 단 한 철의 주지 소임도 맡지
2000년대의 코믹한 영화로 ‘가문의 영광’이 있다. 이 영화는 돈은 있으나 자랑스럽게 내세울만한 인물이 없는 조직폭력단 집안이 총력전을 펼쳐 명문대 출신의 사위를 맞이한다는 내용이다. 그 조폭집안은 돈과 주먹으로는 남의 존경을 받을 수 없어 명문대 출신의 사위로 가문의 영광을 삼아 그 컴플렉스를 극복하려고 한 것이다. 옛날 중국에서는 어떤 사람이 국가에 큰 공적을 쌓아 그 가문의 영광이 되면 황제가 죽은 조상들에게도 벼슬을 내렸다. 그 까닭은 자손의 공적은 그 자신의 노력뿐만 아니라 조상들이 쌓은 공덕의 혜택을 입은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이는 중국인들이 한 개인의 일생을 그 개인에 국한하지 않고 조상과 후손으로 이어지는 가족사의 연계선상에서 파악함을 의미한다. 현재 우리나라의 중요한 이슈 중
포비아(phobia)라는 유령이 우리 사회를 배회하고 있다. 포비아는 특정한 물체나 상황을 지나치게 두려워하는 증상으로 일종의 질병이라고 보는 학자도 있다. 고소공포증은 높은 곳에 있을 때 무서움을 느끼는 증상이다. 밀폐된 곳에서 무서움을 느끼는 폐소공포증이 있는가 하면, 정반대로 트인 장소나 공공장소에서 두려움을 느끼는 광장공포증도 있다. 광장공포증이 심한 사람은 집밖으로 나가기를 매우 꺼려한다. 군중을 두려워하는 대중공포증이 심한 사람은 남들 앞에 나서면 얼굴이 심하게 붉어지고 목소리는 몰론 다리가 떨리기도 한다. 외국인 노동자들에 대해 지나치게 거칠게 대하는 사람은 낯선 사람을 두려워하는 외인공포증에 시달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학교 가기를 싫어하는 학교공포증은 치열한 경쟁이 벌어지는 교육환경에서 당연히
‘불교의 변신은 무죄’이다. 아니 적극 찬양되어야 한다. 보라! 이름 하나 다르게 거니 완전히 달라지는 멋진 예가 있지 않은가? 불교에서 힐링으로…. 가만히 보면 이름을 바꾼 것도 아니다. 단지 이름을 오늘의 말로 해석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불교가 원래 무엇인가? 이고득락(離苦得樂), 괴로움을 벗어나 즐거움을 얻자는 종교 아니던가? 바로 힐링인 것이다. 그 의미를 현대적으로 해석하여 연 힐링법회가 대 성황으로 끝났다는 소식이 참으로 많은 것을 느끼게 한다. 혜민 스님, 정목 스님, 마가 스님, 법륜 스님으로 이어진 힐링의 자리, 행복 나눔의 큰 무대는 불교가 오늘에 어떻게 있어야 하는가를 보여주는 의미 깊은 자리였다고 할 수 있다. 정말 이름 하나 다르게 건 것으로 성공을 할 리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