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에서 가장 큰 명절은 단연 음력 4월 8일 부처님오신날이다. 고타마라는 한 인물의 탄생을 기념하는 부처님오신날은 모든 불자들에게 가장 큰 의미를 주는 날이다. 출가재일은 수행자로의 삶으로 내딛는 두 번째 탄생을 뜻하는 날이다. 싯닷타 태자가 왕궁을 떠나 주어진 모든 현실을 버리고 더 나은 것을 위한 선택, ‘위대한 포기’를 결심한 역사적인 날은 또 다른 의미의 탄생이다. 우리에게는 또 하나의 부처님오신날이다. 성도재일은 궁극적인 깨달음을 얻은 ‘부처님’의 탄생일이다. 진정한 의미의 ‘깨달은 자, 붓다’의 탄생이야말로 새로운 의미
인도에서 소는 가장 신성하고 유용한 동물이다. 힌두교 대표신 쉬바는 흰 소를 타고 다니고, 목동의 신 크리슈나는 모든 소를 보호한다. 종교적 이유로 힌두교도들은 소를 살해하거나 먹지 않지만 모든 소가 이에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버펄로(Buffalo)라고 불리는 큰 뿔의 검은 물소(Bubalus bubalis)는 식용고기로 사용되거나 수출된다. 인도나 네팔 레스토랑에서 먹을 수 있는 값싼 스테이크가 바로 물소 고기다. 초식동물인 소는 성품이 순하여 길들이기 쉬운 동물이지만 물소는 야생성이 강하고 성미가 사나운 맹수로 꼽힌다. 인도신
역사적인 가치를 지니는 성보 문화재로서 불교미술품은 각각의 시대마다 장인들이 그들의 예술정신을 불어넣어 만든 것이다. 그리고 미술사학자들은 그러한 문화재 안에 담긴 시대적인 정신을 읽어내기 위해 노력한다. 그중에서도 마애불은 인위적인 화폭이나 건축적인 공간 대신 자연적으로 조성된 공간과 바위에 인간의 정신을 투사하여 조성하는 매우 독특한 표현기법이다. 즉 마애불은 산 속에 넓은 화폭 같은 바위가 있다고 해서 그 위에 작가가 새기고 싶은 것을 마음대로 새기는 것이 아니라, 누구나 그 바위를 보면 안에 꿈틀거리고 있는 것 같다고 느끼게
법정 스님의 ‘말과 침묵’(1982)에는 사랑에 관한 아름다운 비유가 소개되고 있다. “몸에 그림자 따르듯이”라는 경구가 절실하게 다가와서 처음 독송한 이래 늘 잊혀 지지 않고 울림을 준다. 원출처가 ‘능엄경’으로 표시된 말씀을 스님의 번역문 그대로 옮겨 본다.“한 사람은 일념으로 생각하는데 다른 한 사람은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다면, 이 두 사람은 만나도 만난 것이 아니요 보아도 본 것이 아니다. 그러나 두 사람이 서로 생각하여 생각하는 두 마음이 간절하면, 이생에서 저생에 이르도록 몸에 그림자 따르듯이 서로 어긋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지난 100년의 세월 속에서 ‘큰 판’이 무너지고 새로 세워짐을 두 번이나 겪어야 했다. 긴 세월 전제왕권이 이 땅을 지배했다. 체제의 교학인 성리학과, 그 학문으로 무장된 사대부들의 세상이었다. 그런데 그런 ‘큰 판’이 흔들렸고 끝내 무너졌다. 일제는 식민지를 경영했고 이 세상을 봉건에서 근대로 개화시키겠다고 자임했다. 호구조사를 하고 땅을 측량하여 지번을 부여하는 등 근대적 각종 제도를 도입했다. 이렇게 ‘큰 판’이 한 번 흔들렸다.세계열강들의 식민지 전쟁도 원자폭탄 두 방에 끝이 났다. 1945년 8월6일 히로시마, 9
지난 2015년 인구통계조사 결과에 따르면 원불교와 천도교는 그 교세가 비슷하다. 그런데 원불교는 ‘불교-개신교-가톨릭’에 이은 제4대 종교로 많은 사람들에게 인식되고, 정부에서도 이를 당연하게 여기며, 천도교 쪽에서도 아무런 이의 제기를 하지 않고 있어서 특별한 변수가 생기지 않는 한 이 상태가 앞으로 오랜 동안 굳어질 것 같다.그런데 원불교가 언제, 어떻게 해서 ‘4대 종교’의 틀 안에 자리를 잡게 되었을까. 1948년 정부 수립 이후 여러 차례 국장·국민장이 치러졌는데, 2006년 10월 최규하 전 대통령의 국민장에 이르기까지
지난 연재에서 부처님의 출현은 신(神)중심적 세계로부터 인간의 행위 주체성을 강조하는 인문적 세계로의 전환을 의미한다는 점을 말씀드렸습니다. 구체적으로는 종교행위의 중심이 ‘제사’로부터 ‘수행’으로 전환하게 되었다는 의미이며 나아가 바라문교를 공고히 뒷받침하고 있던 사제주의를 폐기하는 일이었습니다.사제주의란 신과 인간을 매개하고 신을 대리한다는 사제의 종교적 권위를 인정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당시 인도 사회에서 바라문은 혈통에 의한 세습적 사제였습니다. 부처님께서는 높은 영적·정신적 상태를 가리키는 의미로 ‘바라문’이란 용어를 사용
‘노는 입에 염불한다’ ‘까마귀도 염불한다’ 등 옛말이 있다. 다소 해학적인 표현이지만 염불에 대한 몇 가지 간과할 수 없는 특성을 내포한다. 권고성과 복덕성, 용이성과 대중성이다. 먼저 권고성은 사람들에게 염불할 것을 강하게 권유하고 있다는 것이고, 복덕성은 염불을 하면 갖가지 복과 공덕을 얻게 된다는 것이다. 용이성은 염불은 언제 어디서나 쉽게 행할 수 있다는 것이며, 대중성은 남녀노소 유식 무식 빈부귀천에 관계없이 누구나 한다는 것이다.날아다니는 까마귀가 염불할 정도이니 염불이 얼마나 일반적이고 수승한지는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觀音竹繞菩提路 先超苦海有慈航관음죽요보리로 선초고해유자항羅漢松圍般若臺 立絶俗塵憑慧劍나한송위반야대 입절속진빙혜검경북 문경 대승사 응진전에 걸린 주련이다. 그러나 순서가 틀렸다고 볼 수있다. 위의 문장에서 상련은 ‘관음죽요보리로’이고, 하련으로는 ‘나한송위반야대’가 대구되는 시문이다. 그리고 ‘입절속진빙혜검’에 대구되는 하련은 ‘선초고해유자항’이다. 참고로 예천 서악사의 나한전 주련은 대승사 응진전 주련과 같은 필체다. 대승사 주련의 글씨를 번각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주련의 순서는 바르게 걸려있다. 그러므로 이를 정리해 바로 잡으면
요즘 자주 쓰이는 디톡스(detox)는 해독을 뜻하는 말로 신체에 독소를 빼는 제독요법이라 할 수 있다. 유해물질이 몸 안에 들어가지 못하도록 하고, 이미 쌓여있는 독소를 오장육부나 피부, 운기 등으로 배출하는 방법을 말한다.우리 몸을 건강하게 하는 방법은 두 가지다. 첫째는 몸에 이로운 일을 하는 것과 둘째는 몸에 해로운 일을 하지 않는 것이다. 디톡스는 몸에 해로운 일을 다루는 분야다. 열 가지 이로운 것도 좋지만 한 가지 나쁜 일을 하지 않는 게 더 중요하기도 하다.문명이 발달하면서 우리는 독소에 노출될 수밖에 없다. 먹는 것
승이 영봉(靈峰)의 현영화상(顯英和尚)에게 물었다. “제불향상인(諸佛向上人)이란 무엇입니까.” 영봉이 말했다. “백운이 청산을 덮는다.” 승이 물었다. “그것은 화상께서 사람 교화하는 방식 아닙니까.” 영봉이 말했다. “작은 샘물이 흘러 강물을 이룬다.”영봉현영 화상의 법맥은 명교관(明教寬)-복창중선(福昌重善)-영봉현영(靈峰顯英)으로 청원행사의 제9세에 해당하는데 전기는 미상이다. 본 문답에서는 불향상인(佛向上人)의 면모가 무엇인가를 이해하는 것에 주안점이 있다. 부처의 경지는 불법수행의 궁극적인 이상이지만 그러한 부처의 경지에도
고대 인도 사회는 철저한 계급사회였다. 물론 지금도 그렇다. 실제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계급이 존재하지 않았던 때는 없다. 지금 우리 사회 역시 마찬가지이다. 계급을 나누는 방식이 다를 뿐이다. 지금도 암묵적 계급이 존재한다면, 고대 사회에서의 계급제도가 사람들에게 미친 영향은 가히 절대적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 사회에서 만약 계급제도를 부정한다면 어떻게 될까. 그것은 혁명에 다름 아니며, 나아가서는 사회시스템을 부정하는 것이기에 극형에 처해졌을 것이다.부처님은 2500여년전, 계급사회였던 인도사회에서 계급을 부정했던 분이다.
2005년 인구통계조사 결과 10년 동안 개신교도 숫자는 1.6% 감소하고 가톨릭교도는 74.4% 증가한 것으로 밝혀져 개신교계가 충격에 빠진 뒤 이를 진단하는 세미나 ‘2005 인구주택총조사 그 이후, 현대인의 마음을 사로잡은 가톨릭 성장’에서 ‘가톨릭신자의 괄목할 만한 증가와 그 요인’을 발표한 오경환 신부의 발언이 내 머리에 오래 남아 있다. 불교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말이기 때문이다.“사람들은 일상생활 중에 관찰하면서 각 종교에 대하여 호감이나 반감을 갖게 되는 것이고, 아무리 신자들이 열심히 선교해도 호감을 갖는 사람만이 입
불교의 최대 장점은 자유와 자율을 중시한다는 점이 아닐까 생각한다. 혹자는 자유와 자율은 불교의 장점이면서 동시에 최대 약점으로도 평가한다. 그러나 부처님께서 활동하시던 당시 인도를 생각하면 이보다 더한 장점은 생각할 수 없다. 출가자의 나이나 성별, 신분을 논하지 않았다. 누구나 부처님의 품 안에서 자유롭게 수행을 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기본적으로 수행자가 지켜야 할 규범은 자율적으로 지켜야 했다. 계율이 성립하고 교단이 발전하면서 출가의 자유에는 제동이 걸렸다. 누구나 원하면 출가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출가를 금지하는 예
부여 무량사 금동아미타불좌상은 도난된지 28년 만에 우리 앞에 그 모습을 드러냈다. 이를 계기로 무량사 5층석탑에서 발견된 조선 초기의 아미타삼존불상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되었다.1989년 7월13일 충남 부여군 외산면 만수리에 있는 무량사 주지실에 복면을 쓴 강도 두 명이 침입했다. 이들은 주지스님의 얼굴을 가리고 손과 발을 테이프로 묶어 움직일 수 없게 한 뒤 산소용접기로 금고를 해체해 보관중이었던 금동아미타삼존불상과 금동보살좌상, 청동사리구, 청동합, 보살문원판, 동경 등 여덟 점을 모두 훔쳐갔다. 다행히 아미타삼존불상
붓다의 자비(慈悲)는 원래 따뜻한 마음으로 포근히 품어주는 덕이 아니라 집착을 일으키지 않도록 아무 감정의 개입이 없는 상태로 행해지는 다른 사람의 어려움에 대한 배려라는 사실이 정(情) 많은 불자들을 종종 당황스럽게 만든다. 아니, 자비가 ‘무정(無情)한 배려’라니, 얼토당토않게 들릴지 모른다. 그러나 붓다의 자비는 감정이나 집착 없이 행해지는 타인의 번뇌에 대한 배려가 맞다.한편 ‘자선(慈善)’이라고 번역되는 영어의 ‘charity’가 철학의 의미론과 인식론에서 논하는 ‘principle of charity’에서는 엉뚱하게도 ‘
온 세계 사람들이 마스크를 끼고 생활한 것이 1년이 넘는다. 코로나19 때문이다. 코로나19는 중국 우한에서 2019년 12월에 발생한 바이러스성 호흡기 질환이다. 코로나19 바이러스는 호흡기를 통해 감염되며, 증상이 없는 초기에 전염성이 강하다. 감염이 되면 먼저 목 안에 통증이 오고, 열이 나고, 기침이 난다. 호흡곤란 증상을 거쳐서 폐렴으로 발전한다.이 호흡기 질환은 확진자의 호흡과 침 등으로 전염되기 때문에, 예방을 위해서는 우선 마스크를 껴야 하며, 사람과의 대화에 거리를 두어야 한다. 사람의 모임에 인원 제한을 두어야 하
내적인 갈등을 겪을 때, 사람들은 자신의 한쪽 어깨에 악마가, 또 한쪽 어깨에 천사가 앉아 귀에 속살대는 것을 상상한다. 천사가 눈을 반짝이며 바른 소리를 할 때 악마는 음험한 목소리로 유혹하고, 대부분 유혹에 넘어간 ‘나’는 내 잘못이 아니야, 쟤 때문이야, 라며 화살표 꼬리를 가진 악마를 가리킨다. 그러나 실상은 그것과는 조금 다르다. 부처님은 그 ‘나’가 누구인지 묻는다. 부처님의 질문을 따라가다 보면 “나라고 할 만한 것이 없다는 사실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수많은 생각의 목소리가 드글거리지만 그 어느 것도 나라고 할
달리는 버스 안에서 내다보이는 춘천 의암호는 봄빛을 가득 담고 출렁인다. 햇살이 비쳐 반짝이는 호수의 물도 서로에게 인사를 하니 정말로 반갑기 그지없다. 오늘도 오가다 만나는 사람들을 소중한 인연으로, 있는 그대로 보고 어린 시절 기억 저편에 있는 추억을 안고 글 한 줄 남길 수 있으리라는 바람과 함께 대문을 나섰다. 고향 어르신이나 친구라도 만나리란 기대도 가져본다.의암호를 한참 돌아 들어가다 보면 내가 자란 고향마을로 가는 초입에 봉덕사가 있다. 절로 들어가는 언덕길에는 노랗게 아름답던 은행나무의 가지마다 새잎을 틔우기 위해 물
空拳把鋤頭 步行騎水牛공권파서두 보행기수우 人從橋上過 橋流水不流인종교상과 교류수불류(손은 빈손인데 호밋자루를 들고 있고 / 걸어가고 있는데 물소를 타고 있다. / 사람이 다리 위를 지나가는데 / 물은 흐르지 아니하고 다리가 흘러가네. )‘벽암록’ 제96칙에서 본칙의 공안을 두고 부대사(傅大士, 497~569)의 견해를 밝힌 게송이다. 본칙 공안은 그 유명한 조주종심(趙州從諗, 778~897)의 ‘삼전어(三轉語)’다. 삼전어는 미혹한 마음을 단박에 깨트려 깨닫도록 이끄는 세 마디 말을 뜻한다.금불불도로(金佛不渡鑪) 무쇠로 만든 부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