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자리서 한 마음 돌려야청정무구 심성서 지혜 발현 실천법력-수행정진 있어야법 설하는 자-듣는 자 계합 서울 정릉 삼각산 자락에 자리한 봉국사는 도심 사찰이지만 고즈넉했다. 산사 경내를 휘돌며 옷섶을 스쳐 지나가는 바람은 참으로 청량했다. 대웅전을 지나 몇 걸음 더 내딛어 보니 염화실이 눈에 들어온다. 1956년 출가한 후 50여 년 동안 ‘이뭣고’ 화두를 들어온 월서 스님의 주석처다. 스님은 올해 『거울 속 성불의 길』이란 책을 선보인 바 있다. 보통 책 제목은 출판사가 결정하는 게 상례지만, 월서 스님의 의지가 깊게 배인 듯 제목 자체가 예사롭지 않다. 스님이 말하고자 하는 거울은 무엇이며 그 거울 속엔 어떤 성불의 길이 비춰져 있을까! 스님은 이 책에서 “항상 자기 내면을 탐구하고 거시서 발
자원봉사 1만 4000명 확보연꽃마을 생동의 큰 원동력 “이 세상의 모든 힘 중에서 복의 힘이 제일이다. 그러나 복은 받는 것이 아니라 봄에 씨앗을 뿌린 사람이 가을에 거두는 것처럼 심은 대로 거두는 것이다.”『아함경』에 나오는 부처님 말씀이다. 불교의 궁극적 목표인 ‘깨달음’과 함께 불자로서 가야 할 또 하나의 길이 이 속에 담겨 있음을 알 수 있다. 한량없이 복을 지어가며 궁극의 지혜를 완성해 가는 것이 바로 불자가 세워야 할 원력임을 『아함경』은 제시하고 있다. 사회복지법인 연꽃마을을 지난 20년 동안 이끌어 온 각현 스님은 2008년 저서 『해야 할 일 하고 싶은 일』을 선보인바 있는데 서두에 쓴 한마디가 지금도 생생하다. 해야 할 일은 ‘업력(業力)’이고, 하고 싶은 일은 ‘원력(願力)’이라고
400만 배 후 무상-무아 체득해 ‘절 수행’ 보급“단 일 배라도 새 마음-지극정성을 다해 올려야” “절은 아상을 꺾는 것으로 진실한 자신에게 돌아가는 것이다.” 서산대사의 일언이다. ‘아상을 꺾는다’는 의미는 쉽게 다가온다. 절은 허리를 굽히고 머리를 바닥에 조아려야만 완결된다. 자신을 철저히 낮추는 마음을 갖지 아니하고는 이뤄질 수 없는 행위다. 하심 하는 순간 스스로 아상을 꺾어 버리는 것이다. 그런데 ‘진실한 자신에게 돌아가는 것’이란 무슨 의미일까? 부처님을 공경하고, 타인을 배려하는 마음만 갖는다면 진실한 자신에게로 돌아갈 수 있는 뜻일까! 청견 스님은 절에 대해 “아상을 녹이는 거룩한 수행”이라고 말한 바 있다. “수행인에게 아상만큼 무서운 독은 없다. 아상을 내려놓지 못하면 진여를 발견
19살 때 오대산으로 출가지월 만나 대오원력 다져 60여년 ‘한 물건’ 화두회광반조하면 분명 있어 어느 날, 6조 혜능 선사가 대중에게 말했다.“여기에 한 물건이 있는데 머리도 없고 꼬리도 없다. 이름도 없고 뒤도 없으며 앞도 없는데, 그대들은 이것을 알겠는가?” 신회가 한마디 했다. “모든 부처님의 본원이며 저의 불성입니다.” 이에 혜능선사가 일갈했다. “너희에게 이름도 없다고 말했는데 너는 본원과 불성이라 부르고 있구나.” 1000여 년 전의 일이라 해서 어찌 오늘의 일이 아닐까! 육조가 전한 ‘한 물건(一物)’은 시공을 초월해 지금도 화두로 생생하게 살아 있다. 해인사 한주 도견 스님도 ‘일물’을 들었다. 법을 묻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스님은 ‘시간의 토막도 없고, 큰 것도 작은 것에 포함되며, 작
일우 선사 만나 출가 결심사경에 쓴 붓만 1천 자루 천안시 광덕면 매당리 태화산 산자락에 자리한 작은 산사 평심사(平心寺). 이곳에 30여 년 동안 은둔하고 있는 스님이 한 분 있다. 정원 스님이다. 대중에게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선객들 사이에서는 이미 오래 전부터 회자되고 있는 선사다. 정원 스님은 1992년부터 2002년까지 11년 동안 고려대장경, 대정신수대장경, 일본속장경, 한국불교전서, 조선불교통사, 삼장법수 등을 2회 열독한 스님이다. 스님이 대장경 보는 게 무슨 대수냐 할 수 있지만 전 대장경을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보는 경우는 흔치 않다. 그냥 눈으로만 대장경을 본 게 아니다. 그 속에 담긴 핵심을 파악해 해설한 책까지 내 놓았다. 『벽암록』을 비롯한 『현구집』, 『태화당수세록』,
전남 나주 다보사에 천진불, 천진도인으로 유명했던 우화 스님이 있었다. 법문을 청하면 “대오는커녕 소오도 못해 할 말이 없다”며 좀처럼 자신의 살림살이를 내놓지 않았다. 어느 날, 전강 스님이 우화 스님에게 전화를 걸었다. 만공 스님이 입적했으니 한마디 해 보라는 것. 우화 스님은 “도(道)를 못 깨쳤는데 어찌 큰스님 열반을 놓고 뭐라고 해요”라며 사양했다. 아무리 재촉을 해도 뜻을 접지 않자 전강 스님이 농을 건넸다. “정, 안하려면 다보사를 내 놓으시오.” 이에 우화 스님이 한마디 내어 보였다. “푸른 산에 함박눈 내리니 한 봉우리가 드러났다(雪浮靑山 一峰獨露),” 이 한마디에 전강 스님은 탄복했다. 수좌들 사이에서는 이미 ‘수좌 중의 수좌’라 칭송되어 왔지만, 언론 인터뷰는 물론 대중법문을 청하는
68년 태고사 기도입재42년 째 1000일 기도 1만일 염불기도 회향 후무생법인-상락아정 一味 늦가을 저녁 비가 내렸다. 앞서 가는 도광 스님은 배티재 산길 10리를 단걸음에 주파하려는 듯 서둘렀다. 그 뒤를 따르는 26살의 행자 정안 스님은 도광 스님의 짐까지 얹은 걸망을 메고 있어 그야말로 사경을 헤맬 지경이었다. 도광 스님은 단 한 번도 쉬어 가는 법이 없었는데 그렇다고 딱히 탓 할 이유도 없었다. “큰 스님 한 번 만나 뵙고 싶다”한 건 정안 스님 자신이었기 때문이다. 정안 스님은 세납 24세 때 전북 임실 죽림사로 출가했다. 대학시험에 낙방한 후 수 년을 방황했던 그가 죽림사로 발길을 돌린 이유는 ‘깨달음에 이르러 보자’는 원력을 세웠기 때문이다. 죽림사에서 계운 스님으로부터 사미승이 갖춰야
관음정진 중 ‘이뭣고’ 의심마당 쓸면서도 자신 반조 동산 대종사를 은사로 출가한 정관(正觀) 스님의 법명은 당초, ‘경환(慶煥)’이었다. 이 법명은 동산 스님이 지어주셨는데 ‘경주에서 온 사람, 경주에서 돌아 온 사람’이란 뜻이 담겨 있었다고 한다. ‘경환’이라는 법명을 받은 스님은 얼마 후 동산 스님을 찾아가 법명을 바꿔달라고 청했다. 그 이유인 즉 ‘경환’이라는 법명을 아무리 새겨 보려 해도 가슴에 와 닿지 않더라는 것이다. 동산 스님은 “그럼 뭐라고 하고 싶은데?”라고 물었고 스님은 그 자리서 ‘정관’이라 하고 싶다는 뜻을 전했다. 동산 스님은 “벌써 바로 보겠다는 것이냐?”며 의아해 하면서도 허락했다. 그 뒤에 동산 스님은 제자 정관 스님을 자주 놀리곤 했다고 한다. 동산 스님은 대중 스님과 함
스승 해안 스님과 나눈첫 법거량 후 힘 얻어 충남 예산 보덕사에서 수행중이었던 동명 스님은 샘터에서 빨래를 하고 있었다. 스승 해안 스님이 다가오더니 주장자로 바닥을 세 번 두드리고는 곧장 방으로 들어갔다. 스승으로부터 ‘은산철벽’이라는 화두를 받은 지 두 달여 쯤 지난 때였지만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밀려오는 그 무언가가 있었다. 동명 스님은 1964년 해안 스님을 은사로 출가했지만 사실은 그 이전에 전남 완주 일출암에서 행자시절을 보낸 바 있다. 10대 초반의 그는 친구 따라 절에 갔다가 출가 원력을 세우고는 사문의 길로 들어섰다. 동진출가한 스님이었기에 대중들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았다. 댓잎 하나만 떨어져도 누군가 금방 나서 댓잎을 달아주고, 양말에 구멍이라도 하나 나면 금방 새로운 양말이 생겼으니
10·27법난 접한 후 새 원력인재양성-실천불교에 매진 차돌로굳어진 情오늘에야 門 엽니다. 피맺힌가시줄기맨발로 밟아 올라 머금은아침 햇살에송이로나 앉읍니다.(윤지원 시집 『장명등』 중 ‘장미’ 전문. 1983년 판.) 한 송이의 꽃을 보고 느끼는 시인의 감성은 남다르다. 하물며 수행과 전법을 펼치는 스님의 마음과 시인의 마음이 교차된 순간에서 본 한 송이의 장미는 또 다른 의미로 다가왔을 것이다. 한 생명의 탄생 속에서 ‘환희’는 쉽게 공감할 수 있지만 그 사이에 견뎌야 했을 씨앗의 아픔과 꽃으로 피어나기까지의 시련을 통찰해 내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1980년 조선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한 지운 스님의 눈에 비친 장미는 가시를 온 몸으로 훑고 지나서야 꽃을 피우는 존재로 다가왔다.
‘어쩌다 넘어졌다고 해서 어찌 그 자리가 무덤이겠는가’ 문단 데뷔 31년 만에 낸 첫 시집 『무엇을 위해 살 것인가』(월간문학)에는 청화 스님의 시적 내공이 응축된 140여 편의 시가 펼쳐져 있다. 30년 숙성된 시어들은 세속과 출세간이라는 경계마저 허물어 버리고 있는 듯하다. 사춘기 방황-청년기 절망 후시심 다독이며 30여 년 詩作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일 때/ 나는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스님은 ‘아무것도 아닌 내가/ 사람이 되어 섬으로써/ 여기 한 자루 촛불을 들고/ 오늘같이 캄캄한 날/ 사람의 길을 찾는다’며 암울한 시대에서의 ‘항거’ 의미로 촛불을 든 자신을 내어 보이고 있다. 1986년 민주화 운동과 1994년 조계종 종단개혁의 선두에 선 ‘청화’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그러면서도 ‘꽃병
동산 스님을 친견한다는 친구를 따라 범어사에 갔던 14세의 소녀는 팔상전을 장엄한 탱화와 벽화에 흠뻑 빠졌다. 그 전에 느낄 수 없었던 희열이었다. 그는 그 길로 범어사 대성암에서 혜진 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탱화 한 점에 일대사를 단숨에 결정한 것을 보면 자민 스님은 어려서부터 용단을 내리는 데는 일가견이 있었던 듯싶다. 14세에 범어사 탱화 보고 출가한영-성능 스님 대 강맥 이어 한국전쟁에 이어 ‘조계ㆍ태고 분규’로 어수선한 불교 안팎의 분위기 속에서도 자민 스님은 논산 정덕사, 순천 선암사, 동화사, 운문사 등을 찾아다니며 부처님 법을 공부해 갔다. 1970년 음력 12월 11일, 스승인 성능 스님은 개심사 강원 대중들이 모인 가운데 생신상을 받으며 자민 스님에게 ‘보월’이라는 당호와 전강게를
송광사로 향하기 전날에는 천둥번개를 동반한 비가 하루 종일 내렸다. 그 비는 아침에야 그쳤는데 그래서인지 송광사 풍경이 한결 산뜻해 보인다. 선열당에서 작을 개울을 지나 돌계단을 오르니 화엄전이다. 송광사 조실 법흥 스님이 주석하고 있는 전각. 빗장을 열고 들어선 경내는 단아하면서도 쾌적했다. 무언의 선미라 할까! 왼쪽 당우에 걸린 주련이 눈에 들어온다. 바다 밑 진흙소가 달을 머금고 달아나니(海底泥牛月走),바위 앞에 돌호랑이가 아이를 안고 졸고 있다(巖前石虎抱兒眠).철뱀이 금강신장의 눈에 끼어드니(鐵蛇鑽入金剛眼),곤륜산이 코끼리를 타고 백로가 이끈다(崑崙騎象白驚牽). 『선요』에 나오는 말이지만 이 말 속에 깃든 선지는 헤아릴 길이 없다. 편액이 걸려 있는데 언뜻 보아서는 ‘목우산방(牧牛山室)!’ 아
중생-부처 둘 아닌 하나지만 차제법은 분명히 서 있어‘성불’욕심 전 부처님 수행과정-펼친 뜻부터 헤아려야남 걱정 말고 하루에도 수십 번 죽는 자신부터 살펴라 성수 스님은 “벼는 6개월 만에 결실을 맺는데 인간은 60년을 살아도 싹틀 꿈조차 꾸지 못한다”고 일갈했다. 불살생(不殺生)! ‘함부로 살아 있는 생물을 죽이지 말라’는 이 계는 불자라면 누구나 지켜야 하는 5계 중 하나다. 그런데 이 ‘불살생’을 ‘죽지 말라’는 말로 재해석하며 법을 펴는 선사 한 분이 있다. 바로, 황대선원에서 눈 푸른 납자들을 제접하고 있는 성수 스님이다. 함양 황대마을로 들어서자 아직 추수 안 된 벼가 바람에 흔들리며 황금물결을 자아냈다. 빨갛게 물든 단풍과 어우러지니 벼와 나무가 ‘결실’을 화두
06년 통도사 첫순례 후 37곳 사찰 참배…참회-기도-보시행“재발심의 여정…마음 맑히며 불법 체득해가니 머문 곳이 법석” 지난 9월 24일 범어사에 이색 풍경이 연출됐다. 한 번에 2000여 명의 참배객이 경내에 들어선 것이다. 대웅전과 보제루 사이의 넓은 공간을 단번에 꽉 메우는 것은 아주 이례적인 일이다. 24일 하루만의 일도 아니다. 26일까지 연 삼일 동안 지속됐는데 범어사를 참배한 인원이 하루 2000명씩 6000명에 이른다. 그 주인공은 도선사 주지 혜자 스님이 이끄는 108산사순례기도회. 2006년 9월 ‘108산사순례기도회’가 발족된 후 그 해 10월 통도사로 첫 순례를 떠났던 108산사 순례는 벌써 만 3년을 지나고 있다. 당시 첫 순례길에는 2500여명이 함께 했지만 지금은 평균 50
一念은 결코 오염되지 않아…일념수행 안되면 초심으로 돌아가야‘나’를 찾는 건 내가 있는 곳 아는 것…독서 통한 새길도 만나보라 최근, 화제의 불서 한 권을 꼽으라면 조계종 승가대학원장 지안 스님이 내놓은 『처음처럼』(조계종 출판사)일 것이다. 한 주류회사가 내놓은 술 이름과 같아서인지 불자는 물론 일반인들에게도 친근하게 다가가는 모양이다. 그러나 실제 이 책은 승가 강원의 교재인 『초발심자경문』을 번역한 것으로 수행의 참다운 의미와 공덕, 그리고 깨달음이란 무엇인지를 엿보게 하는 수행 지침서다. 지안 스님의 탁월한 번역과 함께 강설에 배인 깔끔한 글맛은 독자들의 호응을 얻기에 충분하다. 일반인들이 이 책에 관심을 갖는 또 다른 이유 하나는 이 책이 던지는 메시지 ‘초심’때문일 것이다. 한 회사 간부는
13살의 어린 나이에 출가한 혜인 스님은 세납 30세가 되던 해 백련암 성철 스님을 찾아갔다. “부처님께 100만 배를 올리겠습니다.”“중간에 그만둘 요량이면 시작도 말고, 끝장낼 각오라면 한 번 해 봐라.”“하겠습니다.”“절하다 죽은 놈 없다. 어떤 일이 있더라도 한 번 시작했으면 멋지게 회향해야 한다.”하루 5000배 200일 여정이 해인사 장경각에서 시작됐다. 1943년 제주도 화순에서 출생한 스님은 1956년 동진출가해 일타 스님을 은사로 사미계를 수지한 후 1962년 해인사에서 자운 율사를 계사로 구족계를 수지했다. 스님은 스스로도 큰 복을 갖고 이생에 오지 않은 것 같다고 술회한다. 해인사 장경각서 하루 5천배200일 백만배 성취 후 진일보 “전생에 술 많이 마시면 지혜롭지 못하다는 말이
20세, 구산은사로 출가 산중 토굴 6년간 수행도 남악 회양 스님이 육조 혜능 스님을 찾아갔다. 혜능 스님이 물었다. “어떤 물건이 이렇게 왔는가?” 즉답을 못한 회양 스님은 8년을 더 공부한 후 혜능 스님을 다시 찾아갔다. 혜능 스님이 또 물었다. “어떤 물건이 이렇게 왔는가?” “한 물건이라 해도 맞지 않습니다.” 한 물건(一物). 이 자체가 화두다. 이 일물이 또 한사람의 마음을 움직였다. 서울 성북동 육조사(六祖寺) 선원장 현웅 스님이다. 현웅 스님은 세납 20세인 1967년 구산 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인천 용화사 선원 등의 제방 선원을 거친 현웅 스님은 산중 토굴에서 6년 동안 정진했다. 1984년 스위스 제네바 불승사의 초청을 받은 스님은 유럽으로 건너가 현지에서 2년 동안 한국선을
어린이·청소년·군포교에 진력 … 전북불교 활성화 토대 마련포교가 내 삶이면 ‘나의 불교는 무언가’ 고뇌하며 원력 세워“도량은 차별없는 마음의 쉼터 …산문에 들면 우리 모두는 도반” “승려들이여! 세상을 향한 연민을 갖고 살아있는 것들의 복지와 행복을 위해 길을 떠나라. 법을 가르쳐라, 순수하며 고귀한 삶을 살아갈 것을 공표하여라.”율장에 담긴 부처님 말씀이다. 전도를 위해 떠나는 승려를 향해 당부한 또 한 구절이 있다. “두 사람이 같은 길을 가지 말라.” 자각한 사람만이, 부처님 뜻을 올곧게 새긴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당찬 기백과 전도의 길을 홀로 떠나야 하는 고독이 함께 서려 있는 듯하다. 지난 40여 년 동안 포교의 길만을 묵묵히 걸어 온 도영 스님을 만나기 위해 완주 송광사를 찾았다. 스님은 1
역대 조사들의 게송을 접한다는 게 그리 녹록치는 않지만, 불자라면 육조혜능의 이 한수는 한번쯤 접해 보았을 것이다.菩提本無樹(보리본무수) 明鏡亦非臺(명경역비대) 本來無一物(본래무일물) 何處惹塵埃(하처야진애) 보리나무는 본래 없고, 밝은 거울 또한 받침대 없네. 본래 한 물건도 없는데, 어느 곳에 티끌과 먼지가 있으리오. ‘돈황본’에 나오는 게송과 비교해 살펴야 그 뜻이 더 명확하게 드러나지만 ‘덕이본’에서 보이는 이 게송만으로도 뭇 사람들을 선미의 세계로 끌어당기기에 충분하다. 그런데 인월암 원순 스님이 2005년 펴낸 『육조단경』(도서출판 법공양)에는 이 게송이 이렇게 번역돼 있다. 깨달음은 잡혀지는 존재가 없고밝은 마음 이름뿐 실체가 없네.본래가 한 물건도 있지 않거늘어느 곳에 일어날 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