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는 문명이 발달하면 발달할수록, 인간의 지성이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빛을 발할 수 있는 종교이다. 현대사회의 문제가 심각해지면 심각해질수록, 그에 대하여 적절한 답을 낼 수 있는 풍부한 자원을 가진 종교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들에 대해 우리 불자들은 확신을 지니고 있고, 그 확신은 단지 우리들의 확신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서구의 형세를 본다면 부처님 이래 이러한 성황을 이룬 적이 없다고 할 정도로 불교는 상승의 기세를 타고 있다. 그것은 불교의 활발한 포교를 통해서가 아니라 문명이 발달한 그들 사회의 요구에 의해 이룩된 일이다. 그렇기에 우리 불교는 그러한 시대적 요구에 부응해 부처님 가르침을 널리 펼 수 있는 가장 좋은 기회를 맞았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불교가 지니고 있는
‘세상 근심과 즐거움은 선거에 달려 있다’는 ‘천하우락재선거.(天下憂樂在選擧)’조선시대 실학자 최한기가 ‘선거’의 중요성을 갈파해 내 놓은 일언은 선거철이면 각종 매체를 통해 어김없이 등장하는 글귀다. 최한기가 말한 ‘선거’는 지금의 ‘대통령 선거’를 염두에 두고 한 말은 아니다. 최한기가 말한 ‘선거’는 참다운 인재를 천거하고 써야 한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말은 지금의 ‘선거’와 직결된다. 민주주의 꽃이라 불리는 ‘선거’도 결국 인재를 천거 해 쓰고자 함이니 말이다. 굳이 다르다 하면 임금이 아닌 국민이 투표를 통해 ‘천거 해 쓰는 것’ 뿐이다. 최한기의 ‘선거론’을 좀 더 들여다보자. 그는 선거가 잘 못 됐을 때의 일부터 낱낱이 밝히고 있다. ‘잘못 선거된 사람에게 또다시 뒷사람을 선거하
연말이라 이런 저런 모임이 잦아지고 있다. 마침 대선이 다가와 자연히 정치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어떤 모임에서 한 친구가 정색을 하고 정치와 종교는 이야기 말자고 했다. 그 까닭은 말하지 않았다. 추측컨대 자칫하면 좋은 분위기를 해칠 수 있을 것을 우려한 것이 아닐까 한다. 그렇다면 그 취지를 탓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정치와 종교에 관해 이철승씨가 재치 있는 말을 했다. 종교는 상수도 공사이고 정치는 하수도 공사라고 했다. 상수도에서 공급되는 깨끗한 물이 인간에게 오염되어 악취 나는 하수로 배출된다. 종교는 상수도 물을 정화하는 작업을 한다. 반면에 정치는 오염된 하수를 처리하는 일을 한다. 분위기 좋은 모임에 굳이 악취 나는 하수도 이야기를 할 필요가 없을지 모른다. 그러나 더욱 심각한 문제는 상수
동산반야회가 창립 30주년을 맞았다는 소식은 참으로 우리 불교계에 큰 힘을 주는 일이다. 우선은 30년이라는 연륜자체가 축하해야 할 일이겠지만, 무엇보다도 재가불자 단체가 30년을 이어오면서 발전된 면모를 보이고 있다는 사실은 무엇보다도 고무적인 일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그 동안 많은 재가불교 지도자들을 중심으로 하여 여러 단체들이 생기고, 또 일정부분 불교계를 위해 공헌을 해 왔지만 이렇게 30년을 이어 내려온 예가 드물다는 것을 생각하면, 동산반야회 창립 30주년이라는 의미가 확실하게 다가올 것이다. 이렇게 동산반야회가 30주년을 이어오게 된 것은 결코 우연이라 할 수가 없다. 그 가운데 가장 중요한 요소는 재가불자들의 교육이라는, 불교계에서 가장 필요하고도 절실한 사업을 그 주축으로
후보등록을 20여일 앞두고 민주통합당의 문재인 후보와 무소속의 안철수 후보가 단일화를 하기로 합의했다. 이로써 제18대 대선은 박근혜 새누리당 후보와 야권 단일후보의 양자대결로 치러지게 되었다. 야권은 정권교체에 대한 기대에 한껏 부풀었고 여권은 단일화를 맹비난하고 나섰다. 후보가 단일화 됐다고 해서 박근혜 후보를 이길 수 있다는 보장은 없다. 2010년 지방선거 이후 야권은 단일화를 정권교체의 필요충분조건으로 보았다. 지방선거의 압도적 승리처럼 단일화만 되면 이길 수 있다면서 단일화에 모든 것을 걸었다. 단일화에 대한 믿음의 바탕에는 ‘한방의 추억’이 깔려 있는 것으로 보인다. 1997년에는 DJP 단일화를 통해 이회창 후보를 한방에 보냈고, 2002년에도 노무현-정몽준 단일화를 통해 이회창 후보를 한방
대통령선거가 우리 앞에 다가오고 있다. 서울시장 재직시절 “서울을 하나님께 봉헌한다”고 공개적인 망언을 했던 이명박씨가 대통령이 된 뒤, 우리 불교계는 지나간 4년 몇 개월이 ‘50년’만큼이나 지겹고 지루한 세월이었다. K대학에, 소망교회에, 영일·포항 출신이라고 해서 ‘고소영정권’이라는 별명이 붙은 이명박정권 치하에서 우리 불교계는 일일이 열거 할 수 없는 차별과 불이익과 수난을 겪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 ‘이명박’을 대통령으로 만든 ‘한나라당’이 ‘새누리당’으로 이름만 바꾸어 ‘유신 독재의 화신, 박정희의 딸’ 박근혜를 대통령후보로 내세웠고, 야당인 민주통합당은 노무현의 그림자였던 문재인을 후보로 내세웠으며 무당파 안철수는 “국민의 정치쇄신 열망을 등에 업었다”면서 스스로 대통령 후보
최근 광덕사 회주 철웅 스님을 친견하기 위해 고향 천안 광덕을 찾았다. 마침, 인터뷰가 오전에 끝나 잠시나마 들녘을 걸어 볼 짬이 났다. 대지는 이미 황금색으로 변했다. 그 속에 담긴 농부들의 피땀을 헤아려야 할 터이지만, 그보다 앞서 가을 들녘이 펼쳐 보이는 풍광에 마음이 사로잡히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어릴 적 벼가 여물 무렵이면 논 옆에 가만히 앉아 있다, 참새들이 벼를 쪼려 내려앉으려는 찰나 ‘훠이 훠이’ 소리 질렀다. 어린 나이에 새를 쫓는 건 놀이였다. 참새들이 놀라 달아나는 게 재미있어 ‘어서 내려 앉아 보라’며 미루나무 옆에 숨기도 했다. 마치 참새들과 숨바꼭질이라도 하듯이 말이다. 그러고 보니 확 트인 풍광이 눈앞에 선뜻 다가왔던 건 허수아비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라는 사실에 기인한 것이었음
가을은 아름다운 언어와 샹송의 계절이다. 가을의 다가옴을 가장 극적으로 노래한 시인은 샤를 보들레르라고 생각한다. 그의 시 ‘가을의 노래’는 이렇게 시작한다. “머지않아 우리는 차가운 어둠 속에 잠기리니. 안녕, 너무 짧았던 우리 여름의 찬란한 빛이여!”그에게 가을은 삶에서 죽음으로 이행하는 계절을 상징한다. 릴케의 다른 감성으로 가을을 노래한다. 가을은 그에게 기도처럼 다가온다. 그의 ‘가을 날’은 “여름은 참으로 위대했습니다. 당신의 그늘을 해시계 위에 내리시고 벌에는 바람을 일게 하여 주십시오”로 시작한다. 가을은 조락의 계절이다. 구르몽은 그의 시 ‘낙엽’에서 나뭇잎이 저버린 숲으로 가자고 한다. 그리고 묻는다. “시몬, 너는 좋으냐? 낙엽 밟는 소리가?” 발로 밟으면 낙엽은 영혼처럼 운다고 했다.
‘우물에 독 타기’라는 오류가 있다. 우물 자체에 독을 풀어 그 우물에서 나오는 모든 물을 못 쓰게 만드는 짓처럼, 어떤 사람이나 어떤 집단을 근원적으로 매도함으로써 그 사람이나 집단의 주장은 모조리 틀렸다고 주장하는 방식의 오류를 말한다. 너무 빤히 드러나는 오류 추리 아니냐고 할 수 있지만 실제는 이러한 오류 추리가 엄청난 힘을 발휘하기도 한다. 인간은 감정의 동물인지라, 어떤 감정적 편향을 갖게 되면 그것이 바로 이성적 사고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그러한 오류의 실례가, 논리학 강의에 아주 좋은 예로 활용될 만할 정도로 너무도 전형적인 형태를 보이면서 일어나고 있다. ‘종교자유정책연구원’에 대한 개신교와 국민일보의 공격이 그것이다. 종자연의 활동 내용 자체를 문제 삼지 않고, 종자연이 불교계 단체
민족대이동이 이뤄지는 추석연휴에는 흩어져 살던 가족과 형제자매, 친척 친지들이 오랜만에 만나게 된다. 차례를 지내고 성묘를 하고, 술 한 잔 나누며 밀렸던 이야기꽃을 피우는 것은 추석연휴의 낯익은 풍경이다. 안부를 묻고, 직장과 집, 그리고 가족 이야기가 이어지다 화제는 자연스럽게 정치로 넘어간다. 대체적으로 정치 이야기는 신나고 즐겁기보다는 짜증나고 언짢은 것이 일반적이다. 정당, 국회, 정치인들을 향해 쏟아내는 비판과 분노, 한숨과 성난 목소리는 귀향활동을 벌이는 정치인들에게 그대로 전해져 정치에 반영이 되곤 한다. 이것을 추석민심이라 부르는데, 비유하자면 ‘민심의 속살’인 셈이다. 새누리당 박근혜 후보와 민주통합당 문재인 후보, 그리고 무소속 안철수 후보에 대한 추석민심은 어떠했을까.
조계종 원로회의 행보가 여간 심상치 않다. 최근 종법에 명시된 권한 이상의 원로회의 권한을 갖기 위한 종법 개정안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 여기에 10월10일 새로운 원로회의 의장이 선출된다. 원로회의 권한 확대 종법 개정안과 새 원로회의 의장 선출. 개정안 찬반 성향과 대세 흐름에 따른 의장이 선출될 가능성도 있어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조계종에서 원로회의가 갖는 의미는 무엇인지 한 번쯤 짚어볼 필요가 있다. 주지하다시피 원로회의 의원은 승납과 법납이 찼다 해서 자동적으로 선출되지 않는다. 17인 이상 25인 이내로 원로회의가 구성되기 때문이다. 중앙종회로부터 추천을 받아야 하는 것은 물론 원로회의를 통해 선출되어야만 한다. 중앙종회의 추천이 ‘대중의 뜻’이라면 원로회의 선출은 ‘검증’과정이라 보아도 무방
최근 경향신문에 불교계를 폄하하는 광고가 실렸다. 광고 내용인 즉 ‘자정능력 상실한 조계종, 막가파식 승가를 정화하자’는 것이다. 도박, 몰카 사태를 비롯한 교구본사 주지 문제로 조계종은 한동안 몸살을 앓았다. 이 중에서도 ‘도박 몰카’ 사건은 사회적 파장이 너무도 컸다. 이 사건을 접한 사부대중, 특히 스님을 비롯한 종단 관계자와 교계 재가 지도자들은 거리를 나서기도 창피스러워 고개를 숙이고 길을 걸을 정도였다. 그렇다 해서 조계종이 정화능력을 상실했다고 봐야 할까? 조계종이 안고 있는 문제점은 유독 이 뿐만이 아니다. 개선해야 할 난제는 산적해 있다. 종단이나 교계 단체들도 속속들이 알고 있다. 교계 언론과 단체들의 날선 비판이 왜 있겠는가? 각종 현안 세미나를 통해 고통을 감수하며 내부의 치부를 드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