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돌이켜 보면 ‘그 고통스런 마음에서 무척이나 벗어나고 싶었지 않았던가’하는 생각이 든다. 그말을 듣고 생각난 가장 미운 사람은 엄마랑 막내오빠였다. 그렇게 미울 수가 없었다. 그들을 용서하기 위해 108배 참회를 계속했지만 참된 인간의 삶을 흉내내는 듯했다. 하루 이틀 회사를 마치면 서둘러 귀가해 저녁 참회기도를 이어가던 어느 날, 상대의 잘못보다 나의 잘못이 떠오르기 시작하며 끝임없이 눈물이 흘렀다. 이런 체험을 하고나니 머리를 깎지 않아도 부처님 말씀을 따르는 생활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기도, 공양, 중생제도가 삶의
경상북도 경산 남산면 시골마을. 오빠 셋에 막내딸로 태어난 나는 가족사항이 어떻게 되느냐는 물음 뒤에 대답으로 옛 표현에 “양념딸 막내로 귀염 많이 받으며 컸겠구나”라는 말을 종종 들었다. 하지만 ‘내가 귀하게 컸는가’ 싶을 정도로 아들 셋을 둔 우리 집의 분위기는 무서웠다. 유난히 엄격한 부모님과 거친 아들들의 반항 덕에 사건 사고가 끝없이 계속됐다. 한철에 한두번 와야 할 태풍 같은 아버지의 불호령은 반복되는 일상의 태풍이었기에 나는 해가 지면 ‘오늘은 또 무슨 사건사고가 일어날까?’라는 걱정 속에 있곤 했다. 귀여움 받는 건
스님께서 “전생에 아미타 부처님과 인연이 깊어 그런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그 말씀을 듣기 전까지 내게 아미타 부처님의 이미지는 ‘천수경’의 '나무본사아미타불' 여덟 글자가 다였다. 스님의 말씀 후에야 ‘원력이 크고 위대한 부처님이구나’하고 생각했다. 그것을 인지한 후 몇년 동안 나를 고통스럽게 한 통증이 사라졌다. 어릴적부터 척추가 온전하지 못한것과 더불어 외부에서 온 스트레스가 너무 심했다. 척추와 허리 통증이 너무나 컸기에 일을 제대로 못해 회사로부터 권고 휴직을 받기도 했다. 집에서도 화장실 갈 때 때로는 기어서, 때로는 문
나와 부처님의 인연은 어머니 덕분이었다. 어머니는 불심이 깊으셨다. 어머니는 시장에서 장사하셨다. 1년에 몇 번 예쁘고 깔끔한 옷차림으로 외출을 하는 날이 있었는데, 그중 하루가 부처님오신날이었다. 어린 시절엔 교회에서 여름 성경학교를 다녔다. 그곳에 가면 군것질거리를 주기에 나는 간식을 먹는 즐거움에 동네 천막교회에 가 앉아있다가 몇 번이나 어머니에게 야단 맞으며 끌려 나오곤 했다.불교와의 인연을 정식으로 맺은 건 20대에 어머니가 정토사라는 작은 암자로 나를 데리고 가신 것이 시작이었다. 어머니는 내게 법당에 가서 절하는 법을
청명 스님의 지도 하에 바즈라 명상센터에서 처음 명상을 시작했을 때 눈을 감음과 동시에 오만가지 생각들이 샘 솟듯이 떠올랐다. 그러나 유서를 써가며 내일이면 죽을 하루살이처럼 살 때의 극단적인 생각들이 아니었다. ‘어제는 뭘 했더라’ ‘오늘은 이것을 했으니 이제 저것만 하면 되겠구나’ ‘아들 밥은 뭘 만들어 주는게 좋을까’ ‘몇 시에 재우고 집안일은 어떤 게 더 남았더라’ ‘내일은 몇 시에 일어나야 할까’ ‘준비물은 뭐지….’ 다양한 생각들이 끝도 없이, 잠시도 쉬지 않고 일어났다. 당혹스러웠다. 스님은 내가 겪는 이 현상들이 당연
지난 몇 년간 폭풍우가 휘몰아치듯 내 삶은 모조리 무너졌다. 가정폭력으로 인한 이혼, 마음을 많이 다친 아들의 치료과정, 임신과 동시에 4년이 넘는 경력단절까지. 여기에 힘들게 오픈한 화실마저 코로나19 여파로 월세조차 내기 힘들어져 결국 폐업신고했다. 평생에 걸쳐 매진한 그림을 쳐다보기만 해도 가슴이 미어졌고, 미술도구를 보는 것조차 힘들었다. 그나마 마음을 다 잡고자 운동을 시작했고, 필라테스 강사가 되기 위해 마음을 다 잡으며 부지런히 공부했다. 하지만 이마저도 실습을 하던 중 공황장애가 찾아와 중단해야 했다. 그 일로 뒤늦게
1차 정진은 고통의 연속이었다. 좌복에 앉으면 온몸이 바늘로 찔리는 듯 쑤셨고, 머릿속은 떠오르는 번뇌와 망상들로 뒤죽박죽이었다. 대웅전 기도, 보제루 봉사를 몇 년동안이나 했던 내가 아닌가. 이대로 포기할 수 없다고 버티며 겨우 45일 1차 정진을 마쳤다.그런데 스스로 생각해도 참 묘한 현상이었다. ‘참선은 나에게 맞지 않는 것 같아’라는 생각이 한 부분을 차지했다면, 또 다른 한 부분은 ‘준비운동 제대로 한 셈 치자. 다시 한 번 도전 어때’라며 선방 문을 다시 두드리도록 나를 이끌었다. 45일 정진을 끝내자마자 2차 정진대중
불교를 처음 접한 곳은 부산 반여동에 있는 한 도량이었다. 건강이 썩 좋지 못했기에 ‘기도하면 조금이라도 나아질까’하는 심정으로 도량을 다니기 시작한 것이 신행의 출발이었다. 이곳에서 불교가 참 편안하고 따뜻하게 다가왔다면, 딸의 입시로 인연을 맺은 다른 절은 기도의 힘을 느끼도록 이끌어 주었다. 그 절에서는 지장보살을 반복해서 염하는 수행을 지속했다. 그러다 보니 수행법에 대한 궁금증이 늘어났고, 이왕이면 기도도 좀 더 깊이 있게 해보고 싶다는 발원이 커졌다. ‘큰 절에 가면 알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용기를 내 부산에서 ‘큰
아들을 설판재자로 입재하고 그 어느 때보다 정성 들여 기도했다. 아들의 진급을 생각하면 자연스레 일어나는 불안하고 초조한 마음을 거듭 내려놓았다. 매일 새벽에 수행하고 농사일로 금요법회에 가지 못 할 때는 유튜브로 실시간 법회에 동참했다. 수행 중반쯤, 아들이 전화로 1주일 뒤에 진급 발표가 있다고 했다. 통화하는데 이미 진급된 것과 같은 기쁨과 편안함이 느껴졌다. 발표될 때까지 더욱 정성스럽게 대비주를 외웠다. 드디어 발표 당일, 그렇게 오랫동안 마음을 졸이며 기다렸던 아들의 진급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대비주수행의 목적이 아들의
‘부처님 인연이 어떻게 지어졌을까’를 생각해 보면 친정어머니가 기도하는 모습이 떠오른다. 어머니는 항상 부엌 한쪽에 깨끗한 물을 떠놓고 기도하셨고 10월 상달에는 정성스럽게 고사를 지내셨다. 남편과 결혼한 후에는 시어머니가 불자였기에 인연이 이어진 것 같다. 시어머니는 초파일이나 백중 때 꼭 절에 다녀오셨고 특히 매년 정월에는 정성스럽게 공양물을 준비해 계룡산 산기도를 하셨다. 이런 환경의 영향이었는지 나는 시어머님의 산기도를 불교의 기도로 이해했다. 공부모임에 동참해 ‘법화경’을 독송하고 봉사도 참여하는 등 절에 다니면서도 거부감
가족은 나의 거울이었다. 남편의 행동과 말에 가시가 있어서 괴로웠는데 부처님 공부를 하고 보니 내 생각과 말, 행동이 그렇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딸의 눈빛과 행동이 날카롭다고 지적했는데 나의 단점을 거울처럼 보여주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나서야 가슴 깊은 곳부터 참회가 일어났다. 평소 약손이라는 소리를 많이 들었다. 원을 세우고 수행하라는 스님의 가르침에 따라 이 약손의 능력을 살리기로 했다. 발을 다치고 병명도 찾지 못한 채 고통에 시달렸던 경험을 바탕으로 몸과 마음이 아파 일상에서 고통받는 사람들을 치유하는 사람이 되고 싶
어릴적부터 어머니를 따라 자주 절에 다녔다. 어머니는 1년 농사를 지으면 가장 먼저 추수한 곡식을 부처님 전에 공양하고 두 손이 닳도록 빌고 기도했다. 지금 돌이켜 보면 살면서 크고 작은 어려움은 있었지만 대기업에 취업하고, 결혼하고, 경제적으로 안정을 이루어 도시에서 자리 잡고 잘 살고 있는 모든 것이 어머니의 기도공덕과 부처님의 가피라고 생각한다. 2013년 9월 직장동료의 자동차 바퀴에 왼쪽 발이 깔리는 사고가 일어났다. 병원에서는 검사결과 단순 염좌로 큰 이상이 없다고 했다. 그렇지만 갈수록 통증이 심해지고 제대로 걸을 수
아내는 그날 휴가를 냈다. 나도 어쩔 수 없이 아내를 따라 휴가를 내고 성지순례 동참버스에 올랐다. 버스안에서 도반들과 나는 예불을 드렸다. 예불이 끝나자 스피커에서 호연 스님의 ‘다라니독경’ 소리가 흘러나왔다. 아내는 내 어깨를 툭 치며 나지막히 “당신, 다라니 외우고 있어” 라고 말했다. 나도 모르게 ‘다라니독경’을 따라하고 있었다. 그때 외우려 수 없이 노력해도 외워지지 않던 다라니가 머릿속에 ‘쑥’하고 들어온 것이다. 참으로 신기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렇게 맺은 인연으로 그해 정혜선원 기초교리반을 등록해 처음부터 부처님
내가 절에 다니기 시작한 날이 언제부터였을까. 어렸을 적 불자인 어머니 손을 잡고 근처 절에 다니고, 성인이 되어서 주말에 등산하며 절에 들러 부처님께 인사하고. 되돌아보면 절이 낮설고 어려운 곳은 아니었다. 그러나 딱 그뿐이었기에 절은 내게 가깝지도 멀지도 않은 느슨한 관계였다. 그러던 어느날 자연스럽게 절에 가고 있는 나를 보았다. 아마 결혼을 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던 것 같다. 내 평생의 반려자가 어머니를 따라 절에 다니는 모습이 일상이 되면서 어느 순간 나도 모르는 순간에 절로 발길을 옮기고 있었다. 시간이 흐르고 아이가
세 번째 기회는 아미타부처님을 만난 것이다. 가족들과 떨어져 생활하면서 지방을 오고 갈 때면 항상 염불과 대비주를 붙잡고 다니곤 했다. 마음 한켠에는 도반들과 함께 염불하고 싶은 생각이 있었다. 항상 염불에 대한 갈증이 있었던 와중 페이스북에 올라온 글을 보게 됐다. 염불철야정진 영상과 후기들이었다. 나에게는 감로수 같은 소식이었고 그 글이 인연이 되어 무량수여래회를 알게 되었다.오랜 망설임 끝에 여름 더위가 깊은 어느 날 철야정진에 참여했다. 낯설고 어색하면서도 염불한다는 생각에 좋았고 설렜다. 다행히 불자님들은 친절하게 합장인사
누군가 “인생에 기회는 꼭 세 번 온다”는 말을 했다. 아마도 그 말은 나를 위한 말 같다. 그 세 번의 큰 기회는 내 삶에 전환점이 되었기 때문이다. 첫 번째는 유년시절이다. 중학생 때 설악산으로 수학여행 가는 길에 낙산사를 방문했다. 버스에서 내려 낙산사 산문을 지나 사천왕문을 막 지나갈 때 갑자기 무서움이 밀려와 심장이 터질 듯 뛰었다. 주저앉을 만큼 온몸이 떨려 사천왕문 앞에서 얼마나 오랜 시간 갈팡질팡했는지. 지금 생각해봐도 이해가 되지는 않지만 기억 속에 각인된 절에 대한 첫 경험이다. 시간이 흘러 고등학생이 됐다. 그날
스님은 이어 “맞다. 업이라는 것은 마치 눈과 같아 하루하루 쌓이면 치우기 힘들다. 당연히 수행도 미루면 나중에 정진할 때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그러니 매일 수행하며 깨어있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비록 고시에 실패해 변호사의 꿈은 이루지 못했지만 돌이켜보면 그때가 가장 행복했었다. 108배, 삼천배 등을 통해 자아성찰 할 수 있었던 아름다운 시간이었다. 마흔 살이 됐을 때 지인으로부터 아내를 소개받아 8개월간의 연애 끝에 결혼했다. 결혼 전 아내는 2년 간 친언니를 따라 교회를 다녔다. 그러나 결혼 이후 교회를 가지 않고 나를
내가 불교를 처음 접하게 된 계기는 군생활 중 같은 소대 선임병이 법정 스님의 ‘무소유’란 책을 권하면서부터다. 당시엔 작고 얇은 소책자였지만 나에겐 아주 큰 감동과 삶의 관점을 바꿔준 엄청난 책이었다. 몇 시간이면 읽고도 남을 책을 매일 조금씩, 조심스레 넘기며 각 페이지의 글자를 한 자, 한 자 음미하며 읽었고, 몇 번이고 반복해서 읽었다. 그렇게 불법과 인연을 맺어 군생활을 법정 스님 책 속에 푹 빠져 지냈다. 왜 그랬을까. 20여년이 지난 지금 그때를 돌아보며 생각컨대, 20대 초의 나는 아집과 편견, 호불호가 가득 찬 모습
부처님 가르침의 6가지 덕목 중에 산딧디꼬(sanditthko: 스스로 보아 알 수 있는 가르침)와 에히빳시꼬(ehipassiko: 와서 보라고 권유할 만한 가르침)이 있다.미얀마 집중수행은 그동안에 느끼지 못했던 것을 체험함으로써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이 길이 유일한 길임을 가슴에 새기고 확신할 수 있는 소중한 경험이었다. 그리고 수행 말미에는 교학의 필요성도 느껴서 어떻게 접근하면 좋을지 사야도께 여쭈었는데 사야도께서는 미얀마 불교대학 입학을 권유하셨다. 이에 2020년 1월 미얀마 국제테라와다불교대학(ITBMU) 입학시험에 응시
“청산림(靑山林) 깊은 골에 일간토굴(一間土窟) 지어놓고 송문(松門)을 반개하고 석경(石徑)에 배회하니.”불자라면 한번쯤 들어봄직한 고려시대 나옹 스님 토굴가의 도입 부분으로 스님처럼 일대사를 해결해 보고자 하는 간절한 마음으로 가끔씩 읊조리고 있다. 나는 고등학교시절부터 불교에 관심이 많아 틈틈이 큰스님들의 법문을 듣고 ‘반야심경’ ‘천수경’ 그리고 대승불교의 소의경전이라 할 수 있는 ‘금강경’을 암송하는 등 불교와 깊은 인연을 맺어왔다. 1980년 전후 사회적 격동기였던 대학 시절에는 불교학생회 일원으로서 민주화운동에 참여하면서