뽀르뚜 알레그레(Porto Alegre)와 리히텐베르크(Lichtenberg). 작지만 우리나라에는 제법 알려진 도시들이다. 뽀르뚜 알레그레는 브라질 남부에 있고, 리히텐베르크는 독일 수도 베를린의 12개 자치도시(서울시의 자치구에 해당) 가운데 하나이다. 이 두 도시가 유명한 것은 ‘주민참여예산제’를 모범적으로 잘 시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주민참여예산제는 지방정부의 예산편성과정에 주민이 참여하는 제도이다. 예산관련정보의 투명한 공개, 예산안 편성 우선순위의 주민 결정, 지방정부와 주민대표의 협의를 통한 실현가능한 예산안 편성, 지방의회에서의 심의·의결과정을 거치면서 주민이 직접 예산편성과정에 참여하도록 한다. 주민참여예산제의 목적은 주민참여로 재정운영의 투명성과 공정성 및 효율성을 높이
새로운 교황이 선출됐다. 교황 선출에 환호하는 교도들, 그 앞에 당당히 서서 축복을 내리는 새 교황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 불교의 현실과 대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종정 선출에 그러한 환호와 기대가 있어 왔던가? 총무원장 선거는 또 어떤가? 특히 총무원장 선출 과정이나 선출 뒤의 후유증은 정말 심각하지 않았던가? 교계 전체가 몸살을 앓는 것은 물론이요, 밖으로까지 좋지 못한 이야기가 퍼져 나가 불교 자체를 멍들게 하는 일이 종종 벌어져 왔던 것을 생각하면 가톨릭 교황의 선출을 그저 다른 종교의 일이라고 무심히 보아 넘길 수가 없다. 남의 산에 있는 돌도 내 옥을 다듬는데 쓰일 수가 있다는 말과는 반대로 남의 산에 있는 옥돌을 보는 부러움, 단지 부러워함에 끝나지 말고 배울 건 배워 우리 불교의 선출 방식도
우리나라 천연기념물 1호는 ‘대구 도동 측백나무 숲’이라는 사실을 아는 이는 꽤 있겠지만 10호까지 헤아려 본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정보 홍수 시대 속에 생물, 사적, 지리 등의 관련 종사인이 아닌 이상 이 분야의 기념물을 차례로 볼 이유가 별달리 없을 터이니 말이다. 그래도 한번쯤 들여 다 본 사람은 다소 의외의 사실 하나를 발견했을 것이다. 10호까지의 천연기념물 중 2호 ‘합천 백조 도래지’를 제외하면 모두 ‘나무’와 관련 있다. 놀라운 건 10개 중 6개가 모두 ‘백송’이라는 사실이다. 어릴 때는 껍질이 푸르스름한 빛을 보이다가 나이 들면 겉 껍질이 벗겨지며 흰빛을 띠기에 ‘백골송(白骨松)’이라 불리는 그 백송(白松)이다. 중국이 원산지인 탓인지 이 백송은 우리 환경에 참으로 민감하다.
1980년대 초 서울대는 전두환 정권에 저항하는 학생들의 시위와 이를 진압하려는 경찰 사이에 최루탄과 투석이 난무하는 전장 터였다. 이때 영문학자 송욱교수가 인문대학장 임기를 마치고 떠나면서 말했다. “극락이 따로 없구나. 학장을 놓으니 바로 극락이구나.” ‘아미타경’에 극락은 여기로부터 서방으로 70억 불국토를 지난 곳에 있다. 그런대 송욱교수는 학장자리를 놓는 순간 70억 불국토를 너머 극락에 도달한 것이다.학생과 경찰의 대치가 치열했던 어느 날 오후, 경찰에게 쫓긴 흥분한 학생들이 학생회관으로 몰려왔다. 참으로 살벌한 분위기였
한 시대가 끝났다. 까마득히 멀어보이던 이명박 정부 5년의 종착점에 어느덧 이르렀다. ‘사상 최대표차 당선’이라는 시작은 창대하였으나 5년 임기의 마지막은 너무나 미약하다. 이명박 정부가 들어설 수 있던 밑바탕에는 살림살이가 좀 나아지지 않을까하는 국민의 막연한 기대가 깔려 있었다. 그러나 지난 5년 민생은 더욱 악화되었다. 미국발 금융위기와 유럽발 재정위기 등 외부의 조건이 매우 나쁘기도 했지만 부자감세 등 소수와 강자를 위한 정책 위주의 국정운영은 국민의 살림살이를 나아지게 만들 수 없었다. 게다가 민주주의의 후퇴, 남북관계 악화 등 이명박 5년은 오점으로 얼룩졌다. “5년의 공과에 대한 평가는 모두 역사에 맡기고자 한다.” 5년의 임기를 마치면서 이명박 대통령이 한 말이다. 얼핏 들
‘대학(大學)’에는 “열 손이 가리키고 열 눈이 바라보니 얼마나 두려운가!”하는 말이 있다. 속 마음에서 일어나는 개인의 일도 결코 속일 수 없음을 말하는 것이다. 개인의 삶도 그러할진대 공적인 자리에 서서 남을 이끄는 자리야 얼마나 어렵고도 두려울까? 더더구나 한 나라의 최고 지도자 자리는 어떠할까? 정말 천만인의 손이 가리키고 천만인의 눈이 바라보는 자리인 것이다. 그러하기에 그러한 자리에 있는 사람이 지켜야 할 가장 중요한 덕목이 불편부당한 공정성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공정성이 가장 요구되는 분야 가운데 하나가 바로 종교의 영역이라 하겠다. 지난 이명박 정권 시절은 이 종교적 공평성이 가장 심각하게 무너진 때였다. 정교분리 위배 사례만 하더라도 역대 정권들의 몇 배를 넘어갈 정도로 심각한
우연한 기회로 이번 입춘을 서울시내에 있는 사형님 절에서 지내게 되었다. 마침 삼재팔난 소멸을 위한 3일간의 특별 기도기간 중이셨다. 며칠 전 겨울방학 하던 날 상기된 얼굴의 한 학인스님이 매우 신나는 표정으로 방학 인사를 하며 툭 던진 한마디. “스님, 삼재 든 거 아세요?” 평소 별 관심 없이 지내던 터라 나는 어린 스님의 말이 대견하고 신기해서 그런 걸 어떻게 아느냐고 했더니 올 계사년에는 무슨 무슨 띠에 해당된 사람이 삼재라고 설명까지 해주는 것이다. 그런데 용케도 삼재 소멸기도에 우연히 동참하게 된 것이다. 고맙고 고마운 일이다. 하여 이번 기회에 삼재와 팔난이 무엇인지 그것이 진정 소멸해야 할 재앙이라면 어떻게 해결해야 할 것인지 신중히 생각해 보기로 한 것이다. 삼재 기도의 유래나 역사에 관해
깊은 산 속의 산사를 만나려면 꼭 한 번 다리를 건너야 한다. 다리는 이곳과 저곳, 세속과 출세간, 차안과 피안을 구분함과 동시에 이어주는 역할을 한다. 다리에 첫발을 내 딛기 전, 호흡 한 번 크게 하는 건, 아마도 저곳 즉 ‘피안’으로 향하는 자신을 추슬러 보고자 하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리라. ‘극락교’, ‘해탈교’라는 다리 이름에 유독 눈길이 머무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렇다면, 전통사찰의 다리 가운데 가장 깊고도 오묘한 뜻을 내포하고 있는 다리 이름은 무엇일까! 세 개의 별, 그리고 반달이라는 뜻을 간직한 통도사 ‘삼성반월교(三聖半月橋)’가 단연 압권이다. 다리에 새겨진 ‘삼성반월교(三星下半月橋)’ 한문 표지석은 경봉 스님 글씨다. 삼성반월교는 홍예교(虹霓橋) 형식이다. 홍예교란 돌을 양쪽 끝에
지난 1월 30일 오후 4시 전남 고흥 나로우주센터에서 우리나라 첫 우주발사체(KSLV-1)나로호가 성공적으로 발사되었다. 발사 9분 후에 나로과학위성이 2단 로켓에서 분리되어 궤도에 진입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이를 가슴 조이며 바라보고 있던 온 국민이 환호했다. 오후 5시 이주호 교육과학기술부장관은 발사성공을 공식선언하며 말했다. “학생.청소년 여러분, 대한민국은 세계로 우주로 뻗어나가고 있습니다. 마음껏 꿈을 펼치기 바랍니다.” 1월 31일 오전 3시 28분 나로호 과학위성과 KAIST 인공위성연구센터 지상국과의 교신이 이루어짐으로서 나로호 발사프로젝트는 완벽한 성공을 거두었다. 이는 우리나라 우주개발 역사의 새로운 장을 연 쾌거라 아니할 수 없다. 이 성공으로 우리나라는 자국에서 자국발사체로 자국
요즈음 가장 널리 쓰이는 말 가운데 하나가 ‘힐링’(healing)이다. 몇 년 동안 가장 많이 팔린 책들은 모두 힐링 관련 책들이다. 혜민 스님이나 김난도 교수의 책은 보기 드물게 밀리언셀러가 되었다. 방송 매체도 힐링 프로그램을 앞 다퉈 만들고 있다. 힐링을 우리말로 옮기면 치유 또는 치료이니 몸의 병을 고치는 것도, 마음의 병을 고치는 것도 힐링이다. 그러나 보통 힐링이라는 말은 육신의 병보다는 마음의 병을 고친다는 의미로 많이 쓰인다.힐링 신드롬에는 많은 사람들이 마음을 심하게 다치거나 억압을 받아 괴로워하는 사회현실이 반영되어 있다. 그렇다면 힐링 책을 읽고 힐링 방송을 보는 것만으로 마음의 병을 고칠 수 있을까. 그렇지 않다. 마음을 아프게 만드는 잘못된 사회 현실을 고치지 않는다면 몸과 마음은
성도절이 지났다. 방방곡곡의 수많은 사찰에서 용맹정진이 이어지면서 부처님이 성도하신 의의를 되새기고, 그 부처님의 모습을 본받으려는 불심들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그러한 모습에 찬탄을 보내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이 시대에 부처님이 성도하신 뜻을 제대로 돌이켜보아야 할 필요성을 느끼기도 한다. 찬탄 이면에서 다시 살펴볼 일들이 적지 않으니, 그 문제들에 대한 고민이 필요한 시점이다. 우선 가장 표면적으로 보이는 것은 불교의 가장 큰 명절이라 할 수 있는 성도절에 환희와 기쁨이 넘쳐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부처님은 우리와 다름없는 인간의 모습으로 오신 것이고, 성도를 통해 비로소 깨달음의 빛을 이 세상에 밝히셨다. 그러하기에 부처님의 성도야말로 불자들에게 있어 가장 기뻐해야 할 일이다. 또한 우리와 같은 인간으로
다사다난했던 임진년이 저물고 이제 계사년의 태양이 밝았다. 작년은 참으로 가난했던 해였다. 하늘은 인색하게도 우리에게 편안한 여름을 주지 않았다. 장기간 지속한 기록적 폭염이 우리들의 몸과 마음을 가난하게 만들었다. 가을이 되자 대선으로 권력에 가난한 정치집단들의 격렬한 투쟁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대한민국의 역사상 첫 여성 대통령이 탄생했다. 이제 새해가 왔다. 우리 모두가 가난을 벗어버리고 부자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매년 정초 재직하던 대학 학과의 신년 하례식에서 나는 덕담으로 “부자 되세요.”라고 말하곤 해왔다. 이 덕담에 다들 즐거워했다. 올해에는 그 덕담이 새로울 것 같다. 동양에서 모든 사람이 바라는 오복(五福)의 으뜸이 부(富)이다. 그 다음에 귀(貴)가 따라온다. 왜 부가 오복의 첫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