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여유만 있으면 사회사업을 하고 싶다” 또는 “남을 돕는 삶을 살고 싶다”고 말한다. 마음 가운데 부처님, 보살님이 계시기 때문이다. 마음은 그렇지만 현실이 따라주지 않는다. 지금 당장이나 금생에는 어렵더라도 마음 가운데 그린 그림은 언젠가는 현실화 된다.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열리고 마음 가운데 그런 그림은 분명 실현되기 때문이다. 세포를 생각해보면 이해가 빠를 수 있다. 세포는 대단히 미세한 마이크로의 세계다. 정자도 난자도 마찬가지다. 그들에게는 세포내부에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의 확고한 영상이 자리하고 있다. 세포나 정자, 난자가 성장할 수 있도록 엄밀히 계획된 그림이 그려져 있고 알 수 없는 거룩한 힘이 그 세포 내에 잠재해 있다. 거룩한 지성이 그 이면에 작동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미물중생부터 인간에 이르기까지 모두 무한과 맞닿아 있다. 지구상의 벌의 종류는 10만종. 벌을 연구하는 학자들에 따르면 벌은 특유의 광파측정기를 보유하고 있다. 자외선을 포착해 수십 리 길을 날아 꿀을 채취한다. 나비도 기가 막힌 탐지기를 지니고 있어 당분의 유무를 판정한 후 다리를 뻗는다. 모기 역시 마찬가지. 특수전파탐지기를 잠수시켜 바닷물과 민물을 구분한 뒤 알을 낳는다. 개미에게도 특유의 탐지기가 있어 아무리 먼 곳으로 먹이사냥을 떠났다 하더라도 탐지기를 이용해 정확히 자신의 집을 찾는다. 식물들의 경우도 빛을 감지하는 탐지기가 있어 모두 향일성을 나타낸다. 그뿐 아니다. 소리를 구분하는 탐지기도 있어 클래식과 팝송을 들려주면 성장속도가 빠르고 발로 툭툭 차면서 적개심을 드러내면 점차 시들다 죽어
법은 지키기 위해 만들어진다. 말과 생각과 행동은 모두 부처님 법을 따라야 한다. 실천되지 않는 법, 행동화되지 않는 법은 가치가 없다. 예를 들어보자. 김치 담그는 법은 김치를 잘 만들기 위해 존재한다. 영어 잘하는 법은 영어를 잘하기 위해, 실제 입을 열어 실천해봐야 그 진위를 가늠할 수 있다. 모든 법은 실천이 있어야 존재가치가 있는 것이지 행동을 담보하지 않으면 쓸모가 없다. 부처님 법도 부처님이 되기 위해 실천되어야 의미가 있는 것이지 공부하고 배우기만 한다고 해서 그 가치를 입증할 수는 없다. 실천을 통해 몸과 마음이 부처가 되어갈 때 부처님 법은 의미가 있다. 선생님 말씀을 듣고 문제를 실제 풀어보아야만 자기 것이 된다. 직접 풀어보지 않으면 진정한 나의 것이 될 수 없다. 김치를 잘 만들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마음이 모든 것을 짓는다. 마음이 모든 것을 지어내기에 마음은 위대한 에너지다. 아인슈타인의 얘기대로 ‘E=mc²’이기 때문이다. 좋은 마음은 좋은 물질을 만들고 나쁜 마음은 나쁜 물질을 만든다. 모든 물질은 그대로 있지 않고 또 끊임없이 소멸되며 에너지로 변한다. 색즉시공 공즉시색이다. 에너지는 파동이다. 좋은 물질은 좋은 파동을 발사한다. 나쁜 물질은 나쁜 파동을 내보낸다. 착하게 살아온 사람은 착한 분위기를 풍기고 거칠게 살아온 사람은 거친 분위기를 풍긴다. 아름다운 꽃밭에는 아름다운 꽃향기가 풍기고 시궁창에서는 악취가 풍긴다. 아름다운 꽃밭에는 그 향기에 이끌려 벌과 나비가 날아들고 시궁창에는 파리와 모기가 날아든다. 벌과 나비는 꽃에 열매를 맺게 하고 자손을 번창 하게
부처님은 누구이신가. 어디에 계시는가? 화엄에서는 허공을 부처님의 몸이자 마음이라고 가르친다. 허공이 만생명의 어버이라는 것이다. 허공이 부처님이시라는 사실을 제대로 이해하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우리의 생명은 호흡에 있고 호흡은 허공을 마시는 것이다. 허공은 부처님이시니까 결국 우리의 생명은 정녕 부처님 아니신가? 생명=호흡=허공=부처님의 등식이 성립하기에 우리의 생명은 정녕 부처님이시다. 우리의 생명 자체가 부처님이라면 우리가 왜 부처님을 소중히 여겨야만 하는가 하는 이유는 자명하다. 부처님을 소중히 여기지 않는 자는 자신의 생명을 소중히 여기지 않은 자다. 부처님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은 정녕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 자다. 부처님께 대한 감사함은 결국 자신의 인생과 생명에 대한 감사함이다. 부처님은
무한자(無限者)에 대한 몰입이 무한을 낳는다. 무한자와 하나가 되면 이기적 자아가 녹아진다. 끝없이 자기를 녹이는 과정을 통해 무한의 왕국에 도달한다. 왜 바다를 보고 싶은가? 왜 텅 빈 하늘을 우러러 보는가? 왜 어머니가 그리워지는가? 왜 부처를 찾는가? 왜 기도하고 싶어지는가? 우리의 마음 가운데 무한이 있기 때문이다. 무한을 만나고픈 마음이 있기 때문이다. 무한자와 하나인 마음 때문이다. 본능적으로 기도하고 싶은 마음 역시 우리의 본질이 부처인 까닭이다. 바다의 깊이를 알려면 기꺼이 뛰어들어야 한다. 부처님의 무한을 알려면 몸을 던져야한다. 작은 나 이기적인 나가 부서질수록 부처님의 나는 더욱 더 자란다. 부처님을 얻으려면 무수한 지옥을 건너야한다. 허공이 부처이기에 결국 인간의 성장은 버리는 곳에
행복이란 무엇인가? 모든 사람들이 행복하길 원한다. 왜 사람들은 행복하지 못한가? 불행하다는 사람들이 너무도 많다. 경제위기로 인해 더 많아졌다. 이 같은 상황 가운데 행복해질 수 있는 방법은 없는가? 그러려면 우선 행복이 무엇인가를 분명히 알아야한다. 행복은 차원이 다른 열반의 세계로 나아가는 길속에 깔린 보석이다. 열반이 부처님 마음이라 한다면 행복은 열반의 아들이다. 부정한 남편을 둔 아내가 있다하자. 한 유형은 도저히 못 살겠다며 헤어져야겠다고 생각한다. 또 한 유형은 그럴 수도 있겠지 자식을 생각해 참아야지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으리라. 전자의 경우는 부정적이고 파괴적이고 수준이 낮다. 후자의 경우는 고차원적 긍정적이고 화합적이라고 할 수 있겠다. 행복의 결정적 요인은 사고수준의 승화이다. 부정
지진은 잘못된 기초 때문에 생겨난다. 참 자아에 기초하지 않았을 때 파괴가 온다. 참 자아로부터 흘러나오는 것만이 참된 힘이 된다. 참된 토대를 형성할 수 있다. 참 자아로부터 나오는 생각과 행동이 아니면 거짓자아를 표현하게 되고 열등감과 약점을 갖게 된다. 결국 불행이 온다. 불행은 참 자아를 등진 상태다. 참자아는 누구인가 무엇인가? 나의 주인공이다. 부처님이다. 거짓자아는 파괴적 죄인이다. 참자아인 부처님은 필요한 모든 해답을 알고 계신다. 당신의 내부에서 우러나오는 참자아의 소리는 당신이 진정 원하는 것으로의 길을 가르친다. 당신이 원하는 해답을 진정으로 알고자하면 당신 내부의 소리를 들어라. 우리는 모두 정신적 백만장자다. 거짓가면을 벗기면 자신의 참자아를 발견하리라. 우리들은 왜 참 자아
법등명 자등명(法燈明 自燈明) 법의 등불을 밝히고 마음의 등불을 밝히라는 가르침이다. 무진등(無盡燈) 모든 사람들의 마음 가운데 등불을 밝히라는 유마경의 말씀이다. 불교는 빛의 종교다. 무량광(無量光)의 종교다. 깨달음이 광명인 때문이다. 불교는 중생을 무명이라 부른다. 지혜가 모자라고 자비가 모자라서이다. 마음은 닦을수록 빛이 난다. 자꾸만 닦고 때를 벗기면 결국 빛이 된다. 해인사에 가면 대적광전이 있다. 비로자나불을 모신 곳이다. 비로자나불은 광명편조불(光明遍照佛)이다. 법신광명불이다. 대일(大日) 큰 태양이라고도 번역한다. 광활한 우주 허공이 적광토(寂光土)라는 것이다. 적광토란 번뇌가 끊어진 자리 광명세계를 뜻한다. 반야의 광명 지혜의 빛 그 자체의 실상세계를 말한다. 寂의 의미는 해탈, 光은 반
아버지와 어머니의 유전자 따라 아들딸이 태어난다. 부모 자식의 인연은 일만 겁이라 한다. 헤아리기 어려운 세월의 인연이다. 왜 나는 부유한 부모를 만나지 못하고 가난한 부모를 만났을까? 왜 재벌가나 부잣집에 태어나지 못했을까? 사람들은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며 그 같은 넋두리를 늘어놓는다. 인연이란 말에 실 사(絲) 변이 들어있듯이 어떤 코드 탓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최근 들어 많이 회자되고 있는 유전자인자 코드와 깊은 연관이 있을 것이다. 남자와 여자의 유전자 코드가 XY, XX 염색체로 다르듯 생명현상에 있어 유전자 코드는 중요하다. 재벌가는 재벌가의 코드가 있고 가난한 집에는 또 나름대로의 코드가 있을 것이다. 아버지 어머니는 자신의 뱃속에 어떤 아들딸이 들어올 것인가 인연에 맡긴다. 어머니 뱃속에
껍질을 벗겨야 알맹이가 드러난다. 참수행자는 껍질 벗는 아픔을 이겨내야 한다. 껍질은 우리들의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이다 껍데기가 있어 나와 남이 갈라지고 끝없는 충돌의 고통에 시달린다. 각양각색의 고통은 모두가 껍질을 벗는 아픔이다. 우리 모두는 죗값으로 이 땅에 왔고 고통을 이겨내면서 부처님 나라를 향해 나간다. 끝없이 자기를 이기는 가운데 부처님의 힘이 나오고 부처님의 가피와 하나가 된다. 자꾸만 자신을 벗기는 길이 해탈의 길이다. 매를 맞으면서 고통을 이겨내면서 참된 공부인은 자꾸 자꾸 허물을 벗는다. 끝없이 수행을 거듭하는 사람은 자신의 껍데기를 벗겨내며 참 자유의 길을 간다. 자신을 끝없이 해탈시켜야 부처님 된다. 끊임없이 고통 속에 갈고 닦는 자는 자비와 사랑의 화신이 된다. 기신론에
사람들은 남에게 베푸는 것을 너무도 힘겨워한다. 남에게 주면 내가 가난해진다고 생각한다. 내 호주머니에서 남의 호주머니로 보내면 내가 손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왜 이다지도 베풀기를 고통스러워하는 중생들에게 부처님은 끊임없이 베풀기를 강조하셨을까? 베풀라, 주라, 비우라, 버리라 등 유사한 용어들이 많다. 불교는 항상 남에게 이익 되는 삶을 살라 가르친다. 남을 이익 되게 하는 것이 나란 존재의 당위적 이유라 가르친다. 남을 이롭게 하면 업장이 소멸되고 나와 남의 장벽이 허물어진다는 것이다. ‘남을 위하라. 인생은 덕업(德業)이다’라는 것이 불교의 핵심 사상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내가 남에게 주면 주는 만큼 내가 부처가 된다는 것이다. 내가 남들에게 베풀고 남을 이익 되게 하면 부처님의 위대한 가
세계의 3대 종교라고 불리우는 불교, 기독교, 이슬람교는 저 마다의 교리에 차이가 있다. 그러나 상호대비 되는 가운데 특유의 공통점이 있다. 인간 존재에 대한 관점이다. 법화경에서는 궁자의 비유라 하는 내용이 기독교에서는 탕자의 비유로 등장하고, 코란에서는 114장 스라투안나스, 알라를 벗어나 악마의 유혹에 진 인간을 그리고 있다. 환희의 세계를 떠나 갖가지 고통 속에 있는 존재로 인간을 그리고 있다. 우리가 부처님 전에 엎드리면 눈물이 그렁그렁 해지는 이유는 왜인가? 부처님께서는 법당을 이고득락(離苦得樂)케 하는 안락의 전당이요. 전미개오(轉迷開悟)케 하는 지혜의 전당이라 하셨다. 창호지 문에 바늘구멍을 내면 찬연한 한줄기 햇살이 흘러들 듯이 부처님을 만나면 한줄기 빛이 흘러들어는 것을 느낀다. 집 떠난
성실 근면의 상징인 소띠 해의 태양이 떠올랐다. 그러나 한해의 전망이 온통 잿빛이다. 아무리 앞날이 어렵더라도 우리는 가야만하고 아무리 괴롭더라도 우리는 걸어야만 한다. 언제 쓰러지는 한이 있다하더라도 우리는 앞으로 나아가야만 한다. 원아불퇴보리심! 불교는 영원한 진보의 종교이다. 너무 두려워 말라. 결코 절망은 없다. 우리는 이 세상 경험 속에 배우기 위해 산다. 경제가 좀 나쁘다 해서 어디 다 죽겠는가? 다 쓰러지겠는가? 절망의 끝에 빛나는 등불이 보이지 않는가? ‘지난날을 되돌아보면 처절한 투쟁은 그때마다 나의 눈을 빛나게 했고 나를 강하게 만들었으며 죽음의 고통마저 나의 용기를 북돋는 원천이었다. 전전반측의 처절한 삶을 살아오며 희망을 잃어 본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태어나면서부터 죽음에 시달리고
부처님은 왕자시절 농경지에서 새가 벌레를 쪼아 먹는 것을 보고 깊은 충격을 받으셨다. 톨스토이는 뱀이 개구리를 잡아먹는 잔인한 현장을 보고 신을 의심했다. 신이 만든 세계가 왜 이다지 잔인한가? 물었다. 실제로 이 세계가 약육강식의 세계라는 사실을 부정하고 싶어도 부정할 도리가 없다. 파리가 하루살이를 잡아먹고 잠자리가 파리를 잡아먹는다. 거미가 잠자리를 잡아먹고 새가 거미를 잡아먹는데, 독사가 새를, 이리가 독사를, 호랑이가 이리를 잡아먹는 먹이 사슬의 끝에 사람이 있다. 인간은 저 원시시대로부터 생존을 위해 잡아먹히기도 하면서 맹수들과 처절한 싸움을 벌여야했다. 원시시대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이 세상에 싸움이 없는 곳은 없다. 미국이 중동에서,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과 대치 상태고 남한과 북한, 아
투수가 마운드에서 공을 던진다. 홈 플레이트까지는 20m미만. 시속 150km의 박찬호 선수라면 0.5초도 안 되는 순간에 포수의 글러브로 빨려든다. 그 순간에 타자의 생사가 결정된다. 홈런이냐? 아웃이냐? 순간이 생사를 가른다. 위험과 기회가 합쳐진 단어를 위기라 부른다. 순간에 위험과 기회가 함께 던져지는 것이다. 축구도 모든 경기도 인생도 마찬가지다. 순간이 천당 지옥을 가르고 순간이 부처와 악마를 가른다. 한 생각 따라 건강과 질병이 갈리고 번뇌와 보리가 갈린다. 먼지는 공기를 더럽히고 오염시키지만 비를 만들어 세상을 씻어낸다. 생각 생각을 점검하는 일이 수행이고 기도 염불 참선 등이 모두 한 생각 다스리기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한 생각이 스위치 역할을 한다. 스위치를 넣으면 천년 묵은 컴컴한
부처님께서는 성불의 마지막 순간까지 악마와 싸우셨다. 부처님께서 악마에 패했다면 역사상에 석가모니란 부처님은 존재할 수 없다. 수많은 수행자들이 몸과 마음을 던져 성불의 길을 나선다. 도중에 마장에 지는 수행자들은 얼마나 될까? 그들은 모두 악마의 주구가 될 것이다. 악마의 힘이 저토록 강한 이유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부처님을 공격 할 정도이니 우리들의 앞날에 무궁무진한 마장이 기다리고 있으리라는 점은 짐작하기에 어렵지 않다. 우리가 무슨 일을 추진하건 그 일의 성취까지는 한없는 마장이 도사리고 있다. 어떤 경우에건 마장이 없는 경우를 보았는가? 잘 나가다 스러지는 예를 얼마나 많이 보았던가? 우리의 인생은 진실로 마장극복의 연속이다. 끝없는 극복의 삶이다. 끝없는 극복 끝에 얻어지는 궁극의 경지를
왜 사람은 불안을 느낄까? 무언가 잘못됐기 때문이다. 제 갈 길을 가지 않기 때문이다. 양심의 힘이 없다면, 마음가운데 부처님이 계시지 않는다면 죄도 불안도 없을 것이다. 마음이 불안하면 삶의 리듬이 원활하지 못하다. 마음이 그릇되면 몸의 리듬이 깨진다. 리듬이 원활치 못하고 깨지면 혈류의 흐름에 문제가 생기고 피가 흐려지고 썩는다. 마음이 맑아야 피가 맑다. 현대사회를 사는 사람들이 대부분 건강하지 못한 이유는 마음이 흐려서이다. 마음을 고쳐야 피가 맑아진다. 반성과 참회가 중요함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재미있는 연구결과가 있다. 모세포의 유전자가 자세포로 완벽히 복제되는가를 검사하는 생체 내 인자(因子)가 있다. Polymerase가 그것이다. 마음이 불안하고 생체리듬이 깨지면 Polym
바위에 구멍을 내려면 계속 뚫어야 한다. 왜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을 수도 없이 외치는가? 반복을 하면 부처님의 힘이 쌓이고 그 힘으로 뚫어나가는 것이다. 끝없이 끊임없이 반복하면 자기한계를 극복한다. 연습이 대가를 만들고 반복이 부처를 만든다. 반복 속에 영원이 있다. 반복을 통해 실상의 세계에 도달한다.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 계속 가야만 한다. 쓰러지면 다시 일어나는 것이고 넘어지면 또 일어나 가는 것이다. 끊임없는 수행을 통해 성불한다는 것은 끊임없는 반복을 의미한다. 위인들도 수많은 실패를 마다하지 않고 계속 나아갔기에 위인이라 불리는 것이고 탁월한 인물들도 어떠한 난관에도 굴하지 않고 계속 나갔기에 그 같은 영광을 얻었다. 어떠한 어려움이 닥쳐온다 해도 결코 굴하지 말라. 결코 물러나지 말라.
위험은 사람을 위축시키기도 하지만 강하게도 만든다. 계속 우리들에게 펼쳐지는 위험스런 문제들을 보라. 그들은 우리들에게 끊임없는 해결책을 요구한다. 어떻게 보면 인생은 위험한 문제를 끝없이 풀어내야만 하는 과정이다. 어려운 문제가 던져졌을 때, 우리들은 항상 긴장할 수밖에 없다. 긴장이 있을 때 눈은 빛난다. 긴장은 언제나 에너지를 강화시킨다. 긴장을 삶의 활력소라 부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문제의 위험 부담이 오히려 힘을 기르는 데 도움이 된다. 성공적인 인생을 사는 사람들은 항상 문제의 위험부담을 과감히 수용한다. 던져지는 문제는 언제나 위험 그 자체가 문제를 제대로 풀어내면 합격이지만 그렇지 못할 경우 고통의 나락에 떨어진다. 우리의 인생이 고통인 이유는 항상 위험스런 문제를 제대로 풀지 못해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