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나라 때 고승인 대주혜해(大珠慧海) 선사의 법문 하나를 소개하고자 한다. 어느 날 혜해 선사에게 불경을 강의하는 온광(蘊光)이라는 법사가 찾아와 수행자가 갖추어야 할 안목에 대해 물었다.선사는 즉시 이렇게 답한다.“허공은 영특한 지혜를 내지 못하고, 구하는 마음이 많으면 근기가 천박하며, 경계를 당해 마음이 일어나면 선정이 부족한 것이고, 마음 밖에서 도를 구하면 외도이며, 마음 안에서 도를 구하면 마귀니라”고 했다.이에 온광 법사가 “그렇다면 필경 아무것도 없겠군요”라고 하자, 선사는 “그러나 끝내 온광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한때 시골 암자에서 ‘금강경’을 강의한 적이 있다. 불교 공부할 기회가 적은 시골 불자님들이었지만 열성으로 법문을 경청했다.그렇게 몇 개월이나 흘렀을까? 여느 때처럼 법회를 위해 암자를 찾았는데 왠지 분위기가 이상했다. 주지스님과 불자들이 나를 대하는 태도도 어색했다. 왜들 이러나 싶었는데 마침 주지스님이 다가왔다. 하시는 말씀인즉 “이제부터는 ‘금강경’ 공부를 안 하고 ‘법화경’ 공부를 하게 되었으니 법사님은 이젠 그만 오셔도 된다”고 했다.스님의 말에 영문을 모르는 나로서는 쉽게 납득이 가지 않았다. 그래서 스님에게 아직 ‘금강
예전에 한 수행 단체의 법회에 초청을 받아 1년 동안 ‘금강경’에 대해서 강의를 한 적이 있다. 법회가 끝나고 점심 공양을 하고 있는데 한 여성 불자가 잠시 드릴 말씀이 있다며 다가왔다. 그 여성 불자는 오늘 들은 ‘금강경’ 강의가 너무 마음에 닿아 자신이 처한 상황을 얘기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불교를 공부하는 사람들이 자칫 오해 할 수 있는 이야기였다.그 불자에 따르면 신심이 돈독한 언니가 있었다고 한다. 그 언니는 언제부터인가 초기불교를 가르치는 수행처에 나갔고 그곳에서 열심히 법문을 듣고 수행도 했다는 것이다
포항공대 강병균 교수의 저술을 통해 알게 된 내용으로 인간의 뇌 속에는 갖가지 종교를 체험 할 수 있는 특정세포가 있다고 한다. 이를 갓스폿(Godspots, 신점)이라고 하는데 자신이 믿고 있는 종교적 지식과 믿음 그리고 열망이 합쳐지면 뇌 속에서 종교적 체험을 만들어 낸다는 것이다.누가 신을 만나 대화를 했다거나, 사후체험을 했다거나, 성령의 빛을 보았다거나, 죄 씻김을 통해 구원을 얻었다거나 하는 등의 모든 현상은 뇌에서 만든 정신 현상으로 신과는 아무 관련이 없다는 말이다. 온갖 종교적 현상은 결국 뇌에서 조작하는 것이지 외
종로 2가를 걷다보면 가끔 행인들을 향해 말을 거는 젊은이들을 만나게 된다. 지나는 사람들 중에 대화가 통할만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을 골라 접근한다. “공덕이 많게 생기셨습니다.” “복을 많이 지으신 것 같습니다.” 등등 말을 건넨 뒤 상대방이 관심을 보이면 “차 한 잔 사주시면 저희가 행복한 삶을 살도록 안내해드리고 싶은데 어떠하신지요?”하면서 보다 적극적으로 다가선다.알고 보면 그들은 특정 종교 전파를 위해 거리에 나온 사람들로 조선 말기 출현한 민족종교의 창시자들 중 한 사람인 강증산이라는 교조의 가르침을 따른다. 강증산을 천지
어느 날 조계사 부근을 산책하는데 한 노스님이 나를 알아보고는 할 말이 있다면서 차 한 잔 사달라고 말씀하셨다. 가까운 찻집으로 모시고 가서 용건을 여쭈었더니 “요즘 불교방송에서 ‘원각경’ 강의를 하고 있지 않느냐”고 물었다. “그렇습니다”라고 대답하자, 그 스님은 “‘원각경’은 원각의 도리를 깨달아야만 알 수 있고 해설할 수 있는 법인데 법사는 원각을 깨달았는가?”고 마치 추궁이라도 하듯이 물었다.이에 나는 “그럼 스님은 ‘원각경’을 들을 때에 깨닫고 들으셨습니까?”하면서 “스님 말씀처럼 원각의 도리를 깨달아야만 ‘원각경’을 설할
지난주에 훌륭하다는 어떤 선사에 대해 비판했다. ‘마음’에 대한 잘못된 견해를 바로잡아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그 선사의 그릇된 불교관은 비단 ‘마음’의 문제만은 아니었다. 영가 법문이 끝난 후 그 선사가 보인 모습은 내게 또 다른 실망을 안겨주었다.그 선사는 마치 자신이 사후세계를 모두 관찰하고 죽은 영혼들을 좋은 세상에 보낼 수 있는 능력자처럼 말하더니 이번에는 법상 서랍에서 사진 한 장을 꺼내들었다. 법당을 가득 메운 대중들은 존경해 마지않는 선사의 행동을 놓치지 않으려는 듯 모든 시선이 그분에게 쏠렸다. 그러자 선사는
한국불교에 최고의 선지식은 공식적으로 현 대한불교조계종 종정 진제 스님이라 해도 무방할 것이다. 그런데 이분과 함께 쌍벽을 이룬다는 모 선사가 계시다. 수행력이 출중하다 하여 종정스님만큼이나 존경을 받는 분이다. 어느 날 나는 그 선사가 계시는 선원을 방문한 적이 있다. 그분의 법문을 듣기 위해서였다. 그날 법문은 주로 죽은 영가들과 관련한 내용이었다. 사람이 죽으면 어떤 과정을 거쳐 어떻게 다시 태어나게 되는지를 자상하게 일러주었다. 스님의 이런 설법 때문인지 그 선원이 선 도량임에도 불구하고 법당은 마치 납골당처럼 영가들 위패로
강의를 듣기 위해 온 불자들과 점심공양을 하는데 한 분이 자신의 가방 속에서 약봉지를 꺼내든다. 머리가 늘 지끈거려 지어온 약이란다. 그런데 약을 먹는 모습이 기이했다. 약 봉지가 약국에서 처방한 게 아니라 조그맣게 손으로 만든 거였다. 그는 꺼낸 약봉지를 마시고 있던 물 컵에 털어 넣는데 빈 봉투였다. 그래서 물었다.“아니 약봉지에 아무것도 없는데 무슨 약을 먹는단 것입니까?”그 분 대답이 기가 막혔다.“이 약은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제가 도통하신 스님으로부터 받은 약인데 여기에는 그분의 기(氣)가 들어 있습니다. 그 스님은 미
한때 기공수련의 권위자라고 자부하는 사람과 지낸 적이 있다. 얼마나 열심히 기수련을 하는지 존경심마저 들 정도였다. 그는 불교에도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어 필자가 자주 부처님 말씀을 들려주려고 했는데 불교에 깊이 귀의하지는 않았다.어느 날 필자가 그에게 “부처님이 어떤 분인 줄도 알고 불교가 어떻다는 것도 알면서 왜 불도 수행을 하지 않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그는 “우리 선도(仙道:신선을 목적으로 하는 도가의 수행)는 몸과 마음을 함께 닦는 성명쌍수(性命雙修)의 가르침인데 불교는 성에 해당하는 마음만 닦으라고 하므로 그 이치가 한
충남 서산에 수행처를 만들어 살고 있을 때의 일이다. 어느 날 필자가 젊은 시절에 몸담았던 불교 단체의 신행회장이 그를 추종하는 신도들과 함께 방문을 하였다. 오랜만에 만나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누던 중 대화의 흐름은 자연히 수행 주제 쪽으로 넘어가게 되었다. 마음이 어떻고 관이 어떻고 불성이 어떻고 그냥 두서도 없이 의견을 주고받는데 한 신도가 필자에게 갑자기 “법사님은 아직도 우리 회장님이 견성한 것을 인정하지 않느냐”고 묻는 것이었다. 눈앞에 자기가 추종하는 회장을 앉혀놓고 필자에게 견성여부를 묻다니 참 난감한 일이긴 하였지만
그 여성불자가 자신은 견성했다고 여기며 이전보다 훨씬 자유로운 삶을 누리던 어느 날이었다. 우편물을 전달하는 우체국 직원으로부터 서류 봉투를 받았다. 남편 앞으로 날아온 봉투였다. 황급히 뜯어 읽어보니 3000만원의 채무를 갚아 달라는 빚 독촉 내용이었다. 이를 이행하지 않으면 소송하겠다는 내용도 함께 적혀 있었다. 순간 그 불자에게 분노가 치밀었다. 도박을 끊은 줄 알았던 남편이 자신 몰래 도박을 다시 하다가 진 빚이었다. 돈도 돈이지만 형언할 수 없는 배신감이 온 마음을 뒤덮었다.당장 남편을 불러 난리를 쳤고 이혼을 요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